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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받으소서 (Laudato si') - 교황 프란치스코 회칙 2015년 6월 18일 반포 공동의 집을 돌보는 것에 관한 생태회칙으로 시작기도로 함께하겠습니다.
찬미받으소서에 나오는 마지막 기도문 中 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들과 함께 바치는 기도~~
9월 1일은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관련된 동영상도 함께 합니다.의정부 교구에서 만들어 주신 동영상이었습니다.
교회에는 두가지 기둥이 있습니다. 하나는 계시이고 또 하나는 전승인데 그 계시와 전승을 통해서 우리들의 공동체 안에서에 믿음에 중심이 형성이 되게 됩니다.
계시란? 성경입니다.
전승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 시대에 맞게 해석한 것입니다.
전승의 가장 공식적인 형태가?
공의회 문헌, 복음의 기쁨( 교황의 권고), 찬미받으소서 (교회의 회칙)등이 교회의 전승에 중심을 형성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좁은 의미에서,
우리들 각자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한편으로 중요하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혼자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게 아닌 교회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가기에, 그 교회 공동체 안에서ㅡ
교회 안에 지도자들이 어떤 관점으로 우리들이 살아가 될 그와 같은 말씀을 해석하고 우리에게 그 교회의 전승, 전통을 세워나가는 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한 일일 것 같습니다.
다행히 신부님께서 다른 회칙같으면 신자분들에게 읽으시라고 권하시지 않으신데, 왜냐하면 대부분의 회칙들이 교회의 전승이기 때문에 백년 후, 이백 년 후에도 읽혀지는 것이므로 굉장히 신중하고 또 그러다 보니까 굉장히 사변적으로 쓰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신학생들한테 가르치실 때도 머리가 아파오는 개념에 대해서 굉장히 복잡하게 설명을 해야하고 신학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해설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Laudato Si'는 비교적 소설책 읽듯이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비교적 쉬운 문장과 쉬운 언어로써 쓰여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분들께 꼭 읽으시라고 권해보고 싶고 아무래도 번역이기 때문에 조금은 좀 부대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전문신학자 분들도 관여하셨지만 번역가들이 관여하면서 이것은 좀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하시는 부분들이 있으시지만, 찬미받으소서의 주 내용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생태적인 문제를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이 이것이 다루고 있는 주 문제입니다.
그러면 첫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왜 교회는 그러면은 교황님이 복음의 기쁨이라는 교황 권고를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안에서 복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복음이란? 왜 중요합니까?
왜 교황님은 복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 것인가? 복음이라는 그 말을 왜 그렇게 두꺼운 교황 권고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전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신부님이 모든 강의를 시작하실 때 구약과 신약이라는 개념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신약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교회와 하느님이 맺은 계약이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복음이란 것은 무엇이냐? 를 알아듣기 위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또 공동체를 이루고 전례에 참여하고, 성서 백주간이라는 프로그램도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교황님께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 복음의 기쁨을 통해서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여! 교회의 수장으로서 교황이 이해하는 복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복음의 기쁨을 읽으신 분?
읽고 이해하기는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성경 말씀도 이해하기 어려운 만큼 그것도 현대적인 언어로 쓰였지만 조금은 개념적인 그와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설명해줘야지 조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전에도 말씀해 주셨듯이 교황님이 작년에 오셨을 때 다들 광화문에 가셨을 겁니다. 왜 ? 가셨습니까?
이게 문제인 겁니다. 교황님을 보러 가는데 두 가지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공관 복음서 마태오. 마르코. 루카를 보면 그렇게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을 둘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제자와 다른 하나인 군중으로 이라고 합니다.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사도들이 뽑히는 것입니다. 그럼 그 제자와 군중을 구별할 수가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따르고 그것을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마지막에 예수님 못박히실 때는 용기가 없어서, 잘 깨닫지를 못해서 다 도망가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쫓아다시면서 예수님과 함께 운명을 하려는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결코 당신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마지막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현실적으로 보면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와 같은 일들을 예수님과 함께 합니다. 물론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시고 나서 그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세상에 전하면서 순교하는 이야기들을 알아 듣게 됩니다.
