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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親和와 琉璃의 세계
-崔寅熙論(이미 발표한 것을 수정 보완해 여기 올립니다)
정 일 남 시인
작가와 시인은 오래 사는 것만이 결코 자랑은 아닐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작품 활동을 했으면서도 빛나는 족적을 남긴 작가와 시인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준다. 그들은 어쩌면 글 쓸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육체를 돌보지 않은 채 집필에 매달린 것이다. 빈곤과 병마에 시달림으로 해서 정신이 오히려 맑아졌을까. 한국에 있어서의 작가와 시인의 운명이란 왜 그렇게 괴로움의 연속이었을까. 영양보충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집필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들은 대개 서른 전후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무지개처럼 사라지고 만 것이다.
여기 잊혀 진 시인 崔寅熙(1926-1958)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자기의 詩才를 마음껏 펼쳐보지도 못한 채 떠났다. 그가 요절한지 53년이 되었으나 문단에서 그 누구도 최인희의 작품을 다두지 않았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시인에 대한 작품 연구는 이제 더 파헤칠게 없는데도 유명하다는 이름 하나 때문에 불필요하게 매달리기도 한다. 이런 편중현상은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본다. 최인희는 이런 그늘에 가려 지금까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 되었으며 그의 이름조차 생소하게 되고 말았다. 여기 최인희의 문학과 생애를 뒤늦게나마 더듬어 봄으로써 그의 문학사적 위치를 점검하고 요절한 시인의 넋을 조금이나마 위로 하고자 한다.
최인희는 ‘文藝’를 통해 문단에 데뷔 했다. 문단등용이 가장 어려웠던 1950년 ‘文藝’ 4월호에 ‘落照’가 추천 되고 동년 6월호에 ‘비개인 저녁’이 추천 되었으며 1953년 初夏號에 ‘길’이 추천됨으로써 문단에 나타났다. 모윤숙은 추천사에서 ‘건실한 시정신이 위태롭지 않음을 좋게 보았다.’고 쓰고 있다. 그 후 발표 작품으로는 ‘바위 아래서’(현대문학 55, 3) ‘음향’(현대문학 동년 10) ‘落葉松’(문학예술 55. 10) ‘열매’(영문. 55 11) ‘첫소리’(현대문학. 56. 5) ‘微笑’(현대문학. 동년 12) ‘平 和’(현대문학. 57. 4) ‘언덕에서’ (현대문학.57. 8) ‘路傍에서’(현대문학. 58. 6) ‘距離’(현대문학. 58. 11) ‘아침의 노래’ (동국문학. 55. 11) ‘待春賦’(청포도. 52. 7) ‘窓’ ‘석양’ ‘청야’ ‘장미밭에서’(청포도. 53, 10)를 발표 했으며 수필로는 ‘운수행각’(현대문학. 53. 9) ‘나의 문학수업’(현대문학. 57. 2) ‘문장의 道’ ‘풍설잡기’ ‘淑이와의 하숙집’(현대문학.55. 5) ‘바다로 돌아가리라‘(현대문학. 59. 9) ’水仙花’(현대문학. 60 7] ‘투병기’(약사시보. 55.10.4) ‘活字化의 魅力’(국제신보.55. 7.28) ‘恨歎’(56. 3) ‘大關嶺 스키장 踏査記’ 등을 활발하게 발표함으로써 문단에서 각광을 받았다. 이 무렵에 등단한 문인으로는 金南石 金南祚 金泰洪 徐廷太 孫東仁 柳周鉉 李東柱 李炯基 李相魯 李仁石 全鳳健 등이 있었다.
최인희의 문학공간은 그가 출생한 삼척의 地理이다. 시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그가 살아온 공간이 갖고 있는 풍토성으로부터 멀리 이탈할 수 없다. 자기가 살아왔던 지리적 배경이 시인의 정서를 키워왔으며 거기서 넓혀 온 경험의 공간이 시의 토대를 이룬다. 어릴 때부터 최인희는 사찰의 일주문을 넘나들며 자라 왔다. 그가 새벽 종소리에 잠이 깨이고 목탁소리를 들으면서 신비의 세계를 맛보았으리라. 거기서 키워 온 자연의 정서가 그의 시로 하여금 동양적 서정을 근간으로 하는 禪의 세계로 기울어지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그가 왜 절에서 머물렀는가 하는 것이다. 스님이 어린 그를 데려다가 절에서 키웠을까. 그렇다면 어릴 때부터 그는 동자승처럼 외롭게 지냈으리라.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올데갈데없는 처지로 절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최인희의 아버지는 엄연히 있었고 농사일에 종사했다고 전한다. 그가 머물던 절은 두타산에 있는 天隱寺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는 절에 딸린 농토를 경작하고 있었을까.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미망인 禹鍾淑 여사가 끝내 답변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추궁하기가 민망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인희의 부친은 崔相鳳씨로 子, 永坦, 號, 雲皐였으며 어머니는 李梅紅씨였다. 아버지는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최인희는 1926년[丙寅] 12월 29일에 용계변에서 태어난다. 여기서 최인희의 어린 시절의 생활공간이 천은사가 분명하다는 사실은 그가 미로초등학교에 다닌 것으로도 알 수 있다.(후에 그는 북평초등학교로 전학한다) 최인희와 초등학교 동급생이었던 정연석씨(필자의 담임선생)의 증언으로는 스님의 아들이라 했으나 미망인은 그걸 부인한다. 김시래 동해시 문화원장의 이야기는 또 다르다. 최인희가 너무도 영리한 아이였으므로 절에서 데려다 키운 것으로 증언한다. 여기서 나는 한발 물러서기로 한다. 그의 출생에 대한 신분의 규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천은사와의 만남인 것이다. 최인희와 천은사와의 만남은 고려의 문인 李承休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動安居士 이승휴가 민족서사시 ‘帝王韻記’를 집필한 곳이 천은사라는 사실은 최인희로서는 우연의 일치다. 최인희의 문학이 여기서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 그럼 이승휴는 어떤 연고로 이곳에 은거하게 되었는가. 이승휴가 구산동 용계변을 좋아했으며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이곳에서 보냈다. 우리는 여기서 고려시대의 지성이 한 시대를 고민하면서 자연에 묻혀 먹을 갈아 써내려 간 모질음의 세계를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이승휴가 충렬왕에게 상소한다. 나라의 형편이 곤란하고 가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는데 전하는 어찌하여 잔치만 벌이고 사냥하기만을 즐기느냐, 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로 말미암아 이승휴가 파직되어 두타산 龜山洞 龍溪邊으로 오게 된 데에는 그의 外家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휴는 이곳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어 연명하면서 고려의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제왕운기’와 ‘內典錄’을 완성시킨다. ‘맨처음 누가 나라를 열어 풍운을 일으켰느뇨? 