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실천 - 거꾸로 살기
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 목 차 ▒
프롤로그
1. 거꾸로 사신 두 분
⑴ 부처님 - 권력과 금력을 버리고 깨달음의 길로
⑵ 퇴옹 성철의 역설적 삶
2. 거꾸로 말하기
⑴ 중도의 표현 - 비판, 부정, 반정립
⑵ 선문답의 딜레마와 중화작용
3. 계와 율 - 거꾸로 행동하기
⑴ 10악(惡)과 번뇌 - 동물적 행복의 원천
⑵ 세속과 상반된 승가의 가치체계
4. 중도의 사회적 실천 - NGO활동
⑴ 중도불성(中道佛性)의 감성과 천수천안(千手千眼)의 실천
⑵ 금력과 권력이 ‘골방의 족보’처럼 취급되는 사회를 위하여
⑶ 중도의 실천 - 이분법 타파
프롤로그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멀리 녹야원을 찾아가 다섯 비구에게 첫 번째 가르침을 베푸셨다. 초전법륜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세속을 떠난 자가 탐닉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느니라.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는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빠지는 것이니라. 그것은 졸렬하며 저급하고 속되며 비천하고 이롭지 않느니라. 다른 하나는 고행에 집착하는 것이니라. 그것은 고통스럽고 비천하며 이롭지 않느니라. 여래는 이런 두 가지 극단에서 벗어나 중도(中道)를 깨달았느니라. 중도는 보게 해 주고 알게 해 주며, 평온과 통찰과 보리와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러면 여래가 깨달아서, 보게 해 주고 알게 해 주며 평온과 통찰과 보리와 열반으로 인도해 주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로, 올바로 알고 올바로 생각하며 올바로 말하고 올바로 행동하며 올바로 생계를 유지하며 올바로 노력하며 올바로 살피고 올바로 집중하는 것이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첫 설법은, 깨달음을 위한 수행에서 쾌락과 고행의 양 극단을 배격하라는 중도의 가르침이었고 이를 팔정도(八正道)라고 부른다.
부처님의 첫 설법 이후 2,500여 년 지난 어느 날 대한민국의 합천 해인사에서 장대한 법석이 열렸다. 근 30년의 은둔수행을 마친 성철 큰스님께서 1967년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하자 동안거 기간에 선방 수좌와 학인 스님 등을 대상으로 불교 교학 전반에 대한 강의를 여셨던 것이다. ‘전설(傳說)의 백일법문(百日法門)’이었다. 스님께서는 초기불교에서 시작하여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 전체를 ‘중도(中道)’로 엮어서 해설하셨다. 당시 스님의 법문은 모두 녹취되었고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백일법문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서 세간에 선을 보였다. 부처님의 첫 설법 이후 기나긴 세월이 흐르고 지역과 언어가 모두 달라졌지만 불교의 핵심이 중도에 있다는 통찰만은 그대로 계승되었다.1)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고행의 자기학대’와 ‘감각적 즐거움’을 배격한 고락중도(苦樂中道)의 선(禪) 수행을 통해 단상중도(斷常中道)의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을 발견하셨고, 퇴옹 성철스님께서는 철두철미한 지계청정의 삶과 역설적(逆說的)인 중도의 언행을 통해서 불교의 본질을 회복하셨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의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이 시대의 불자들은, 금력과 권력의 횡포를 감시하고 우리 사회의 후미진 구석에서 신음하는 모든 생명을 보듬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이는 NGO와 보조를 함께 하면서 병든 우리사회를 치유하고 중화시키는 일이다. 중도의 시대적 계승이다.
1. 거꾸로 사신 두 분
⑴ 거꾸로 사신 부처님 - 권력과 금력을 버리고 깨달음의 길로
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가지 장면으로 요약한 팔상도의 두 번째 장면을 ‘비람강생상’이라고 부른다. 비람강생상은 ‘룸비니(비람)’ 동산의 무우수 아래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탄생하는 모습, 탄생 직후 태자가 한 손은 하늘을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치는 모습, 천신들이 온갖 보물로 태자에게 공양을 올리는 모습, 용왕이 태자의 몸을 씻어드리는 모습, 태자를 모시고 왕궁으로 돌아오는 모습, 아시타(Asita)라는 이름의 선인이 태자의 관상을 보는 모습의 여섯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마지막 여섯 번째 장면에서 아시타 선인이 통곡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시타 선인이 통곡하는 것이 의아하여 부처님의 아버지 정반왕께서 그 이유를 묻자 선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대왕이시여 태자께서는 서른두 가지 상호를 갖추고 계신데, 이러한 상호를 갖는 분이 세속에서 살아간다면 장성한 후에 반드시 전륜성왕이 되어 온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고, 출가하여 수행자가 된다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어 천신과 인간을 널리 제도하는 부처님이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태자의 상호는 너무나 완벽하기에 출가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얻고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실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제 나이가 이미 120세가 되어서 얼마 후에 목숨을 마칠 게 분명하니 태자께서 부처님이 되시는 것도 보지 못하고 가르침도 듣지 못할 것이라 슬퍼서 웁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궁극적 목표에는 전륜성왕과 부처의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두 가지 목표 가운데 부처가 더 우위에 있다는 점이다.