반면에 군중들은,
예수님이 악령도 쫓아내고 아픈 사람도 고쳐주고 그렇다가는 빵도 물고기도 주고 그러면서 가르침도 들어보니까 꽤 들을만 하고 자기 속이 시원한 얘기들도 하고 이러시니까!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쫓아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내 욕망이 이루어 지지 않을까?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 입니다.
나중에 그래서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 군중들은 뭐라고 소리칩니까?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실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겁니다.
오늘날 우리 세상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한 일들인 겁니다. 정치 지도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을 뽑을 때? 그를 통해서 정말로 좋은 세상을 이루려는 비젼을 그가 갖고 있는지를 판단하지 않고 단지 누가 국회의원이 되면 누가 대통령이 되면 내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 까? 라고 뽑는다면 군중과 같은 겁니다.
올바른 민주 시민으로서의, 의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광화문에 가셨던 분들이 정말로
아! 우리 새로운 교황님이 왔는데 그 교황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보자!
그리고 그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내 삶을 변화시켜보자!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다시 한번 이루어보자!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루는 하느님 백성이 다시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보자! 라는 그런 희망없이 그곳에 갔다면, 제자로 갔던 게 아닙니다. 교황님 구경하러 가신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교황님의 어떤 말씀이 자신의 삶에 불이익이 된다면 우리는 서슴치 않고 뭐라고 소리칠까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외칠 그와 같은 사람들인 겁니다.
따라서 교황님의 뜻을 잘 알기 위해서 광화문에 가서 교황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그강론의 말씀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정리된 형태로 나온 이런 회칙이라던지 교황 권고를 읽고 '아! 이 분의 생각이 어떤 것일까? 라는 것을 알아듣는 것, 중요하겠습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신앙에 관한한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 찬미받으소서 라는 것 안에서는?
2) 생태 윤리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윤리라는 것은 ? 관계의 학문입니다. 어떤 뜻이냐 하면 그 중심에는 항상 내가 있고, 내가 누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이 올바른 관계인가? 라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겁니다.
내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이 올바를까? 하는 것은 대인 윤리입니다.
내가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것이 올바른가?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사회 윤리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나와 이 세상이 돌아가는 삶을 영위하는 경제(경제 활동, 경제 생활, 경제적 이상 등)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경제윤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것은 대신 윤리입니다. 나와 어떤 대상을,
찬미받으소서에서는 나와 내 주위의 생태계의 올바른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 가 중요한 생태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중요할까요?
왜냐하면 그와 같은 윤리가 무너질때 어떤일이 발생하냐면?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가 생태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이유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창세 3,1-24)에 있어서도 그렇고 카인과 아벨( 창세 4,1-16)의 죄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들이 죄를 짓고 나고 하느님으로부터 숨습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하느님이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창세3,9)
그렇게 아담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카인에게 가서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세4,9) 라고 사람을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봅니다.
왜냐?
인간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그게 죕니다. 그게 죄의 본질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그 죄에 따른 벌은 너무나 단순한 대답이라서 실망하실 테지만 ,
죄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벌은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니까 하느님이 우리를 보호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놀고있는데 아이들이 엄마로부터 멀어진겁니다. 그래서 엄마가 아이을 찾을 수 없는 것이고 아이를 지킬 수 없는 겁니다.
빛으로부터 멀어지면 어둠이 있습니다. 우리가 빛쪽으로 가야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어둠쪽으로 가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들은 언제 어둠속으로 가서 아무도 나를 안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할까요? 우리가 죄를 졌을때,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울때, 내 자신이 더이상 사랑스럽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어둠을 찾게 됩니다.
빛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게 벌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쾅! 때리시고 우리를 아프게 하시고 그러한 것이 벌이 아니라 이제 나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삶이다.
그래서 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죄가 내가 지은 이 잘못을 하느님도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라는 생각을 하는 것. 이것이 정말 무서운 죄입니다.