하느님의 손자, 그 이름 단군이로세.’ 제왕운기의 서사시 중에서 가장 감명을 주는 구절이다. 이승휴가 이 서사시를 집필함으로써 단군왕검은 일개 지방의 군왕이 아니라 민족시조인 단군으로 승격 되어 나타난 것이다. 제왕운기는 한민족의 자부심을 키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종래의 고정관념을 타파하였다. 몽고의 입김이 거센 가운데 이승휴는 용계변에서 심혈을 기울여 명작을 완성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제넘게 최인희와 이승휴를 연결시켜 비교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승휴의 정직한 성품과 국토를 사랑했던 기록이 말해주듯 최인희의 문학에 대한 출발의 기점이 다름 아닌 이승휴의 옛 발자취가 어린 곳이라는데 아이러니를 느낀다. 이승휴가 대서사시를 꽃피웠던 바로 그 장소에서 최인희가 문학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최인희의 동양적 자연의 정서는 어쩌면 고려청자의 하늘과 닿아 있다고 볼 수가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雲水의 길을 좋아 했습니다.지방의 인심, 언어 풍습 등을 보고 듣는 것은 각별한 취미사로 여겨 왔던 것입니다. 우리 집은 멀지 않은 곳, 푸른 동해를 끼고 봄가을로 한 철씩 치성 가는 두타산록을 등지고 돌아앉은 곳에 있었습니다. 산을 믿고 산의 靈을 숭배하는 사람으로부터 내가 산정기를 타고 났다는 말로써 아버지의 호감을 얻으려 든 일을 어렴풋이 기 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알고 보면 그들은 우매한 샤마니스트였지만.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산의 精靈을 숭배하기보다 산을 사랑하고 옛날의 향리와 모르는 지방의 풍토를 사랑하는 관습은 이제는 드디어 내 것이 되고 말았다.‘
-‘雲水行脚’ 중에서-
소월의 문학 발생지가 정주를 중심으로 약산과 구성에서 삭주로 이어지는 자연의 영역이었으며 목월의 영역이 경주를 중심으로 한 남도 삼백 리였다면 최인희의 영역은 두타산록을 중심으로 한 용계변의 세계라 할 수 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영리했으므로 주변 사람들은 그를 두타산의 정기를 타고난 아이로 믿은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심심찮게 그런 얘기를 듣는다. 그런 정황으로 보아 최인희는 평범한 아이가 아니였음을 알게 된다. 그가 성장하면서 그런 일을 우매한 샤마니스트들의 이야기로 규정하지만 그가 자연을 신의 존재로 숭배하기보다 자연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로 바라보게 된다. 억눌림과 구속의 대상이 아니라 소유하고 싶을 때 소유할 수 있고 대화하고 싶을 때 대화할 수 있는 편안함의 세계로 본 것이다. 움직이는 사물의 현실과 고요함의 세계를 넘나들며 그 조화로운 삶의 높이와 넓이를 감싸 안았다.
‘자연이 아름다워서 내가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것은 상투적인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러한 조건만 가지고 글을 쓰게 된다면 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인묵객 아닐 수 없었을 테니까. 이렇게 심정에 넘실거리는 물결과 대해의 끓어오르는 정열의 심지에 불을 붙여준 분들이 또한 고맙게 인연되어 주었다는 말을 나는 여기에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다.‘
-‘나의 문학수업’ 중에서-
최인희가 용계변에서 한학을 익히고 오대산에서 불경을 배울 때 그의 끓어오르는 정열의 심지에 불을 붙여준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최인희가 후에 월정사의 도움으로 대구의 大倫中學에 다니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竹筍詩人俱樂部’에 참여하게 되고 揚鷹이란 필명으로 ‘작별’이란 시를 처음으로 발표하게 된다. 李潤守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과 매 토요일 마다 만나 자작시를 낭송하고 互評 했으며 이따금 木月이나 靑馬가 들려 격려 해 주면 한층 더 힘을 얻어 모두들 어깨를 으쓱거리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그에게 충격을 준 사람은 남태성이라는 문학청년을 월정사에서 만나고부터 문학에 대한 강인한 감명을 받았으며 그로부터 ‘朝光’誌와 ‘少年’誌를 빌려보게 된다. 그리고 그 무렵 서울에서 내려 온 조지훈이 월정사에서 강론을 하였는데 그것이 문학에 불을 붙여준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 시기를 제 1의 습작기로 보고 싶다. 그의 문학에의 열정을 꺾어버린 것이 6. 25였으며 4년 동안의 공백 기간을 보내게 된다. 제2의 습작기는 동국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강릉에서 교편을 잡으며 이어진다. 1952년 겨울에 ‘靑葡萄詩同人會’를 조직 동인으로 참여하였는데 동인으로는 黃錦燦 金有振 李仁秀 咸在福 咸惠蓮 등이다. 이 무렵에 최인희는 이미 ‘문예’에 2회의 추천을 받아놓고 3회의 추천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내가 최인희를 알게 된 것은 그가 강릉여고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알게 되자 자주 만나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과묵하지만 문학에 대한 이야기는 열을 띄고 하였다. 그렇게 되자 우리는 문학이 아닌 인간 면에서 더 정이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친하면 친할수록 더 친하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하는 인간성을 갖고 있다. 그는 다정다감하여 봄꽃과 여름 구름과 가을의 단풍을, 그리고 겨울 눈길을 좋아하였고 슬픈 일을 보면 밤을 새워가며 근심하였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인간성을 갖고 있었다.‘
-황금찬의 ‘최인희의 이모 저모’ 중에서-
최인희가 제2기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쏟게 된 것은 이들 동인들과의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다시 점화 되었거니와 이들 동인들 중에서 가장 먼저 문단의 추천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재질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예’에 추천받은 후 그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썼다.
