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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기벌레에 쏘인 경험.
원래 추억이라 하면 좋은 일에 붙이는 단어 아닌가.
이번에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다른 작품, 살인의 추억.
제목 때문에 적응이 안 되던 기억이 있다.
내가 국어실력이 달리는 것인지 아니면 영화내용상 뭔가 반전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
우리가 잘 아는 노래.
메기를 마기로 발음하는 것도 좀 생소하다.
요즘 읽는 소설에 나오는 거머리 이야기.
오르한 파묵에 이어 두번째 접하는 터키 작가.
하산 알리 톱파시의 소설 <<그림자 없는 사람들>>
"그녀는 무슨 통증을 없애려고 거머리가 가득 든 병 두개를 끼고 잠이 들었는데,
나중에 몸이 풍선처럼 빵빵해지도록 피를 빨아 먹고 죽은 거머리들 한가운데
서 어연 고깃덩어리로 발견되었다"
으악...병뚜껑이 열린거?
소설을 읽다보면 뜻하지 않게 접하는 잔혹한 사건이나 표현들과 극사실주의적
표현에 그 이미지나 배경을 상상하기도 싫은 경우가 있다.
그리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묘사들을 보게된다.
영화는 그걸 장면으로 보여주지만 소설은 세심하고 디테일하게 작문을 통해
묘사한다.
<<세계 챔피언>>이란 소설은 승리를 위해 경주견 개들을 얼마나 잔혹하게 다루는지를
묘사한다. 보기 싫은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사포로 갈기도 해.
개 발바닥을 까칠한 사포로 갈아서 껍질을 벗겨버리면 달릴 때 아프거든."
지지난 주(5월 초), 소나무 그늘 아래 누워 커피도 마시고 책도 보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중간시간대(환절기)라 바람은 다소 차갑고 태양은 약간 뜨겁게 느껴진다.
하늘은 맑고 푸르르지만 사람들 옷도 제각기 몸의 상태에 따라 그 투터운 정도가
다 다른 듯 하다.
야외에서 봄 소풍을 즐기기에는 조금 찬 기운이 돌고(봄 소풍 온 유치원생들과 중학생들로
북적이기는 하지만) 벚꽃은 진지 좀 되고, 지난 주처럼 온동네가 아카시아 향수를 뿌려 놓은 것처럼 꽃향기가
나지 않는 무미건조하기만 한 그런 날씨가 계속된다.
세상이 변한 탓에 누구나 카메라가 장착된 스마트폰이란 만능기계를 들고 다닌다.
스마트폰은 이제 그 용도에 따라서 사용방식을 달리하며 어디서나 소지하고 다니는
제 1의 필수품이 된 지 오래다.
하늘로 뻗은 소나무 밑둥이 제법 굴곡을 만들어낼 정도로 야무지게 편편이
갈라져 예술적인 감흥도 느낄정도로 운치가 있다.
그래서 사진 한 장 찍어 이것이 그림이다 생각하며 소장해 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세한도>>의 소나무를 상상해 보면 더 마음이 차분해지고
뭔가 음미할 가치를 지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다양한 나무의 표면 즉 껍질, 수피(樹皮) 또는 목피(木皮)가 주는 재질의 독특한 질감이
매력적이다.
그래서 거목이 된 나무의 표면을 사진을 찍어 본체와 이미지를 대조해 보기도 하고....
이 소나무 껍질 조각들을 보니 아련한? 아픈기억이 떠오른다.
어린시절은, 늘 자연속에서 살아온 환경(사방이 모두 산과 논과 밭).
그 느낌을 알기도 전에 -물아일체의 경지는 아닐지 몰라도- 자연에 동화된
시절을 보낸 것도 사실이다.
산에서 나는 뿌리(마와 칡 등)와 열매(오디와 산딸기 등) 그리고 풀잎
(논에서 자라는 잡풀-이름을 알 수 없지만-을 손으로 잡아 뽑아 그 하얀 부분을 조금씩 먹는다.
또 산에서 나는 시금치라고 해서 약간 신 맛이 나는 잎사귀를 먹고, 찔레를 꺽어 연한 순을 먹는다.
