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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이 진리답게 살고자 한다면 대장부의 기상을 가져야만 한다. 깨진 그릇에는 좋은 음식을 담을 수 없듯이 자기의 분명한 마음의 중심도 세우지 못하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면 결코 법다울 수 없다. 그릇이 크고 중심 잡힌 사람은 남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대가 처해 있는 곳에서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바로 그곳이 진실 될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3,254)
대장부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말이지요. 자신의 마음에 딱 중심을 세우고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남들의 말에 휘둘리거나 그러지 않고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住 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오는데요. 자기가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언제나 주인공이 된다면,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그 자리가 곧 진실 될 것이다. 왜냐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가장 진실 된 자리이고. 하나도 바꾸기 이전에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우리는 지금의 나는 좀 부족해서 조금 더 완벽하고, 조금 더 많이 갖추고, 조금 더 많은 걸 가지고, 그러면 그때 가서 행복해질 거라고, 혹은 그때 가서 완전해질 거라고 여기지만 사실 지금이, 지금이 가장 완전하다는 것이지요. 또 이 세상의 주인은 따로 있고 나는 객이다.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내가 있는 이 자리, 내가 지금 있는 나라는 존재. 존재가 바로 이 온 우주의 주인이라는 것이지요, 언제나. 그래서 내가 항상 객이라는 생각, 부족하다는 생각,
못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라는 분별심으로 남들과 끊임없이 비교해서 그런 분별심에 사로잡히니까 자신이 주인이 되지 못하고, 늘 객으로 사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가 처해 있는 곳에서 언제나 주인만 될 수 있으면 서 있는 그곳이 바로 가장 진실할 것이다. 입처개진(立處皆眞)이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가장 진실한 자리라는 거지요. 그러니 여기서 당연히 대장부가 돼야 되는 거지요. 이 자리가 항상 완전한 진실의 자리이기 때문에.
뭐 생각으로 여기저기 헤아리고 분별하고 누구보다 못하다 잘했다 뭐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우월감 느끼고 열등감 느끼고 그러는 것이 가장 어리석은 상이지요. 자기답게 그냥 지금 이대로 ‘답게’ 살면 되는데.
보통의 어리석고 눈먼 스님들은 배불리 밥을 먹고 앉아서는 좌선하고 관수행을 하면서, 흘러나오는 생각을 꽉 움켜쥐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애쓴다. 시끄러운 것은 싫어하고 고요함을 찾으려고 하지만 이것은 외도(外道)의 법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4)
배불리 밥을 먹고 앉아서 좌선하면서 관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관찰하지요. 마음을 관찰해보고 호흡을 관찰하고 하면서 흘러나오는 생각을 꽉 움켜쥐려고 노력하잖아요.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된다. “저는 좌선하고 앉아있으면 자꾸 생각이 올라와 미치겠습니다.”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그게 이제 생각을 꽉 움켜쥐려고 애쓰는 거죠.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애쓴다. 우리가 하는 거지요.
시끄러운 것은 싫어하고 고요함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이것은 외도의 법이다. 좌선하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이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건 외도의 법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게 진짜 외도라서 외도의 법이라고 한다기보다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라고 딱 정해놓고 이것을 그냥 밀어붙이면서 힘주어서 밀어붙이면서 ‘이거 아니면 안 된다’라고 생각하고 ‘이 수행을 통해 내가 깨달을 수 있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줄 모르고 달이라고 착각해서 여기에 머물러 있고 안주해 있게 되면 이것이 이런 역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방편도 그 방편이 먹히는 동안만 순간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거지. 쉽게 말해서 모든 방편은 병이 든 사람에게 주는 약과도 같은 거거든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약입니다, 약. 그런 표현을 들죠. 옆 동네는 하늘에 계신 주님 저에게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러잖아요. 그런데 우리 부처님 법은 일용할 양식을 주지 않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자기가 이미 다 갖추고 있어요. 정해집니다. 자기가 다 가지고 있어서 자기가 힘주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무위법으로 저절로 배고프면 찾아먹게 돼있고 알아서 다 그냥 저절로 이미 우리에게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처님이 밥을 줄 필요가 없지요. 이미 내 스스로 다 구족 되어 있는데 부처님한테 밥을 구걸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약을 줍니다, 약을.
약을 주는 것은 병자에게만 약을 주는 거잖아요. 우리가 병자들이거든요. 분별 망상하는 병에 시달리는 아픈 사람들. 고통에 시달리는 고통이라는 괴로움이라는 병을 지닌 사람에게만 약이 필요한 거지요. 그래서 약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방편의 가르침, 모든 수행법, 이것은 전부다 약입니다. 약이 좋다고 해서 팔만 사천 대장경이 다 좋은 건 줄 아는데, 약이 아무리 좋아도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이 약국 가가 지고 막 이 약 저 약 밥 먹듯이 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얼마 전에 저희 아버님과 통화를 했는데 연세가 좀 많이 드셔서 그러시겠지만 건강이 어떠시냐고 여쭸더니, 요즘에는 밥 먹을 새가 없이 밥은 별로 먹지도 않는데 약만 밥만큼 먹는다고. 약만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약을 밥만큼 먹는다고. 밥은 오히려 조금 먹는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보면 저희 아버님 또래는 아니지만 젊으신 분 중에도 그런 분이 계세요. 약을 막 그냥 한 열 가지씩 먹고 오만 가지 약을 다 챙겨 먹고 오만 가지 영양제를 다 챙겨 먹고.
그런데 약도 적당히 먹어야지 모든 약을 다 먹게 되면 오히려 그게 부작용을 낳는 것처럼. 부처님의 모든 방편은 반드시 부작용이 뒤따릅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계속하는 거예요. 당신이 “이렇게, 이렇게 해라.”라고 얘기해 놓고 이거를 깨뜨리지 못하는 사람, 그 약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야 그건 외도의 법이야.”라고까지 부처님 스스로 정법이라고 얘기한 것까지도 깨뜨려가면서 그것을 다시 빼앗는 거지요. 주었다 뺏는 거지요.
