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20> 서장 (書狀)
허사리에 대한 답서(2)
텅 비고 밝아서 저절로 비출 것이니
"나는 그대의 도호(道號)를 담연(湛然)으로 삼았습니다. 마치 물의 맑음과 같이 흔들림이 없으면, 텅 비고 밝아서 저절로 비출 것이니 수고로이 애쓸 것이 없습니다.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모두 담연을 벗어나지 않아서 털끝 만큼도 새어나가지 않습니다. 다만 이 담연의 도장으로 모든 곳에 도장을 찍으면 옳음도 없고 옳지 않음도 없어서 하나 하나가 해탈이며 하나 하나가 밝고 묘하며 하나 하나가 진실하여, 쓸 때에도 담연하며 쓰지 않을 때에도 담연할 것입니다."
허사리에 대한 답서 가운데 이 부분은 특히 대혜 스님의 선에 대한 안목의 깊이가 잘 나타나 있는 좋은 글이다. 스스로의 확고하고 철저한 체험이 없다면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의 말을 흉내내는 것도 아니요, 생각으로 헤아려 하는 말도 아니다. 오로지 그 미묘한 세계를 맛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묘한 말이다.
"흔들림이 없으면 텅 비고 밝아서 저절로 비출 것이니, 수고로이 애쓸 것이 없다"는 한 마디 말에 이미 체험의 모든 면이 잘 나타나 있다.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의식(意識)을 따라가지 않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끊임없이 생멸하며 흐르는 의식을 쫓아 다니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특정한 생각에 사로잡혀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님을 말한다. 이러한 상태를 흔들림이 없다는 말 이상으로 적절하게 말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이것을 두고 [상(相)을 취하지 않으면 있는 그대로일 뿐 움직임이 없다](不取於相如如不動)라 하였다.
"텅 비고 밝다"는 것은 의식에 가로 막히는 장애가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생각, 느낌, 의지 등 소위 오온·십팔계의 의식세계에 가로막히지 않으면, 구름에 가로 막히지 않는 태양처럼 어두운 곳과 밝은 곳이 따로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흔들림이 없음"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다.
오온·십팔계의 의식세계에 가로막히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든 "저절로 비추어져" 드러나 어둠 속에 감추어지는 것이 없다. 이 "저절로"를 교학에서는 "무위(無爲)"라고 말하지만, "수고로이 애쓸 것 없이" 저절로 되는 것이야 말로 여여부동(如如不動) 한 '이것'(대혜 스님이 '담연'이라고 부르는 것)의 진면목이다. 수고로이 애를 써는 유위행(有爲行)은 곧 의식을 따라 머무는 것이요, 생각을 따라 상(相)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여부동할 수가 없다.
"세간법과 출세간법이 모두 담연을 벗어나지 않아서 털끝 만큼도 새어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여여부동한 '이것'이 차별없이 평등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깨끗함과 더러움, 옳음과 그름, 선과 악, 완전함과 부족함, 범부와 성인, 정법과 외도, 말과 침묵, 고요함과 시끄러움 등등의 어떤 차별도 '이것'에는 없다. 모든 차별은 의식에 따라가고 의식에 머물 때 생겨나는 것일 뿐이고, '이것'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불이법(不二法) 혹은 무이법(無二法)이라고 한다.
차별없이 평등하다는 것은 곧 모든 법이 이것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것은 '이것'에 나타나며 털 끝 만큼도 '이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다 '이것'이지만, '이것'은 어떤 것도 아니며 어디에도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 하나가 해탈이며 하나 하나가 밝고 묘하며 하나 하나가 진실하여, 쓸 때에도 담연하며 쓰지 않을 때에도 담연하다"는 말은 바로 이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이 분명하면, 아무 생각 없고 말이 없는 고요한 마음이나 생각을 내고 말을 하는 움직이는 마음이나 모두 '이것'을 벗어나지 않으므로, "하나 하나가 밝고 묘하며 하나 하나가 진실하다"고 하는 것이다. '깨어있음과 잠자는 것이 같다'[寤寐一如]는 말도 이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 '이것'은 그 어떤 마음에도 구속되거나 장애되지 않으므로, "하나 하나가 해탈"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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