<대지도론>에서는 전륜성왕과 부처 모두 32상을 갖췄으며 복덕이 무량하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부처가 우월하다고 가르친다. 첫째 전륜성왕은 탐진치의 번뇌가 가득하지만 부처에게는 그런 번뇌가 없다. 둘째 전륜성왕은 생로병사를 되풀이 하며 윤회하지만 부처는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셋째 전륜성왕은 기껏해야 인간이 사는 4천하를 통치하지만 부처는 무량한 온갖 세계의 중생들을 이끈다. 전륜성왕은 재물을 자유자재로 쓰지만(財自在) 부처는 마음을 자유자재로 쓴다(心自在). 전륜성왕은 천락(天樂)을 추구하며 살지만 부처는 천락은 물론이고 최고의 삼매락(三昧樂)조차 추구하지 않는다. 전륜성왕은 밖의 자극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지만 부처는 그 마음 자체에 즐거움이 있다.
전륜성왕의 길은 무력을 통해서 황제의 지위에 오르려는 ‘세속적인 영웅호걸’의 길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라이온 킹’과 같은 최강자가 되는 길이다. 수많은 나라와 부족들을 굴복시키고 하나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통해 상상을 초월한 살육을 자행해야 한다. 알렉산더가 그랬고 진시황이 그랬고 칭기즈칸이 그랬다. 이러한 영웅호걸들이 나타나면 민중은 도탄에 빠진다. 12세 어린 나이에 농경제에 참석했다가 ‘고기 몸’의 비극을 목격하고 비감에 젖었던 싯다르타 태자였기에 세속적인 영웅호걸을 추구하는 ‘전륜성왕의 길’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29세가 되었을 때 태자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리게 된다. 아시타 선인의 예언과 같이 출가하여 구도의 삶을 시작했던 것이다. 권력과 금력으로 세상을 제압하려는 동물적 삶을 버리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 고통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셨다. 비폭력의 길, 깨달음의 길이었다. 진정한 영웅, 대웅(大雄)의 길이었다.2)
⑵ 퇴옹 성철의 역설적 삶
퇴옹은 평생 화두를 참구한 분이었다. 생각의 한계, 언어와 문자의 극한을 접하면서 살아간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과 언어 모두 역설적이다. 퇴옹은 종정 취임 직후 불자들에게 한 말씀을 해달라는 모 방송사 기자의 부탁을 받고서 “한 말씀이라 ……. 내 말에 속지 마라, 내 말 ……, 내 말 말이여 ……, 내 말에 속지 마라, 그 말이여!”라고 대답하였고 그 장면이 그대로 방송된 적이 있다.3) 필자 역시 그 장면을 TV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전형적인 ‘거짓말쟁이 역설(Liar Paradox)’이다. 뿐만 아니다. 파계사 성전암의 동구불출 일화에서 보듯이 퇴옹은 그 일생의 대부분을 은둔수행자로 살았고, 종정 취임 이후의 법어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의 구체적 현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친견을 하기위해서는 3천배를 해야 한다는 관문을 만들어서 대중과의 소통을 끊었는데, 1993년 입적 후에는 다비식장에 모인 문상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얼마 후 있었던 여론조사에서도 해방 이후 우리사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뽑혔다.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을 수 없다. 평소에 내던지는 그분의 언어도 역설이었고, 그 삶도 역설적이었다. 그 이유는 퇴옹의 ‘몸’과 ‘생각’과 ‘인생’ 모두에 ‘역설’과 그 구조가 동일한 ‘화두’가 깊이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두철미한 간화선사로서의 퇴옹의 역설적 면모는 그의 열반송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열반송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生平欺誑男女群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였으니
彌天罪業過須彌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넘는구나.
活陷阿鼻恨萬端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인데
一輪吐紅掛碧山 둥근 바퀴 하나가 붉은 빛을 토하며 푸른 산에 걸렸네.
간화선 전통에서 스승은 제자에게 화두를 준다. 조주무자나 마삼근, 정전백수자 등이 그 예들이다. 화두의 필수적인 요소로 대신근(大信根)과 대의단(大疑團)과 대분지(大憤志)의 셋을 든다. 스승에게서 받은 화두를 타파할 경우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확고한 믿음[대신근]이 있어야 하고, 기필코 이를 타파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분발을 해야 하며[대분지], 화두에 대해서 궁금한 마음이 충만해야 한다[대의단]. 퇴옹의 열반송은 화두의 요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다른 큰스님들의 열반송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도, 퇴옹의 열반송은 심지어 불자가 아닌 사람, 이웃 종교의 전도사조차 암기하고 다닐 정도다. 무언가 깊은 뜻이 있을 것 같고[대신근] 그 뜻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해서[대의단] 기필코 알아내고야 말겠다[대분지]는 마음이 들게 한다. 열반하면서 퇴옹이 전 국민의 가슴에 대못처럼 내리박은 ‘화두’가 아닐 수 없다.