그리고 송화가루가 날리기전 그 열매를 따서 먹기도 하고 바구니를 가져다가 집으로 가져와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말리면 노란 가루-송홧가루-가 생기는데 채에 걸러서 설탕을 약간 뿌려서
수저로 떠 먹으면 맛이 좋다.)을 따서 취식을 하는 자연인 수준의 생활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던 시절이다.
요즘은 자연인도 전문가 수준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자를 말하지만...
그런데 이젠 봄나물을 캐더라도 농약성분과 중금속으로 오염된 수준을 따져야 하고,
송편에 들어가는 솔잎도 아무데서나 채취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성 정보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다.
미세먼지와 방사능 음식.
환경과 음식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
포비아(공포증)와 신드롬(증후군)을 달고 사는 시대에 어떤 것에 강박증이나 이상현상 하나쯤은
달고 살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비정상일 정도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자연과 어우러진 초등시절과 그 단절로 시작된 중학교시절은 상반된 극과 극의
생활을 요구한다.
어느날 갑자기 검은 제복을 입고 까까머리를 하고 강압적인 교육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만 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개성이나 취향은 드러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으로 치부된다.
숨이 막힐 지경인 환경을 견뎌야 했던 동기부여 방식은 놀랍게 단순하다.
남들 다 하니까...
평생을 '남들이 다 하니까'로 살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 그거 왜 해?"
"남들이 다 하니까..."
"남들이 안 하니까"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심이 필요하고 남들보다 우월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특정 부분(경쟁이 치열해서 얼쩔 수 없이 선택을 하거나 튀는 본성을 감출 길 없는 것까지 포함)이나
좀 독특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나 듣는 말이다.
어린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숨을 쉬기만해도 몸이 더러워지는 느낌이다.
피톤치드가 대량으로 뿜어져 나오는 곳을 찾아 몸과 마음의 힐링을 하고서야 심리적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시대.
공기의 질이 달라지는 경계가 확실하게 구별되는 공간분할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탓에 그 경계를 잘 모르던 어린시절과 달리 체감속도가 상당히 빠르게
다가온다.
계절마다 독감과 A형 간염 등 치명적인 바이러스주의보를 쏟아내는 언론의 기사들을 접한다.
그런 정보의 부정적인 공포심 조장은 건강에 대한 심각한 경계심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져 웰빙이나,
욜로족(You Only Live Once) 같은 말로 더러워지고 삭막해진 세상에 대한 집단적 거부반응 같은 것으로 돌파구를
만들려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병주고 약준다'는 말처럼 지금의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온갖 병을 일으킬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고 죽을 병이 아니면 다행이라고 여기며 처방전을 무슨 경전처럼 따르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세상에 널리 알려진 루소의 이 명언은 일반적으로 문명이 아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 정확한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사회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다"함으로써 그 철학의 본질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는데,
루소는 문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고 자유롭고 평등하지 못한 문명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위키
노년에 시골에 집 한채 장만해서 자연과 함께 사는 걸 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루소의
말이 공감백배의 타당한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한창 활동이 왕성할 시기에 지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그런 공간과 시간을 찾아
일상을 보내라는 것은 어찌보면 사망선고나 다름 없는 극단적 표현일지 모른다.
이전에 허리-목 디스크로 병원을 들렀는데 나는 그냥 나무토막 같은 존재 같았다.
목을 잡아 빼고 온열기로 덮어 찜질을 하고...개인의 몸관리 부실 차원이겠지만
우리는 어떤 병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모든 원인은 자기관리 부실이란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환경적 원인이나 외부적
이유들은 불가항력적 요소로 개선의 여지에 한계가 있음을 암묵적으로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듯 하다.
요즘 같은 의료환경이 잘 갖춰진 세상에 선친(先親)이 오래전 병원(의료원이란 이름으로
지역마다 하나쯤 있던 시설)에서 맹장을 오진해서 복막염 등으로 번지고 차후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싶다.(요즘은 본인이 병원을 기피한 나머지 병을 키워서
시기를 놓치지 않으면 모를까 병원에서 이런 걸 오진 하는 사례는 흔치 않으리라...)
http://www.healtip.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0
쓰다보니 말이 길어졌는데...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쐐기에 쏘인 경험을 말해야겠다.
