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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 봉수산 순교성지 - 형제애로 맺은 뜨거운 신앙의 자취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105-3(대흥 동헌 옆)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의좋은형제길 25-14
의좋은 형제를 배출한 우애의 고을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은 지금은 작은 면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서북부를 관할하는 홍주목에 소속된 5군 14현의 하나로 독립된 현이었다. 그러기에 현감이 다스리는 현청이 있었다.
이곳은 홍주목과 공주목, 호남과 한양을 잇는 역참이 있었던 곳이다. 박해시대에는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예산, 홍주, 공주, 청양 지역을 잇는 내포지역 복음 전파와 박해의 길목이기도 했다. 또 삼국시대 때에는 인근 봉수산에 백제의 부흥운동을 일으킨 임존성이 있어 역사의 의미를 새겨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옛날 교과서에도 나오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다들 알고 있다. 한 마을에 사는 이 형제는 가을걷이를 하여 밤에 서로 몰래 볏단을 져다가 서로 상대편의 낟가리에 쌓았다. 그런데 이튿날 보면 조금도 변동이 없어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결국 나중에는 서로 밤에 볏단을 지고 가다가 도중에 만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이 형제 이성만, 이순이 살았던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지금은 의좋은 형제 길이라는 도로도 있고 비각도 있고 동상도 세워져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들 형제의 우애를 현양하고 있다.
의좋은 신앙의 형제 출현
그런데 조선후기 천주교 박해시대에는 또 다른 방식의 형제애를 드러내는 사례가 있다. 신유박해 때 형제가 같이 체포되어 굳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한날 한시에 순교의 칼을 받고 하느님의 품에 안긴 일이다. 그 순교 형제의 이름은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그의 사촌형인 김광옥 안드레아이다.
김정득(金丁得) 베드로는 홍주목 대흥현 출신으로 예산의 김광옥 안드레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두 형제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갔다. 두 형제가 피신하면서 가져간 것은 교회 서적과 성물뿐이었다. 그들의 피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더 빨리 발각되었다. 그래서 김정득은 홍주로, 김광옥은 예산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고, 이후 함께 청주에 수감되어 형벌을 받았다.
복자 김정득 베드로가 어떤 신앙생활을 이어왔는지는 상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한양으로 압송되어 1801년 8월 21일(음력 7월 13일) 받은 사형선고 선고문을 보면 그가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신앙을 증언했을 뿐 아니라 이웃들에게 담대하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고, 어떤 형벌과 문초에도 교우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국가의 금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는 폐지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속에 숨어 살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였으며, 형벌과 문초를 가하여도 아주 모질어서 굴복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
사형선고를 받고 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고신과 형벌로 몸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어려운 상태에서도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김광옥 안드레아는 천상의 기쁨에 가득 차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각자의 처형 장소인 대흥과 예산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두 형제는 손을 맞잡고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 이리하여 형제는 각각 다른 처형지에서 같은 시간에 순교했다. 1801년 8월25일(음 7월17일)이었다.
김광옥 (金廣玉) 안드레아는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출신의 김광옥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을 역임하였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프란치스코)은 그의 아들이다.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았으나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그는 예산으로,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얼마 후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신공을 바쳤다. 김정득 바오로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예산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당시 60세 가량이었다.
두 복자의 순교자 3계는 첫째 천주를 배반하지 말라(信德), 둘째 교우를 일러바치지 말라(愛德), 셋째 성물과 교회서적을 바치지 말라(望德)였는데 셋째 성물을 보존함이라는 것은 농부가 굶어 죽을지라도 씨앗주머니는 베고 죽는다는 말과 통한다고 설명된다.
성지 조성
대흥면 봉수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봉수산 성지는 순교복자 두 형제뿐 아니라 대흥 고을 출신의 여러 순교자도 현양하고 있다. 8대 교구장 뮈텔(Mutel) 주교가 편찬한 치명일기(致命日記)에는 복자 김정득 베드로 외에도 황 베드로(46세), 백청여(50세 가량), 원지우 안드레아, 이 루도비코(43세), 이 아우구스티노(38세), 원 요셉(55세) 이 기록되어 대흥 고을 출신 순교자는 모두 7위이다.