그 구조 역시 역설적이다.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였다.”는 ‘인지(認知)의 역설’과,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넘어서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다.”라는 ‘감성의 역설’을 병치해 놓았다.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였다.”면 그 글을 쓰는 순간도 남녀의 무리를 속이고 있어야 하기에 속이지 않은 것이 되어야 하고, 속이지 않은 것이라면 “속였다.”고 쓴 것이 진실이기에 속인 것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속인 것이 된다면 “속였다.”는 것이 속인 것이기에 속이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 끝이 나지 않는 ‘거짓말쟁이 역설’이다. “하늘을 넘치는 죄업이 수미산을 넘어서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다.”라고 참회의 사설(辭說)을 토로(吐露)하지만, 사실은 참회의 순간이 가장 숭고한 순간이다. 역설적이다. 자신을 가장 낮추는 순간이 인격적으로 가장 높아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참회’는 세상 끝에서 만나는 역설적 감성이다. 성인이나 위인의 통찰은 역설로 가득하다.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요, 이름을 이름이라고 하면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노자],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이순신]. “마음을 비우는 자가 복을 받는다(虛心者受福)”[예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 예를 들려면 끝이 없다. 역설은 ‘세상의 끝’에서 만나는 지극한 통찰이다. ‘생각의 끝’에 화두의 반전(反轉)이 있듯이.4)
사람들은 지금도 간화선사 퇴옹이 입적하면서 남긴 열반송을 입에 오르내리면서 그 의미에 대해 설왕설래한다. 그의 삶이 역설이었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역설이었고, 그의 행동이 역설이었고, 삶의 끝자락에 남긴 그의 열반송이 역설이었다. 간화선사 퇴옹은 ‘역설의 화신(化身)’이었다. 퇴옹에게 화두는 오매일여의 관문을 넘어서 ‘삶과 죽음’조차 관통하였다. 생사일여(生死一如)가 되었다. 그 분은 가셨지만 그 분이 남긴 열반송은 활구가 되어 아직도 우리의 가슴속에서 훨훨 타고 있다.5)
2. 거꾸로 말하기
⑴ 중도의 표현 - 비판, 부정, 반정립
『반야경』이나 『중론』등 반야삼론계 문헌에는 쌍차쌍조(雙遮雙照)의 문구들이 많이 등장한다. 비유비무(非有非無), 무생무멸(無生無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등이 상반된 두 가지[雙] 개념을 모두 부정[遮]하는 쌍차의 문구라면 유무, 생멸, 단상, 일이, 거래 등은 상반된 두 가지 개념을 모두 긍정[照]하는 쌍조의 문구들이다. 선(禪)의 교학적 토대인 삼론학에서는 쌍차와 같이 무(無: 없다), 불(不: 않다), 비(非: 아니다) 등의 부정어를 수반하는 표현을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비유비무’와 같이 유와 무의 이변(二邊) 모두를 부정하는 쌍차의 표현도 중도이지만, ‘비유’, ‘무생’, ‘부단’ 등과 같이 어느 한 쪽만 부정하는 표현도 중도라고 부른다.6) 요컨대 중도란 ‘부정’이고 ‘비판’이고 ‘반정립’이다. 거꾸로 말하기다.
⑵ 선문답의 딜레마와 중화작용
선사들은 교화대상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뜨린다. 마조의 ‘도불용수(道不用修)’ 사상은 “깨달음이란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오염만 막으면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는 조작적 수행을 통해서 무언가 이루고 말겠다는 각오를 한 수행승들을 위한 가르침일 뿐이다. 이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신봉하여 수행을 하지 않을 경우 범부와 다를 게 없어진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마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도를 닦습니까?” 마조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도는 수행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수행을 해서 얻는다고 하면, 수행을 해서 이루어진 것은 다시 무너지고 말기에 [소승의] 성문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닦지 않는다면 범부와 같아집니다.”7)
앞에서는 분명히 “도는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닦지 않을 수도 없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일반 범부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도를 닦아서 얻으려 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닦지 않을 수도 없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다. 양변(兩邊)을 격파하는 중도의 궁지다.