우리는 부처님이 준 약 이면 모든 데 다 좋은 만사형통하는 약인 줄 알고 부처님이 주었으니까 끝까지 끝끝내 그 약만 고수를 하거든요, 병이 나은 다음에도. 나은 다음에 ‘약을 먹지 마라’ ‘줘라’ 하는데 계속 약을 먹으니까 강력 처방을 내려서 ‘야 그건 약이 아니다. 오히려 너를 더 망치게 하고 너를 더 잘못되게 할 수 있는 삿된 약이다’ 이렇게 방편을 쓰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이런 방편들을 보고 ‘무조건 다 아니다’라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그냥 방편이라는 소리를 이렇게 하시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되지요. 그래서 좌선을 하고 관수행을 하려고 애를 쓰고 생각을 움켜쥐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유위 조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누가 “스님 이제 가시면 저희는 어디 가서 뭘 해야 됩니까? 뭐 내지는 선방에 가도 됩니까? 아니면 어디 가서 무슨 기도를 해도 됩니까?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거기서 하는 다양한 기도 수행을 해도 됩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고 물어보세요. 당연히 해도 됩니다. 당연히 하셔야 되고 기도할 땐 기도도 하시고, 인근 절에 수행하는 데 가서 수행도 하고, 참선하는 데서 참선도 하고, 위빠사나를 하는 데 가서 위빠사나도 하고. 다양한 약들을 복용하셔도 좋은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지요. 당연히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 면요.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하지는 마세요. ‘선방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여덟 시간을 내가 앉아서 채우리라’
이걸 안 채우면 수행 안 하는 것 같고, 뭐 네다섯 시간을 앉아 있어야 될 것 같고, 뭐 이런 부담감은 없어도 된다는 말이에요. 그냥 앉고 싶으면 앉고 싶은 만큼 그냥 앉으면 돼요. 그래도 난 좀 더 앉고 싶다. 그러면 조금 더 버틸 만큼의 그 정도만 앉아 있다가 그다음에는 그냥 안 하면 되지. 그거를 막 옛날의 스님들처럼 장좌불와(長坐不臥) 해서 앉아가지고 내가 오래 앉아있는 게 마치 공부 잘하는 것 인양, 그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보니까, 기도하는 것이 그냥 우리 마음공부하는 것과 똑같아요. 일상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공부이고 자기가 발심을 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공부가 되기 때문에 무엇이든 당연히 해도 좋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고. 그래서 이것을 나누지 마시라는 거지요. 물론 자기 마음속에서 ‘야 여기는 방편이 너무 낮은 기복적인 방편을 쓰고 있으니 쉽게 말해서 나와는 코드가 안 맞는구나’ 그걸 겉으로 입으로 꺼내서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누구한테나 내 생각으로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 너희들 수준 낮은’ 이렇게 얕보거나 하는 생각을 가지면 그게 스스로 걸려드는 겁니다, 분별에. 이게 열등감보다 더 안 좋은 우월감입니다. 우월감은 착각이 아주 엄청난 거예요. 우월감이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이 법의 세계에서는. 다 진실한 겁니다. 모든 차원의 가르침이 다 진실한 거예요. 다 진실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현실 생활에 막 얽매여 있어도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진실입니다.
그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막 애쓰고 노력하는 것. 그런 사람에게 혓바닥을 쯧쯧쯧 하면서 ‘저 어리석은 중생들 나처럼 이렇게 마음공부를 해야지 위없이 더 높은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하는 이 발심의 공부를 해야지. 저 돈 따위에 얽매여서 말이지’ 그러면서 얕잡아 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라는 곳이 세상의 물질적인 어떤 성취, 성공, 돈, 명예, 권력, 이런 것들, 이런 허망한 물질적인 세간의 수많은 것들을 얻고 쟁취하고 얻어내고 그러기 위해서 만들어진 세상이에요, 이 세상이.
그래서 그걸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야 그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야 나름 깨달을 확률이 높습니다. 자기는 이 공부에 발심도 안 했는데. 대충대충 사는 거보다 세속적으로 돈도 열심히 버는 사람이 더 좋은 거지요. 열심히 공부해보는 게 좋은 거지요. 사랑도 열심히 해보고 뭐 열심히, 열심히 살아보는 것은 좋습니다. 세간적인 거라도. 왜 그렇겠어요?
세간에서 열심히 매진해서 열심히 동일시되어서 이게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입니다. 그 경험이 없으면 깨달음에 발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세속적인 걸 열심히 추구해봐야 나중에 가서 ‘이렇게 내가 온몸과 마음과 정열과 내 젊음을 다 바쳐서 애썼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다니’ 하고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아 세간이 이렇게 믿을 바가 못 되는구나’ 하고 더 강력하게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 차원에서 불교에서는 괴로움이라는 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라는 그 자체가 우리를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한다.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걸 또 괴로움을 크게 당하려면 현실 세계에서 뭔가 크게 추구하고 크게 동일시되어서 세속에서 집착과 욕심도 크게 부리고 그래 봐야 크게 집착해서 크게 상처를 받아요. 크게 상처를 받아야 크게 아파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에너지가 커집니다.
자잘하게 그냥 소소하게 성취하고 이러는 사람들은 이 공부에 발심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그런 사람들은 또 그런 사람 나름대로 큰 괴로움 없이 그냥 소소하게 공부해나가는 그런 사람들의 길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왕창 집착하고 왕창 깨져보고 이렇게 사는 것도 좋은 공부의 길입니다. 그런데 또 그냥 소소하게 성공도 하고 소소하게 실패도 하다가 소소하게 삶의 어떤 걸 느끼면서 또 내 마음공부도 소소하게 하고.
그러면서 불교 공부도 소소하게 하다가 기도도 하다가 염불도 하다가 이렇게 조금조금 단계를 밟아가다가 나중에 ‘야 이렇게 공부해가지고 될 일이 아니구나’ 해서 또 공부를 탁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저마다 삶의 방식이 다 달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에 와서 느끼기에는 오히려 너무 불교의 방편에 사로잡히고 집착해서 너무 과도하게 집착해 있는 사람이 스스로 그걸 깨지 못한다면, 어떤 경우는 너무 깊이 사로잡혀서 시절 인연이라고 하는 거예요.
본인이 특정한 방편에 깊이 사로잡혀 있을 때는 그걸 아무리 깨줘도 스스로 절대 안 깨려고 합니다. 오히려 저를 욕하지요. 여러분들이 세간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한테 어떤 조언을 해주고 하셔도 좋은데 그걸 불교라고 이러면서 조언하지는 마시고, 그냥 조언을 하시는 건 괜찮은데. 불교라 그러면서 하지는 마시고. 그리고 또 사람들에게 어지간하면 이 공부에 대한 조언은 안 하는 게 좋아요. 내가 정말 완전하게 자신감이 딱 있기 전에는.
공부에 대해서 기복적이거나 기도수행을 하는 사람에게 “야 그런 수행은 하지 말고 정말 제대로 된 공부를 해라.”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잖아요. 여러분이 욕 얻어먹기 아주 쉽습니다. 특히나 뭐 “수행을 하는 건 다 외도라고 했다.” 뭐 이런 식의 얘기를 하거나 이랬다가는 큰일 납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이 상당히 비교 분별을 많이 하는 세상이라서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오쇼 같은 경우는 ‘위험하다’라는 표현을 썼는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위험한 게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항상 세상 사람들로부터 피해 다니고 도피해서 다니거나 숨어 다니거나 그걸 전혀 얘기하지 않고 살거나 그랬습니다, 옛날 같은 경우. 그런 경우도 많았어요. 선사시대 같은 경우야 그걸 아예 권위로 인정을 해줬으니까 상관이 없는데. 이 세상 사람들의 분별심, 비교, 이 질투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법이 없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는데 누군가가 법이 있다고 하면 자신의 밥그릇이 큰일 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이 깨달음을 얻은 자가 위험해집니다. 이게 무서운 동네라니까요, 중생세간이. 그래서 옛날에 그런 기록들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도망 다니거나 피해 다니거나 육조 스님도 그랬듯이. 도망 다니고 피해 다니거나 뭐 심지어는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중세세간이 무서운 곳이라서 그래요. 그래서 내가 공부에 대한 뭐 이게 맞다 저게 맞다 아무리 얘기해도 본인이 시절 인연이 안 되면 아무리 좋은 얘기를 청산유수처럼 해도 그 사람이 절대 안 받아들입니다. 제가 이것저것 다 시험해봐서 알아요.
이게 그 사람보다 가르쳐주는 사람의 권위가 한 수십 배 이상의 권위를 가지고 있어서 이 사람을 정말 스승으로써 권위 있게 받아들였을 때 이게 어느 정도 쉽게 말해서 먹힐 수 있는지는 몰라도. 그래서 도반들끼리 공부에 대한 얘기를 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서로가 공부에 대한 상이 있기도 하고. 사실 저도 스님들끼리 모이면 공부에 대한 얘기를 하기가 되게 조심스럽습니다.
