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세월,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우리의 하루하루가 곧 세월
지난 10월 6일 올해의 노벨 문학상이 프랑스의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돌아갔다. 솔직히 나는 아니 에르노를 잘 알지 못했지만 여러 기사에서 언급되는 그녀의 이름을 보면서 그녀의 작품들이 너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벨 문학상이라는 이름이 주는 위대함과 숭고함에 눌려 아직 독서의 폭이 좁은 내가 과연 그녀의 작품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망설여지기도 했다.
얼마 전 서점 진열대에 전시되어 있는 아니 에르노의 책들을 보며 한 권 정도는 꼭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도서관에서 희망도서로 신청해 그녀의 작품 중 하나인 <세월>을 읽어보게 되었다. 희망도서로 신청해 새 책을 읽어보는 이 느낌도 신선했다.
아니 에르노, 프랑스 최초의 여상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는 프랑스 작가로 202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프랑스는 노벨 문학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라고 한다. 올해를 포함해 총 16명의 수상자가 나왔고, 1957년은 알베르 까뮈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여성 수상자는 아니 에르노가 처음이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삶을 문학적 소재로 삼아 자서전과 소설을 혼합한 형태의 글을 쓴다. 그녀는 가난한 노동자 계급자의 딸로 태어나 유명한 작가이자 문학 교수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경험한 사회적 불균형을 문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녀는 "나는 내 삶과 글쓰기라는 두 방식으로 살아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라고 말한다. 그녀의 글쓰기에는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겨있고 동시에 그녀가 살아냈던 그 시대의 사회적 문제점, 요소들이 담겨있다. 이번에 <세월>을 읽고 아니 에르노이 세계에 입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의 작품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세월,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
(출처: 알라딘)
모든 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워질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쌓인 사진은 삭제될 것이다. 침묵이 흐를 것이고 어떤 단어로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입을 열어도 '나는'도, '나'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계속해서 세상에 단어를 내놓을 것이다. 축제의 테이블을 둘러싼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저 단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며, 먼 세대의 이름 없는 다수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점점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p.19
그녀는 하나씩 차례로 떠다니는 인생의 여러 순간 속의 자신을 느끼고 있다.
p.271
우리나라에서 <세월>은 1984Books에서 출간이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1984Books의 책을 참 좋아한다. <작은 파티 드레스>, <환희의 인간>의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품들이 출간된 출판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책의 표지가 너무나 감각 있고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나온 책들을 읽으면 내가 지적인 독서인이 된 듯한 기분도 든다. 이번 <세월>책의 표지 색과 사진 역시나 감탄스럽다.
작은 파티 드레스저자크리스티앙 보뱅출판1984Books발매2021.03.25.
환희의 인간저자크리스티앙 보뱅출판1984Books발매2021.12.15.
아니 에르노, 세월, 1984Books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으로도 여겨지는 <세월>은 1941년부터 2006년까지, 노동자 계급으로 태어나 자란 것으로 시작해 교수로서의 생활, 그리고 현재 작가에 이르기까지 세월의 흐름과 함께 그녀 자신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녀' 또는 '우리'로 서술해가며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이야기 속 인물들은 아니 에르노 자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시대를 살아갔던 수많은 여성들을 대변한다.
철벽으로 인해 둘로 나뉜 유럽, 서쪽은 태양과 컬러들, 동쪽은 그늘과 추위, 눈, 그리고 언젠가 부다페스트처럼 결국 프랑스 국경을 넘어 파리에 배치될 소련의 전차, 그녀를 사로잡은 너지 임레(헝가리의 정치가, 혁명에 참여하고 공산당에 입당함)와 카다르(헝가리의 정치가, 수상)라는 이름, 그녀는 그 음절들을 간헐적으로 반복해서 읊는다.
p.84
나는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만 조금만 알뿐, 예를 들면 세계 대전, 베트남 전쟁, 강제 수용소 등등... 프랑스의 역사는 거의 알지 못하고 프랑스의 유명 인물들도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낯선 이름이나 알듯 말듯 한 역사적 사실이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검색해가며 그 시대의 상황을 알아보려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념 대립으로 인한 전 세계적인 혼란을 이야기하는 부분들을 읽으며 인류 역사의 그 혼돈스럽고 슬픈 한 부분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이념 대립이 유럽의 나라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까지 미친 영향들을 생각해 보며 우리 인류는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우리는 모든 것을 시도해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p.141
특히 프랑스 68혁명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68혁명은 1968년에 대학생들을 시작으로 일어난 시위로 당시 미국의 베트남 침략과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반대했던 혁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기성세대와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혁명으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정치와 노동 조건의 평등함을 요구하는 기회가 되었다고도 한다. 68혁명 이야기들을 읽으며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도 생각이 많이 났다.
2000년이 다가왔다. 우리가 그 시대를 알게 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p.274
첫 번째 비행기가 국제무역센터를 공격하고 커플들이 손을 잡고 공중으로 몸을 던졌던 순간, 각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내려 했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었다. 15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3,000명의 사람들과 동시에 살아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들의 기억을 떠올리자면, 나는 치과에 있었고 도로에 있었으며 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대성에 당혹스러워하며 지구상에 사람들과 떨어져 살고 있다는 것과 똑같은 불안정함 속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280
책 뒷부분으로 가면서 2000년대로 들어선다. 시대에 따른 프랑스의 정치적 변화, 문화적 변화와 함께 컴퓨터, 핸드폰의 발전에 적응해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먼 유럽의 사람들도 그저 흐르는 세월에 몸을 맡기며 살아가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의 9.11 테러,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전쟁, 클린턴 등도 언급되는데 나도 9.11로 건물이 갈라지는 그 끔찍한 장면을 뉴스에서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대에 이 땅 위에 살다간 그녀의 행적을 이루고 있는 기간이 아니라 그녀를 관통한 그 시간, 그녀가 살아 있을 때만 기록할 수 있는 그 세상이다.
p.318
초반에 책을 읽을 때는 어려워서 과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지 스스로 의심도 들긴 했었지만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면서 점점 몰입해가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낯선 인물의 이름이나 기념일이 나올 때마다 검색해 보고 기사나 사진 등을 보며 그 시대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만났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1941년부터의 아니 에르노가 살던 시대를 살고 있었으며 그 세월을 같이 겪고 있었다. 한 사람이 겪은 모든 일들이 곧 세월이며 역사임을 깨달았다. 아니 에르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이마다 자신이 살아온 해를 규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과거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p.97
낮이 길어진 3월, 겨울옷을 입고 너무 더울 때면 - 다가오는 것은 여름만이 아니라 형체도, 계획도 없는, 다만 인생이었다.
p.106
점점 빠르게 등장하는 것들은 과거를 밀어냈다. 사람들은 용도를 묻지 않고 단지 무언가를 갖고 싶어 했으며, 당장 그것의 값을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이 괴로워했다.
p.114
우리는 어른이 된 그 아이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들을 결속하는 것은 피도 유전자도 아닌, 다만 함께 보낸 수천 번의 나날들, 말과 몸짓, 음식들, 차를 타고 다닌 거리, 의식한 흔적 없는 다수의 공통된 경험들의 현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p.255
[출처] 아니 에르노, 세월, 202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우리의 하루하루가 곧 세월|작성자 매일 기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