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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회 열왕기 상권 14장-19장
1열왕 14,1-18 예로보암의 아들이 죽다
예로보암은 아히야의 예언자의 예언에 따라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눈에서 벗어나는 일만을 하였다. 예로보암은 자신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들자 아내에게 실로에 있는 아히야 예언자를 찾아가도록 한다. 아내에게 신분을 감추고 아히야 예언자를 찾아가게 한다. 그것은 예로보암이 이미 아들 치료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아내가 하느님을 찾아가 아들의 미래에 대해 묻도록 한다. 아히야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하지만 아들만이 무덤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곡을 하고 그를 묻을 것입니다. 예로보암에게 딸린 자 가운데 그 아이만 무덤에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보암 집안에서 그 아이만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좋게 보였기 때문입니다”(13).
14장은 아히야 예언자의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이것도 열왕기 안에서 눈에 띄게 얽혀 있는 예언자 전승에 뿌리를 둔다. 여기서 아히야는 왕자 아비야(14,12-13)뿐 아니라 예로보암의 집안 전체(14,10-11)에 다가올 죽음과 이스라엘 왕국 전체(14,15-16)가 맞을 재앙도 선언한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예로보암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예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종이든 자유인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그리하여 똥거름을 말끔히 치우듯이 나는 예로보암 집안을 치워 버리겠다”(10).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치셔서, 갈대가 물속에서 흔들리는 것처럼 만들어 놓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신 이 좋은 땅에서 이스라엘을 뽑아, 그들을 유프라테스 강 저쪽으로 흩어 버리실 것입니다. 그들이 아세라 목상들을 만들어 주님의 분노를 돋우었기 때문입니다”(15). 신명기계 편집자는 이 재앙들이 임금이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준다(14,8-9.16).
1열왕 14,19-20 예로보암이 죽다
“예로보암이 다스린 기간은 스물두 해이다. 그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자, 그의 아들 나답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20). 아히야의 불길한 예언(10,11,14-16절)에 비하면 열왕기의 간략한 기록은 마치 예로보암이 평온한 임종을 맞은 듯이 보이게 한다. 그러나 역대기에 의하면 예로보암은 유다 왕 아비야에게 베텔마저 빼앗기는 패전의 수모를 겪은 후 죽었다. 그리고 역대기는 그 사실을 '주님의 치심을 입어'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2역대 13,13-20). 그래서 여러 주석가들은 예로보암이 패전의 여파로 얻은 지병 때문에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예로보암이 22년 동안 통치하고(기원전 932/1-910년) 죽자 그의 아들 나답(910-909년)이 뒤를 이어 임금이 되는데 바아사에게 암살당한다(15,25-31).
1열왕 14,21-31 르하브암의 유다 통치
“한편 유다에서는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이 다스리고 있었다. 르하브암은 마흔한 살에 임금이 되어,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선택하신 도성 예루살렘에서 열일곱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나아마인데 암몬 여자였다”(21). 갑자기 북이스라엘에서 남유다로 장면이 바뀐다(14,21-31). 남왕국 르하브암의 17년간 통치를 보여준다.(기원전 932-914년) 르하브암도 경신례 행위, 아마도 가나안의 풍산 신 바알을 숭배한 것(14,23-24) 때문에 비난받는다. “또한 그 땅에는 신전 남창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민족들의 온갖 역겨운 짓을 그대로 따라 하였다”(24). '남창하는 자'(카데쉬)는 단순한 동성 연애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방 신전의 남창(男娼)을 말한다. 이들은 아세라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 소속된 남창들로서 의식(儀式) 중의 매음 행위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이 남왕국 내에 존재했다는 사실은 우상 숭배의 만연도 뜻하지만, 아울러 주님 신앙으로 결집된 이스라엘 공동체 의식이 이미 허물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짐승 같은 성행위는 사악한 이교 제의(異敎祭儀)에 속한 것이고, 그러한 제의가 성행했음은 곧 신정(神政)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탈출 20,1-17)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남북을 막론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신정국가 건립 목표를 잊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계절의 주기에 바탕을 둔 가나안 종교는 풍산 예식을 포함하는데, 이 예식에서 성행위는 중요한 상징적 자리를 차지하였다. 풍산 신의 신전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곳에 예배하러 온 남자와 여자들을 맞아 성행위를 하는 ‘신전 창녀와 남창들’(신명 23,18)이 있었다. 이 종교적 매춘은 이스라엘 신앙의 온전성과 순수성을 끊임없이 해치는 위협이었다.
그리하여 이집트 자료에서는 쇼셍크로 알려진 시삭이 기원전 927년에 공격하고 약탈을 감행하는데 이것은 하느님이 내린 벌로서 등장한다. “르하브암 임금 제오년에 이집트 임금 시삭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주님의 집에 있는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가져갔다. 모조리 가져가 버렸다. 또한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도 모두 가져갔다”(25-26).
르하브암의 모친 암몬 사람 나아마라는 이름이 그 출생지와 더불어 재차 언급되었다(21절). 이처럼 언급이 반복된 이유로서 다음 세 가지가 추측된다. 먼저 르하브암이 우상 숭배자로 타락함에 있어서 이 암몬 여인의 영향이 컸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그녀는 유다 땅에 암몬의 가증한 우상 '몰록'을 성행시킨 장본인이었을 것이다(23절). 둘째로, 솔로몬의 실책이 그 아들에게 미친 악영향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신명 28,28). 셋째로, 온 백성들에게 여인의 어그러진 처신에 대해 경계시키기 위함이다. 현숙한 아내와 자애로운 어머니로서의 여인의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 한 여인이 남편과 자녀는 물론 나아가서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 또한 엄청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하느님께서는 특히 이방 여인과의 혼인을 금지 하였던 것이다(신명 7,3).
한편 르하브암은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이 있었지만 그중 마아카를 가장 총애하였다. 그래서 마아카의 아들 아비얌을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목해 놓았다(2역대 11,21-22).
1열왕 15,1-8 아비얌의 유다 통치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 임금 제십팔년에 아비얌이 유다의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세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마아카인데 아비살롬의 딸이었다”(1-2).
남유다의 아비얌이 임금이 되던 해를 ‘예로보암 임금 제 십팔년에’라는 말로 시작한다. 예로보암의 즉위 연대는 기원전 930년경이다. 그러므로 이 해는 기원전 930년경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남유다나 북이스라엘 왕의 즉위 연대를 이렇게 이스라엘이나 유다 왕의 연대에 비교해서 밝히는 상관 방법은 열왕기의 특징이다(9,25,28,33 절). 당시에는 이외에 달리 객관적 연대 표시 방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비얌은 르하브암의 뒤를 이어 유다의 제 2대 왕으로 등극한 인물이다. 그런데 2역대 11,21-22에 의하면 아비얌은 원래 장자(長子)가 아닌, 단지 르하브암이 장자로 '삼은'(후계자 지명을 의미) 아들로 나타난다. 이는 아비얌의 모친 마아카(2절)가 르하브암이 총애하는 왕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르하브암의 행위는 할아버지 다윗의 행위와 흡사하다. 왜냐하면 과거 다윗도 장자를 제껴 놓고 총애하는 밧 세바의 아들 솔로몬으로 후계자를 삼았기 때문이다(1,5-40). 그러나 다윗의 경우와 달리 르하브암은 일찌감치 아비얌을 왕위 계승자로 선포함으로써 사전에 왕비를 둘러싼 경쟁 가능성을 봉쇄하였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3년은 예로보암 재위 제 18년에서 20년 사이(기원전913-911년경), 즉 햇수로 3년을 가리킨다(9절). 그러므로 아비얌의 실제 재위 기간은 무척 짧았던 셈이다. 그 역시 아버지 르하브암과 마찬가지로 폭정과 이교신을 섬기기도 하여 짧은 통치를 하였던 것이다.