조심스러운 이유가 공부 얘기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서로가 되게 조심스러운 이유는, 예를 들어 음식 하는 사람들을 가끔 인터넷 사이트에서 보면 백종원이 하는 프로 같은 데서 보면 “음식이 맛이 없다.” 뭐 이렇게 가차 없이 얘기도 하던데. 식당 주인에게 ‘음식이 맛없다’ 이러면 치명적인 것처럼. 자신의 인생이 달린 건데, 치명적인 것처럼. 스님들에게 “너 수행 제대로 못 하고 있다.” “그거는 진짜가 아니야.” 이런 식의 얘기는 인생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어마어마한 충격입니다.
본인의 공부에 대한 어떤 확고부동한 어떤 신념? 좋게 말하면 공부에 대한 확신? 이런 건데. 안 좋게 말하면 방편에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혹은 자신의 공부에 대해서 견고한 걸 가지고 있어서 공부 얘기로 상대방을 건드리게 됐을 때는 되게 충격을 받거나 아니면 오히려 공격을 받는 경우들도 있어요. “네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냐.”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특히나 이제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어지간하면 그렇게 하는 게 좋죠. 좋고. 다음 또 진도 나가겠습니다. 255쪽이고요.
32상 80종호는 모두 환상일 뿐임을 분명히 알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5)
경전에 나오는 수많은 방편들이 전부다 약인데. 32상 80종호 같은 약은 약 중에도 아주 안 좋은 것 중에서 아주 안 좋은 약이지요, 어찌 보면. 모양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 겉모습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옛날에나 이렇게 필요했을, 그러니까 신비주의적이고 뭔가 그런 걸 추구하는 사람에게나 먹힐 만한 약입니다. 중생들은 나와 똑같이 보이고 똑같이 생겼고 똑같은 행동을 하면 믿지를 않는 거예요.
‘저 사람에게 뭔 도가 있어’ ‘뭔 깨달음이 있겠어’ 이래서 믿지를 않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야 부처님은 우리와 달라.” “뭐가 달라?” “32상 80종호가 있어서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은 몸에 놀라운 특성들이 있어.” 그래가지고 막 만들어내는 겁니다. 32상 80종호 보면은 요상합니다. 이건 사람이 아니에요. 혓바닥을 이렇게 내밀면 얼굴 전체를 뒤덮고요.
발바닥도 평발인데다가 뭐 물갈퀴 같은 것도 손가락 발가락에 있어야 되고요. 이걸 그대로 그려놓으면 거의 외계인도 이런 외계인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험악한 참 황당한 모습일 수가 있어요. 물론 어떤 품겨 나오는 향기 나 뭐 이런 것들을 얘기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래서 이런 32상 80종호는 중생들이 부처님의 그 거룩함, 장엄함, 그것에 형상화된 것에 집착하니까 형상화시켜서 상징적으로 이렇게 만들어낸 것이지요. 당연히 환상입니다.
그러니까 겉모습에 속지 말라는 얘기지요. ‘32상 80종호는 환상인 줄 알라’라는 것은 겉모습, 우리도 중생세간에서는 겉모습을 많이 중시 여기잖아요. 그래서 스님들도 뭔가 겉모습에서 풍기는 뭔가가 참 훌륭해 보여야지 따르지. 훌륭해 보이지 않으면 또 안 따르고. 또 왠지 겉모습이 참 그럴싸해 보이면 그분이 삿된 말을 해도 따르고. 또 이제 내가 봤을 때는 자기 취향이 아니면 그분이 아무리 훌륭한 얘기를 해도 그걸 또 안 따르는 수도 있고, 그렇단 말이지요. 모양을 따를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그대들은 부처에게 육신통(六神通)이 있어서 불가사의하다고 말한다. 착각하지 말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5,256)
한 마디로 딱 끊어버리시죠. ‘육신통이 있으니까 불가사의하다’ 이거는 정말 엄청난 착각이지요. 부처님의 육신통이라는 게 우리가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은 뭐 천안통이 있어서 여기 앉아가지고 ‘저 밖에 야 저기 저 누가 오지’ 옛날에 우리 그런 얘기 많이 듣잖아요. 어떤 스님은 집안에 앉아가지고 “야 어디서 누가 올 거야.” 알아차리고. “저 밖에 지금 누가 오고 있구나.” 그런 얘기를 해야 큰스님인 줄 알아요.
부처님이 이 자리에 앉아 계신다면 여기 있는 여러분만 보일 겁니다. 밖에 1층에서 오는 사람이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교회에 오늘 몇 명이 왔구나’ 이런 거 어떻게 알아맞힙니까. 그런 게 신통이 아닙니다. 전혀 그런 게 신통이 아니에요. 전생을 맞춘다? 이건 더 없는 허망한 망상 분별이지요. 과거나 미래도 허망한 착각이고 의식이 만들어낸 생각이잖아요. 분별이잖아요. 오로지 지금 이 순간밖에 없는 입처개진의 세계에서 어제도 환상이고 내일도 환상인데.
미래에 어떻게 될지를 어떻게 맞춥니까. 사람이 사람의 미래를 과거, 전생이 뭐였는지를 그걸 어떻게 맞혀요. 인도인들에게 윤회라는 사상 자체가 아리안 인들이 옛날부터 아리안 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공통적인 생각이었어요. 그러니까 아리안 인들이 유럽으로도 일부 가고 뭐 인도 아리안인 쪽으로도 일부 오고 이러다 보니까 그 아리안 인들이 살던 그런 곳에서 대표적으로 윤회 얘기가 다 있어요.
그런데 그 윤회 얘기가 아리안 인들이 살지 않았던 나머지 어떤 나라, 부족, 국가 이런 곳에서는 윤회 얘기 자체가 거의 없는 토양입니다. 부처님이 지금 우리나라에 오셨다면 아마 산신에 대해서 얘기를 해줬을 거예요, 아마. 산신 기도를 하도 좋아하니까 산신 기도를 좋아해서 산신각에 가서 기도를 해야 아들을 낳는다고 생각을 하면서 기도를 하니까. 부처님이 그 할머니들한테 바로 산신 기도해가지고 아들 나았냐.
그러면서 혼을 내면 그 할머니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으시겠어요. 그러니까 처음에 좀 다독여놓고 부처님은 이 선사 스님들에 비하면 너무 자비로우시고 방편을 너무 자유자재로 잘 구사하시는 정말, 정말 우리 바라밀에도 보면 방편바라밀이라는 게 있거든요.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방편의 바라밀을 잘 쓰시는 놀라우신 분이 정말 부처님이세요. 그런데 이 선사시대에는 그렇게 대중 설법을 할 필요가 없었던 시대에요.
선사 스님들은 공부를 딱할 사람만 수 백리 떨어진 곳에서 딱딱 와가지고 그 아래서 백 명이든, 오십 명이든, 삼십 명이든, 그 스님들만 딱 모아놓고 그분들을 위해서 공부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게 방편을 쓸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그냥 과감하게 쳐줘도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근기가 그만큼 되는 사람만 모여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렇게 방편을 안 쓴 것이지.
