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92. 불교의 중국전래와 낙양
후한 명제 꿈에 金人본 후 불교 중국땅에 들어와
|
<백마사 제운탑> |
사진설명: 13층(높이 35m)인 제운탑은 낙양시내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탑이자, 당나라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멋진 탑이다. |
중국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낙양을 빼놓을 수 없다. 불교의 중국 전래와 관련 있는 ‘최초의 사찰’ 백마사, 중국을 대표하는 석굴 가운데 하나인 용문석굴이 낙양에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불교는 언제쯤 중국에 공식적으로 전래됐을까.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기 위해서는 중국불교의 시원을 짚어야만 하기에 이 문제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에서 관건은 중국이다.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 일본 등지로 확산됐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언제 어떻게 공식적으로 전래됐는가’에 대해선 황당무계한 전설로부터 사적(史籍)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그 중 어느 하나로 결정하기는 어렵다. 흔히 거론되는, 후한의 명제가 꿈에 금인을 보고 불법을 구했다(感夢求法)는, 〈모자이혹론(牟子理惑論)〉에 나오는 기록도 영평연간(58~75)보다 100년 뒤에 정리된 것으로, 수많은 추측이나 사건이 부가됐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모자는 낙양엔 가보지도 못했고, 중국 남부지역에서 〈이혹론〉을 지었다.
이처럼 ‘불교의 중국 초전설(初傳說)’을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 펴냄), 〈중국불교사〉(불교시대사 펴냄), 〈중국불교〉(민족사 펴냄) 등에 의거해 모든 설들을 ‘시대 순으로’ 정리해보자. ‘불교의 중국 전래설’과 관련해 진(晉)의 곽박이 찬술한 〈산해경〉 ‘해내경’에 나오는 ‘삼황오제설’을 먼저 들 수 있다. 4000~5000년 전 전설 속 인물들인 삼황오제 때 이미 불교가 알려졌었다는 이 설은 지나치게 황당해 고려할만한 가치는 없다. 다음으로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을 들 수 있는데, 〈역대삼보기〉, 〈한법본내전〉, 〈주서이기〉 등에 관련 기록이 나온다. 이들 책에 의하면 부처님은 주 소왕(기원전 1052~1002) 때 태어났으며, 이 때 이미 부처님 이름이 중국에 알려져 성인으로 불렸으며, 인도에서 스님이 왔다는 설이다. 즉 노자가 부처님으로 태어나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설. 그러나 이 설 역시 믿기 어렵다.
도선스님이 찬한 〈광홍명집〉 권1 ‘귀정편’에 나오는 ‘공자설’도 신빙성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열자〉 권4 ‘중니편’을 인용, 기록한 〈광홍명집〉에 의하면 “공자가 서방에 있는 부처님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중국과 인도는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설을 믿기 어렵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전국 시대 말엽인 연(燕) 소왕(昭王. 기원전 311~299) 때 신독(인도)국에서 ‘시라’라는 130세 되는 환술사가 연나라 수도에 와 손가락 끝에서 10층짜리 부도를 출현시켜 불법을 전파했다는 ‘연소왕설’, 강남의 유송(劉宋) 시절 종병(宗炳)이 지은 〈홍명집) 권2 ‘명불론’에 나오는 학설인 전국시대 제나라(기원전 386~221) 수도 임치성에 아육왕사가 있었다는 ‘아육왕사설’ 등도 믿기 힘든 설임이 분명하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이, 진시황 시절 불교가 중국에 전래됐다는 ‘진시황설’. 여기엔 두 가지 내용이 있다. 하나는 이른바 ‘석리방(釋利房)의 전교설’로 수나라의 비장방(費長房)이 쓴 〈역대삼보기〉 권1과 남송의 지반(志磐)이 지은 〈불조통기〉 권35에 관련 기록이 보인다. 이들 책에 따르면 시황제 4년(기원전 217) 사문인 석리방 등 18명의 현자가 불경을 가져왔으나 시황제가 금지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기〉 권6 ‘진시황본기’ 제6에 나오는 기록으로, 시황제가 병기를 녹여 12좌의 금인을 주조했다는 것이다. “〈불조통기〉나 〈역대삼보기〉 기록은 후인이 조작한 〈주사행경록〉에 근거를 두고 작성해 믿을 수 없고, 진시황 시절 만든 금인은 불상이 아닌 종고(鐘鼓)를 매다는 횟대를 사람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기에 두 가지 설 모두 믿기 어렵다”고 문명교류 연구가 정수일씨(전 단국대 교수)는 분석했다.
‘노자화호설’등은 믿기 힘든 說
북제의 위수(魏收)가 지은 〈위서〉 ‘석노지’에 나오는 ‘휴도왕 금인설’도 믿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석노지’에 의하면 전한 무제 원수 2년(기원전 121) 곽거병이 흉노를 토벌했을 때 흉노의 휴도왕이 모셨던 금인을 얻어 감천궁에 안치했는데, 이 금인이 바로 불상으로 무제가 그것을 궁 안에 봉안했다는 것이 ‘휴도왕 금인설’의 핵심. 그러나 작고한 일본의 가마다 시게오교수는 “위수가 근거한 〈사기〉 권10의 ‘흉노열전’이나 〈한서〉 권55의 ‘곽거병전’엔 휴도왕이 금인을 얻었다는 기사만 있지, 그것을 감천궁에 안치했다는 언급은 없으며, 〈사기〉 원문은 ‘휴도왕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신 금인’이라고 기술하고 있어 이 금인이 불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휴도왕 금인’은 불교 전래와는 무관함을 알 수 있다.
|
사진설명: 백마사 경내. 참배객과 관광객이 왔다 갔다 하는 등 나름대로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
〈위서〉 ‘석노지’에 나오는 ‘장건 전문설’ 또한 믿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무제의 명을 받고 대월지에 간 장건(?~기원전 114)이 대하(大夏. 박트리아.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도착해 신독국(인도)의 부도(불교)에 관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기〉 ‘대완전’이나 〈한서〉 ‘서역전’엔 장건이 불교를 알고 있었다고 믿을 만한 기록이 전무하다. 전한 선제 시절 〈열선전〉을 쓴 유향(劉向)과 그의 아들 유흠(劉歆)이 불교를 알고 있었다는 소위 ‘유향불전설’도 믿을 바는 못된다고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지적한다.