위에 인용한 설법에서 마조는 양 극단을 모두 드러내면서 교화대상의 마음을 중도로 몰고 가지만 선문답의 현장, 법거량의 현장에서 선승들은 독특한 언행을 통해 상대의 편견을 중화시킨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조주의 “무!”라는 대답은 ‘상대의 생각을 중화시키는 작용’이었다. ‘개’와 ‘불성’과 ‘있음’이라는 분별을 타파하는 ‘작용’이었다. “부처란 어떤 분이냐?”는 물음에 대한 동산 양개의 “마삼근!”이라는 대답 역시 중화작용이며, “뜰 앞의 잣(측백)나무!”나 “마른 똥 막대기!”는 물론이고 임제의 “악!”하는 고함(喝)이나 덕산의 ‘몽둥이질’ 모두 ‘이분법적인 분별의 병’을 타파하는 ‘중화제’였다. 선승들의 이와 같은 교화방식은 가까이는 육조 혜능(慧能: 638~713)의 사상, 멀리는 삼론학의 중도불성론(中道佛性論)에 기원을 둔다. 혜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有)를 물으면 무(無)로 대답해야 하며 무를 물으면 유로 대답해야 한다. 범부(凡夫)에 대해 물으면 성인(聖人)으로 대답하고 성인에 대해 물으면 범부로 대답하라. 두 가지 길이 서로 의존하여 중도의 뜻을 생한다.8)
『열반경』에서 가르치듯이 일체의 중생에게 불성이 있기에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 것이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有)는 대답을 기대하고서 조주 스님에게 물었다. 그러나 조주는 없다(無)고 대답한다. 기대와 다른 대답이다. 다름을 떠나서 상반된 대답이다. 혜능이 “유를 물으면 무로 대답해야 한다.”고 가르친 대로, 불성이 있다는 대답을 원했는데 없다고 답한다. 조주의 답을 통해서 ‘유의 극단’에 치우쳤던 질문자의 생각이 중화된다.
승랑의 증손제자로 삼론학을 집대성한 길장은 당시에 중국 불교계에 퍼져 있던 열한 가지 불성론을 소개하면서9) 그 모두를 비판한 다음에, 불성이란 중도라고 규정한 후 중도불성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묻는다. “[이상과 같이] 다른 이론을 논파한 내용은 그럴 듯하다. [그러면] 이쪽에서는 무엇을 정인(正因)으로 삼는가?” 답한다. “일단 다른 이론을 상대할 때에는 그런 이론 그대로 뒤집을 필요가 있다. 그들 모두가 ‘유’를 말하면 이쪽에서는 모두 ‘무’를 말한다. 그가 ‘중생’을 정인으로 삼으면, 이쪽에서는 ‘중생이 아님[非衆生]’을 정인으로 삼고, 그가 육법(六法)을 정인으로 삼으면 이쪽에서는 ‘육법이 아님[非六法]’을 정인으로 삼는다. 더 나아가 그가 ‘진제’를 정인으로 삼으면 이쪽에서는 ‘진제가 아님[非眞諦]’을 정인으로 삼는다. 만일 ‘속제’를 정인으로 삼으면 이쪽에서는 ‘속제가 아님[非俗諦]’을 정인으로 삼는다. 그래서 ‘비진비속의 중도’가 정인(正因)인 불성인 것이다. 약으로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경우는 이렇게 설할 필요가 있다.10)
누군가가 ‘유’를 말하면 그에 대한 부정인 ‘무’를 말함으로써 불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중생’이 불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대해서 ‘중생 아님’이 성불의 정인인 불성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주장을 비판하고, 다른 누군가가 ‘진제’를 불성이라고 주장하면 ‘진제가 아님’이 불성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주장을 비판함으로써 중도불성을 드러낸다는 설명이다. ‘비유비무(非有非無)’나 ‘비진비속(非眞非俗)’과 같은 ‘중도의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치우친 생각을 비판하는 ‘중화작용’을 통해서 불성을 체득케 한다. 이는 앞에 인용했던 혜능의 설명과 다르지 않으며 선승들의 파격적 언행과 맥을 같이 한다.11)
3. 계와 율 - 거꾸로 행동하기
⑴ 10악(惡)과 번뇌 - 동물적 행복의 원천
불교수행의 목표는 모든 번뇌가 사라진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열 가지 근본번뇌를 완전히 제거한 최고의 성자,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와 같은 종교적 가르침을 모르는 인간이나, 짐승들은 탐욕,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의 추동으로 악을 지으며 살아간다. 불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권하지만, 사실 ‘번뇌와 악행’은 ‘동물적 행복의 원천’이다. 찰스 다윈의 용어로 표현하면 번뇌와 악행은 먹이 획득에 성공하게 하여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의 적자(適者)가 되게 하고, 새끼를 낳아 잘 키우게 함으로써 성선택(Sexual selection)의 경쟁에서 승자(勝者)가 되게 해준다.