대전교구는 2019년 5월 6일 124위 순교자들의 시복을 기념하고, 특별히 ‘의좋은 순교자’로 불리는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사촌 형제인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를 기억하고, 대흥 고을 출신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대흥봉수산 순교성지를 조성하여 축복식을 거행했다.
대흥 봉수산 순교성지는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다 처형된 장소의 특성을 살려 토지면적 약 1,500평의 대지 위에 100평의 임시 성당을 건립하고 다시 700평의 공간에 대흥 관아의 감옥을 재현한 형옥원을 건립했다. 형옥원에는 박해시대 순교자를 가두었던 옥사, 저잣거리, 처형대가 재현되었고, 그 둘레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되었다. 아울러 성지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되새기며, 봉수산과 예당저수지와 조화를 이루는 자연환경 속에서 순례자들에게 순교 영성을 전파해나가고 있다.
낮 1시가 다 되어 성지 입구에 도착. 점심시간이긴 하나 일단 순례를 한 후 식사를 하기로 했다. 성지 입구에서는 일군의 여성 순례단이 신부님으로부터 성지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대흥 성지는 약간 높은 곳에 조립식 성당 건물이 겸손한 모습으로 나지막하게 자리잡고 있고, 계단 아래 약간 낮은 곳에 형옥원이 조성되어 상 · 하 2단 구조로 되어 있다.
성지 성당
성당 바깥 출입문 옆에는 성모님이 맞아 주시고 있다.
문 안 로비의 정면 벽에는 십자가 아래 김대건 신부의 영정이 나지막하게 걸렸고 그 앞에 성모상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돌아온 탕자 등 여러 개의 성화가 벽에 걸렸다. 사무실과 제의실도 보인다.
로비에서 성전 안에 들어가니 조립식 건물이면서 공간을 확보하려다 보니 천장이 낮고 제대 또한 나지막하다. 하지만 천장과 벽면은 동일하게 흰색을 이루어 정갈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제대 후벽과 제단 위에는 여러 가지 성화, 성물을 배치하여 엄청 복잡하다.
벽 가운데에 십자고상이 있고, 왼편에는 124위 복자화와 자비의 예수님상이 걸렸고 그 앞 제단에 자비의 예수님의 환시를 체험한 파우스티나 성녀의 사진이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성모님 액자와 예수성심상 사이에 성 남종삼 유해 봉안대가 있다. 그 옆에 순교자 김광득 형제의 액자가 사이 좋은 모습으로 세워져 있고 맨 오른쪽에 성화 삼위일체 이콘 액자가 탁자 위에 세워져 있다.
좌우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갈라져 걸렸다. 그런데 벽면의 특징은 통유리 창문을 마치 출입문처럼 크게 내어 두꺼운 벽을 통해 바깥의 풍경을 안으로 끌이고 들이고 있다. 이로 인해 나지막하고 답답한 실내 공간을 시원스럽게 넓히는 효과를 주고 있다.
형옥원
원래 대흥 관아의 옥사는 상중리 296번지 옥담거리에 있었다. 또 사형을 집행하던 처형장은 예당호 내천변에 있었고, 조리돌림 등의 고신(拷訊)이 행해지던 저잣거리는 동서리 173번지 인근에 있었다. 이를 성지로 조성을 하면서 모두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형옥원(刑獄苑)에 들어서면 넓은 잔디 광장 가운데 두 팔 벌린 성모상이 순례자를 반겨 맞이하고 있다. 성모상이 세워진 받침대는 사형을 집행했던 참수대(斬首臺)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 뒤로 전통 목조건물이 있다. 기와지붕에 나무와 흙벽으로 이루어진 익숙한 건물이지만, 가까이 가면 일반적인 가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옥사(獄舍)이기에 문마다 여닫는 창호 대신 창살이 쳐져 있다.