이밖에 위나라의 어환이 찬술한 〈위략〉 ‘서융전’에 전한 애제 원수 원년(기원전 2)에 박사 제자 경로가 대월지 왕의 사신인 이존으로부터 부도경(불교)을 구수(口授)받았다는 ‘이존구수경설’, 후한 광무제 건무 15년(39)에 명제의 이종동생인 초왕 영(英)이 숭불(崇佛)했다는 ‘초왕영숭불설’ 등은 신빙성은 가지만 불교의 공식 전래는 아닌 것으로 학자들은 파악한다.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게 됐거나, 불교와 인연을 맺은 소위 ‘사전(私傳)’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중국 공식 전래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그래서 흔히 공전(公傳)의 시발로 보는 것이 후한 명제의 ‘감몽구법설(感夢求法說)’이다. 〈후한서〉, 〈위서〉, 〈고승전〉, 〈출삼장기집〉, 〈위서〉 등에 나오는 이 기록의 내용은 이렇다. 명제가 꿈에 장대한 금인을 보았는데, 정수리에서 빛이 비춰지고, 색깔은 황금색이었다. 신하들에게 물으니 박식한 부의(傅毅)가 “허공을 날아다니고 몸에서 빛을 발하는 천축의 득도자 부처가 바로 몽중의 신 같다”고 답했다.
|
사진설명: 제운탑 앞에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중국인. |
명제는 즉시 채옹이란 사람을 사신으로 인도에 보냈다. 채옹은 섭마등, 축법란스님과 함께 〈사십이장경〉 등 경전과 불상을 백마에 싣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명제는 성 서쪽 옹문 밖에 백마사를 지어 두 스님을 머무르게 했다. 이상의 여러 전래설을 통관하면, “전한 후기부터 불교가 전해지기 시작해 후한 중기 국가가 전래를 공인하게 됐고, 후한 말기에 불교다운 모습으로 정착됐다”고 정리할 수 있다.
‘불교의 중국전래설’을 생각하며 백마사로 간 것이 2002년 10월8일. 어제 낙양에 도착해 아침에 용문석굴을 보고 곧바로 백마사로 갔다. 낙양 시내 서쪽 10km 지점에 있는 백마사 산문엔 한 쌍의 백마상이 서 있었다. 경전과 불상을 싣고 중국에 왔다는 백마. 백마사 산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중국에 불교를 전했다는 축법란 스님의 복발탑과 섭마등 스님의 복발탑이 보였다. 탑 앞에 비도 서 있었다. 세운지 오래되지는 않아보였다. 복발탑은 석조기단 위에 둥근 탑신이 얹힌 모양이었다. 보상화문을 새긴 아치문이 기단부에 있어, 인도 복발탑에 중국식 원분(圓墳)을 가미한 독특한 절충양식으로 여겨졌다.
백마사에 축법란. 석마등 스님 복발탑
|
사진설명: 백마사에 있는 섭마등스님의 복발탑(왼쪽 뒤)과 비. |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간간이 왔다 갔다 했다. 사천왕을 봉안한 천왕전, 청대의 석가삼존대불을 모신 대불전, 대웅전, 접인전(接引殿), 비로각 등이 남북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데, “모두 명나라 때 건축양식”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백마사는 사실 중국 역사의 산증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후한 명제 때 창건돼 파괴와 중수가 수없이 반복된 사찰이기 때문이다.
190년 후한 헌제가 장안으로 피난 갈 때 백마사는 1차 소실됐다. 234년 다시 중건된 백마사는 309년 흉노족이 낙양에 들어왔을 때 2차로 소실된다. 495년 북위 효문제가 다시 세웠지만 534년 북위가 망할 때 3차로 전소되고 말았다. 그러다 685년 측천무후의 칙명으로 다시 중건됐으나, 755년 안사의 난 당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곧 4차의 중건이 있었고, 845년 회창 폐불 때 명맥은 유지했으나, 946년 후진 멸망 때 다시 5차로 소실되고 말았다. 992년 송태조가 중건하고, 1390년 명태조가 백마사를 대대적으로 중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야말로 소실과 중건이 되풀이된, 지난한 역사를 백마사는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
사진설명: 백마사에 있는 축법란스님의 복발탑(오른쪽 뒤)과 비. |
백마사와 이어진, 비구니스님들이 살고 있다는 사역(寺域)으로 건너갔다. 비구니스님들이 보였다. 합장하고 지나 제운탑이 있는 곳으로 갔다. 13층(높이 35m)을 자랑하는 제운탑은 낙양 시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탑이자, 최대의 건축물이다. 서안에서 본 대안탑, 소안탑과 비슷한 탑으로, 당나라 양식 탑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 앞에서 한 중국인 신도가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오체투지 한 체 한 참이나 일어나지 않기에,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땅바닥에 전신을 눕힌 채 한 참이나 간절하게 기도하는 중국인 신도를 보며, 중국에도 불교가 널리 확산되고 있구나 생각했다. 중국불교는 그렇게 서서히 소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호에는 ‘서안, 낙양의 삼국 유학승’을 연재합니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