아마도 선사 스님들도 부처님처럼 시중에 나가서 법을 설하고 하셨다면 아마 그런 방편을 쓰시는 분들도 많이 계셨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선어록에만 꽂혀 있는 사람들은 방편을 완전히 그냥 내치면서 자비로운 방편을 쓰면 그걸 오히려 외도인 것처럼 얘기하기도 해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부처님도 외도이게요. 그러니까 육신통이라고 얘기한 것은 우리가 아주 잘못 알아들은 그런 신통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거나, 그건 전혀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겁니다. 경전에는 다 그렇게 나와요. 이런 식으로 나옵니다. 육신통을,
무릇 부처의 육신통이란 색깔 세계에 들어가지만 색깔에 속지 않고, 소리 세계에 들어가지만 소리에 속지 않으며, 냄새 세계에 들어가더라도 냄새에 속지 않고, 맛의 세계에 들어가서 맛에 속지 않고, 감촉의 세계에 들어가서는 감촉에 속지 않고, 법의 세계에 들어가서도 법에 속지 않는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6)
이게 진짜 신통력입니다. 안이비설신의를 자유자재로 쓰면서도 눈귀코혀몸뜻으로 색성향미촉법을 다 마주하면서 살더라도 거기에 속지 않는 겁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내지 무의식계라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눈으로 세상을 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볼 뿐, 좋다 나쁘다 집착하고 좋은 거는 취하려고 하고 싫은 건 밀쳐내려고 해서 미워하고 취사간택하지 않는 것이지요. 왜? 보이는 대상에 속지 않으니까.
들리는 소리를 듣고 칭찬하면 막 좋아하고 더 듣고 싶어 하고, 비난을 들으면 막 기분 나빠하고 서글퍼하고 가슴 아파서 상처받고, 그러지 않는단 말이지요. 그 소리라는 것은 허망한 소리 파동이라는 것은 분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걸아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걸 소리 파동일 뿐이라고 해서 밥시간 돼가지고 “짜장, 짬뽕, 뭐 먹을 거냐.” 묻는데 얘기도 안 하진 않는단 말이지요. 그 파동은 알아듣고 내가 마땅히 말도 하는 거죠.
“난 뭐 먹고 싶다.” 얘기는 한단 말이지요. 소리 파동을 써먹을 줄은 아는 거예요, 백 프로. 써먹을 줄은 아는데, 거기 속지는 않는 거지요. 남들이 나보고 막 뭐라고 욕을 하고 했을 때 그것을 지혜롭게 들을 때는 욕을 얻어먹어서 괴로워하는 마음은 내려놓는 것이고. 다만 그 욕을 ‘저 사람의 말이 좀 과한 얘기긴 하지만 저렇게 얘기한 것은 뭔가 나에게도 저런 면이 일부 있긴 있나 보구나’ ‘저걸 내가 좀 고쳐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일부 할 수는 있지요.
그렇게 고칠지언정 그것 때문에 상처받아서 몇 날 며칠을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그럴 일은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색깔 세계에 살면서도 색깔에 속지 않는 겁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고 사는 거지요. 소리를 들을 때도 소리에 속지 않고, 냄새를 맡으면서도 냄새에 속지 않고, 맛을 보면서도 맛에 속지 않고, 우리는 다 맛에 속고 살거든요. 우리가 돈이 많을 때는 마음껏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었는데 갑자기,
요즘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계세요. 옛날에는 더 많았지만. 사업을 하시는 분들 보면 사업을 잘 하시다가 갑자기 확 망하셔서 너무 힘들어지고 또다시 어떻게 버텨내시고 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 분들과 제가 이야기를 나눠보면, 저는 정말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이런 일들이 이 세상에, 지금 이 시간에 항상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구나,라는 걸 느낀 것이. 너무 심각하게 망한 분들 같은 경우는요.
정말 당장 오늘내일 먹을 밥조차 사 먹을 돈이 없을 정도로 잃은 분도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을 학원, 과외를 시키기는커녕 학교조차 보낼 수가 없을 정도로. 그래서 어떤 분은 너무너무 힘들고 너무너무 가난해서 돈이 너무 없는데 이걸 애들한테 표현도 할 수 없고 그냥 애들은 막 짜증만 내고 맛있는 반찬이 없다고 하는데. 참 말도 못 하고 그러다가 ‘내가 돈이라도 좀 벌면 애들 맛있는 거 사줘야지’
라고 생각을 하다가 어느 날 조금 조금씩 이래저래 벌고 갚아가고 하면서 약간의 여유가 생겨서 큰맘 먹고 “야 오늘은 외식하자.” 그래서 데리고 나가가지고 팔천 원짜리, 가족이 팔천 원짜리를 네 명이 밖에 나가서 맛있게 사 먹고 집에 이렇게 걸어서 들어가는 얘기를 하면서 그때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팔천 원씩이나 하는 밥을 나가서 사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한동안의 기간 동안. 그 정도로 확 망해버리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우리는 우리 눈에 그렇게 안 보이니까 잘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까지 힘든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럴 때, 그럴 때 그분들 중에 이제 이런 얘기를 하는 분이 계셨어요.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는데 내가 가난했을 때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다. 나는 사실 뭐 밥이나 김치만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옛날에는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데 가서 가끔 회식도 하고 맛있는 맛 집도 찾아다니고 얘들이 ‘뭐 먹고 싶다’
이러면 가서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랬는데. 어느 순간 그걸 못하니까 너무너무 정말 자괴감이 들고, 너무너무 정말 아이들 앞에서 부끄럽고, 또 본인 스스로도 되게 비참하다는 느낌이 들고, 그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 느낌. 내가 비참해졌다는 느낌. 그게 나를 너무 괴롭혔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게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겁니다. 사실은 비싼 밥을 먹는 거나 그냥 소박하게 밥이랑 김치를 먹는 거나 건강으로 따지면 오히려 밥이랑 김치를 먹는 게 더 건강할 수도 있거든요.
저는 여기 원광사 와서는 정말 그 어느 때보다 음식을 잘 챙겨 먹고 있는데. 보통 군에 계시는 법사님들이나 민간 스님들도 마찬가지로, 아마 여러분들도 그러실 거예요. 보살님들도 집에 계실 때 귀찮아서 그냥 대충 밥솥 하나 들고 김치나 좀 찢어서 드시듯이 그걸 가지고 비참하다고 생각 안 하잖아요. 아 그냥 김치랑 대충 먹을 수도 있고. 애들이 먹다 남은 걸 이렇게 드실 수도 있고. 저는 뭐 요리하고 이런 거 자체를 되게 싫어하는 스타일입니다.
뭐 귀찮아하고. ‘내가 굳이 이걸 요리해가지고 먹어야 되나’ 이런 스타일이라 그냥 있으면 있는 거 먹고 없으면 그냥 말고. 한때는 상추를 이렇게 가꾸고 했는데 이런 것도 좀 그래서 그 군부대 주변에는 다 오염이 안 돼 있잖아요. 한동안 제가 상추나 이런 것들 농사를 지었는데 그것도 한때지. 한때가 지나니까 그것도 귀찮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야 내가 상추나 이런 것들을 키워서 먹느니’ 군부대 안에는 너무나도 청정한 곳이잖아요.
내가 이거 나물, 약초를 공부하는 편이 훨씬 낫구나. 싶어서 이제 약초랑 나물을 공부해보니까 여러분들은 모르실 텐데요.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반 풀들 있잖아요. 일반 풀들이 전부다 나물이고 전부다 약초입니다. 못 먹는 몇 가지 있어요. 독기가 좀 있다든가 이런 독성분이 있는 몇 가지만 빼고는 전부다 먹어도 되는 것들이에요. 그걸 아니까 못 먹는 게 없어요. 그거를 뜯어서 그냥 된장에 찍어 먹을 수도 있고. 이럴 테면 그렇다는 거지요.
그런데 제가 돈이 없어서 그렇게 먹겠습니까? 돈이 없어서 그래 먹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보세요. 똑같이 김치랑 밥만 먹어도 비참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비참하게 느끼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가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 겁니다. 내가 비참하다,라고 생각한 것이지 그게 왜 비참한 거겠어요. 저 아프리카에서 그런 풀 조차 김치조차 밥조차 없는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매일같이 배부르게 밥과 김치를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또 행복한 거겠어요.