불전에서는 열 가지 악행을 열거한다. ‘ⓐ살생(殺生), ⓑ투도(偸盜: 훔치기), ⓒ사음(邪淫: 삿된 음행), ⓓ망어(妄語: 거짓말), ⓔ양설(兩舌: 이간질), ⓕ악구(惡口: 욕), ⓖ기어(綺語: 꾸밈말), ⓗ탐욕(貪欲), ⓘ진에(瞋恚: 분노), ⓙ사견(邪見: 종교적 어리석음)’의 열 가지다. 과거의 사람들 역시 짐승과 다를 게 없었다. 종교적 가르침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인간사회 역시 밀림과 다름없었을 게다. 알렉산더대왕, 진시황, 칭기즈칸 모두 인간의 모습을 한 잔인한 살륙자, ‘라이온 킹’이었다. 탐욕, 분노, 교만과 같은 강력한 번뇌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인과응보를 부정하기에 내생의 과보에 대한 두려움 없이(⑻사견, ⑺변집견) 무참하게 살륙을 저지른다(ⓐ살생). ‘라이온 킹’이 그렇듯이 수많은 암컷 후궁들을 거느린다(ⓒ사음). 지금도 금력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 중에는 그 속내가 짐승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짐승 또는 짐승과 같이 ‘몸의 행복’,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의 경우 10번뇌의 토대 위에서 10악을 지향하며 살아간다. 물론 현대의 인간사회에서는 ‘법’이 ‘악행’을 처벌하기에 노골적으로 10악을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법망(法網)에 걸려들지 않게 교묘하게 10악을 지으면서 동물적 ‘행복’을 만끽한다. 일시적으로는 승승장구하며 최강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상대적 행복은 언젠가 결국 스러지고 만다. 진정한 행복은 그런 투쟁의 세계에서 벗어날 때 찾아온다. 번뇌와 악행을 끊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12)
⑵ 세속과 상반된 승가의 가치체계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짐승의 세계는 모두가 불행한 사회이다. 왜냐하면 최정상의 ‘하나’ 이외에는 모두 ‘공포’와 ‘열등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며, 또 최정상의 ‘하나’ 역시 얼마 후 노쇠하면 새로운 최강자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경제활동에 대한 제재가 하나하나 제거되고 있는 자유방임(Laissez-faire)의 사회에서, 그 구성원 모두가 경제지상주의적(經濟至上主義的) 가치관에 매몰되어 살아간다면, 이는 ‘짐승의 세계’와 다를 게 없는 불행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사회가 바로 그렇다. 현재 이혼율에서 우리나라가 세계최고를 달리게 된 것도, 그 깊은 원인은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우리 사회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힘의 세기에 따라 배우자가 교체된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방임적 가치관’과 완전히 상반된 가치체계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있다. 바로 불교의 승가사회이다. ‘이법(理法)으로서의 윤리’인 계(戒)에 근거한 율(律)의 규범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가 승가사회이다. 계와 율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동물적 속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계인 재가 오계(五戒)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도둑질하지 말라(不偸盜)
삿된 음행하지 말라(不邪淫)
거짓말하지 말라(不妄語)
술 마시지 말라(不飮酒)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삼귀의계(三歸依戒)의 다짐을 할 경우 재가불자로서의 삶이 시작되는데, 이에 덧붙여 위와 같은 오계의 다짐을 할 경우 보다 신실한 불자로 향상한다. 이 가운데 불음주나 불망어의 계목은 양조(釀造)문화가 없고 언어가 없는 짐승에게는 적용시킬 수 없겠지만, 다른 세 가지 계목을 짐승의 행동과 비교하면 그 지향점이 완전히 상반됨을 알 수 있다. 들개(野犬)나 하이에나(Hyena)와 같은 들짐승의 경우, 다른 누구보다 살생의 전투력[殺]이 뛰어나야 우두머리의 자리에 오르고, 먹을거리를 많이 훔쳐올수록[盜] 자식을 건강하게 양육할 수 있으며, 가능한 한 많은 암컷과의 음행[淫]을 통해 자신의 DNA를 널리 퍼뜨리고자 한다. 그러나 오계에서 보듯이 불교의 가치체계는 이러한 짐승들의 가치체계와 완전히 상반된다.
출가계인 구족계의 경우도 그 취지는 오계와 마찬가지다. 출가계인 비구 250계나 비구니 348계의 경우 그 핵심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 남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② 자신을 해치는 행동(= 고결하지 못한 행동)을 하지 말 것
③ 승가의 화합을 깨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④ 승가에 대한 재가자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⑤ 출가자의 수행에 지장을 주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⑥ 불교에 대한 신앙심을 훼손하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⑦ 번뇌를 야기하는 행동을 하지 말 것
⑧ 승가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을 하지 말 것13)
구족계의 궁극적 목적은 ‘계약사회로서의 승가’를 보전함으로써 불법이 계속 재생산될 수 있게 하는 것이지만, 그 기본정신은 오계와 마찬가지로 ‘동물적 속성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분율』에서 제시하는 가장 가벼운 계목인 100가지 중학법(衆學法) 중에서 식사와 관련한 몇 가지 계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40) 밥을 베어 먹지 말라.
41) 볼을 불룩거리며 먹지 말라.
42) 밥을 씹는 소리를 내지 말라.
43) 밥을 후루룩거리며 빨아 먹지 말라.
