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수영만요트 마리나 출항일
오전 5시 기상. 커피 한잔을 먹고 어제 적은 항해 일지를 일부 수정한다. 비는 하염없이 내린다. 윈디를 확인하니 역시 뒷바람이다. 그러나 어떻게 믿나? 어제 단단히 혼이 났다. 어쨌거나 여기서 강릉까지 1일 11시간. 35시간이다. 오늘 오후 늦게 출항하면 된다. 오후 5시를 출항시간으로 하자!
오전 6시. 샤워를 하고 문선장님을 깨운다. 잠을 아주 잘 잔 모양이다. 그동안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일주 일만에 처음으로 발 뻗고 자는 거다. 깨우기가 미안하다. 그러나 샤워하고, 식사하고, 혹시나 김기봉 선장님께서 7시까지 오시면 우리가 늦으면 안 된다. 문선장님은 내가 깨우자마자 스프링처럼 일어난다. 젊다. 보기 좋다.
어제 김기봉 선장님께서 사다 주신 부산 명물 돼지국밥을 끓인다. 아주 맛있다. 고기 건더기도 많다. 아마 나는 설사를 할 것이다. 항해 도중 늘 맨밥에 간단한 반찬 몇 가지만 먹었으니, 이런 진국을 먹으면 설사를 한다. 고기요리를 먹어도 마찬가지다. 오늘 오전 중엔 이동 중에 아주 조심하자. 젊었을 때 술 많이 마셔서 아침마다 과민성 대장염으로 고생하던 생각이 난다. 듀스파타린!
오전 7시. 김기봉 선장님으로부터 15분 후에 도착 하신다는 문자다. 준비를 하고 비를 맞으며 부산시요트협회 건물 앞으로 간다. 기다리고 계신다. 출입국관리소로 이동하면서 김기봉 선장님께 말씀을 들어보니, 부산시요트협회 회장님, 부회장님께 말씀 드려 우리가 임시폰툰에 피항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부산시요트협회 회장님, 부회장님! 너무 감사합니다!
오전 7시 50분. 부산 출입국 관리소에 가보니 공무원분들이 제네시스를 다 알고 계신다. 10여분 만에 간단히 여권에 입국 스탬프가 찍힌다. 역시 한국이다. 김기봉 선장님께서 부산 신항 마리나로 안내해 주신다. 멋진 마리나다. 초현대식 클럽하우스와 70여개의 선석이 있다. 아직 개장 전이다. 인근에 부산 오페라하우스가 건설 중이다. 부산 신항 마리나가 오픈하면 왕산 마리나 보다 더 고가의 계류장이 되지 않을까 싶다. 부럽다. 잠자는 강릉시 공무원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 언제까지 잠자고 있을 것인가? 묻고도 싶다. 괜히 혼자 속이 탄다.
오전 8시 30분. 인근의 커피숍에 간다. ‘이번엔 제가 모시겠습니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커피를 마시며 김기봉 선장님이 지난 1월 신모지에서 24피트 5마력 선외기 모터 세일 요트를 가져 오신 이야기를 듣는다. 나비오닉스 설치한 핸드폰은 바다에 빠트리고, 강한 파도 때문에 마리나로 입항도 못했단다. 비 오고 안개 가득한 바다에서 아예 러더를 묶고 선실 안에 들어가 멀미만 하며 울산 앞바다까지 18해리를 표류하다가, 다른 분의 전화기에 나비오닉스를 깔고 오후 6시 경에 간신히 입항하셨다고 한다. 나 역시 21피트 요트로 서해안 딜리버리 하다가 학암포로 긴급 피항한 경험이 있어, 그 파도의 느낌이 생생하다. 죽음이 1미터 밖에서 어른어른 했었다. 우리 요티들은 이렇게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하루가 부족하다.
오전 10시. 김기봉 선장님이 차를 태워 주셔서, 철물점에 가 제비표 우의를 두벌 산다. 어제 문선장님은 젖은 옷 때문에 대형 쓰레기봉투에 팔 구멍을 뚫어 입고 있었다. 우습지만 진지하다. 체온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제비표 우의를 사니 마음이 놓인다. 또 식품류는 부족한 것이 없냐고 물으셔서 식재료 마트로 가서 시리얼 한통을 샀다. 김기봉 선장님은 이렇게 친절하게 직접 시간을 내어 차를 태워 데리고 다니면서 우리를 도우셨다. 김기봉 선장님이 강릉에 오면 나도 이렇게 해드려야 하는데. 아니 누구든 강릉에 세일러가 오면 내가 이렇게 해야 하는데. 은근 나의 덜퉁한 성격이 걱정이다. 어쨌든 이번에도 김기봉 선장님께 톡톡히 신세를 진다. 해서 김선장님께 제가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말씀드린다. 김기봉 선장님은 꼬막 비빔밥 어떠냐고 하셔서 모두 그렇게 하기로 한다. 오늘 12시든, 오후 1시든, 편하실 때 오시라고 말씀 드리고 우리는 잠시 헤어진다. 참 대단히 친절하신 분이다. 세일러의 마음가짐과 Seaman-Ship 을 다시 한 번 배운다.
10시 30분. 배로 돌아와 점검을 시작한다. 바다엔 안개가 깔리고 비가 쏟아진다. 오늘 우리가 이 안개와 빗속으로 출항한다고 생각하니 착잡하다. 안개만 걷혀도 좋겠다. 비도 불편하지만 윈디의 바람 예보만 맞아도 얼마나 좋을까. 오후 출항 전까지는 기상이 좀 좋아 지기를 고대한다. 이래저래 소망하는 바만 자꾸 많아진다. 나는 프로 불편러 세일러인가? 반성하자.
나는 엔진을 점검하고, 문선장님은 디젤유 60리터를 더 채운다. 강릉까지는 충분하다. 어제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월요일 오전 10시, 강릉 입항도 문제없다. 또 부산서 C.I.Q.를 마쳤으니 강릉서는 입항 신고만 하면 된다. 여유롭다.
오후 1시. 김기봉 선장님께 연락이 왔다. 함께 꼬막정찬 집에 가서 정식을 먹었다. 싸고 맛난 집이었다. 역시 현지인의 안내를 받아야 맛 집에 갈 수 있다. 맛난 음식 배부르게 먹고, 마리나 근처의 2층 커피숍에 가서 바다를 살폈다. 이슬비에 안개 시정 1마일 정도다. 이제 곧 저 바다로 나가야 한다. 김기봉 선장님과 요트에 관한 이야기들을 더 나누고, 2시 40분경 아쉽게 작별을 한다. 정말 감사한 1박2일이었다.
오후 3시. 부산 세관에 5시에 출항 한다고 신고를 한다. 전화 받은 분이, 10분 이내에 아무런 연락이 없으면 그냥 출항하면 된다고 하신다. 허가가 났다는 문자 같은 것도 없단다. Okay! 그럼 10분 후 부터는 언제든 출항하면 된다. 문선장님과 둘이서 주섬주섬 출항 준비를 한다. 수영만요트경기장 안엔 바람 한 점 없다. 손님들을 태운 카타마란만 계속 마리나를 드나든다. 부러운 광경이다. 곧 출항이다. 강릉에서 그리운 가족을 만날 마지막 코스다. 바람만 허락하면 된다. 이번엔 윈디의 예보 모델 3개를 다 뒤져 본다. 별 문제 없다. 비 때문에 수중전이 될 것 같지만, 이제야 말로 강릉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움, 그 구체적인 대상들에게로.
하느님 제게 힘과 용기를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