‘가다가 도중에 길이 끊어지고 사닥다리를 기어올라 다시 연결되는 산길의 명맥을 이어 가노라면 산과 산의 벽면을 울리고 쏟아지는 천척 폭포의 장쾌함도 그지없습니다. 흰 바위 흐르는 물, 대담하는 산봉을 기어가는 흰 구름, 이 모두 말없는 설법이요 있는지 마는지 내 너무도 작은 존재로 하여 열락의 幽수境에 함입케 하였던 것입니다. 나의 여정은 버릴 수 없는 내 인생이요 생은 또 편편이 생산되는 詩一貫 그것입니다. 그 어느 것을 버리는 것도 내 살아가는 노정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뽑아주신 몇 편의 시가 이와 같은 의미의 시도에서 끝일 바 아니고 보면 스스로의 것이지만 한없이 사랑스럽고 즐겁습니다. 계속해서 인생의 표현으로서 시를 쓰겠습니다.‘
그가 ‘문예’에 추천 된 시기가 강릉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였는데 그 때 재미있는 일화 하나가 있다. 어느 朝禮 때 일이다. 교감선생이 나와서 최인희의 문단 데뷔를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하자 일본에서 대학 예술과를 나왔다는 교장선생이 말을 가로 채서는 ‘詩당선도 좋지만 우리들은 한층 더 새 교육연구에 정진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조례를 걷어치운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모르기는 하거니와 교장선생도 문학을 전공한 것 같고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최인희가 이루었다는 데 기분이 상했음 직 하다. 그는 어린 시절을 말한다. 아버지 등에 업혀 구슬처럼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산골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면 산벽에서 꾀꼬리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계절은 점차로 확연 해 갔고 세상살이에 대한 고민도 이로부터 시작 되었다고 술회한다. 그렇다면 그의 고민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는 개울에서 가재나 물고기를 잡는 것이 무엇보다 즐거웠는데 늙은 훈장으로부터 한문을 배우는 일은 정말 싫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말하기를 자연의 도취에서 더 나가면 염세적인 구렁이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요정의 산천이 아니요 성급히 인심을 매도 하려드는 현실주의적인 경개도 아닌 오직 조촐하고 순박하고 돈후하면서 남몰래 마음을 울려주는 산천이 주위에서 나를 키워주었다고 말한다. 그가 바라 본 자연관은 자칫하면 애수와 감상에 빠질 수도 있었으나 그 좌절의 길목을 經典이 버티고 있었기에 그는 더 이상 좌절의 벼랑에 떨어지지 않고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보여 진다. 그래서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절망하기보다 소멸이 곧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보았으며 자연의 섭리가 화엄의 세계임을 뉘우치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의 시에서 불교적인 색채가 겉으로 짙게 배어나지 않는다는데 겸허함을 느낀다. 내면에 스며있으면서 드러나는 상투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시에 불교적 향기가 나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법향에 시를 묻어버리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은 미당이나 동탁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시와 선과 자연이 따로 떨어져 있으나 그것을 한 곳에 묶어 셋이 하나 되는 시의 미학을 이룩해 보려고 시도했던 괴로움이 그의 시에 비친다. 그가 자연에 그처럼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도 누가 시켜서 빠져든 것이 아니라 숙명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던 내성적 관조가 빚어낸 결과이다. 李承休가 관조 했던 자연을 쉽게 잊을 수 없었으며 청자빛 세계는 머룻빛의 바탕과도 통했다. 산촌의 비밀스런 요소를 다 간직한 고요의 세계가 최인희의 시를 감싸주었다.
소복이 산마루에는 햇빛만 솟아 오른 듯이
솔들의 푸른빛이 잠자고 있다.
골을 따라 산길로 더듬어 오르면
나와 더불어 벗할 친구도 없고
묵중히 서서 세월지키는 느티나무랑
운무도 서렸다 녹아진 바위의 아래로
은은히 흔들며
새여 오는 범종소리
白石이 씻겨가는 시낼랑 뒤로 흘려 보내고
고개넘어 낡은 단청
산문은 트였는데
천년 묵은 기왓장도
푸르른 채 어둡나니.
-落照. 전문-
‘文藝’의 초회 추전작인 이 작품은 서구적 유행 사상에 물들지 않은 동양적 서정을 근간으로 함으로써 그의 순수성을 보여주었으며 언어 선택에 세심하였고 함축성 있는 言語美를 획득하였다. 이 詩 속에는 오염 되지 않은 자연의 원형이 그대로 제시 되어 있다. 산마루에는 햇빛 푸른 솔 산길 느티나무 운무 바위 범종소리 시냇물 산문 기왓장 등이 서로 조화를 이룬 채 시인 앞에 드러나 있다. 이 사물들이 낙조에 의해서 재조명 된다. 엄숙한 세계라 할 수 있다. 이제 지켜 서서 관망하는 시인조차 낙조에 물들어 간다. 사물을 흔들어 놓는 울림이 골짜기를 깨운다. 이 범종소리 하나로 해서 모든 사물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 범종소리가 시인을 감싸고 있던 번뇌의 밧줄을 풀어준다. 범종소리가 깨우는 산의 공기는 황금물결을 이룬다. 울림의 파장이 퍼져나갈 수록 꽃과 나뭇잎이 흔들린다. 시인은 낙조를 통해서 선의 경지에 닿으려고 애쓴다. 땅거미가 오기 직전의 世間과 遭遇한다. 거기서 천년 묵은 기왓장을 발견한 것은 그가 麗의 공간과 닿아보려는 모색이 아닐까. 천년 묵은 기왓장이라면 능히 고려에 닿고도 남으리라. 청기와는 푸른빛과 어두운 빛을 동시에 간직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삶과 죽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낙조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경계역이라 볼 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남의 의미와 통한다.