44) 혀로 밥을 핥아먹지 말라.14)
이런 지침은 짐승이 식사하는 모습과 완전히 반대된다. 이러한 계목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행동에 위의를 갖춘 지계 청정한 출가자의 경우, 신심 깊은 불자들이 ‘그 신발에 묻은 먼지도 서로 가져가려고 할 정도’15)로 존경받는다. 우리가 머리를 조아리고 존경의 모습을 보이는 존재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권력이든, 금력이든 나보다 그 세력이 월등한 권력자나 재력가이고, 다른 하나는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며 수행하는 출가 구도자이다. 권력자나 재력가에 대한 절복은 공포심에 의한 행위이고, 출가 구도자에 대한 예경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위이다. 굴복을 보이는 겉모습은 같지만 그 속마음은 다르다. 전자의 경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우리의 안전이 위협을 받기 때문이며, 그렇게 할 경우 우리에게 이득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승의 말이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안 간다.”는 속담에 권력자에 대해 사람들이 굴복의 모습을 보이는 이유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지계 청정한 출가자에게 우리가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보내는 이유는, 그들이 결코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위험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겉모습과 속마음이 다르지 않다. ‘지계청정하고 자비심 가득한 스님’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보이는 ‘인간의 종교적 본능’에 대한 사회생물학적(Sociobological) 해석이다.
승가의 가치체계는 ‘권력과 금력이 지배하는 사회’의 가치체계와 완전히 상반된다. 권력과 금력의 대소에 의해 서열이 매겨지는 사회에서 그 구성원 모두가 물리적 위력만을 추구하며 살아갈 경우, 이는 짐승의 사회와 다를 게 없다. 최정상의 한 사람 이외에는 모두 금력과 권력에서 자신보다 상위에 있는 사람들의 위력에 눌려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반(反)동물적 가치체계에 의해 서열이 매겨지는 승가사회의 경우 그 구성원 중에서 ‘가장 자비롭고, 가장 선량하며, 가장 지혜로운 수행자’가 최정상에 오르기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사회이다.16)
4. 중도의 사회적 실천 - NGO활동
⑴ 중도불성(中道佛性)의 감성과 천수천안(千手千眼)의 실천
동아시아불교계에『대반열반경』이 번역, 유포되면서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경문의 ‘불성’의 정체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길장(吉藏: 549~623)의 『대승현론』에서는 당시의 이론가들이 주장했던 불성의 정체로 중생(衆生), 육법(六法)17), 심(心), 명전불후(冥傳不朽)18), 피고구락(避苦求樂)19), 진신(眞神)20), 아리야식자성청정심(阿梨耶識自性淸淨心), 당과(當果)21), 득불지리(得佛之理)22), 진제(眞諦), 제일의공(第一義空)의 열한 가지를 소개한다. 그러나 삼론학에서는 이 모두를 비판한 후 불성은 중도(中道)라고 결론을 내린다.23)
중도란 ‘탈이분법을 향한 무한 변증법’이다. 유(有)와 무(無)의 ‘이분법’에 대해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를 제시하고, 이런 ‘이분법’과 ‘중도’를 다시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면 ‘비이 비불이(非二 非不二)’24)의 ‘중도’를 새롭게 제시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유’와 ‘무’의 자리에는 각각 ‘삶[生]’과 ‘죽음[死]’이 대입될 수도 있고, ‘나[自]’와 ‘남[他]’이 대입될 수도 있고, 긺[長]과 짧음[短]이 대입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삶과 죽음이 실재한다는 이분법적 생각에 대해서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중도의 조망을 제시하고,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조망을 어떤 상태로 집착하여, ‘삶도 있고 죽음도 있는 현실[生死의二]’과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이상[不生不死의 不二]’을 분리하는 이분법적 착각에 빠진 자에게는 다시 ‘삶도 있고 죽음도 있는 현실’도 없지만,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이상(理想)’ 역시 없다[非二 非不二]는 제2의 중도적 조망을 제시한다. 이렇게 ‘무소득(無所得)을 향한 영원한 추구’가 삼론학에서 발견한 중도(中道)의 진정한 의미이다. 중도를 향한 추동이 바로 불성인 것이다.
이분법에서 벗어난 이러한 인지적(認知的) 중도의 지혜는 우리의 ‘감성’에서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자비심이 싹트게 한다.25) 불교수행자의 인지(認知)의 변화가 그의 정서(情緖)를 변화시킨다.26) 선가(禪家)의 수행목표인 견성(見性)은 견불성(見佛性)을 의미한다.27) 견성한 수행자, 아니 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중도인 불성의 편린이라 자각한 사람에게는 ‘중도적 감성’인 자타불이,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싹튼다. 이는 비단 불교도만 갖춘 감성이 아니다.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역시 중도불성의 감성이다.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1967) 그리고 ‘청년 마르크스’를 움직이게 한 추동력은 중도불성의 감성이었을 것이다. 중도불성은 ‘제도권 종교’를 초월한 진정한 종교심의 원천이다.
중도불성의 감성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현실에 대해서도 작동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분법이 심해질 때 이를 타파하기 위해 중도불성의 감성이 움직인다. 이분법이란 국가 내, 국가 간에 빈곤[貧]과 부유[富]의 ‘차별의 이분법(二分法)’일 수도 있고, 하나의 민족이 남[南]과 북[北]으로 갈린 ‘분단의 이분법’일 수도 있다. 중도불성을 추구해 온 불교도는, 만일 그가 진정으로 불교적인 신행활동을 했다면, 이러한 이분법에 대해 방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적 보살행이 시작된다.