1열왕 15,9-24 아사의 유다 통치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 제이십년에 아사가 유다의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마흔한 해 동안 다스렸다. 그의 할머니 이름은 마아카인데 아비살롬의 딸이었다. 아사는 자기 조상 다윗처럼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였다”(9-11).
북왕국의 초대왕 예로보암은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남왕국 3대 왕(르하브암,아비얌,아사)을 상대한 셈이다. 그런데 2역대 13,20에 의하면, 예로보암은 아비얌과의 전투 이후 다시 강성하지 못하고 결국 주님의 치심을 입어 죽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아사가 즉위할 무렵 예로보암은 패전의 후유증으로 고통당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로보암은 아사의 통치에 별 위험이 되지 못했다. 이 점이 아사가 비교적 안정된 정세 속에 눈을 내부로 돌려 종교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11-15절).
41년간 통치한 아사는 유다의 역대 왕들 중 세 번째로 장기간 동안 통치한 인물이다. 유다 왕들의 통치 연대를 살펴보면, 선한 왕들의 통치는 대체로 길고 악한 왕들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는 자기 할머니 마아카마저 아세라를 위하여 역겨운 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모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아사는 역겨운 상을 잘라 내어 ‘키드론 골짜기’에서 불살라 버렸다”(13).
따라서 아사 임금이 41년간 오래도록 왕위가 존속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의 결과였다(탈출 20,12). 한편 아사 통치 기간(기원전910-869) 중 북이스라엘의 왕위는 무려 여섯 차례(나답,바아사,엘라,지므리,오므리,아합)나 바뀌었다.
“아사와 이스라엘 임금 바아사 사이에는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전쟁이 있었다”(16). '내내'(칼 예메헴)은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모든 날들에'란 뜻이다. 이는 앞서 14,30의 '항상'과 15,6의 '사는 날 동안'이나 마찬가지의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 왕국 초기부터 남북간에 전쟁이 있더니 각각 3대 왕에 이르도록 전쟁이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역대기는 아사 즉위 후 십년 동안 평화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2역대 14,1). 즉 예로보암의 말기 2년, 나답의 2년, 바아사의 6년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은 전쟁이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츠마라임 전투에서 아비얌에게 패전한 이후(2역대 13,1-22) 미처 세력을 회복하기도 전에 정권이 교체되는 등 불안정한 북왕국 내부의 정정(政情) 때문이다. 그러나 바아사는 어느 정도 정국이 수습되자 다시 남유다와의 전쟁에 돌입하였다. 이처럼 분열 왕국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끝없는 전쟁의 악순환이다. 그러므로 비극의 시대의 한 표징으로서 열왕기는 이 점을 자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14,30;15,6).
17절에서 이스라엘 임금 바아사는 라마를 세웠다. 이것이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 침공 원인이 었다. 라마는 원래 베냐민 지파의 성읍으로서(여호 18,25) 예루살렘 북방 약6Km 지점에 위치하였다. 따라서 바아사는 이곳을 점령함으로써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던 것같다. 백성들의 남하(南下) 제지,하느님의 축복 가운데서 유다 왕국이 평화를 누린다고 하는 소문은 북 이스라엘 곳곳에까지 전해졌고, 그 소문을 들은 자들 중 대거 월남하는 이들이 늘어났다(2역대 15,9). 그러자 포악한 바아사왕은 예로보암과 동일한 염려(12,27)에 사로잡힌 나머지 라마를 기반으로 하여 남하 무리들을 강제 저지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유다 정복을 위한 전초 기지 확보, 라마는 유다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으므로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따라서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유다의 아사왕은 황급한 나머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비책을 마련하였던 것이다(18-22절). 한편, 바아사의 침공 연대를 역대기는 아사 왕 36년이라고 말한다(2역대 16,1). 그런데 열왕기는 바아사가 죽고 아들 엘라가 즉위한 때가 아사왕 26년이라고 한다(16,8). 따라서 이러한 연대의 문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비교적 유력한 견해는 '아사 왕 36년'이란 '왕국분열 이후 36년'으로 보는 견해이다.
당시 성전과 왕궁의 곳간에는 르하브암 당시 이집트의 시삭에게 약탈당하고 남은 것들 이외도(14,26) 아비얌이 예로보암과의 싸움에서 탈취한 보물들과(2역대 13,18) 아사가 에티오피아인들을 물리치고 탈취한 물건 등(대하 14,15)이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기간 지속되었던 평화 시기 동안 유다 왕궁에는 많은 은금 보화들이 축적되었을 걸로 짐작된다. 따라서 아사가 이 많은 보물들을 '모조리 거두어서' 아람 임금 벤 하닷에게 바치고 구원병을 요청하였다는 사실은, 바아사의 침공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가를 잘 대변해 준다. 하지만 그가 일찍이 체험한 하느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였더라면 그렇듯 심각한 공포와 낭패감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사의 나머지 모든 행적과 모든 무용, 그리고 그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세운 성읍들에 관한 것은 유다 임금들의 실록에 쓰여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늘그막에 발에 병이 났다”(23). 아사는 대체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은 왕이긴 하지만(11-15절) 그렇다고 전혀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벤 하닷을 끌어들여 북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한 일외에도(18-21절) 그가 이처럼 발에 병이 생겼을 때 하느님을 의지하지 않았다고 역대기는 서술한다(2역대 16,12). 이는 곧 아사가 처음과 달리 세월이 흐를수록 점차 주님에게서 멀어져 갔음을 의미하는 한 증거이다. 한편 '병'에 해당하는 단어(하라)는 '문질러 없애다'란 뜻에서 온 말이다. 이로 보아 아사의 발에 난 병은 가려움증이 아주 심한 피부병이었던 듯하다.
1열왕 15,25-34 나답과 바아사의 이스라엘 통치
“유다 임금 아사 제이년에 예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두 해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르고 자기 아버지의 길을 걸었다. 아버지가 이스라엘까지도 죄짓게 한 그 죄를 따라 걸었다”(25-26). 나답은 2년간 통치하면서 악한 짓만을 골라해서 이사카르로 지반 출신 바아사의 반란으로 죽음을 당했다. 따라서 북쪽에서는 바아사가 나답을 암살하고(15,27) 반란을 일으켜 24년 동안 통치한다.(기원전 909-886/5년) 아들 엘라가 뒤를 잇지만 기원전 884년경 지므리에게 온 가족과 함께 암살당한다.(16,8-11) 지므리, 티브니, 그리고 오므리(모두 이스라엘 군대의 사령관)는 내전을 벌인다(16,15-22).