먼 산 고을에 푸른 안개 서서히 기어오르고
들과 집과 나무들은 거울 속에 뵈는 듯 한데
마을은 멀리 가까이 맑은 연기를 뿜어 올린다.
산을 넘는 햇빛은 물에 고이 씻긴 듯 창가에 부드러운 날개를 펴고
비가 개인 저녁답은 먼 산도 가까이 오길래
사립을 열고 마조서서 산길을 바라보는 노인도 있다.
비에 젖은 방울소리 한산히 들러오면
소와 송아지를 앞세우고 돌아오는 목동이 춥겠다.
조용히 이슬이 지는 호숫가에는 하얀 물줄을 그으며
한 쌍의 백구도 떠나가리라.
-비개인 저녁. 전문-
‘낙조’에서 우리는 범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비개인 저녁’에서는 마을로 돌아오는 송아지의 방울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우리 고유의 풍경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의 안쪽을 편안하게 해준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시를 한번은 써봤으면 하는 충동을 일으키게 하는 작품이다. 비가 갠 날의 더 없이 깨끗한 먼 산과 기슭에서 풀을 뜯다 돌아오는 정서의 산촌 점경이 자리를 잡는다. 비가 개임과 동시에 안개가 걷히고 그래서 집과 나무와 들이 거울 속에 뵈는 것 같다고 했다. 여기선 계절의 경계를 느낀다. 초가을로 들어선 느낌이다. 이제 멀지 않아 백구도 호숫가에 하얀 물줄을 그으며 날아갈 것을 시인은 염려한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 줄거리를 이룬 작품이다. 여기서 시인이 욕망하는 사항은 아무도 제시하지 않았다. 이 전형적인 산촌의 현실인식이 동양적 인생관을 기초로 한 감수성 이다. 노인과 목동, 그리고 한 쌍의 백구가 조화 된 분위기를 이룬다. 존재의 양상을 지켜보고 성찰하는 자세에 머물러 있을 뿐 일찍이 불교를 삶의 정신적 원리로 선택함으로써 사물을 관조하는 풍습에 젖어든 게 아닌가, 셈하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자연에는 기계문명의 소음이란 들을 수 없다. 그런 세계가 두타산 용계변에서 비롯하여 무릉계곡을 거쳐 용추로 이어지는 세계였으며 강릉 일원에서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세계로 확산 된다.
산상에는 차운 물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물소리 대신 죽욱 죽
하늘로 벋어오른 낙엽송의 울창한 자세가 마음에 시원하다.
낙엽송은 산천에 뭇 꽃을 피우고 공기보다 부드러운 침엽의
잡목 속에 섞이어 운무 덮인 전설 같은 지역에서 줄기차게 자라 오른다
창창하게 조밀한 간격을 두고 날신히 솟아오른 무도하는
모습을 청청백일이 웃음쳐 바라본다. 자열의 모습인들 어찌 우리의
것이 되기를 깨달아 보지 않으랴.
천년을 헤이고 오히려 만세를 누려가도 넘침없이 자라나는
낙엽송을 본다. 그에게 棟樑 되기를 바라는 것은 차라리 사치
-제대로 쓸어져 흙에 묻히는 날까지 싱싱히 살아가는 그 운치만이라도
우리의 자손들로 하여금 크낙한 한개 보람이 되리니.
아아 산과 산 이르는 곳마다 이러한 나무로 아우성치든 아득한 옛 이야기를
하늘 높이 푸른 저 언덕으로 마을로, 거침없이 벋어오른
尖點의 線脈으로 골고루 일러 보낼 낙엽송의 우렁찬 자세가
흘러가는 물소리 보다 더욱 시원하다.
-낙엽송. 전문-
우리는 이 시에서 특별한 발상으로 해서 어떤 새로움을 느낄 수는 없다. 흔히 나무를 의인화 하는 경우가 아니라 그는 낙엽송을 정상을 향해 달리는 정신으로 받아드린다.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내달리는 욕망이 낙엽송이다. 물소리 보다 시원한 이미지가 안겨온다. 그에게 낙엽송이란 우럴어보는 존재이며 생명의 상징이다. 그가 어릴 때부터 대관령을 넘어 월정사의 문턱을 넘나들 때 관조의 침묵으로 바라보았던 낙엽송은 ‘우렁찬 자세가 흘러가는 물소리 보다 더욱 시원하다’고 했다. 조선소나무는 대체로 뒤틀리며 구부정하게 자란다. 역사가 뒤틀릴 때 소나무는 더욱 뒤틀린다고 한다. 마치 인간의 질곡처럼 소나무는 괴롭게 자라는데 낙엽송은 거침없이 자란다. 쓰러져 흙에 묻히는 날까지 싱싱하게 살아가는 그 운치를 마음에 새겨보는 것이다. 그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품속을 하나의 武陵世界로 본 듯하다. 대체로 그는 사물을 관찰하되 멀리 물러서서 관조하는 편이었으며 초기 시에 나타나는 자연관은 겸허한 자세로 존재를 받아드리는 안온함을 보였다. 혼란스러운 대인관계를 볼 수 없었으며 순환하는 자연 속에서 상호 보완작용을 하는 생명의 질서에 오래 빠져들었다. 그는 자연을 숭배 하지도 않았으며 자연에 순응하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관조하는 자세, 그것이 그의 시의 특성이다. 우리는 이것을 觀照의 詩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마치 산속의 磨崖佛이 世間生世를 굽어보듯 말이다. 최인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내게 그렇게 많은 돈을 貧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명리고 권력도 그렇게 貧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무력함이 생활의 모토라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허영을 버리고 경솔하지 말며 貧心을 버리게 되면 이것이 곧 성현의 자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더욱이 문학을 해보리라, 글을 써보리라, 그리하여 내 살아감을 맑게 해 보리라고.’
-문장의 도. 중에서-
우리는 여기서 그가 貧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에 귀를 귀울이게 된다. 물론이 말은 삶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니와 문학에 있어서도 貧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며 문학의 꽃을 피우려고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생활과 문학 중 그 어느 것을 버리는 것도 파멸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최인희는 입버릇처럼 아내에게 조그마한 살림집이라도 마련 해 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가난을 탓한다거나 배고픔을 슬퍼하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선비는 아무리 가난해도 쌀값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유교정신도 언뜻 비친다. 그는 문학의 길이 배고픔의 길임을 일찍 자각했음에도 문학을 하려고 했으며 삶을 맑게 하려고 글을 썼다.