이처럼 이렇게 육근으로써 육경을 접촉하면서도 거기 속지 않는 것, 그게 진짜라고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게 육신통입니다. 그게 진정한 신통력이지. 뭐 전생을 보고 타심통(他心通)이 열리고 심지어는 축지법(縮地法)을 하고 이거는 외도의 신통력입니다. 외도입니다, 외도. 분명하게 외도의 신통입니다. 그것이 열렸다,라고 해서 심지어 그걸 광고하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여러분은 아주 간단하게 정리를 하시면 돼요.
‘아 저 사람 외도구나’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구나’ 정확한 답입니다, 그것은. 그러니까 그런 외도의 신통력을 가지고 쫓아다니면 우리가 그런 사람들 종처럼 노예가 돼버려요. 그것을 광고하는 사람은 그걸 가지고 남들에게 뭔가 지배해서 뭔가 뜯어내고 싶은 게 있는 사람들이 그걸 광고해요. 그러지 않으면 뭐 하러 그런 광고를 하겠어요. 그래서 그런 어떤 것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어디에도 의지하지 않는 도인은 비록 오온(五蘊)이라는 번뇌의 몸뚱이에 불과하지만, 곧 땅 위를 걷는 참된 신통을 행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6)
진정한 도인은 이 오온이라는 여러분과 우리와 똑같은 이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그냥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고 있지만 놀라운 신통을 행하는 거지요. 물 위를 걷는 신통을 행하는 게 아니고 하늘을 걷는 신통을 행하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 진정한 신통입니다. 땅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신통이고요. 여러분들이 애쓰거나 노력하지 않는데 제 혼자 알아서 들숨과 날숨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심지어는 잘 때조차 기절했을 때조차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잖아요, 이 들숨과 날숨이. 이게 신통력 아닙니까? 내가 ‘들숨을 쉬어야지’ ‘날숨을 쉬어야지’ 한 번도 의도하지 않아도 제 혼자 알아서 내 생명을 살아가는 그게 진정한 신통력이지요. 아침밥 먹은 거 지금 소화시키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저절로 제가 알아서 소화하고 있는 것도 신통이고. 심지어는 차를 타고 운전해가면서 라디오를 다 듣고 또는 법문도 듣고 하면서도 운전은 운전대로 제가 알아서 잘 해요.
몸이 제가 알아서 반응도 잘하고. 오만가지 진정한 신통이 있는데 그런 쓸데없이 하늘을 난다든가 또 그것도 우리가 하지요, 그런 신통도. 비행기도 타고 돈만 있으며 비행기도 탈 수 있고. 그래서 그런 어떤 ‘평범한’ ‘평상심’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신통입니다.
출가자라면 먼저 도를 배워야 한다. 이 산승은 오래전부터 수십 년 동안 계율을 공부하기도 하고, 또 경전과 논서를 찾아 구하기도 하였지만, 뒤에 비로소 이것들이 세상의 고통을 구하기 위한 일시적인 약 처방으로써 잠시 드러내 보인 말일 뿐임을 알았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7)
아까 말씀드렸지요. 일시적인 약 처방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일시에 이것들을 내버리고 곧장 도를 구하고 선에 참여하였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7)
우리가 이제 그러고 있지요. 수십 년 동안 여러분이 계율도 지켜보았고, 경전과 논서를 찾아 공부도 했고, 불교대학도 다녔고, 기도도 해봤고, 염불도 해봤고, 독경도 해봤고, 이 경전 저 경전 좋다는 경전 다 들어보기도 했고, 뭐 이렇게 무슨 기도, 무슨 기도, 무슨 기도, 무슨 진급기도, 뭐 무슨 수능 기도, 아니면 성적 향상기도, 뭐 이런 광고를 하는 곳들도 찾아다니면서 거기에 빠져보기도 했고. 그런 다양한 광고를 하는 곳들도 많잖아요.
그런 곳에서 다양한 방편도 해봤단 말이지요. 그런데 ‘아 그게 일시적인 약 처방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그게 간절히 필요하면 그때는 그 약이 필요한 거예요. 그럼 그곳에 가면 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약 처방을 받고. 그리나 이게 잠시 드러내 보인 것이라는 걸 이제 비로소 알고 나니까 비로소 일시에 이것들을 내버리고. 모든 약들은요, 약봉지는 필요할 때 먹기 위해서 가지고 있고 먹을 순 있겠지만 결국에는 그 모든 약봉지는 다 갖다 버려야 됩니다.
공부하고 나서도 약봉지를 끼고 살 필요는 없잖아요. 건강한 사람은 약 먹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곧장 도를 구하고 선에 참여하였다. ‘선에 참여하였다’ 이게 ‘참선’입니다. 참여할 참(參) 자입니다. 참선이라는 거는 앉아있는 게 참선이 전혀 아니고 선에 참여하는 것. 지금 여러분들이 참선하고 있는 거예요. 어떤 분이 얼마 전에 저한테 “아이 우리 원광사도 참선 모임을 만들어가지고 참선 좀 가르쳐줬으면 좋겠다.”라고 그러더라고요.
“지금 계속 참선 모임을 하고 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 그랬더니 “아이 그래도 좀 앉아야 이렇게 앉아야 이제”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방편도 있고 그래서 그것도 좋은 방편이에요. 그런데 그것만이 참선은 아니다. 이렇게 ‘선에 참여하는 것’ 이게 진정한 참선입니다. 선에 참여하는 것. 그 뒤에 선에 참여한다면 어떻게 되냐면,
그 뒤 대선지식을 만나보고 나서야 비로소 도를 보는 안목이 밝아져서, 비로소 천하의 큰스님들을 알아보게 되었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7)
안목이 없는 사람은요. 천하의 큰스님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확실해요. 큰스님인데 큰스님이라고 전혀 생각을 안 해요. 그리고 ‘야 저분은 진짜 좀 아 이건 좀 아닌데’ 싶은데 그분을 더 큰스님이라고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 훌륭한 스님들은 ‘아이고 뭐 별로’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를 저는 많이 봤거든요. 아주 그냥 시답지 않게 생각을 하고 우습게 생각을 하고. 그리고 또 우리랑 똑같이 평범한 것에 대해서 뭔가,
이렇게 나쁜 남자한테 끌리고 나쁜 여자한테 약간 끌리는 그런 게 있듯이 뭔가 카리스마라는 이름으로 보면 좀 평범하고 이런 거보다는 뭔가 이상한, 요상한 카리스마를 따르거나 이러기도 한단 말이지요. 그런 요상한 카리스마가 진정한 도는 아닙니다. ‘평상심’ 평상심으로 천하의 큰스님을 알아볼 수 있는, 스승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열리는 게 가장 중요한 공부에요. 그래서 옛날부터 뭐라 그랬습니까? 공부는, 공부는 다른 거 없습니다.