인간의 어떤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용서하시지 않는 죄는 없다.
※ 하느님의 사랑에 그 높이는 인간의 죄에 깊이보다 항상 높다! 라는 것을 우리들이 잊지 않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런 우리들이 생태계를 파괴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만들어주신 보시니 좋았던 그 세상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 죄의 상황에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거기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생태계와 함께 살 수 있을까?(찬미받으소서의 중심주제인 '생태계와 공존 방법') 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Laudato Si' 의 중심 주제이고 그래서 이 찬미받으소서, 라는 이 책 안에는 자주 '공동의 집' 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생태계는 나와 생태계가,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것들이 단지 여기서 말하는 생태계라는 것들은 생명을 지닌 것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저 산과 저 강과 저 바다와 저 나무와 저 흙과 모든 것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공동의 집이다(Common Home) 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런 Common Home, 이라는 모두의 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내 집이야! 그러니까 너는 우리집의 손님이고 그러한 존재이니까 나는 너를 함브로 해도 돼! 라는 것이 아니라, 여기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집이다. 라는 그와 같은 생각, 기본적인 우리가 생각하는 ㅡ 그 생각의 전환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조금만 더하시고 탈출기 하시겠습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대목에서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왜냐?
공동의 집이라고 얘기했을 때, 그렇다면 우리의 생태계를 우리의 이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와 같은 상황입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가장 중요한 율법이 뭡니까?" 라고 여쭈니,
첫번째는 신명6,5 을 인용하시면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레위19,18 을 인용하시면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말씀을 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라는 이 두 가지 계명이 정말 중요하다. 그것을 복음의 중심으로 우리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웃이 누구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가, 다시 예수님께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루카10,29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웃이 누구인지는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10,29-37)를 들려주십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면 여기서 만약 그 율법학자가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어봤을 때 기대하는 대답은 "그것도 몰라? 이웃은 당연히 우리 유다 민족이지?" 라는 말씀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약 성경 안에서 이웃(히브리어, 레아끄??)이라는 단어는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표현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루카10,27) 라고 얘기하셨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 안에 있는 그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겁니다.
공동체를 지켜라! 그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서 유다인을 얘기하지 않으시고 유다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마리아, 그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적인 관점에서 이웃을 얘기할 때는?
구원의 공동체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얘기합니다. 따라서 세례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구원의 길에 이를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사를 통해서 즉 가장 기본적인 세례 성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산과 들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 모든 존재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구원의 공동체로 초대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입니다.
신부님께서 외국에서 본당을 좀 도와 주셨는데, 어느 외국 할머니가 신부님께 "제가 정말 오랫동안 제 가족처럼 함께 살던 고양이가 있는데 죽었습니다. 고양이를 위해서 장례 미사를 좀 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순간적으로 헷갈리셨지만,
할머니께 "장례 미사를 해 드릴순 없구요. 대신 고양이를 위해서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미사를 하면서도 함께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양이를 위해서 미사를 장례 미사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고 말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고양이는 세례받은 적이 없는 겁니다.
세례받은 적이 없는 사람, 또는 세례받았더라도 신앙을 거부하면서 죽은 분에 대해서는 장례 미사를 해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요즘에 어떤 분이 혹시라도, 인생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서 자살을 하시더라도 자살한 분에 대해서 장례 미사를 해 드리는 것은 교회적으로 약간 좀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왜냐? 그분이 설혹 자살했더라도 죽기 전까지 회개할 시간이 충분히 있으니까.
만약 어떤 분이 "나는 하느님을 거부한다." 하고 유서를 썼다면 그분에 대해서는 신앙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의미라 하면은 장례 미사를 해드릴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반대로 이제는, 고양이의 경우에는 그런게 아니라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뭐라고 불렀죠?