이마에는 푸르름만 있을 뿐이다. / 멀리서는 솔 하나 보이지 않는대로 / 오
직 세월과 그 자신을 믿을 따름이다. / 풀이 솟지 않고 / 돌 하나 마음에 지
니지 않은 아쉬움이런들 / 왼 몸을 깎아가는 풍설에 웃음지어 / 밤이면 밤
마다 별이 깜박이는 이마 위에 / 내일을 위하여 햇빛을 기다린다. / 無始來
로 지켜 온 / 잊을 수 없는 안타까움에서 / 마을과 마을을 두고 / 가로 앉
아 바래봄이다. / 언덕에는 이마가 닳도록 / 스스로 푸르름이 있을 뿐이다.
-언덕. 전문-
이 시에서 주인공은 홀로 언덕에 올라 시야에 전개되는 풍광을 바라본다. 언덕이란 들과 강과 산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장소다. 그리고 올라가는데 큰 부담도 되지 않는다. 오르고 싶을 때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곳, 누구나 고향을 생각할 때 언덕에 올라가고 싶어 한다. 이 시의 경우 어떤 언덕을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언덕은 마을과 마을을 두고 그 사이에 있으며 시인은 햇빛을 바란다. 내일을 위해서 어둠이 아닌 햇빛을 기다린다는 것은 시인이 추구하는 끝없는 욕망일 것이다. 어떤 가능성이 비치는 정신의 오두막(詩)을 상상할 수도 있다. 이마에는 푸름만 있다고 했으며 되풀이해서 이마가 닳도록 푸름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최인희의 시에서는 안온함은 있어도 슬픔은 없다. 푸름이란 살아 있음이고 평화이며 시인이 위로 받고 싶었던 자연의 전부다. 그런 자연을 가졌던 최인희는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가게 되지만 그의 시가 어떤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가 인창고교와 숙명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요절하기 전의 몇 년 동안 향수 어린 시를 썼다. 조그마한 살림집이라도 스스로 마련하려고 그는 주야간 수업을 하였는데 그게 무리하여 건강을 해치게 된다. 거기다가 괴로움을 달래려고 술을 지나치게 마신 것이 병발의 원인이 된 것이다.
앓다 난 자리가 / 신기하게 허전하다. / 병후 왔던 손님들이 / 일제히 손
을 끊고 돌아가고 / 마음에 남는 건 / 새삼스레 허공뿐. / 창을 가리워
주는 푸른 나무잎도 / 꽃병에 꽂힌 몇 폭의 꽃도 /그대로 제자리에 놓여
있는데 / 아내는 뜻모를 웃음을 던지고 / 밖으로 나갔다.
-病後. 일부-
최인희는 일시적인 병의 호전을 낙관하고 있은 듯하다. 어쩌면 인간의 심리란 다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중병인 환자도 일시적으로 마음이 가벼워질 때가 있다. 그러면 또 사람과 어울리게 되고 술을 마신다. 병은 다시 악화되고 다시 병원을 찾게 된다. 이런 경우가 비단 최인희 만이 아니겠지만 그는 자신의 병을 너무도 몰랐던 것 같다. 아니, 알고 있었으리라. 그가 자기의 병실을 지키며 수발을 들어주던 아내의 뜻 모르는 웃음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본다. 아내가 자기 앞에서는 웃음을 보여주었지만 밖으로 나간 아내가 홀로 외딴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가 언젠가 입원하고 있을 때 학생들이 꽃을 사가지고 와선 자주 꽂아주곤 했는데 그 때 그가 ‘꽃을 사가지고 다니는 취미를 위해서도 앓는 사람은 있어야 하겠어‘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지나친 과로와 과음이 병소를 악화시킨 것이 안타깝다. 그의 詩 저변을 흐르고 있는 思念의 世界는 불교적 색채가 깔려 있다. 다시 되풀이 하거니와 그가 지주의 아들이든 아니든 간에 유년시절부터 경전이 즐비한 법당 속에서 佛心을 보듬고 키워 왔으므로 그의 시가 法香에서 멀리 벗어날 수는 없었다. 李承休가 불교서적을 빌려 읽었다는 삼화사와도 무관하지 않았으며 비둘기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듯 그의 詩心은 늘 용계변에 가 있었으리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는 길을 옹호해 줄 유일한 동반자로 자연을 택했다. 그래서 그 靜觀의 바위 위에 詩心을 앉히려고 했다.
하늘에는 길이 없다.
하늘에는 길이 있다.
희고 푸른 圓盤 위에
무엇인가 낭낭히 울리는 소리
아아, 하늘에는 永劫에로 흐르는 길이 있다.
-音響. 의 일부-
존재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無想과 無念을 가리키는 것이며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존재가 그에 해당된다. 가령 꽃이 있으되 있는 것이 아니며 꽃이 떨어지고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認識, 그리하여 인간세상은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못 된다는 경지에 이른다. 다만 희고 푸른 원반 위에 무엇인가 낭랑히 울리는 소리가 있으며 그것이 육체가 없는 어느 분의 말씀으로 남는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귀하고 천하며 잘살고 못살고 끝없이 받아야 하는 고통과 한없이 받을 수 있는 행복은 그 모두가 전생에 지은 인과로 이뤄지는 것이니라.’ 부처가 제자에게 한 이 말은 최인희가 어릴 때부터 익혀온 三世因果說 일 것이다. 그는 비록 출가하여 스님은 되지 못했으나 문학을 빌려서 자기만의 禪的세계를 꽃피워 보려고 괴로워했다. 비록 때 묻은 세속에 발을 딛고 살았으나 그가 永劫으로 흐르는 깨끗한 길을 찾았고 그 길을 걸어가겠다는 의지는 시를 통해 닿아보려던 이상세계였다.
깨달음은 원래 나무가 없다 하거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고 없음이
모두 없는데 움직이는 고기 때문에 생명이라 명명함이 내 밟고가는
나의 그림자.