내가 공부를 잘하느냐 못 하느냐는 사실 그거는 뭐 그다음 문제고. 그리고 그거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공부의 전부는 뭐냐면 부처님의 말씀처럼 ‘좋은 스승과 좋은 도반을 만나는 건 공부의 반을 성취하는 게 아니라 공부의 전부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교 공부라는, 제가 돌아보니까 그래요. 공부하는 과정은 뭐냐면 공부를 하는 과정이 아니었더라고요. 스승을 찾아가는 과정이었고,
참된 공부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던 것이지요. 참된 공부를 찾는 그게 진정한 공부이지. 그걸 찾아가는데 바로 옆 동네에 살아도 이십 년, 삼십 년이 걸립니다. 이십 년, 삼십 년이 걸려요. 제가 삼십 년 전에 분명히 이 바른 공부를 접했었고 저한테 그런 얘기를 했던 분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제가 콧방귀를 뀌었었거든요. 요즘 하는 말로 ‘아, 뭐 이해 안 되는 말만 했았고 말이지. 큰스님이라고 해가지고 뭐 뭐 쓸데없는 말만 하고 그래가지고 그게 무슨 공부야’ 이러고. ‘세간과 우리와 떨어져 있는’ 뭐 이렇게 비판만 했었지요. 그래서 이 안목이 열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대들이 법다운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다만 다른 이들에게 속지만 말고, 안에서나 밖에서나 만나기만 하면 그 즉시 죽여라.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8)
이게 선사 스님들의 안목에서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과 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여야, 비로소 해탈하여 사물에 얽매이지 않고 벗어나 자재할 것이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8)
여기서 죽이라는 얘기는 진짜 칼을 들이대라는 얘기가 아니지요. 당연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상을 깨라는 얘기입니다. 상을 깨라. ‘부처라는 상’이 있으면 중생과 부처를 둘로 나누는 분별심이잖아요. 또 ‘조사라는 상’ 조사와 우리를 둘로 나누는 상이고. ‘부모라는 상’ ‘친척이라는 상’ 뭐 이것도 하나의 상입니다. ‘하나의 모양’ ‘상’ 집착에 얽매여서 평생토록 그야말로 모양을 진짜인 걸로 착각하고 불교에서 말하는 출가라는 제도도 ‘부모를 버리고 나가서 출가한다’
이 개념 자체가 부모라는 상, 이것도 하나의 상이다. 하나의 이번 생에 부여받은 하나의 역할이다. 그러니까 이건 이번 생에서의 인연, 이걸 중요시 여기는 게 아니라 출세간을 얘기하는 것이지. 세간 안에서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출세간. 출세간은 생사하면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생사법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불생불멸법을 얘기하는 것이지.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은 생사법이잖아요.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부부간은 더욱더 생겨났다 사라지는 거지요. 요즘 삼분의 일은 이혼을 한답니다. 삼분의 일이 이혼하고 삼분의 일 이혼하는 사람이 다시 재혼을 하면 재혼한 커플들 중에 삼분의 이가 또다시 이혼을 한다. 뭐 이런 통계가 있더라고요. 이제는 사실 이혼을 하는 것도 그렇게 큰 허물이 아니에요, 요즘 시대에는. 그렇다고 해서 뭐 이혼을 권장하는 건 아니지만 법륜 스님이 얘기하는 거 들어보면 되게 쿨하게 얘기하시니까,
‘뭐 저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화가 날 정도로 쿨하게 얘기하세요. 보살님이 남편 때문에 죽겠다 이러면 “아 그럼 이혼하지.” 되게 가볍게 얘기를 해요. “아 그래도 이혼까지는.” “이혼까지는 안 되면 그럼 같이 살아.” 그러면서 이제 아주 아픈 데를 찌르지요. “이혼 안 하고 지금 그냥 사는 거는 어쨌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이라도 일단 있어야 살 거 같으니까 나 혼자 못 살 거 같으니까 일단은 필요에 의해서 있는 거 아니요.”
“그러면 있으면서 잘하고 살아.”라고 되게 쿨하게 얘기해요. 마치 인도의 이야기처럼. 두 부부가 아들을 낳고 살다가 여행을 떠났는데 만행을 떠났는데. 그늘 밑에서 이렇게 가족이 쉬고 있다가 남편하고 아들이 저쪽 개울가에 가서 잠시 있는 동안 아내 혼자서 그늘 아래서 쉬고 있었는데. 또 다른 여행자가 잘 생긴 남자 여행자가 왔는데 어머니하고 그 여행자하고 얘기를 하다가 눈이 맞은 거예요, 그새.
그래서 아무 말도 없이 그 마누라가 여행자랑 둘이서 저리로 가는 거예요. 가는 겁니다. 아들이 깜짝 놀라가지고 아빠 왜 가만 계시냐고. 저기 가서 엄마를 잡아오고 저놈을 한 대 때리든지 해서 빨리 잡아야 안 되겠느냐 그랬더니. 그 남편이 아들한테 “네 엄마는 올 때도 그냥 자기 인연 따라 그냥 잠시 나에게 온 거고 지금도 이제 인연 따라가는 거야.”(웃음)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가는데 왜 그걸 가지고 뭘 붙잡느냐.
그렇게 얘기했다는 인도의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이렇게 되게 쿨하게 얘기했는데. 이 얘기가 시사하는 바가 뭐냐 하면 실제 우리 삶이 이렇습니다, 사실은. 인연 따라 잠깐 생겨났다가 인연 따라 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인연 따라 생겨났다 사라지는 거에 의미 부여를 하지요. 의미 부여를 해서 ‘내 사람이다’ ‘내 거다’ 뭐 이런 의미 부여를 하고 거기 집착을 하고 그게 없어지게 됐을 때 인연 따라 생긴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사라지거든요.
그런데 그게 없어지게 됐을 때 막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인연 따라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그냥 가는 거예요. 그리고 뭐 제가 자꾸 이런 비유를 드니까 자꾸 이혼 찬양론처럼 들리는데. 이혼을 찬양하는 게 아니라 예를 들어 이혼을 했다. 그걸 가지고 막 심각하게 그 사람을 안 좋게 보거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살다 보면.
그건 특수사항이 아닌 거지요. 그냥 보편적인 사항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삼분의 일이 이혼을 하고 하니까. 그래서 모든 어떤 그런 것들을 가지고 내가 내 식대로 내 의식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막 고민하고 이럴 필요가 전혀 없고, 가볍게 생각하면 돼요. 아까 그 남편처럼 되게 가볍게 바라볼 필요는 있습니다. 마치 자식들이 대학가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남편이 진급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돈을 많이 벌어오고 적게 벌어오고도 마찬가집니다.
그렇게 심각할 필요는 없어요. 자식이 서울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안 가면 그냥 뭐 ‘안 가나 보다’ 생각하면 되는 거지. 뭐 못 갔다. 뭐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그 ‘회사에 가야 되는데 못 갔느냐’ 하고 괴로워하고 이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그냥 가볍게, 가볍게 삶을 바라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심각해해도 될 건 되고 안 될 건 안 돼요. 집착을 해도 될 건 되고 안 될 건 안 되고. 집착을 안 하고 그냥,
그냥 인연 따라 살아도 될 건 되고 안 될 건 안 되고. 시절 인연 따라 시절 인연이 다 갖춰진 것들은 그 시절 인연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인연이라는 거 속에는 또 자유의지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집착 없이 마음을 낼 거는 충분히 내라는 거지요. 내가 지금 그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게 지금 나에게 최선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일어난 거예요.
돈 벌어야 되겠단 생각이 일어났으면 그건 추잡한 생각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돈 벌어야 될 때이기 때문에 돈 벌어야 된단 생각이 일어난 거예요. 그거는 뭐 세속적인 생각이거나 이런 게 아닙니다. 세속과 출세간이 둘이 아닌 하나에요, 하나. 그래서 세간의 일도 세간의 일대로 열심히 살고 세간의 일을 열심히 사는 것 자체가 출세간에 발심하는, 아까 말한 것처럼 공부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어떤 하나의 상에 얽매이지 않고 거기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이거 죽이라는 얘기는. 내 마음에 그런 과도한 집착이 없으면 모든 거로부터 자유롭게 그 일을 행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유롭게. 릴랙스(relax) 한 채. 힘주지 않고 편안하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일을 하는데 이 사람은 집착 없이 편안하게 했는데 훨씬 더 능률이 오릅니다, 훨씬.