태양을 형제라고, 달을 누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웃보다 더 가까운 가족의 개념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태양과 달은 세례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형제라, 누이라 불렀을까요? 그와 같은 친밀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다행하게도 교회에는 두 가지 구원관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구원관 : 세례를 통한 구원( 죽어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 즉 우리가 갈수 있는 구원과 가지 못하는 대상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애완견 키우시는 분들 중에서 '내가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가는데 얘가 있을까? 없을까?' 라는 생각.
우리의 하느님 나라는 저기에 있고 우리가 죽어서 그곳으로 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는 것이 일차적인 그림입니다.
그런데 두번째 그림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시면서(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가장 중심)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5)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죽어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구원관 : 우리가 있는 곳에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주님의 기도 안에서도 어떻게 기도하냐면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구원의 두가지 방향성이 그 구원의 현실로 우리가 떠나 가는것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의 현실이 우리에게 오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온다면 단지 우리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는 많은 것들, 우리와 함께 있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우리가 갖고있는 그와 같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함께 하느님 나라 구원 현실에 들어가게 된다. 라는 조금은 다른 그림으로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을 애기할 수 있고, 그것은 생태 윤리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신학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의 기도할 때 마다 이것이 그런 뜻이구나! 라는 생각 많이 안해 보셨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느님의 현실이 우리 안에 이뤄지고 우리는먼지로 이루어진 땅에서 나온 인간이기 때문에 언제간 한 줌 땅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시간이 왔을 때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우리도 역시 부활하여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우리에게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라는 그와 같은 희망으로 우리들의 신앙에 다른 측면에서 부활의 개념 역시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탈출15,22-27 모세가 마라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바꾸다
를 봤는데,
지금까지 스토리 라인을 정리하자면 갈대 바다를 건넜습니다. 갈대바다를 건너고 모세와 미르얌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직후에 이야기입니다. 좀 전에 노래를 부를 땐 분위기 좋았잖아요??
그런데 곧 분위기가 반전합니다. 그러면서 마라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바꾸는 ....
여기서 몇 가지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으셔서 그 부분을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보면
탈출 15,26
"너희가 주 너희 하느님의 말을 잘 듣고, 주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을 하며, 그 계명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모든 규정을 지키면 이집트인들에게 내린 어떤 질병도 너희에게는 내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처음으로 생각하는 이집트인들에게 내린 질병은 '종기' 입니다.
질병
º 신명 28,27 : 주님께서는 너희가 고치지 못할 이집트의 궤양과 종기와 옴과 가려움병으로 너희를 치실 것이다.
º 신명 28,60 : 그분께서는 너희가 겁내던 이집트의 모든 질병을 너희에게 되돌리시어, 그것들이 너희에게 달라붙게 하실 것이다.
오늘날에 이스라엘이 가장 두려워 하는 병을 이때로 되돌려보면 아마도 피부가 짓무르는, 코가 없어지고 손가락, 발가락이 문제가 생기는 그런 한센병에 관한 이야길 것이다.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외에도 이스라엘이 두려워 하는 병이 또 하나있습니다. 흑사병입니다.
º 레위 26,25 : 나는 너희에게 칼을 보내어 계약을 어긴 것을 복수하게 할 것이다. 너희가 너희 성읍들 안으로 피해 모여들면, 나는 너희 가운데에 흑사병을 보내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원수의 손에 넘어가고 말 것이다.
º 아모 4,10 : 나는 너희에게 이집트 흑사병을 보내고 너희 젊은이들을 칼로 죽였으며 말들은 잡혀가게 하였다. 또 너희 진영의 악취가 올라와서 너희 코를 찌르게 하였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대 재앙입니다. 사람들이 어쩔수 없이 모여살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 모여사는 것이 불가능하게 하는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입니다.
메르스로 공포에 떨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신문에서는 크게 보도하지 않았는데 탄저균 소동이 있었습니다. 군사적 목적으로 실험하기 위해서 들어왔는데 민간인들에게도 노출된 그와 같은 조금은 있어서는 안될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전에는 사스..