바아사는 24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는데 그도 예로보암이 걸었던 우상숭배에 빠져 주님의 눈을 거슬리게 악한 행위를 하였다.
1열왕 16,1-8 바아사의 이스라엘 통치
“바아사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내렸다. ‘나는 너를 먼지에서 들어 높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영도자로 세웠다. 그런데 너는 예로보암의 길을 걷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의 분노를 돋우었다”(1-2). "예후"란 이름은 "그는 주님이시다"란 뜻이다. 그런데 1절의 예후는 오므리 왕조에 반란을 일으킨 북이스라엘의 10대 왕 예후와는 동명이인이다(2열왕 9,2). 한편 예후의 아버지 하나니(Hanani)는 유다 왕 아사의 실책을 경고하다 옥에 갇힌 인물이다(2역대 16,7-10). 그리고 그의 아들인 예후는 16장에서처럼 바아사를 책망했을 뿐 아니라 여호사팟 왕을 아합왕과 결합한 일로 책망한 자이다(2역대 19,2).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과 예후 부자(父子)가 모두 하느님의 신실되고도 용맹스러운 예언자였음을 알 수 있다.
유다의 선견자인 예후가 이처럼 이스라엘 왕 바아사를 책망한 것은 당시 정세(15,32)로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즉 당시 예후의 예언 속에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을 향하신 하느님의 끝없는 관심과 배려가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해 남북 왕국으로 분단되기는 했으나 남유다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또한 동일하게 하느님의 언약 속에 포함된 백성이었으므로 하느님께서는 남왕국의 예언자 예후를 통해 북왕국에 대한 예언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이 만든 어떠한 인위적 방법이 굳건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든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예레 3,12).
“내가 너를 먼지에서 들어 높여”라는 말에서 바아사의 출신 신분이 매우 비천하였음과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느님의 주권과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상기시켜 준다. 즉 바아사는 왕통을 이은 자도 아니었으며 큰 지파 출신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로보암의 집을 향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14,14) 왕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이 같은 손길을 발견하였더라면 배은 망덕한 예로보암의 전철을 되풀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은 바아사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영도자로 세었다. 즉 바아사가 비천한 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된 것은 물론 그의 용맹이 탁월했기 때문이기도 하나 그 용맹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좇아 바아사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2절에서 바아사의 죄를 우상 숭배 곧 하느님께 대한 배은 망덕으로 규정하고 있음에 비해 3절은 이제 그에 상응 하는 하느님의 징벌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파라오 바아사의 가문을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되게 한다는 것이다. “바아사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4).
1열왕 16,8-14 엘라의 이스라엘 통치
“유다 임금 아사 제이십육년에 바아사의 아들 엘라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티르차에서 두 해 동안 다스렸다”(8). 엘라는 기원전 887-886년 2년간만 통치하였고, 자신의 부하 즈므리 장수의 모반으로 죽음을 당했다. 즈므리는 엘라가 술에 취했을 때 그에 딸린 시구들 모두를 죽였다. 이렇게 즈므리는 바아사 집안을 사라지게 하였다.
1열왕 16,15-20 즈므리의 이스라엘 통치
“유다 임금 아사 제이십칠년에 지므리가 임금이 되어, 티르차에서 이레 동안 다스렸다. 그 무렵에 이스라엘 군대는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속한 기브톤을 치려고 진을 치고 있었다”(15). 지므리가 1주일 동안이라도 왕으로 재위(在位)할 수 있었던 것은 기브톤 출정군이 티츠차로 회군(回軍)하는 데 1주일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회군한 군대는 마침내 시므리의 왕 행세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시므리의 7일 천하는 죄를 짓는 데는 시간이 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지므리가 엘라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이처럼 단명(短命)한 것은 백성들이 그의 반란에 동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16-18절).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지므리가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그 까닭은 시므리가 매우 잔인한 성품의 소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11절).
디르차 성이 함락되자 시므리는 최후의 도피처인 왕궁 위소로 도피했으나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오므리 군대를 목도하고서는 절망 끝에 그만 불을 놓아 자살하고 만 것이다. 사실 치므리는 자신이 잔혹한 유혈극을 벌였던 인물이었으니(9-11절) 왕권 쟁탈전에서의 자비란 기대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처럼 자살로 최후를 마친 지므리에게서 우리는 철두철미 자의성(恣意性)으로 일관한 그의 생애를 본다. 즉 그가 추구한 왕권은 스스로의 권력욕에서 기인했을 뿐 하느님께로부터 봉사의 직분을 받았다는 자각의 흔적이 전혀 없다. 따라서 신정 정치의 이상을 품은 열왕기 사가(史家)가 그런 지므리에게 조금도 정통성도 인정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지므리와 오십 보 백 보의 인물들이 들락날락 했던 북왕국 왕권 자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음은 당연하다.
1열왕 16,21-28 오므리의 이스라엘 통치
“유다 임금 아사 제삼십일년에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열두 해 동안 다스렸는데, 여섯 해는 티르차에서 다스렸다. 그는 사마리아 산을 세메르에게서 은 두 탈렌트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자기가 세운 성읍의 이름을, 산의 본래 소유자인 세메르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고 하였다”(23-24).
마침내 오므리가 이스라엘 임금이 되고 몇 년 뒤에 예로보암 때부터 북쪽 임금들의 수도였던 티르차 성읍을 떠나 사마리아를 새로운 수도로 세운다. 사마리아는 기원전 722년에 파괴될 때까지 북왕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열왕기 저자는 오므리를 불충실하다고 판단하여 더 이상 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므리는 12년 동안 통치했다(기원전 884-874년).
1달란트(Talent)를 대략 34kg으로 봄으로 은 두 달란트는 68kg 정도이다. 그런데 당시 은의 주가가 아무리 높았다 하더라도 금보다는 낮았을 터이니 오므리가 사마리아 산을 구입함에 있어 비싼 가격을 치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정작 중요한 점은 오므리가 이 산을 매입한 것이 율법에 위반되는 행위였다는 점이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토지는 하느님께 속한 것인 동시에 각 백성들이 영원한 유산으로 후손에게 물려주도록 정해진 것이었다. 따라서 율법은 토지를 영구적으로 매매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였다(레위 25,23-28). 물론 다윗이 아리우나의 타작 마당을 산 경우가 있기는 하나(2사무 24,21), 오므리의 사마리아 구입과는 그 성경이 달랐다. 즉 아리우나는 이방 부족인 여부스 사람이었으며, 그의 타작 마당을 다윗이 구입한 것도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종교적 목적에서 그리하였다. 한편 오므리의 불법적 토지 매입은 그의 아들 아합에게도 영향을 준듯하다. 아합은 기업으로 물려 받은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취하였다(21,1-16).
사마리아(Samaria)는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67km. 지중해 동쪽으로 약 40km 가량 떨어진 팔레스타인 중앙 산맥의 한 언덕에 위치한 성읍이다. 이곳은 북이스라엘의 전(前) 수도였던 세켐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가량 떨어진 곳이다.