業이라 함은 그것이 곧 땅에 뿌린 씨앗이요, 그로 인연하여 한 몸 이
끌고 나아갔다. 돌아옴이며 불빛에 달라드는 하루살이, 이니면 나비요,
또 그보다 다른 벌레의 헐떡임이로다.
-黃昏.의 일부-
諸行無常이란 인간 삶의 덧없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체념 속에 안기게 되고 보면 그 편안함이란 삶의 또 다른 길로 통한다. 그 달관의 세계로 통하는 길목에 황혼이 열린다. 시인은 말한다.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보라.’고 방향을 가리킨다. 물론 황혼이 서쪽에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는 누구를 향하여 서쪽을 보라고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그건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일 것이다. 생이란 다 서쪽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새들도 서쪽으로 날아가는 시각, 무덤도 서쪽을 바라보지 않던가. 불타는 황혼을 맞아서 그는 ‘돌아갈 수 없는 哀愁의 殘骸를 이제 내 발걸음 앞에 흩어놓고 밟고 감인가.’라고 읊는데, 그럼 애수의 잔해란 무엇을 말함인가. 이 말을 바꿔 ‘追憶의 잔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범종소리가 산을 울리던 용계변의 기억을 떠올릴 때 그 기억이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묘한 것이 된다. 그가 나비나 하루살이의 일생까지 옹호해야 하는 정서란 자기가 땅에 뿌린 業과 무관하지 않음을 지적 해 준다. 불빛에 달려드는 미물들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삶이란 뜻일까.
천년을 물려오고 만년을 누려 갈
年輪의 산봉에 태양은 타오른다.
파도 속에 삭여지고
파도 속에 이룩되는
우리들 거룩한 넉두리 위에
아아, 이제 다시 우럴어 받들 圓光이여.
-파도소리. 일부-
파도소리를 어떻게 듣고 받아드리느냐가 중요하다. 온갖 만상을 상징하는 파도소리에서 어떤 긴장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 시가 평범한 시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으나 마지막에 건져 올린 圓光이란 언어 하나가 구원 해준 셈이다. 부처의 몸이나 머리에서 내비치는 둥근 빛이 원광일 것이다. 불타의 영원불멸의 정신일 것이다. 파도소리를 說法으로 받아드릴 때 그리고 그 분노를 원광 으로 감싸 안을 때 이 시의 중심은 바로 잡혀진다. 반면에 최남선의 경우는 젊은 소년의 지칠 줄 모르는 도전으로 안겨온다. 소년의 욕망을 상징하기도 하고 권력자도 꼼작 못하게 하는 힘을 과시한다. 일테면 최남선의 바다는 육지를 삼킬 듯한 분노와 도전이 전제 되지만 최인희의 바다는 이미 분노와 도전이 끝난 달관의 존재로 드러난다. 분노와 도전이 삭여지면서 악함이 선함으로 돌아앉는다.
엄마 품에 안기어 젖을 빨다 흐뭇하면 아가는 제 손가락을 빤다. 아빠가
아는체를 해주면 빨던 제 손가락을 아빠 입에 넣어준다. 다음엔 엄마 입
에 넣어준다. 그러면서 알지 못할 제 소리로 엄마를 놀린다. 아빠를 놀려
댄다.
언제 보아도 또 다시 보아도 아가에겐 웃음이 어려 있다. 잠이 들면 고요
한 숨소리에 가벼운 방안 공기는 웃음 머금은 물결에 실려있다.
문살을 딛고 햇살이 화창하게 쏟아 오르면 아가는 문살을 향하여 웃음을
띠운다. 방안으로 밀려드는 햇빛을 쥐었다가도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하여
눈매에 입가에 차차로 왼 얼굴에도 그 부드럽고도 황홀한 물결은 마구 피
어나는 것이다.
-平和. 일부-
그가 자연의 품에 안겨 관조의 시만을 쓰지 않았다는 증거를 위의 시가 말해준다. 최인희는 거의 生活詩를 쓰지 않았다. 가정을 꾸려 삶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겪었던 일상사에 대해 쓰지 않았다. 사생활을 소재로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라고 여겼으리라. 관조의 시에 푹 빠졌던 그고 보면 구차한 삶의 내면을 소재로 궁상을 떠는 시를 쓰고 싶지를 않았을 것이다. 평화란 싸움이 없는 사회를 말한다. 전쟁이 없는 나라, 혼란이 없는 환경, 그리고 아가가 웃는 가정이 평화가 아닐까. 최인희는 단 하나의 혈육을 남겼는데 그가 딸 지은 이다. 지은이는 지금 미국에 체류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재질을 닮아 그곳 문예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또한 ‘시 마을’誌에 시가 당선되기도 했다. 최인희가 어릴 때 아버지의 등에 업혀 꿈을 키워 왔듯이 천진스러운 아가와 함께 가정의 평화를 맛본다. 아가의 때 묻지 않은 순수의 세계, 그 티 없는 아가로부터 시인은 평화를 느끼고 희망을 갖는다. 따라서 이 시가 이루는 묘미는 햇빛을 쥐어보는 아가의 손에 있으며 또한 아가의 손이 만드는 황홀한 물결이다. 그리고 그 물결이 만드는 황홀한 세계인데 그 빛이 꽃밭에 가서 꽃을 깨우고 나비를 날아들게 하다니 신비로운 일이다. 이 시의 효용가치는 시대가 아무리 변한들 색이 바래지지 않으리라 본다.
琉璃 세계에도 끓는 태양과 꽃들의 웃음이 동요하고 있다.
구슬알을 헤치고 강을 따라 흘러가면 여기서도 손에 잡힐 듯한 바람이며
나무며 꽃들의 즐거움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오월의 꾀꼬리 소리 물구비
처럼 산곡을 돌아오는 -
자라 오르는 수목에 나직히 손잡고 서서 아침이슬 방울지는 點光속에 마
침내 산상 높이 계양될 기폭을 바라본다.
펄, 펄, 펄, 한없이 나부끼는 소리.