중도불성을 우리의 삶 속에서 구현하는 보살도를 실천하고자 할 때 두 가지 조건이 필수적이다. 내적으로는 자비심이 가득해야 하고, 외적으로는 방편을 갖고 실천해야 한다.28) 내적인 자비심은 중도불성의 자각을 통해 갖추어진다. 이를 위한 수행은 이변(二邊)을 떠난 중도의 인지(認知)를 지향하는 간화선 수행일 수도 있고, 무상(無常)에 대한 관찰을 통해 무아(無我)를 자각함으로써 자타불이의 중도를 체득하는 위빠사나 수행일 수도 있다.
그러면 이러한 중도불성의 감성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할까? 우리는 그 ‘롤 모델(Role model)’을 천수천안(千手千眼)의 관세음보살에게서 찾을 수 있다. 천개의 눈으로 고통 받는 중생을 찾아내어 천개의 손으로 그 고통을 보듬는 관세음보살 …. 약자를 보살피고 불의에 항거하는 NGO의 천수(千手)가 인터넷의 천안(天眼)과 만남으로써 우리사회는 밝아질 수 있다. ‘천수천안 NGO’의 감시와 보호와 항거는, ‘신자유주의의 밀림’을 지키는 이 시대의 희망이다.29)
⑵ 금력과 권력이 ‘골방의 족보’처럼 취급되는 사회를 위하여
불교의 계와 율에 스며있는 반(反)-동물적인 가치체계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운용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 혜원(慧遠: 334∼416)의 사문왕자불경론(沙門王者不敬論) 에서 보듯이, 승가의 가치체계에서 세속적 권력은 무의미하다. 승가의 가치체계에서는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것 이상의 과도한 재물 역시 무의미하다. 재물이나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수행과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승가의 삶이 예증하듯이, 가치관의 변화를 통해 누구나 권력이나 금력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 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권력이 부럽지 않을 수 있고,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승가적 가치체계 속에서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가 보장되어야 하며 권력이나 금력을 가진 자가 그 누구의 권리도 함부로 유린할 수 없어야 한다. ‘사회보장’과 함께 ‘엄정한 법치’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천개의 눈으로 고통 받는 중생을 찾아내어 천개의 손으로 그 고통을 보듬는 천수천안 NGO’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불교적 가치체계에 바탕하여 활동하는 ‘천수천안 NGO’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절대빈곤이 사라지고 진정한 법치가 이루어질 때 과도한 재산이나 권력은 ‘골방의 족보’처럼 취급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갖고 있는 ‘힘’보다 ‘콘텐츠’에 가치를 둔다. 부유하게 사는 것보다, 의미 있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다. 누구에게나 언젠가 죽음이 닥치기 때문이다.30)
⑶ 중도의 실천 - 이분법 타파
견성(見性)은 ‘중도의 자각’이다. 중도는 ‘탈이분법(脫二分法)’이다. ‘이분법에서 벗어난 불이(不二)의 마음’이다.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다. “삶과 죽음이 다르다”고 분별하기에 “나는 살아있다”는 착각 속에서 죽음에 대해 번민하였다. 그러나 불이의 중도를 자각할 경우,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철견(徹見)하기에 죽음에 대한 망상이 사라진다. 치심이 해소되는 것이다. “나와 남이 다르다”고 선을 긋기에 남의 불행을 방관한 채 이기적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불이중도(不二中道)를 체득한 수행자에게는 동체대비의 자비심이 샘솟는다. 나와 남을 구분하는 이분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불이중도의 불성을 자각한 불교수행자는, 인지(認知)가 정화되었기에 죽음에 대한 망상에서 벗어나고, 감성이 정화되었기에 그 마음에는 이타의 자비심이 가득하다. 다른 생명체의 고통에 대해 무심하지 않으며, 사회적 차별을 수수방관하지 않는다. 탈이분법의 중도를 자각한 수행자는 생(生)과 사(死)의 이분법을 타파했기에 종교적 번민에서 해방되고, 자타(自他)의 이분법이 사라졌기에 지치고 어려운 이웃을 향하여 동체대비의 감성을 실천한다. 사회적으로는 빈부의 이분법이 극심해지지 않도록 권력과 금력의 횡포를 감시하고 견제한다. 종교적으로는 우리 사회에서 종교와 종교 사이에 진하게 그어진 ‘구분의 선(線)’을 지운다.31) 아울러 ‘분단의 이분법’을 타파하는 일 역시 탈이분법의 중도불성을 추구하는 우리 불교인들이 앞장서야 할 또 하나의 과제다. 불이중도(不二中道)의 민족적 실천이다.32)
부처님께서 발견하시고, 동아시아에 전해진 후 선(禪)으로 빚어져, 퇴옹 성철 스님에게 계승된 불교의 본질, ‘불이중도(不二中道)’는 이제 사회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이는 나와 남의 이분법을 타파하는 자비실천이고, 부자와 빈자의 이분법을 타파하는 정의 구현이며, 종교 간의 구분을 타파하는 종교화해이고, 남한과 북한의 대립을 타파하는 통일운동이다.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이고, 중도의 민족적 실천이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심과 반대로 사는 것이다. ‘거꾸로 사는 것’이다.