오므리가 정적 티브니를 물리치고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른 지 2년 째 되던 해였다. 그때에는 정국(政局)이 어느 정도 수습되었으므로 오므리는 새로운 왕궁 건축과 수도 정비 사럽에 온 신경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마리아성 건축 원인은 대략 다음과 같이 추정할 수 있다. 예로보암에 의해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은 지므리에 의해 불타 버렸고(18절), 수도 티르차 또한 그 동안의 극렬한 전투로 말미암아 형편없이 파괴되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왕조에 걸맞는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고, 사마리아의 지형학적 우수성 때문에 사마리아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후대에 북왕국을 공격한 여러 나라의 군대가 끝내 사마리아는 점령하지 못했고, 강대국 아시리야조차도 장기적인 포위 공격 끝에야 함락시킬 수 있었던 점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20,1-30).
26절을 보면 오므리의 죄악은 무엇보다도 예로보암의 경우와 같이 우상 숭배의 죄악인듯하다(12,28-30). 그런데 본절에서 보듯 오므리는 이전 누구보다 더욱 악하게 행했다고 고발당한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아합이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결혼하고 우상 숭배에 열을 올린 것(29-33)을 보면, 이미 오므리 시대에 이방과의 교류 및 우상 숭배의 정책적 장려가 있었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다.
1열왕 16,29-33 아합의 이스라엘 통치
“아합은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죄를 따라 걷는 것만으로는 모자랐던지, 시돈인들의 임금 엣바알의 딸 이제벨을 아내로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바알에게 가서 그것을 섬기고 예배하기까지 하였다”(31). 아합(기원전 874-853년)은 아버지 오므리를 계승하고 페니키아 공주이자 가나안 바알 종교의 열렬한 사도인 이제벨과 혼인한다. 오므리 왕조 시대(오므리, 아합, 아하즈야, 요람)에 두 가지 큰 위기가 닥친다. 하나는 왕실이 북왕국에서 야훼 종교를 쓸어버리고 바알 종교로 대체하려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합의 딸 아탈야 때문에 다윗 왕조가 거의 소멸하게 된 것이다.(2열왕 11장) 이 두 위기를 모두 지휘한 사람이 이제벨이었다.
시돈인들의 임금 엣바알의 딸이자 아세라 여신(아스토렛/ 아스타르테?)의 여사제인 이제벨은 바알 종교의 열정적인 사도였다. 그녀는 바알 신당과 제단을 세우라고 아합을 설득한다(16,32). 또한 야훼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고(18,3-5) 엘리야에게 개인적으로 대항한다(19,1-3). 그리고 나봇이 잔인한 방식으로 죽도록 뒤에서 조종한다(21,7-15). 그녀는 결국 이스라엘 군대의 반역 사령관인 예후의 손에 죽는다(2열왕 9,30-37). 하느님은 이제벨과 맞서도록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보내신다.
1열왕 17,1 엘리야가 가뭄을 예언하다
북쪽에 따로 독립된 왕국을 세우고 특히 베텔 산당을 북부 왕국의 공식적이니 산당으로 정항 예로보암은 새로운 왕조를 세울 심산이었다. 하지만 예로보암의 아들 나답(기원전 910-909년)은 임금이 된지 일 년도 채 못 되어 암살당하고 말았다. 나답의 암살을 꾸민 자가 스스로 임금이 되어, 자기 아들(엘라, 기원전 886-885년)로 하여금 뒤를 이어 통치하도록 지명했는데, 역사는 반복되어 또다시 일 년도 못 되어 그 아들이 암살을 당하고, 그 암살자가 임금이 되어 칠 일 동안 통치했다. 그러다가 군대의 사령관 한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켜 북왕국에 어느 정도 질서를 잡았는데, 이 사람이 오므리였다(기원전 885-874년, 1열왕 15,25-16,28).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오므리는 위대한 임금이었다. 그는 나라를 안정시켰고, 페니키아와 강력한 유대를 맺음으로써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는데, 그 유대는 그의 아들 아합과 시돈 임금의 딸 이제벨의 결혼으로 나타났다. 오므리는 또한 호화로운 왕도(王都) 사마리아를 세우기도 했는데, 사마리아는 마지막까지 북왕국의 수도로 남아 있게 된다.
오므리가 죽자, 그 아들 아합이 투쟁 없이 왕관을 물려받아 이십여 년간 통치한다(기원전 874-853년). 페니키아의 가나안 여인인 아합의 아내 이제벨은 자기 조국의 종교에 대한 신앙심이 열렬하였다. 페니키아의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문화적으로 훨씬 더 앞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제벨은 페니키아식 형태의 가나안 종교를 장려함으로써 자기 남편이 다스리는 후진적인 백성의 수준을 끌어올리려고 시도했을 것이다(1열왕 16,29-34).
오므리와 아합이 통치하는 동안 귀족 계급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신흥 부유층과 마찬가지로 문화적으로 ‘현대화’되고 세련된 생활을 하고 싶어 했다. 따라서 흔히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관대함을 보여 주어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부자가 되어 자기들을 억압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자신도 해 보고 싶어 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가나안 종교를 장려하려는 이제벨의 움직임은 이런 모든 사회 계층에서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모든 계층에 있었는데, 고위 관리들(1열왕 18,3-4)과 몇몇 예언자 집단(2열왕 2장), 그리고 상당수의 일반 백성들(1열왕 19,18)이 그들이었다. 그 반대파 지도자는 시골 출신의 기인(奇人), 길앗의 엘리야였다. 엘리야는 아직 옛 전통에 따라 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계약과 율법을 통해 주님께서 부여해 주신 위대한 이상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백성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복경하고서 고통과 솟구치는 분노와 결정을 느꼈다. 하느님 백성이 되라는 고귀한 부르심이 가나안 문화를 모방하는 것으로 변절되어 가고, 주님 하느님의 자리마저도 가나안의 바알이 차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나안 사람들은 많은 남신들과 여신들을 믿고 있었는데, 그중 주요한 남신은 하닷이라고 불리었다(하닷은 바알 등 몇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닷은 폭풍과 번개, 천둥과 비의 신이었다. 농사의 작황은 강우량에 달려 있었는데 폭풍이 비를 몰고 오기 때문에 그는 풍요의 신이었고, 따라서 번영을 가져다주는 신이었다. 하닷의 상대가 되는 여신은 아세라였다(성경에서는 가끔 아스타롯이라고도 불린다).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번영을 약속하는 가나안 신들이 먼저 정의와 검소한 생활을 요구하시는 주님 하느님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엘리야 예언자 시대에 부자가 되기를 갈망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알 하닷을 섬기고 싶은, 적어도 그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과 동등하게 섬기고 싶은 유혹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참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분명히 불리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일상생활에서 엄격한 윤리 규정을 요구하셨는데, 그 규정은 사람들의 세속적 욕심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전례에 의한 예배(성적 다산 의식)를 통해 섬기는 바알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다.
엘리야와 관련된 일련의 이야기들(1열왕 17-19장)이 이제 북왕국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엘리야는 길앗, 곧 요르단 강 건너편에 있는 티스베 출신이다. 그의 임무 수행은 주로 아합의 통치와 이 임금과 그의 아내가 초래한 종교적인 위기의 시기동안 이루어진다.