-아침의 노래. 일부-
최인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詩人은 누구였을까. 그의 초기 시에 나타나는 詩의 律格을 살펴보면 ‘청포도’誌에 발표한 작품이나 장시인 旅情百尺에서 즐비하게 나타나는 7.5調나 3(4).4調의 율격을 즐겨 쓴 것으로는 素月이나 木月의 영향을 받은 감이 있으나 세칭 ‘靑鹿派’의 趙芝薰과의 만남이 이뤄진 후부터 조지훈이 추구했던 회고적 에스프리를 바탕으로 한 민족적 정서와 전통에의 향수, 불교적 禪昧 등을 燥濯 된 서정으로 표현하는데 기울어지게 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다만 조지훈이 동란 이후 조국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어지고 정치적 현실에도 참여하는 변화를 보인데 반해 최인희는 초지일관 변함없는 詩情을 펼쳐가고 있었다. 그의 시의 변화가 있었다면 초기에 고수했던 민요조의 율격이 후반으로 오면서 行이 길어지는 융통성을 보였다는데 있을 것이다. ‘아침의 노래’에서 눈에 띠는 것은 유리세계라는 긴장감에 있다. 유리세계란 그의 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 말이다. 여기서 유리세계란 구슬 알이 흐르는 溪流일 것이다. 유리세계란 그의 꿈이며 구원의 빛이고 돌아가야 할 고향을 뜻함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山谷이란 마치 유리세계처럼 투명 했으며 그 속에 꽃과 나무가 투영되어 동요한다. 꾀꼬리 소리도 들리고 보면 이런 오염되지 않은 세계란 현실세계라기 보다는 理想世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일생동안 태고의 原形이 간직 된 美의 세계를 간직하려고 했었다. 그는 현실이 괴로울수록 이상세계를 향한 그리움은 강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시의 예술을 한층 높여야겠다는 정신이 다름 아닌 산상에 높이 계양 될 기폭이었다. 그는 유리처럼 투명한 시를 쓰려고 했다. 최인희는 후기에 가서 어린 시절의 고향을 회고하는 시를 쓰게 된다. 그 좋은 예의 작품이 ‘꾀꼬리’라 할 수 있다.
아버지 등에 엎이어
나는 꾀꼬리의 말을 배웠다.
이제는 일흔이 넘으신
아버지의 흐린 기억 속에
삼십년 전의 꾀꼬리 소리
슬하에 있지 않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아버지 등에 업히어
말을 배우던 옛날의 아버지 모습이 보인다.
꾀꼬리는 청산에서 청산에로
하고 한 울음으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꾀꼬리. 일부-
시인은 그가 태어나 자라던 龍溪邊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낙조의 눈부심을 잊을 수 없다. 거기엔 雙瀑이 무지개를 세우는 곳이고 龍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龍湫瀑布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구산동의 생가와 천은사의 범종소리도 새롭다. 漢文을 가르쳐주던 노인 훈장도 생각난다. 아버지 등에 업혀 돌다리를 건너며 듣던 꾀꼬리 소리가 이 시를 살려주는 구원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詩가 비탄에 빠지는 까닭은 다름 아닌 아버지와의 떨어져 있는 불효를 자각함이고 시인자신이 이미 건강을 잃은 상태에서 써졌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최인희의 시에서 자주 아버지의 이야기는 나타나지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것이 일찍 어머니를 여인 까닭인지 아니면 다른 사연이 있는 것인지는 숨겨두더라도 고향을 떠올리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구석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이건 아마도 영원한 비밀이 될지 모른다. 꾀꼬리 우는 소리가 시인을 자꾸 부른다. 그의 고향은 비밀만이 간직 된 채 요요하기만 하다. 도연명의 ‘桃花源記’에 보면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강을 따라가다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화림에서 길을 잃고 만다. 어부는 배에서 내려 산을 헤매다가 어느 한 곳에서 동굴을 발견하고 그곳을 따라간다. 한 곳에 이르니 사람들이 수 백 년씩 죽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곳이 있더라는 것이다. 거기서 어부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는데 후에 다시 찾아가려 했으나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무릉도원은 동양식 유토피아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최인희의 고향엔 武陵이 실제로 있으며 무릉을 거쳐 올라가면 용계변(용추)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용계변은 도원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최인희의 고향으로 가려면 무릉을 거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으며 고래로 부정을 탄 사람은 갈 수 없는 곳으로 여겨 왔다. 부정 탄 사람이 가서는 안 되는 무구세계가 용추인 것이다. 그런 고향을 가졌었기에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었으며 그런 곳을 그는 ‘유리의 세계’라고 불렀다. 현실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유리의 세계, 인간의 삶이 유리의 세계에 들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마음의 얼굴이 얼마나 깨끗한가에 달려 있다. 유리세계에 들어가려면 빛으로 짠 옷을 입어야 하고 꽃의 향기로 화장을 해야 하며 몸은 물로 씻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세계다. 유리세계에 그는 닿으려고 괴로워했다. 최인희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窓은 유리로 되어 있고 유리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존재를 인식했다. 유리가 아니고서는 창을 생각할 수 없듯이 창은 그가 도달하려던 무구세계로 가는 길이 된다. 말하자면 그의 시가 도달하려던 花林이라 할 수 있다. 무릉과 용추는 그가 고향을 떠올리기만 하면 안겨 왔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천년 만년도
累累 얽힌 미래에
전할 환담의 자리
석벽에 적어서
‘용추’라 이름하고
그 아래에 다시 새겨둔 이름
-여정백척. 중에서-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세속에 빠져 헤매다 보면 마음은 간절하나 쉽게 갈 수 없는 곳이 고향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고향을 추억의 곳간에 묻어 두고 사무칠 때마다 조금씩 꺼내어 시의 꽃을 피우지 않았던가. 그가 유리의 세계라고 불렀던 용추는 그가 시를 통해서 다시 이뤄 보려고 했던 토마스 무어의 세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의 요절이었으며 만약에 최인희가 십년을 더 살 수만 있었어도 청록파 시인이나 만해의 경지 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재능을 그는 갖고 있었다.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에도,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도, 옷자락을