■ 각 주
* 본 발제문은 ‘창의적 논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발표했던 필자의 논문, 수필, 저서에서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1) 이상은 拙稿, <중도>(월간 불광)에서 발췌.
2) 이상은 拙稿, ‘싯다르타 태자의 출가’(불교신문)에서 발췌
3) 원택, 성철스님 시봉이야기 제2권, 김영사, 2001, pp.250~251.
4) 이상의 해석은 2004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던 학술대회 “근현대 한국 불교사상의 재조명: 퇴옹성철의 불교관과 현실인식을 중심으로”에서 발표된 허우성의 논문, 「간디와 성철」에 대한 필자의 논평문에서 이미 피력한 바 있다: 퇴옹성철의 깨달음과 수행 - 성철의 선사상과 불교사적 위치 , 예문서원, 2006, pp.401~410 참조.
5) 이상은 拙稿, <현대 한국 사회와 퇴옹성철의 위상과 역할>(‘현대 한국 사회와 퇴옹 성철’ 포럼)에서 발췌
6) 拙著, ≪승랑 - 그 생애와 사상의 분석적 탐구≫에서
7) 『江西馬祖道一禪師語錄』(『新纂藏』69, p.2c). “僧問 如何是脩道 曰 道不屬脩 若言脩得 脩成還壞 即同聲聞 若言不脩 即同凡夫”
8) 『六祖大師法寶壇經』(『大正藏』48, p.360c), “問有將無對 問無將有對 問凡以聖對 問聖以凡對 二道相因 生中道義”
9) 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중생 ②육법(六法: 五陰과 人) ③마음(心) ④그윽하게 이어지며 쇠락하지 않음(冥傳不朽) ⑤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추구함(避苦求樂) ⑥참된 영혼(眞神) ⑦아리야식 자성청정심(阿梨耶識 自性淸淨心) ⑧앞으로 이룰 불과(當果) ⑨부처가 된다는 이치(得佛之理) ⑩진제(眞諦) ⑪제일의공(第一義空). 『大乘玄論』 (『大正藏』45, pp.35b~c).
10) 吉藏, 『大乘玄論』(『大正藏』45, p.37a), “問 破他可爾 今時何者為正因耶 答 一往對他則須併反 彼悉言有 今則皆無 彼以眾生為正因 今以非眾生為正因 彼以六法為正因 今以非六法為正因 乃至 以真諦為正因 今以非真諦為正因 若以俗諦為正因 今以非俗諦為正因 故云非真非俗中道為正因佛性也 以藥治病則須此說”
11) 이상은 拙稿, <선과 반야중관의 관계>(불교학연구)에서 발췌
12) 이상은 拙稿, <불교의 구사학으로 풀어 본 무의식과 명상>(서울불교대학원 10주년 세미나 발제문)에서 발췌.
13) 김성철, 「출가자와 재가자의 바람직한 관계」, 참여불교 , 2003.
14) 四分比丘戒本 , 대정장22, 1021a.
15) 보리도차제론 .
16) 이상은 拙稿, <신자유주의의 정체와 불교도의 역할>(불교학연구)에서 발췌.
17) 五陰과 人
18) 그윽하게 이어지며 쇠락하지 않는 마음.
19) 고를 피하고 낙을 추구하는 마음.
20) 참된 神我.
21) 앞으로 언젠가 부처의 과보에 오를 것임.
22) 누구든 부처가 된다는 이치.
23) 無常無斷名爲中道 只以此爲中道佛性也: 대승현론 , 대정장45, pp.37b / 今大乘明義 正以中道為正因體 故正因佛性是正法: 혜균, 대승사론현의기 , 만신찬속장경46, p.603b.
24) 非二: 非-有無, 非不二: 非-非有非無.
25) 若智 自他不二 生死涅槃平等 開 佛道因緣也: 吉藏, 大品義疏 , 신찬속장경24, p.288a.
26) 우리의 정서는 인지에 종속적이다: 我執必依法執而起( 성유식론 , 대정장31, p.24b).
27) 西天國王 問波羅提尊者曰 我欲作佛 不知何者是佛 尊者曰 見性是佛 王曰 師見性否 尊者曰 我見佛性: 大慧普覺禪師語錄 , 대정장47, 829c.
28) 菩薩大事者 所謂不捨一切衆生 然度衆生必須二事 一者內有慈悲心 二者外有方便救濟: 길장, 금강반야소 , 대정장33, p.102c.
29) 이상은 拙稿, <신자유주의의 정체와 불교도의 역할>(불교학연구)에서 발췌.
30) 이상은 拙稿, <신자유주의의 정체와 불교도의 역할>(불교학연구)에서 발췌.
31) 이상은 拙稿, ‘깨달음의 사회화’(불교신문)에서 발췌.
32) 이상은 拙稿, ‘문수스님의 질타와 불교인의 과제’(불교평론)에서.
[출처: 김성철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