이 대목에 나오는 엘리야 이야기와 뒤에 나오는 엘리사 이야기는 열왕기의 나머지 부분과 다른 특징을 갖는다. 어떤 이야기는 사건과 관련된 임금을 언급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이런 것들을 생략한다.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는 아마도 그들을 따랐던 제자 집단 안에서 발전했을 것이다. 이 제자집단은 예언자들이 설교한 말보다는 행동에 집중했는데 특히 그 말들의 기적적인 힘을 강조했다.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 여덟 개 가운데 다섯 개가 1열왕 17-19장에 들어 있다(1열왕 21장; 2열왕 1-2장 참조).
“길앗의 티스베에 사는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살아 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1). 엘리야는 이제벨의 영향에서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면서 선전포고로 심각한 가뭄을 예고한다. 이 자연재해는 바알 종교의 풍산 예식이라는 배경에서 볼 때 매우 역설적이다.
1열왕 17,2-7 엘리야와 까마귀
엘리야는 아합을 피해 요르단 건너편에 있는 크릿 시내에 숨는다(17,2-7). 가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엘리야는 도망치듯 크릿 시내로 숨는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다.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4). 까마귀가 부정한 조류(레위 11,5)라 하여 '까마귀'(오르빔)를 '아랍인들'(아르빔)이나 '상인들'(오리빔)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오히려 본문은 까마귀로 읽어야 할 강조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온통 바알 숭배로 돌아선 시점에 주님 신앙의 용사 엘리야를 지탱해준 것은 까마귀, 이방인 과부(9-16절) 등 이라는 역설의 강조점을 본문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이 부정한 것들로 여긴 요소들이 도리어 이스라엘의 구원과 정화에 한몫 기여한 것이다.
엘리야가 예언 선포 이후(1절) 이처럼 잠적해버린 사실을 놓고 그 당시 비웃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는 피신을 수치로 꺼리지 않고 즉각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다. 즉 엘리야는 사람의 취향과 기질에 영합하여 영웅이 되기보다 자신을 잊은 듯 하느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6).
까마귀는 본래 매우 게걸스런 날짐승으로 시체와 썩을 것들을 즐겨 먹어치운다. 그런데 그런 까마귀가 엘리야에게 음식을 고스란히 날라주었다는 데에서 기적적인 성격이 한층 더 강조된다. 한편 이처럼 까마귀도 순종케 하는 하느님의 능력은 엘리야에게 깊은 감명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즉 주님 신앙의 열의가 대단한 엘리야의 눈에는 당시 우상 숭배에 열중하는 백성의 모습이 마치 부패한 시체를 탐하는 까마귀떼처럼 가망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까마귀조차도 순종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다.
18,1과 야고보서 5,17에 의하면 당시 이 같은 가뭄은 3년 6개월 동안이나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1열왕 17,8-24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 기적을 베풀다
시돈에 있는 사렙타에서 엘리야는 절망한 과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해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적을 행한다(17,10-16). 이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그는 과부의 죽은 아들의 생명을 되살린다(17,17-24).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8-9).
엘리야는 사렙타로 간다. 아합 당시의 가뭄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팔레스틴 여러 지역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낮선 나그네의 물 요구는 여간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근동에서는 식수 대접이 거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겨졌다 하더라도 어려운 승낙이었다. 이는 사렙타 과부가 넘어야 할 첫번째 시험(test)이었다. 한편 엘리야가 물을 달라는 요구를 통해 자신을 대접할 과부를 식별하는 장면은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찾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창세 24,17). 마실 물을 달라는 부탁을 거절치 않자 엘리야는 과부에게 이제 좀 더 당돌한 부탁을 한다. 즉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더욱 식량난이 열악한 형편인 과부에게 빵을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엘리야의 다소 무리한 부탁은 자신에게 대접할 과부가 누구인지 알아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으니(9절) 사렙타 과부는 이 두 번째 시험마저도 통과하여야 했다.
“엘리야가 과부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13). 여인은 엘리야의 말을 따랐다. 그런데 나는 정말 엘리야의 말을 따라 행동할 수 있을까.
엘리야의 요청에 과부가 당황한 까닭은 그나마 남은 밀가루는 최후의 만찬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빵 하나를 요구한 엘리야의 한 마디는 그야말로 과부에게 자신의 전부를 요구하는 엄청난 요청이 아닐 수 없었다. 훗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이 과부가 신앙의 표본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도 이처럼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그녀가 순종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루카 4,24-26). 한편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에 몰두하는 동안 바알 숭배의 본 고장에서 한 과부가 바알 신앙을 포기했다는 점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리 캄캄한 흑암 속에서도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의 빛이 비추고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에게 축복이 부여된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16). 여기서 하느님의 초자연적 개입과 말씀을 확실히 이루심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지 현상 자체의 건조한 설명을 요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하튼 엘리야의 기적은 제자 엘리사가 가난한 과부에게 기름을 가득 채워주었던 기적(2열왕 4,1-7)과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써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연상케 한다(마르 6,41-43).
그러나 호사담화라고 말할 수 있다. 가뭄시기에 엘리야를 통해 풍부한 밀가루와 기름이 있지만 아들이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게 되었다. 과부는 몸부림치며 말한다. “여자가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하느님의 사람이시여! 어르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한테 오셔서, 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18).
‘하느님의 사람이시여!’라는 그 말과 행위에 있어서 진정한 예언자를 일컬을 때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사렙타 과부는 엘리야가 베푼 기적을 보고서 엘리야가 진정한 주님 하느님의 예언자였음을 확신한 게 분명하다. 과부에게 있어서 독자(獨子)란 대개 유일한 생의 희망인 법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죽자 과부는 층격을 받고 엘리야와의 관계를 부정한다. 즉, 사렙타 과부는 엘리야에게 “'어르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한테 오셔서, 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라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기실 그 동안 과부가 엘리야를 봉양했던 것은 그가 하느님의 예언자였으므로 예언자의 대접을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과부는 예언자의 보상을 받았던 셈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들이 죽어버리자 그것은 과부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허무한 것으로 만들 정도의 큰 고통이 되고 만 것이다.
“제 죄를 기억하시고”라는 말은 재난이나 질병을 자신의 죄와 결부시켜 생각하는 고대인들의 통념적 사고 방식이 잘 담겨 있다(욥 4,7). 즉, 사렙타 과부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값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엘리야 같은 예언자가 옆에 있음으로 해서 과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한 의식을 갖게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은, 비록 엘리야조차도 당혹스러워 했지만(19-11절) 도리어 이것은 '하느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즉,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22-24절)을 통해 사렙타 과부는 하느님의 크신 능력과 보다 밝은 계시를 깨닫게 됨으로써 더욱 성숙된 신앙으로 진일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주님 하느님께서 유대인만의 하느님이 아닌 이방인의 하느님도 되신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로써 사렙타 과부는 더욱 더 진실되게 주님 하느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데리고 자신의 머물던 옥상 방으로 가서 자기 잠자리에 누였다. 이스라엘인들의 '옥상 방'(알리야)은 우리네 감각과는 달리 그 집의 가장 좋은 처소이다. 왜냐하면 팔레스티나와 같은 뜨거운 기후의 지방에서 지붕 위에 툭 트인 방은 비교적 통풍이 잘되는 쾌적한 곳이기 대문이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다락에 기거하고 있다는 것은 사렙타 과부로부터 기꺼운 환대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대에도 불구하고 사렙타 과부가 큰 불행을 당하였으니 그곳에 체류하고 있는 엘리야로서도 난처하고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과부 아들의 죽음과 과부의 항변은 엘리야를 적잖이 당황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는 당시 엘리야 자신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당혹한 일을 당하여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이 위로 세 번 자기 몸을 펼친 다음 주님께 다시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 저의 하느님,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21). 그리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은 간구하는 자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살아계신 분이심이 드러났다.