조류독감, 유럽을 공포로 몰아놓았던 광우병, 우리가 먹고 마시고 숨쉬고 하는 것들 안에서 병들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이유없이 죽는...천연두? 라는 병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경각심이 없는데 인류가 이 지구상에 살면서 가장 많은 인류를 죽인 병은 천연두였습니다.
천연두 때문에 5억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물론 긴 시간이었겠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애들이 천연두에 걸리면은 치사율이 90%로 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핵과 같은 요즘도 문제가 되는 말라리아, 아니면 AIDS 이와 같은 질병들이 항상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했던 전염병들 중에서 형상으로 알아 볼수 있는 한센병, 그리고 흑사병도 걸리고 나서 보면은 손끝과 발끝이 시커멓게 되면서 사람들이 괴혈사해서 죽는 그와 같은 병이다 보니까, 사람들의 큰 두려움에 대상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갈대 바다 사건 이후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낮은 단계로 본다면 바다를 건너 광야로 나선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존해 나가고 야훼가 어떻게 그들을 보호하는가?
바다를 건넜지만 약속의 땅에 가야하는데 그런 과정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잘 보호하시면서 이끌어 가시는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는지 이런 이야기가 있고,
다른 한 단계를 좀 올려다 보면, 이스라엘에 갈대 바다 사건을 통해서 야훼의 구원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와 같은 믿음을 야훼에 대한 구원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가는가? 라는 것에 대한, 따라서 지금부터 우리가 읽게 될 마라에서의 이야기, 만나 이야기, 또 마싸와 므리바의 이야기, 아니면은 아말렉과의 이야기들 안에서 지속적으로 어떤 질문을 던지냐 하면? 야훼가 정말 있는 거냐? 우리가 던지는 질문과도 똑같은 질문입니다.
우리들도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이 정말 있는거야? 라는 질문을 합니다. 신부님도 아주 가끔 던지려 하시는데 모퉁이에서 식은땀이 나신다고..^^
삶 전체를 던지셨는데 만약 하느님이 안계신다면??
그런데 성직자분들과 수도자분들도 하느님이 안계신다. 라기 보다는 신의 부재 체험을 하신다고 합니다.
기도하시는데 전혀 응답이 들리지 않고 침묵하시는 하느님, 내지는 안계시는 것 같은 하느님, 그와 같은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하시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도 영신 지도신부님과의 마지막 편지 안에서 '요즘은 하느님이 제 기도에 대한 응답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신이 안계시는 것 같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이 언론 보도를 통해서 전해지면서 신부님은 굉장히 기쁘셨다고 합니다.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그런 진솔한 이야기에 위로를 얻으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하느님을 깨달아 가는 이스라엘을 만나게 됩니다.
마라의 이야기(탈출 15,11-27 모세가 마리에서 쓴 물을 단 물로 바꾸다)는 그 모든, 이스라엘이 갈대바다 사건을 건너면서 민족적인 정체성을 얻어갑니다. =>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 탄생이야기입니다.
탈출기를 유심히 읽어보시면 갈대 바다 사건이전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이라고, 민족적인 개념으로 부르는 것이 아주 드물게 나옵니다. 대개 이스라엘의 자손들, 이라는 표현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서 '이스라엘'은 야곱입니다. 야곱에 자손들 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갈대 바다 사건 이후에는 이스라엘 이라는 민족 개념이 등장하고 그리고 그들이 조직화됩니다.
조직적으로 지파로 아니면 가문으로 조직화된 모습으로 점점점 틀을 형성해 나가는 그와 같은 것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출발은 씁니다.
마라에 쓴 물 ㅡ
앞선 갈대 바다 사건이전까지의 이집트 이야기에서도 그 출발점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역을 시켜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이 쓰디썼다. 라는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따라서 이집트에서도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체험하는 그 체험의 출발점에는 쓰다! 라는 것이 있고, 이제 갈대 바다를 건너서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점도 쓴겁니다.
그런데 쓴 것으로 끝나느냐? 아닙니다.