조선시대 사형(死刑)에는 사약을 받는 사사형(賜死刑), 백지사형, 교수형, 참형, 거열형(車裂刑)등이 있었다. 이중 참형과 거열형은 공개적으로 집행하였다. 참형은 대체로 추분을 지나 다음 해 춘분 이전에 형조, 의금부, 포도청 등 행형기관에서 집행하는 대시참형(待時斬刑)이 있고 군영에서 때를 가리지 않고 하는 부대시참형(不待時斬刑)이 있었다. 복자 김광득, 김광삼 형제는 사안의 중대성에 따라 부대시형 참형을 받았고 사흘 동안 그들의 머리가 장대에 효수(梟首)되었다.
김정신 스테파노(단국대 건축학과) 교수가 설계한 형옥원 앞마당은 십자 형태의 거리 모습으로 조성되어 조리돌림, 팔 주리 틀기, 큰칼 씌우기 등의 형벌, 그리고 사형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그림과 설명이 준비되어 있다. 형옥원 바로 앞에는 형벌을 집행하던 의자와 곤장대도 놓여 있다.
복원된 옥사에는 3개의 방이 있고 방마다 순교자 한 명씩 갇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양쪽에는 103위 성인 순교화와 124복자화가 복제되어 붙어 있다.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김광옥 안드레아가 투옥된 방에는 각각 영정과 조각상, 그리고 순교화가 한 점씩 그려져 있다. 탁희성 화백이 그린 것이다.
복자 김정득 순교화(좌)는 김정득 베드로가 잡혀 갈 때 소중한 성물들을 땅에 묻었다는 기록에 따라 땅을 파고 묻는 모습을 화제로 그린 것이다.(탁희성 화백 그림)
김광옥 순교화(우)는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가 면장 직에 있었던 사실을 화제로 하여 관청에 재직할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십자가의 길
대흥 동헌 및 아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174호)
순교 성지를 떠나 바로 옆에 있는 대흥 관아로 이동했다. 옛날에는 대흥 관아는 수령이 다스리는 데 필요한 많은 부속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들 소실되고 동헌과 아문 두 건물만 터를 지키고 있다.
. 동헌(東軒)은 역대 수령들이 집무하던 정청으로 정면 6칸, 측며 2칸의 목조 기와집이다. 건물은 대청과 온돌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문(衙門)은 동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지붕은 중앙을 높게 올리 소슬문이다. 편액에는 임성아문(任城衙門)이라고 되어 있는데 통일신라 시대 이후 부르던 대흥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삼국시대 때는 임존성으로 백제가 망한 후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난 거점이라고 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의좋은 형제 효제비(충남 유형문화재 102호)와 동상
대흥 관아에서 의좋은 형제 효제비와 동상으로 이동했다. 의좋은 형제 비석은 대흥관아 바로 앞에 붙어 있고, 의좋은 형제 동상은 관아 옆 면사무소와 초등학교 사이에 공원처럼 조성되어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의좋은 형제 이야기는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정도로 알고 있지만 실제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는 실화이다. 1978년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서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가 발견되고, 최근에 이두문자가 해독됨으로써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다.
이 비석은 고려초 효자로 이름난 이성만과 이순 형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연산군 3년(1497년) 지신사(知申事) 하연(河演)의 주청에 의해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佳芳橋) 옆에 세워졌으며, 조선초기 양식의 화강암 비석에 이성만 형제의 갸륵한 행실에 대하여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모범되게 하라는 173자가 기록되었다
따라서 비석의 위치는 이곳이 아니라 예산군 개뱅이다리 근처에 있었는데 예당 저수지로 수몰 위험이 있어 현 위치인 대흥면 사무소 앞으로 옮겼다.
의좋은 형제상 앞에 놓여진 12개의 돌에는 1964년에 발행된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려있는 '의좋은 형제'이야기 전문이 새겨져 있다.
하오 2시 이제 마지막 순례지 해미로 가야 한다. 그러보니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다. 슬그머니 시장기가 엄습한다. 일단 출발하여 도로변의 식당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민물 새우탕으로 점심을 때우고 다시 해미 향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