엘리야가 자신의 몸을 아이 위로 펼친 행위는 신체 접촉으로 병을 치료하는 신기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세 번 엎드린 것이 그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아이의 소생이 가능하다고 하는 엘리야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3'이란 숫자는 하느님의 '완전 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을 통해 몸의 질병이나 건강이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 옮겨진다(사도 20,9-12)에서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한 바오로의 몸짓이 있다. 그러나 생명을 되살리는 일은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명시적으로 야훼께서 귀속된다(17,22). 아들의 생명을 선물로 되돌려 받은 어머니는 “이제야 저는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사람이시며, 어르신 입으로 전하신 주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24)라고 고백한다.
1열왕 18,1-19 엘리야와 오바드야 그리고 아합
“세월이 많이 흘러 삼 년째 되던 해에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가서 아합을 만나라. 내가 땅 위에 비를 내리겠다”(1). 삼 년간 가뭄이 계속되었을 때 엘리야는 아합 임금의 궁내 대신 오바드야를 통해 아합을 만나다(1-8). 오바드야는 그때 궁정 관리였고 충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제벨의 학살에서 백 명의 예언자들을 보호해 준 행동(18,4)은 그의 용기를 보여주고, 집단 형태로 등장하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활동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아합은 가뭄의 저주를 한 엘리야를 보고 이스라엘을 불행으로 빠트린 자라고 물었다.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내가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님과 임금님 조상의 집안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계명을 저버렸고, 임금님은 바알을 따랐습니다”(18). 바알은 가나안 최고의 신 엘의 아들로서 폭풍우와 농경 수확의 풍산의 신이다(판관 2,13).
이어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말한다. “이제 사람을 보내어 온 이스라엘을 카르멜 산으로 모아 주십시오. 그리고 이제벨에게서 얻어먹는 바알의 예언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예언자 사백 명도 함께 모아 주십시오”(19). 페니키아에 가까운 카르멜 산은 팔레스티나에서 유행하던 온갖 종류의 종교, 특히 바알 종교의 예배가 성행하던 곳이었다. 카르멜이라는 이름은 또한 바알처럼 천둥이나 비의 신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대 민족들 가운데 이스라엘만 예언자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주변 민족에도 환시가, 접신가, 탈혼가, 그리고 영감을 받은 자들이 있었는데, 성경 저자들은 이들도 ‘예언자’라고 불렀다.
엘리야는 카르멜 산 위에서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한다. 아마도 그곳은 이제벨이 후원하는 바알 숭배의 주요 신당이었을 것이다(18,19-46).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무리이며 인원이 많고 보호를 필요로 했다. 그들은 그 이야기에서 언급되는 ‘바알의 예언자들’(18,19)과 경쟁한다. 이는 ‘예언활동’이 이스라엘 밖에서는 어느 정도 일반적인 현상이었음을 보여준다.
1열왕 18,20-40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바알 예언자들과 대결하다
이 본문은 엘리야가 참 하느님과 바알을 대결시키는 장면을 보여 준다. 이 일화는 냉소와 풍자로 가득 차 있다. 참예언자는 백성이 실제로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드러내 준다. 백성은 바알과 주님 양편을 다 섬기면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가 온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절뚝거릴 작정입니까?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은 엘리야에게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21).
바알의 예언자들은 자기네 신의 관심을 끌려고 온갖 기괴한 노력들을 다하지만 폭풍의 신으로 하여금 제물 위에 불을 내리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엘리야가 충만한 신뢰심으로 제물을 얹어 놓은 장작 위에 물을 붓고 매우 단순하게 기도하자 불길이 내려와 그 제물을 태워 버린다.
첫째 계명은 다른 어떤 신도 섬기지 말도록 금하고 있기에 엘리야는 백성에게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편에 서도록 주장하고 있다(36절).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압도당한 사람들은 참 하느님을 인정하고 엎드려 흠숭한다(39절). 엘리야와 그 뒤의 모든 예언자들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어느 쪽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고자 한다. 엘리야는 백성들이 울타리 위에 올라앉아 타협하면서 자기들의 고귀한 이상(理想)을 싸구려로 만들고, 또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자하며, 나아가 그들이 회개하여 참되신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돌아서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산을 향해 가는 엘리야의 여행 이야기는 그 교훈적 가치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이다. 이 아름다운 시적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참된 예언자의 특징들을 더 발견할 수 있다.
엘리야의 기도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주님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하느님이시다. 2) 엘리야는 그분의 진정한 종이다. 주님과 바알 사이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엘리야가 주님의 진정한 권한이 부여된 예언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백성들은 그 권위를 의심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오는 그들의 증언과 경배, 그리고 고백은 그들이 그 권위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이 이야기에서 불은 엘리야가 배교한 임금에게 심판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 참된 ‘하느님의 사람’임을 세 무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불은 주님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며 엘리야가 그의 참예언자임을 증명해 주면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한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백성들에게 참하느님이 어느 신인가를 대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21절의 “언제까지”는 논쟁적인 문맥에서 호소, 책망, 슬픔 등을 나타내는 어구다. ‘양다리’는 백성이 동요하며 결단력 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백성들은 이쪽 길도 아니고 저쪽 길도 아닌 모습으로 행동한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면 그분을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는 예언자가 일관된 행동을 요구하는 말이다. 잘못된 길일지라도 중간에 있는 것보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한길을 택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대답하다’는 이 절의 주제어이다.
23절에서 엘리야는 불을 붙이지 않는 희생제를 제안한다. 사제가 아닌 사람이 이러한 제사를 드리는 것은 레위기 규정보다 더 이른 시기의 상황을 반영한다.
“여러분은 여러분 신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겠습니다. 그때에 불로 대답하는 신이 있으면,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자 백성이 모두 ‘그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24). 24절에서 ‘불로 대답하는 신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주님과 바알 모두 불의 권능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실제 불을 보내는 능력을 지닌 쪽이 진정한 하느님으로 인정받게 된다.
사백오십 명의 바알 예언자들이 하루 종일 춤을 추고 자해까지 하며 바알을 불렀지만, 바알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해 지기 바로 직전의 마지막 짧은 시간에 행하셨다. 주님은 이것을 그분의 참된 종이었던 엘리야의 짧지만 매우 간절하고 강력하게 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행하셨다. 바알이 여행을 떠나고 일을 하고 잠이 든 동안, 바알의 무능력이 온전히 드러날 때까지 주님께서는 주의를 기울이며 깨어 계셨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반복적으로 “바알이시여, 저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소리도 없었다.