한국의 자연환경은 특정지역을 빼고는 독사도 별로 없고 사막이나 있는 전갈 같은 독충도
없다. (끽해야 모기...70년대 서울 남산 근처 회현동에 살던 형님 집 일본식 가옥에 빈대가
많았다는 말을 들은 바는 있다.)
내가 살던 곳도 그런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여름이면 제비들이 돌아와 자연스럽게 집을 짓고 스파이더가 낙하하며 얼굴에 달라붙어도
이상하지 않는 그런 곳.
밤에 개구리가 울어대고 밭에 지나다가 널린 채소를 하나 짤라 먹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 그런 곳.
로컬푸드란 말이 낯설어 로컬푸드가 아닌 것을 찾기가 더 어려운 그런 곳.
내륙지방이라 생선이 귀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그래도 논 웅덩이에 물을 퍼내면 자연산 미꾸라지와 메기 그리고 잔챙이
물고기들을 얻을 수는 있다.
빠께스(오래전 사용한 일본식 발음)에 미꾸라지들을 놓고 굵은 소금을 한움쿰
뿌려대면 미친 듯이 날뛰다가 누런색으로 변하면서 끈끈한 액이 나오고 진흙을
토해낸다.(해감-물속에서 흙과 유기물이 썩어 생기는 냄새나는 찌끼.)
며칠 전 주변 아파트 단지에 소동이 벌어졌다.
벌들이 집을 지어서 119가 출동한 것.
이런 것들 외에 조심해야 할 독충 중에 쐐기벌레라는 것이 있다.
아까 왜 소나무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이 쐬기벌레에 쏘인 흔하지 않은 경험이 있기에 그렇다.
어린시절 친구가 만든, 아니면 그 아버지가 만들어준 소나무 껍질로 만든 작은 돛단배가
시냇물을 따라 유유히 흘러가는 걸 보고 소위 말하는 필이 꽂혔다.
따라서 꼭 내 손으로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산으로 올라갔다.
조금 깊은 산속에 오래된 굵은 소나무들을 세심히 관찰하며 작은 배를 만들 만한 모양새를
갖춘 재료를 찾던 중 내맘에 꼭 드는 걸 발견한다.
길게 날렵하고 두께가 어느정도 두툼한 것이 상상으로라도 이미 시냇물을 따라 전복사고를 내지 않고 항해를
할만 한 것에 틀림없다.생긴 모양은 유선형에다가 돛을 달기 위해 나무젓가락 같은 걸 꼽아 놓을 정도의 두께와
균형을 잘 잡아 전복되지 않을 좌우 대칭,...
그런고로 의심의 여지없이 최소한 유속이 강하지 않은 시냇가에서는 두둥실 떠다닐만 하다.
오~이거다 싶어 얼른 손으로 그 두께를 가늠하며 쇠꼬챙이로 껍질을 벗겨내려 들이대려는 순간.
대바늘로 찌르는 듯 한 통증.
아아아아악~
갑자기 찾아든 서든 어택, 고통에 정신이 혼미하다.
"도대체...뭐야..?"
도드라지게 툭 불거져 나온 돛단배 제작용 껍데기 사이, 골이 깊은 소나무 껍질들 사이에 도사리고 있던 노랗게
생긴 정체불명의 벌레가 마치 씹다 버린 노란껌딱지를 벽에 붙여놓은 것 마냥 솜털이 숭숭숭 드러난채 꼼짝않고
가만히 있다.
순간의 고통이 주는 억울함에 눈물이 날정도로 분하지만...
"너가 나를 건드린거지, 내가 너를 건드린게 아니다. "
"왜 가만히 있는 나에게 손을 뻗어 들이댔냐?"
지금 그 때를 돌이켜보며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고통이 더더욱 극심하게 오는데 할 말이 없다.
시냇가에 띄울 작은 돛단배고 뭐고 집으로 달려와 응급처치를 할 생각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산을 내려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오랜 시간 고전적 만병통치약 자릴 차지하던 된장을 발라 본다.
(동네에 약국은 없다. 아마도 기억에는 그렇다.)