쓰기 시작했지만 나중에 이집트에서,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탈출기 전반부에 마무리라면, 그 후반부에서는 쓰게 시작했지만, 하지만 이제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그러면서 그들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시나이 계약까지 도달하는(탈출기 후반부의 이야기)입니다.
단지 쓴것으로 끝나는 것이아니라 쓰게, 나쁘게 시작했지만 좋게 끝나는 그와 같은 내용들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변하는..
이런 쓰다와 달다의 언어 유희는,
나중에 읽게 될 룻기에서도 등장합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남편과 아들들을 잃고 룻이라 불리는 며느리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면서 사람들이 '어 저기 나오미가 온다!' 라고 하니까 나오미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 라는 말에는 '달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룻 1,20-21
나를 나오미("달다") 라 부르지 말고
마라(" 쓰다") 라고 부르셔요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너무나 쓰라리게 하신 까닭이랍니다.
나 아쉬움 없아 떠나갔는데
주님께서 나를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지 그대들은 나오미라 부르나요?
주님께서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불행을 안겨 주셨답니다.
이 마르, 라는 낱말이 마리아(Maria) = 미르얌(Myriam) 안에도 들어있습니다. 성모님의 삶도 참으로 쓰디썼다. 결혼도 하기 전에 아기를 낳게 하시고 나중에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을 보아야만 했던 여인의 쓰디쓴 삶을 성모님의 삶 안에서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또 다른 면에서 우리들이 마라의 사건을 이해해 볼 수가 있습니다.
갈대 바다 사건 ⇒ 물이 많음.
그래서 물을 가르고 백성들을 지나가게 하는, 죽음을 넘어서 백성을 넘어가게 하는 물이 너무 많은 게 문제였습니다.
광야로 넘어옴 ⇒ 물이 너무 적은게 문제
그런데 따지고 보면 창세기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창세1, 첫번째 창조 이야기 에서는 물이 너무 많아서 궁창을 세워서 물을 가르고 궁창 아래에 있는 물들이 모이면서 비로서 땅이 드러나는 그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장의 이야기로 넘어가면 물이 너무 적은게 문제입니다.
땅은 아직 있었지만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땅 거죽에서 안개 같은게 피어오르면서 비로서 생명이 시작되는,
따라서 창세기 1장과 2장의 세계관은 조금 다릅니다.
창세 1장 - 물이 많음
창세 2장 - 물이 적음
탈출 사건에서도 갈대 바다 사건에서는 물이 너무 많은게 문제였고, 광야로 넘어오면서는 물이 너무 적은게 문제입니다. 따라서 물은 적당한게 좋습니다.
신부님이 어렸을적에도 연락도 없이 단수가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단수가 됐을 때 삶의 불편함,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사건에서도 하느님께서 그렇게 많은 비를 내려서 본인이 창조한 질서 잡힌 세상을 다시 혼돈으로 되돌리시지만,
노아의 홍수 사건
하지만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을 출발 하시듯이,
갈대 바다 사건을
통해서 그 모든 것들이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만큼은 생명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이스라엘 민족으로서의 새로운 출발
노아의 홍수 사건 · 갈대 바다의 사건 ⇒ 새로운 창조 라는 신학적 의미가 부여되는 겁니다.
노아의 홍수를 통해서 새로이 창조하셨다.
갈대 바다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민족이 새로 생성되는 새로운 시작!
그리고 나서 하늘에서 비는 40일이 내립니다.
그 40일을 통해서 세상이 망해버리는 것 같지만 거기다 우리가 신학적인 개념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 세상을 씻어내는 인간의 타락과 폭력이란 죄로 물든 세상을 정화하는 시간입니다.
사십일 간의 홍수의 의미 ⇒ 인간의 타락 · 폭력으로 물든 세상의 정화
이스라엘 민족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정화되어야 합니다. 40일로는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40년을 ! 약속의 땅으로 가기위해 정화되는
여기서 40년 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개념으로는 one generation 입니다. 한 세대가 지나가는 겁니다. 따라서 나중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는 이집트에서 나온 그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모세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다음 세대만 들어갈 수 있는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