“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이리 다가오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백성이 모두 다가오자 그는 무너진 주님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엘리야는, 일찍이 ‘너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내린 야곱의 자손들 지파 수대로 돌을 열두 개 가져왔다”(30-31). 주님의 제단은 바알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너뜨린 제단이었다. 이를 엘리야는 고쳐 쌓았다. 그리고 엘리야는 모세가 세운 열두 개의 돌기둥을 상기하면서 열두 지파의 통합체를 보이도록 하였다. 제단 둘레에 두 스아가 들어갈 만큼 도량을 팠다. 1스아는 1/3에파로서 약 7.6리터이다. 그러므로 '두스아'는 약 15리터 정도의 양임을 알 수 있다. 제단에 장작을 쌓은 다음 황소를 토막내어 장작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번제물과 장작 위에 물을 가득 부었다. 이렇게 세 번을 하도록 하였다.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자 엘리야 예언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36-37). 36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매우 친숙한 표현으로, 원래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에서 ‘야곱’을 의도적으로 ‘이스라엘’로 바꾸어 부른 것이다.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다”(38). 한순간의 간절하고 긴급한 기도가 주님을 행동하시도록 움직인다. 바알은 불의 신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불이 필요할 때 그는 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불을 가지고 있는 분은 주님이셨다. 주님께서 불을 보내신 것은 바알을 굴복시키고 바알을 믿는 이들과 논쟁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자를 확증해 주시고 당신 백성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불을 내리셨다.
다시 말해 카르멜 산 위에서 벌어진 엘리야와 바알 예언자들의 대결은 성경의 중요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사람 수로만 보면 이길 확률은 1대 450이다. 그러나 신들의 힘 측면에서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엘리야에게는 준비된 열두 개의 돌과 이집트 탈출 전승들을 상기시키는 제단이 있었다. 엘리야가 바알을 움직이려고 기를 쓰는 것을 조롱한다.
그 자리에는 백성이 함께 있었다. 엘리야는 세 차례에 걸쳐 ‘그 백성’(18,21.22.30)에게 말하면서, 매번 주님께서 바알을 이기고 있음을 점진적으로 표현한다. 엘리야의 기도는 단순한데 모세처럼 족장들을 언급한다. 응답으로 “주님의 불길”이 아래로 내려와 번재물과 제단, 물을 삼켜버린다.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39) 그리하여 엘리야는 그 백성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것에서 확고한 야훼 신앙에 헌신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종교적으로 어중간한 상태에서 단호한 결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엘리야는 바알 예언자 모두를 키손천으로 끌고 가 모두를 죽였다. 바알 예언자들을 학살한 일은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일어난 이스라엘의 학살을 상기시킨다.
1열왕 18,41-46 가뭄이 끝나다
마지막 장면에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비가 오는 소리를 듣고 식사를 권하고 가뭄이 끝나는 것을 지켜본다. 이곳과 다른 이야기들 안에서 때때로 아합을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고대 사료가 후대 편집자들의 사료와 그들이 아합에게 한 총체적인 비난보다 실제로 일어난 그 사건에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합이 음식을 들려고 올라가자, 엘리야도 카르멜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으로 몸을 수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42). 엘리야는 이처럼 땅에 무릎을 꿇는 정도에서 지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는 깊숙한 자세로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두가지로 풀이한다. 첫째로, 복종을 표현하는 무릎 꿇음과 겸손을 표현하는 깊숙한 머리 숙임이 결합된 자세로서 그 기도의 간절함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둘째로, 외부에 대한 시각(視覺)을 차단함로써 보다 깊숙한 내면의 기도의 경지에로 몰입해 가기 위한 행동이다.
엘리야는 자기 시종에게 카르멜 산에서 지중해 바다쪽을 보도록 하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시종에게 그는 일곱이나 다시 보라고 하였다. 히브리인들의 숫자의 상징적 의미에서 '7'은 하느님의 수이자 완전한 승리의 수로 쓰인다. 따라서 엘리야가 시종에게 일곱 번 확인해 보라 지시한 것은 곧 기도의 씨름에서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다부진 결의의 표시이자 하느님께서 끝내는 응답하시리라는 완전한 신뢰의 표시이기도 하다. “일곱 번째가 되었을 때에 시종은 ‘바다에서 사람 손바닥만 한 작은 구름이 올라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엘리야가 시종에게 일렀다. ‘아합에게 올라가서, 비가 와서 길이 막히기 전에 병거를 갖추어 내려가십시오.’ 하고 전하여라”(44).
이처럼 손바닥 만한 구름에서 엄청난 양의 비를 예상하는 것은 그만치 확고한 엘리야의 확신을 보여준다. 한편 키손 강은 갈멜산 바로 아래로 흐르며 여러 갈래의 시내가 합류되어 있다. 따라서 큰 비가 내릴 때에는 키손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그 주변 일대는 통행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엘리야는 아합을 염려하여 길이 막히기 전에 갈멜 산에서 떠나도록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엘리야는 이스라엘과 그 왕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그들을 위하는 자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17절). 따라서 아합은 이제 지난 날의 과오를 깨끗이 청산하고 주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로서의 본분으로 돌아와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아합은 여전히 하느님을 거역하는 길을 집요하게도 고집하였으며 끝내는 참혹한 말로 맞기에 이르렀다(22,38).
“한편 엘리야는 주님의 손이 자기에게 내리자, 허리를 동여매고 아합을 앞질러 이즈르엘 어귀까지 뛰어갔다”(46). ‘주님의 손이 내라다’라는 말은 주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할 예언자를 움직이러 갑자기 개입하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카르멜과 이즈르엘 사이의 27킬로미터 떨어진 거리를 단숨에 뛰어갈 힘을 주시는 것으로 드러난다.
1열왕 19,1-8 엘리야가 호렙 산으로 가다
17-18장에서 소개된 이야기들에서 엘리야는 무척이나 능력과 힘이 있다. 엘리야는 기아 속에 죽어 가는 사렙타의 과부에게 음식을 주었고, 가뭄을 끝내는 비를 내리게 했으며, 희생 제물을 사르는 불을 하늘에서 내렸고, 확신 속에서 병든 아이를 고쳐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약하고 체념하는 모습이다. 승리감을 만끽했던 엘리야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겁을 먹고(3절) 낙담할 수 있는지(4-9절) 조금 당혹스럽다.
“아합은 엘리야가 한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를 죽인 일을 낱낱이 이제벨에게 이야기하였다. 이제벨은 심부름꾼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렇게 전하였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그대의 목숨을 그들의 목숨과 한가지로 만들지 못한다면, 신들이 나에게 벌을 내리고 또 내릴 것이오”(1-2).