집착하고 ‘반드시 해야 돼’ 하고 생각하며 하는 사람보다 ‘나는 못 해도 좋고 안 돼도 좋고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 하고 일을 하는 사람이 훨씬 일의 능률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경험해서 많이 아실 거예요. 확실하게 일의 능률이 있어요. 제가 글 써보면 확실하게 알거든요. 뭔가 막 엄청 부담 주면서 막 이거 어떻게, 어떻게 잘 써야 되고 막 부담을 주면 야 이거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하면서 되게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마음에도 안 들어요.
항상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그 누구도 뭐라는 얘기 없이 그냥 혼자서 그냥 갑자기 뜬금없이 그냥 막 이렇게 쓰게 됐을 때. 정말 한 5분 한 번도 고친 적이 없이 그냥, 그냥 쭉 쓰고 그냥 끝. 한 번 더 수정도 안 해요. 그런데 제가 정말 나중에 이렇게 읽어 보면 막 애써서 쓴 글은 아주 읽기가 싫은, 오히려 그러거든요. 그래서 이게 유위법.
애쓰는 애써가지고 뭔가를 만들어내려고 하고 조작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들고 결과는 더 안 좋아지고. 그래서 항상 마음에 힘을 빼고 인생에 집착을 내려놓고 다 보는 대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고 하듯이. 어디에도 내가 집착하고 사로잡혀 있는 그 모든 것을 죽여 버려야 됩니다. 다 가볍게 유희삼매라고 하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그대는 온갖 곳에서 찾아 헤매는 마음을 쉬지 못한다.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하기를, ‘애달프다, 대장부여!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구나’ 라고 했던 것이다. 그대가 한마디 말을 듣고 곧장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비춰 보아, 결코 따로 구하지 않고, 그대의 몸과 마음이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그 즉시 일이 없다면, 비로소 법을 얻었다고 한다.
(선어록과 마음공부 p259)
이게 제일 중요한 얘기입니다. 온갖 곳에서 찾아 헤매는 마음을 쉬지 못하는 게 우리의 병입니다. 세속적으로도 뭔가 ‘이뤄야지, 이뤄야지’ 하고 찾아 헤매지요. 출세간적으로도 ‘이렇게 하지 저렇게 하지’ 하고 찾아 헤맵니다. 찾아 헤매는 마음이 멈추는 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공부해서 부처가 되고 싶잖아요. 어떻게 하면 되느냐. 찾아 헤매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앉아서 좌선하거나 법문 듣는 것은 참선이고 공부인데.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있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순간 그냥 이렇게 있는 게 공부예요. 있는 게 참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있느냐? 그냥 있는 게 참선입니다. 뭔가 하고 있는 거는 번뇌 망상을 부리는 중생심을 연습하는 거고요. 분별심을 연습하는 거잖아요. ‘이거 해야 돼’ ‘저거 해야 돼’ ‘이거 해서 무언가 성취해야 돼’ ‘저거 해서 무언가 성취해야 돼’
‘수행을 통해 부처가 돼야 돼’ 이게 전부다 조작이고 유위법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부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지요. 분별하지 않는 것이 불교 공부의 핵심이잖아요. 그런데 ‘추구한다’라는 마음은 뭐예요? ‘찾아 헤맨다’라는 마음은 ‘나는 지금 갖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노력을 다하면 나중에 이걸 가질 수 있을 거야’ ‘부처를 얻을 수 있을 거야’ ‘삶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거야’라고 둘로 쪼개놓는 마음입니다.
찾아 헤매는 마음 자체가 벌써 중생심이에요. 분별심이에요. 둘로 나누는 마음을 강화시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서. 그래서 우리는 뭐만 하면 되느냐면. ‘불이법’ ‘불이중도’ 불이중도가 불교의 핵심이잖아요. 불이중도를 실천하는 방법은 뭐겠습니까? ‘내가 이거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야지’ ‘찾아야지’ ‘구해야지’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냥 지금 이 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머물러 있게 돼요.
미래를 향해 추구하는 바가 없으니까 지금 여기에 존재하게 됩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누리고, 만끽하고, 감동하면서, 감사해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지금 여기에 내가 느끼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허용해주게 됩니다. 포용해주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고, 다 허락해주는 거예요. 분별하지 않고.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니까 이건 더 하고 저건 덜 해야지’
하는 생각이 없이 ‘나에게 오는 모든 것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住 立處皆眞)이구나’ ‘다 참된 진실이구나’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게 믿음이에요. ‘나에게 온 이것이 나를 위한 최선의 진리야’라고 온전히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굳은 믿음을 가지고 내 안에 턱 맡겨버리는 거예요. 내 안의 진실에. 그냥 지금 이대로가 진실이니까 지금 이대로의 진실에 내 온 존재를 턱 내맡겨버리는 겁니다.
내맡겨버리면 할 게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맡겼으니까 힘 뺀 채 하고 싶은 거 그냥 다 하고 사는 거예요. 남들 크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힘을 빼고 내가 하고 싶은 거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겁니다. 뭔가 추구하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걸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지요. 그래서 비로소 무언가를 미래를 향해 추구하지 않고 그냥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를 저도 많이 그랬었지요.
뭐 기도를 시작하면 마음속에서 ‘아이 언제쯤 기도 끝나나’ 한 시간, 한 시간 반이면 기도 끝난다. 그러면 ‘야 이거 빨리해가지고 막 열심히 해서’ 이제 기도 끝날 때를 기다리잖아요. 여러분 집에서 나올 때는 빨리 법당에 도착하기를 기다려요. ‘그래서 빨리 법문 들어야지’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법문 듣다 보면 ‘아 지금 쉴 때가 됐는데 안 쉬지’기다리고.(웃음)
수업 들을 땐 ‘아 이제 끝날 때가 됐는데’ 하고 끝날 때를 기다려요. 또 끝나고 나면 ‘빨리 집에 도착해야 되는데’ 하고 집에 도착하길 기다리고. 또 ‘야 내일 주말이 빨리 와야 되는데’ 하는 걸 기다리고. 다음 주에 있을 뭔가 좋은 건수를 기다리고. 한 달 뒤에 있을 무슨 휴가를 기다리고.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기다리느라고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 여기에 이 심심하고 이 아무 일 없는 이 평범한 그냥 맹숭맹숭한 이것을 그냥 있어 줘보는. 기도를 한다. 신묘장구 대다라니 막 독송을 한다. 하면 ‘야 이거 빨리 끝내야지. 이번에 3독 했구나. 아직 4독이 남았구나’ 이렇게 생각하기보다.(웃음) 그냥 신묘장구 그냥 그거 자체로 ‘오케이’ 여기서 그냥 있겠다. 절을 할 땐 절을 하는 그 자체로 그냥 한 배 한 배에 존재하겠다. 그냥 이거 자체가 전부다.
길을 걸을 때는 집에 갈 때는 도착하고 나면 안심. 이게 아니고 그냥 한 발 한 발 걷는 그 자체가 내 인생에 최선의 참선이다. 지하철 타고 가만 앉아있는 이것이 최선의 참선이에요. 지금 가고 있는 이 자리가. 모든 순간순간에 다음 순간을 추구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그 순간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냥 이렇게 바라보는 거지요. 바라보는 걸 그냥 바라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그걸 또 일삼아 해요. 위빠사나.(웃음)
이래서 ‘관찰을 해야지’ ‘생각이 올라오는 걸 관찰해야지’ ‘들리는 소리도 관찰해야지’ ‘이 소리가 부처의 소리라는데 왜 나에게 중생심으로 중생의 소리로 들리지’ 이러면서 ‘이게 불성이라는데, 왜 보이는 게 다 부처라는데, 나에게는 중생으로 보일까’ 이게 다 생각으로 하는 공부에요. 생각으로 하는 공부.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게 화두를 들라는 얘기가 그 얘기에요. 그러니까 가끔 한 번씩 ‘이 뭐고’ 하는 건 나쁘지 않은데.