그러나 효과가 없는 듯 하다.
한참을 지나 가족들이 하나 둘씩 돌아오고...
작은 손을 위로 치켜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고통을 참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떫은 감을 바르면 낫는다는 말을 해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뒷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감나무로 가서 땅에 다 익기도 전에
일찍 떨어진 감을 찾아 본다.
또 나무를 흔들어 조기수확?을 해서 부실하게 꼭지가 달린 감 하나를 얻었다.
칼로 반을 잘라 진액을 내서 얼른 물린 곳에 대고 있어보니....
아무런 효험이 없다.ㅜㅜ
지금처럼 버물리나 물파스도 없고, 응급약도 없다.
계속 문질러대니 쏘인 곳을 지날 때마다 고역이다.
마치 선인장 가시나 다른 미세한 가시가 박혀 있는 부분을 손으로 건드리면
아픈 것처럼 그 이상 아프다.
밤에는 천으로 감아서 감조각을 감고 자고 낮에는 새로 얻은 감을 잘아 문지르고 다닌다.
계속해서 아프지만 다른 방법을 알 수 없으니 아파도 참기로 한다.
그렇게 4-5일이 지난 후에는 아마도 감성분의 덕이 아닌 자연치료가 된 듯 나았다.
누가 알려준지는 기억이 없지만 감이 쐐기의 독성을 없애는데 효과가
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있다고 한 들 지금으로써는 벌레물린데 사용하는 응급약을 쓰거나 차라리 치약을 바르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다.
글 중간쯤에 언급한 루소의 명언.
자연으로 돌아가라....그래봐야 별 의미가 없다.
자연과 문명.
루소는 이런 단순한 대비를 말한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비디오테이프 호환마마.... 경고 비디오.
대여점 비디오를 틀면 늘 등장하는 장면.
호랑이가 아기를 물어가는 장면이 보인다.
아마도 산에 사는 호랑이가 마을에 내려와 갓난아이를 잡아가는 장면으로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LCtQbh-DxCQ
하지만 지금 같은 문명사회에서는 유괴범들이 돈을 위해 힘없는 아이들을 노린다.
그렇다고 야생이나 정글에 사는 위험한 동물처럼 식별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약육강식의 사회구조가 보편화될수록 약자들에 대한 강자들의 횡포는
더욱 심화된다. 그런 부조리를 법으로 막고 연대를 통해 시정을 요구하지만
기득권을 쥔자들에게는 그 법의 정의나 합리성 따위는 의미가 없다.
단지 자신들에게 이용가치의 유무에만 관심이 있다.
<pd수첩>이나 <그것이 알고싶다> 같은 프로를 통해 접하는 세상사의 무서움.
그런저런 사건사고의 현상 이면들을 보면 문명은 또 다른 형태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자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선한 면과 악마적인 면을 동시에 지닌....
산에 가면 쐐기에 쏘여 손가락이 아파서 고통을 당하고
문명이 만들어낸 인터넷상(생태계)에서는 악플러들이 쏘는 인간쐐기의 침에 찔려 고통을 호소한다.
또 일상에서는 서로 말과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 받고 촌철살인한다.
산에 사는 쐐기에 쏘인 경험의 의미를 너무 확대해석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여튼 자연이란 의미를 단순화해서 안락한 휴식처로써의
의미만을 찾는다든지 아니면 막연한 의미로 최고선(신을 보는 관점처럼)이란 의미로
파악해서 그 대비를 통해 문명의 해악을 고발하는 어찌보면 쓸모없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선량하기도 하고 무자비하기도 한 인간군상들로 무리를
이루어 공존한다.
그 속을 알 수 없기에 조심하지않으면 안 된다.
어제는 여성을 쫓아가던 남자가 cctv에 포착된 장면이 공개되었다.
무서운 세상이다.
누가 이리나 늑대, 하이에나 같은 맹수인지 도통 알 수 없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속을 감추고 불현듯 등장하는...괴한...웃고 있는 사이코 패스의 어두운 그림자....
그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누군가에게 쐐기벌레는 되지 말아야 할터인데....
막 하는 말이...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는다"
참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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