이제벨에게 두려움을 느낀 엘리야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호렙으로 도망친다. 호렙은 신명기계 역사가들이 시나이, “하느님의 산”(1열왕 19,8)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엘리야는 너무도 약해졌고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기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자기 생명을 포기하면서 광야로 도망친다. 그는 자신의 힘의 근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끊어 버린다. 고통스러운 체험을 한 그는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싶어 하며, 자신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망각한다. 브에르 세바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곳이다. 그곳에 시종을 남겨 두었다는 것은 엘리야가 포기했음을 나타낸다. 그곳에서 우리는 성경의 위대한 장면을 보게 된다. 그 신비스런 체험은 예언자가 지쳐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된(19,4) 후에야 일어난다. 그는 천사가 준 빵과 물로 힘을 얻어(19,6-8), 다시 그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하룻길을 간 후 몹시 지쳐서 죽기를 간청한다. “자기는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로 나갔다.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4).
여기에도 역설적인 면이 있다. 엘리야는 목숨을 구하려고 도망치면서도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개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예언자들이 박해를 당했고, 적어도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순간들을 체험했다(예레 20,14-18).
절망과 싸우는 가운데에서까지도 예언자는 하느님께 음식을 받아먹고 힘을 얻는다. 놀랍게도 엘리야는 천사가 준 음식만으로 사십 일을 여행하여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게 된다. 하느님은 여전히 엘리야에게 줄 사명이 있으셨기에 그에게 하늘의 양식을 주신 것이다. 하지만 예언자의 참된 음식은 하느님께서 모세를 만나시고(탈출 3,1-6)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탈출 19-24장) 하느님의 산 호렙에서 얻게 될 것이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8).
1열왕 19,9-18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다
하느님의 산에서 엘리야는 모세의 체험(탈출 33,18)을 되풀이하면서 하느님의 현현을 체험한다.
9-10절에서, 하느님이 엘리야에게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엘리야는 하느님을 위해 열정을 다해 한 일이 헛되었다고 설명한다.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10).
이스라엘 백성들은 1) 하느님과의 계약을 저버리고, 2) 하느님의 제단을 헐었고, 3)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죽였는데, 이제 혼자 남은 자신마저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르치고자 하는 점은 아주 명백하다. 즉, 참된 예언자는 바로 하느님 백성의 신앙과 생명의 진정한 원천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백성의 전통에 몰입함으로써 힘과 통찰력을 얻는다.
11-12절에서는 산 위 주님 앞에 서 있는 엘리야에게 하느님 현존의 친숙한 상징들인 바람, 지진, 불이 언급된다. 이것들은 모두 주님의 권능을 상징한다. 그러고 나서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12).
시나이 산(호렙 산)에서 주님께서는 두려운 표징들로써 당신 현존을 알리신 적이 있다. 여기서 엘리야도 그와 비슷한 체험을 하지만, 주님께서는 예전에 시나이 산에서 조상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처럼 불과 지진 가운데는 계시지 않음을 발견한다. 하느님께서는 지금까지 엘리야의 사명을 도운 지진과 불과 바람뿐만 아니라 ‘조용하고 여린 소리’ ‘부드러운 미풍’ 가운데에도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신 것이다. 즉, 하느님은 안 계시는 것 같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도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의 뜻이 장엄하고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음을 드러낸다.
이젠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그들 자신의 양심, 그들 자신의 통찰력을 통해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조용하고 여린 소리’ 가운데에서 찾아야 했다. 또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극적으로 원수들을 무찔러 주시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주님께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역사 안에서 조용하고 섬세하게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언자 역시 주님께서 기적적으로 나타나시어 자기를 도와주시기를 기대하지 않고, 그분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역사 안에서 일해야 했다.
15-18절에서 주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가운데서 일하라고 말씀하신다. 엘리야(혹은 그의 제자들)가 장차 끼어들게 될 무서운 사건들에 관해 12절에서 묘사하는 ‘부드러운 미풍’이 하느님의 부드러움이나 자비하심과는 상관이 없음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길을 돌려 다마스쿠스 광야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거든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고, 님시의 손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15-16). 15-16절은 이야기의 절정이다. 이제 엘리야는 자신의 사명을 다할 땅으로 되돌아가서 엘리사(1열왕 19,19-21)와 하자엘(2열왕 8,7-15)과 예후(2열왕 9,1-13)에게 기름을 붓는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엘리야가 돌아왔을 때 그에게는 세 가지 임무가 주어진다.
▘ 하자엘을 아람의 임금으로 세우는 일 : 실제로 엘리사가 그를 아람 임금으로 세우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렇게 된다.(2열왕 8,7-15)
▘ 예후를 이스라엘 임금으로 세우는 일 : 결국 엘리사의 제자를 통해 이룬다.(2열왕 9,1-10)
▘ 엘리사를 예언자와 후계자로 임명하는 일 : 예언자를 임명하는 방식인 기름부음 없이 그렇게 한다.(2열왕 2,1-18)
하느님께 충실했던 이스라엘의 칠천 명(1열왕 19,18)은 하느님의 힘이 어떻게 남은 자들 안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 극적으로 표현한다(아모 5,15; 미카 5,6-7; 이사 10,20-22). 신약 성경에서 바오로는 이스라엘 대부분이 복음을 외면할 때 적은 숫자의 유다계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공을 거두시는 하느님의 신비스런 방식을 성찰하면서 이 본문을 떠올린다.(로마 11,4-5)
1열왕 19,19-21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다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19).
엘리야는 매우 긴급하게 엘리사를 부르고,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 위해 잘 되던 농장을 떠난다. 그리고 육십 년간 지속된 예언자 활동을 시작한다. 가난했던 엘리야와 달리 부유한 엘리사에게는 몸종이 있었다. 엘리사는 엘리야보다 사회적 교류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 엘리야는 자신의 겉옷을 걸쳐주는 행위를 통해 엘리사를 ‘임명한다’. 이것은 물건이 하느님의 힘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엘리야는 자기 옷을 던져 주는 이 행위로써 엘리사에게 예언자 소명을 부여한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 위해 그의 가족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난다. 그 장면은 예수님께서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긴급하게(루카 9,59-61) 제자들에게 직업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는 신약성경 대목 안에 반영된다(마르 1,16-20).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21).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라는 말에서 이제까지 농부였던 엘리사가 농기를 불사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전적인 헌신과 결단의 상징적 표시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종의 의식(儀式)이라 할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엘리사가 구태여 농기구를 불사를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이 제사는 엘리사가 새로운 직책을 맡게 되었다는 표지이다.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여기서 '사람들'이란 당시 엘리사와 함께 밭을 갈았던 일꾼들 뿐 아니라 그의 친척과 친구, 이읏 모두를 의미한다. 즉 엘리사는 이제 이들과 헤어지는 마당에서 마지막 석별(惜別)의 잔치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종을 들었다’라는 말은 열왕기에서는 엘리야가 여호수아의 계승과 대비하려는 의도가 있다 한다. 그렇다면 21절은 바로 그에 해당하는 요소라 하겠다. 즉 여호수야가 모세의 시중을 든 것처럼 엘리사도 엘리야의 시중을 든 것이다. 한편 2열왕 3,11에 의하면, 엘리사를 '여기에 사팟의 아들 엘리사가 있습니다. 엘리야의 시중을 들던 사람입니다’로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