스치며 문간을 드러서는 그분의 발자국 소리로 여겨왔고 빗소리를 들을 때
는 차분히 일러주시던 그분의 음성으로 여기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세살
짜리 딸애를 키우며 비애에만 젖어있을 수 없었기에 이제 부끄러우나마 그
분 영전에 이 유고집을 바차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오개월 간을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꼭 완쾌해서 저 밝은 햇빛의 거리에 나설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때문인지 병구완으로 초췌해진 모습이 안스럽다고 오히려 그이는
저에게 위안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단간 살림의 셋방에 면목없어 하지만
않았어도, 주야간 수업으로 자신을 그처럼 혹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에 지금도 가슴이 저리곤 합니다.‘
-그분께 드리는 소망의 선물. 중에서-
최인희는 승려가 될 수도 있었으나 먹물 옷을 입지 않고 사찰로부터 떨어져 거리를 두고 살아 온 셈이다. 스님이 된다고 해서 시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으나 그로서는 지나치게 경전에 휩싸이다 보면 자기가 추구했던 시의 보편성에 어떤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의 욕망은 또 다른 세계에 있었으며 유리세계에서 시의 향기를 피워 보려고 했었다. 비록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어도 말이다. 그가 용계변으로 돌아가려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건 마음속에 간직했을 뿐이고 정토나 아미타에 이르는 길은 마음의 남루부터 씻어야 한다고 다짐 했으리라. 최인희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시를 쓰기는 했으나 깊이 禪詩에 매달리지는 않았다. 극히 일부의 시에서 불교적 향취를 맛볼 수는 있으나 여타의 시에서 발견되는 것은 불교적 색채 보다는 한국적 전통의 정서에 기울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서정을 계승 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며 그 전통시를 자기 나름의 호흡으로 승화 시켜 새로운 경지를 개척 해 보려던 노력이 역역하다. 다시 되풀이 하거니와 시와 선과 자연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조화롭게 묶어서 형이상학적 美를 추구하려고 했다. 조지훈이 ‘시와 선, 시가 마침내 선과 자리를 같이한다. 시도 또한 선이다.’ 라고 말한 ‘詩禪一味’觀에 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소월이나 목월의 답습이 아닌 관동지방의 자연관찰을 통해서 섬세한 아름다움의 서정시를 건지려고 시도하였다. 특히 그의 유일한 長詩 ‘여정백척’에서 시도했던 美學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인간의 원초적 순수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투명함이 보인다. 자연을 지켜보고 자연을 끌어안으므로 자신마저 자연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는 자연 속에 님을 끌어드리지도 않았으며 어떤 절대 신과의 대화도 시도하지 않았다. 님과의 대화가 끊어진 상태이지만 본성적으로 관조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려던 그는 대화가 필요 없었으리라. 정관의 경지엔 교감만 필요하다. 따라서 대화와 행동이 용인되지 않는 것이 그의 시의 특성을 이룬다. 그가 일상생활에서 시의 소재를 찾지 않는 것도 그 원인의 하나다. 그가 시에서 나무 바위 꽃 산과 구름 등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소재를 택한 것은 한국적 자연미를 승화시켜 보겠다는 의지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친화를 통해서 세속으로부터의 괴로움과 유혹을 뿌리쳐 보려는 통제의 수단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당시 모더니즘이며 전후의 혼란 속에서 외래사조가 휩쓸고 있을 때 거기에 휩싸이지 않고 일관되게 자신이 지향하는 시학을 고수하기 위해서 괴로워했음을 느끼게 한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희노애락을 노래하기 보다는 자연의 질서와 계절의 변화가 가져오는 신비의 모습을 관찰 하면서 敍景的 미를 노래하는데 일관 해 왔다. 俗塵에서 벗어나 원초적 깨끗함의 세계를 갈구했던 그는 무릉에 닿고 싶어 했으며 그곳에 닿으려고 시를 썼다. 그는 기교파 시인이 아니었으며 소월처럼 눈물을 보인 시인도 아니었다. 시사적 계열을 따진다면 초기의 작품은 형식상 소월이나 목월이 취했던 7.5調 내지 3(4)調의 유파에 속했으며 차차 시의 형식을 독자적으로 형성하는 융통성을 보였다. 조지훈이나 박재삼의 계열에 근접 했다고 볼 때 최인희의 詩史的 위치는 조심스럽게 결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최인희의 유고집 ‘旅情百尺’이 그 가 떠난 후 실로 24년만인 1982년에 제자들의 손에 의해 간행 되었으며 황금찬 시인은 서문에 ‘그가 많은 작품은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시는 시심이 맑고 섬광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나의 이 서투른 논고가 앞으로 최인희문학 연구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동안거사 이승휴가 殿中侍史의 벼슬자리에서 파직되어 말년을 은거했던 용계변의 세계, 그곳은 이승휴가 복숭아나무 천 그루를 심어놓고 그 자연 속에서 葛巾으로 술을 걸러 마시며 시를 읊었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서 태어나 문학의 싹을 피웠던 최인희와 고려의 지성과의 만남은 우연의 일치이긴 했으나 그에겐 자부심을 갖게 했으며 그 민족혼을 이어받아 이상세계에 도달하려고 했었다. 그가 걸어 온 짧은 생은 비록 땅에 발을 딛고 살았을망정 영혼의 피신처는 유리의 세계였으며 거기에 닿고자 했던 것이다. 그 용계변의 깨끗한 세계가 그의 시의 세계임은 물론이다. 그는 1958년 8월 31일 05시15분 성모병원 73호실에서 32세를 일기로 요절 했다. 최인희의 무덤은 고향인 동해시의 선산에 있으며 그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의 詩碑가 세워져 있다. 거기가 바로 무릉으로 가는 입구가 된다. 결국 최인희 시인은 살아서 가지 못했던 고향을 영혼만으로 찾아 간 것이다. 시비에는 그의 시 ‘落照’가 아로새겨져 있다. 용계변은 지금도 맑은 물이 흐르고 낙조가 불을 지피고 있을 것이다. (끝)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즐거운 봄날 되시어요.
최인희 시인은 삼척 출신인데 동해시에서 최인희문학상을 해마다 수여해요.
잘못 되었다고 저는 봅니다. 미망인 우정숙 여사가 아직 강릉에 살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