그걸 계속 붙잡고 다니면 ‘이게 부처라는데 왜 난 부처로 보이지 않지’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 송화두가 생각으로 하는 공부가 돼버려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어주는 거예요. 문득문득 잠시 여기저기 막 쫓아다니는 생각들을 이 자리로 돌이켜 놓아서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구경꾼’이 되는 겁니다. 내 삶을 구경하는 구경꾼. 이 구경하는 자는 내가 아니에요. 누가 구경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구경하는 자는 누굴까요. 그 구경하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뇌 속에 있나요? 눈 속에 있나요? 어디 있어요? 알 수 없지요. 과학에서도 발견 못했지요. 그게 뇌에서 일어나는 건지. 우반구에서 일어나는 우반구가 주로 한다는 어떤 뇌의 작용이 있다 그래요. 뇌 과학에서. 그런데 이 우반구가 마비가 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반구가 마비된 사람이 얘가 해야 되는 기능이라 얘는 못할 줄 알았는데,
이 기능을 얘가 이어받아서 하더랍니다. 뇌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서 일어나야 될 일인데 이게 완전 마비가 됐을 때도 그 일이 일어나고 있더라는 거예요. 어딘가에서 일어나는지 모르는 일이 일어납니다. 왜 그럴까요? 어떤 경우 그러잖아요. 간을 이식했는데 심장을 이식했는데 그전에 이식한 사람, 그 사람의 성격적인 특성이 자꾸 나한테 나타나는 이런 일들도 있다,
라는 건 그 사람의 성격적 특징이 그 심장을 통해 나에게로 어느 정도 왔다,라고 얘기할 수도 있어요. 그럼 그 성격이 심장 속에 들어가 있나? 간 속에 들어가 있는 겁니까? 특정한 곳에 있는 게 아닙니다. 특정한 내 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이 생각을 일으키거나 뭔가 있는 그대로 관찰할 때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허공성’이 하는 거예요, 굳이 말을 한다면. 내 안에 있는 이 육근으로 이루어진 이 몸이 하는 것도 아니에요.
몸이 보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목전’이라고 그래서 ‘눈앞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여기 앞에 있는 탑을 한번 그림으로 그려보세요. 그림이 그려지지요. 요 앞에 있는 탑이 그림으로 그려지지요, 거지요. 어디다가 그리셨어요? 뇌 속에 그렸나요? 간에다가 그렸나요? 눈에다가 그렸나요? 어딘가요? 그게 그 생각이 탑이라는 이미지가 그려진 그 자리가 있잖아요. 그 자리는 뇌도 아니고 어디도 아니에요. 그게 요 앞에 있는 건지도 몰라요.
여기 있는 건지도 모르고. 그냥 편만하게 있는 걸 수도 있고. 그러면 보살님도 앞에 탑을 어딘가에서 목전에서 그렸어요. 보살님도 탑을 어딘가에서 그렸어요. 그 중간쯤 어딘가에서 그렸다 치면 이 분이 그린 그 탑과 이 분이 그린 그 탑이 일으켰던 그 작용, 그 작용이 다르다,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탑이라는 이미지가 올라온 그 자리가 내가 탑이라는 이미지를 그려낸 그 자리,
그 자리와 옆에 사람이 이미지를 그려낸 그 자리가 같은지 다른지 알 수 있습니까? (죽비를 치며) 이 소리를 들었는데 이 소리를 난 귀가 들었다,라고 확신을 하고 있지만 진짜 귀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처럼. 어떤 듣는 작용, 듣는 놈은 여기 어딘가에서 들을 수도 있거든요. 옛날 이런 표현도 씁니다. 큰스님들이 공부를 하고 하실 때 보면은 그런 사례도 많이 나와요. 여러분들도 아마 그럴 겁니다.
가끔 기도하고 하다 보면 예를 들어 이 시계 초점 소리가 아주 크게 들릴 때가 있어요. 또 이게 저기서 안 들리고 여기서 들릴 때가 있어요. 바깥에서 울리는 어떤 소리들이 그냥 되게 가까이 느껴질 때도 있고, 또는 공간 감각을 잊을 때도 있고, 저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걸까요? 내 귀가 듣는 걸까요? 아니면 그 새가 듣는 걸까요? 그 사이에 있는 허공이 듣는 걸까요?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듣는 자리를.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성’이니, ‘허공성’이니, 뭐 ‘듣는 자리’ 이 자리니, ‘본래면목’이니, 이런 표현을 쓰는데. 그야말로 ‘일불성’ 하나의 부처, 하나의 부처 자리, 하나의 텅 빈 이 허공성이 그 모든 것을 하고 있는 겁니다. 셰어하우스(share house: 침실만 제외한 거실, 화장실, 욕실 등을 공유하는 생활방식) 하듯이. 하나의 불성을 우리가 그냥 셰어해서 쓰는 것도 아니지요. 내가 바로 그것이니까. 모두가 다 그것 아닌 것이 없단 말이지요.
그래서 그것 하나를 다 같이 쓰고 있는 겁니다. 하나를. 하나의 부처를 우리가 모두 다 따로따로인 것처럼 망상하면서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망상하는 건 ‘내가 있고 네가 있어’라는 건 내 망상이고. 그 하나, 하나 쓰고 있는 그 하나는 그 하나의 부처일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 이미 부처를 가지고 또 다른 부처를 찾는 그런 허망한 망상.
그것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고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서 있는 그게 공부입니다. 그게 참선이에요. 여러분들이 참선하고 싶으면 방금 전에 일어났던 ‘내가 뭘 해야지’ 했던 생각 있잖아요. 항상 우리는 그 생각을 하고 있어요. ‘뭘 해야지’ 하는 생각 ‘아침에 일어나면 빨리 씻고 빨리 화장해야지’ 뭐 이런 생각 있잖아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또 그냥, 그냥 하는 거지요. ‘지금 빨리하고 마쳐야지’ 이런 생각 하지 않고.
다음 순간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그것을 하는 존재로써 있어 보는 겁니다. ‘청소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가 아니고 그냥 청소하는 이것이, 청소하는 이 동작이나 절하는 동작이나 뭐가 달라요. 청소하는 게 절 수행하는 것과 똑같아요. ‘지금 이 순간 청소 빨리 끝내고 치워야지’ 하는 생각만 없이 그냥 그 순간 온전히 청소만 할 수 있으면 그게 참선입니다.
그다음 순간을 추구하지 않고 지금 그 자리에 있으면 그게 바로 부처가 되는 공부이고 그게 바로 참선이다. 그런데 어디 가서 무슨 수행을 또다시 하고, 어디 가서 무슨 공부를 따로 하고, 무슨 방법을 또 찾아야 되겠습니까? 명확한 방법을 얘기해줄 수 없는 게 이 공부입니다. 좀 쉬었다가 하겠습니다. (1부 녹취)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 청소 빨리 끝내고 치워야지’ 하는 생각만 없이 그냥 그 순간 온전히 청소만 할 수 있으면 그게 참선입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share house
읽는 동안 행복했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