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세보에서 '언식' 검색 중간 자료 (추가 검색 중입니다)
1. 이 글의 목적
이 글은 장씨 족보/세보/대동보에서 '언식(彦植)'으로 검색한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무과 시험 합격자 명단인 '무과 방목'과 정조대왕의 『일성록』에서 검색한 내용도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혹시나 자료가 필요한 분이 있을까 하여, 자료를 남깁니다.
각각의 족보/세보/대동보에는 URL을 링크하여, 도서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글의 최종 목표는 청교 장언식 공의 출생년도를 확인하여, 정사론의 기술연대를 추정하는 것입니다.
수 많은 장씨 족보에서 확인하고 하는 사항은 다음과 같은 것 입니다.
子 彦植
字 ○○ (字 靑郊)
(연호 ○○) 戊辰 ○○月 ○○日生
○○ ○○月 ○○日卒
丁未年 武科
嘉義大夫同僉節制
2. 검색 결과
현재 (2019년 6월) 까지 조건을 만족시키는 항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3.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는 '언식'에 대한 검색 결과
1) 사진 정보
장씨세보 사진의 정렬 순서는 '언식'으로 검색하고 찾은 시간 순서로 하였습니다.
(1) 1840년 경자생 인동장씨 31세 / 인동장씨 대동보 권2, 1998년, 761쪽, 권11 297쪽
인동장씨 대동세보(상), 1998년, 12쪽
(2) 1838년 무술생 인동장씨 31세 / 장씨 대동보 권2, 1998년, 766쪽, 권11 327쪽
인동장씨 대동세보(상), 1998년, 95쪽
(3) 1825년 순조 을유년생 인동장씨 29세 / 인동장씨 대동보 권3 1413쪽,
인동장씨 경파 주박공문중보, 2011년. 138쪽
인동장씨 태상경공파세보, 1996년, 2권 15쪽.
인동장씨세보 1~10권, 1914년, 5권 天 페이지.
인동장씨세보 1~5권, 1854년(철종 5년), 4권 天 페이지
(4) 1884년 고종 갑신생 인동장씨 29세 / 인동장씨 대동보 권3 1290쪽
인동장씨 태상경공파세보, 1996년
인동장씨세보, 1914년,
(1914년에 발간된 인동장씨세보이기 때문에, 아들 율환에 대한 기재는 누락됨.)
(5) 1837년 헌종 정유년생 인동장씨 29세 / 인동장씨 대동보 권4 02쪽
인동장씨 태상경공파세보, 1996년, 3권 31쪽.
(6) 1839년 헌종 기해생 인동장씨 29세 / 인동장씨 대동보 권4 138쪽
인동장씨 태상경공파세보, 1996년, 3권 165쪽.
이 분 '언식'은 검색 결과 중에 유일하게 벼슬을 하신 분입니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겸오위장
(7) 1850년 헌종 경술생 인동장씨 31세 / 인동장씨 대동보 권2 311쪽
(8) 1819년 순조 을유생 인동장씨 31세 / 인동장씨 대동보 권4 1286쪽, 권18 583쪽
인동장씨세보, 1914년, 10권 遐페이지.
(부친 '성급'의 정보가 추가됨 : 字 義準)
(9) 1885년 을유생 울진장씨 27세 / 울진장씨 대동보 3권 126쪽
(10) 1840년대 울진장씨 27세 / 울진장씨 대동보, 1993년, 3권 849쪽
이 분 '언식'의 조부 '성달'이 정조 경술년 1790년생이므로,
이 분 '언식'의 출생년도는 1840년대로 추정합니다.
(11) 1929년 울진장씨 / 울진장씨 대동보, 1993년, 3권 993쪽
이 분은 여성이며, 1929년 생입니다.
조건에 맞지는 않았으나, '장언식'이라는 이름이 여성의 이름으로 쓰였기에 특이하여 기록합니다.
(12) 1907년 정미생 옥산장씨 40세 / 옥산장씨 파보 1971년. 出쪽(천자문 페이지)
옥산장씨파보, 1984년.
조부뻘인 38세가 순조 을축년이므로, 정미년은 1907년으로 추정합니다.
(13) 1800~1900년대 안동장씨 34세 / 안동장씨 대동보, 2001년, 7권 5281쪽
조부 '봉진'이 1837년 생입니다.
정보는 부족하지만 '언식'이 1868년 무진생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14) 1900년대 이후 안동장씨 36세 / 안동장씨 대동보, 2001년, 7권 5808쪽
이 분 '언식'에 대한 출생연도는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조부뻘되는 34세 정도에까지 올라가야 통덕랑(정5품) 벼슬을 하신 분이 검색되기에,
이 분 '언식'의 출생연도는 최대한 소급해도 조선후기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15) 1900년대 이후 안동장씨 36세 / 안동장씨 대동보, 2001년, 7권 5809쪽
(16) 1845년 을사생 흥성장씨 44세 / 흥성장씨세보, 1902년, 9권, 成쪽(천자문 페이지)
흥성장씨세보, 1902년, 6권에는 女 金彦植(41세) 이라는 분도 있습니다.
이 분의 경우 성이 張씨이고 이름이 金彦植이 되나요?
흥성장씨세보, 1902년, 11권 雨쪽에는 子 顯信 이라는 분의 처인 동래 정씨의 아버지,
그러니까 장인어른인 鄭彦植 이라는 분의 이름도 나옵니다.
(17) 1841년 철종 신축생 인동장씨 31세 / 인동장씨세보, 1914년, 9권 闕페이지.
1841년 신축년은 헌종 7년입니다.
철종의 재위 기간이 1849년에서 1864년이므로, 다소 오류가 있는 출생 정보입니다.
부친은 '도급'이지만, 생부는 '문급'입니다.
부친의 형제 분들에게 아들로서 입양된 경우가 됩니다.
(18) 1763년 영조 계사생 + α 울진장씨 24세 / 울진장씨세보 1~16권, 1806년(순조 6년), 9권 壁 페이지
이름만 세보에 올라와 있습니다.
형 언범이 1763년(영조 39년) 계사생이므로,
이 울진장씨세보에 있는 '언식'이라는 분은 1764년~1780년 정도에 태어난 분인 것 같습니다.
19) 1817년 순조7년 정축생 흥성장씨 12세(직장공세신파) / 흥성장씨세보 3권 塲 페이지
2) '언식'으로 검색된 서책 정보 모음
안동장씨 대동보 1~10권, 2001년.
인동장씨 대동보 1~19권, 1998년.
인동장씨 대동세보 상하권, 1998년.
인동장씨세보 1~10권, 1914년.
인동장씨세보 1~5권, 1854년(철종 5년).
인동장씨 경파 주박공문중보, 2011년
인동장씨 태상경공파세보 1~5권, 1996년.
옥산장씨 파보 1971년.
옥산장씨파보, 1984년.
울진장씨 대동보 1~4권, 1983년
울진장씨세보 1~16권, 1806년(순조 6년)
흥성장씨세보 1~15권, 1902년.
흥성장씨세보 1~3권, 미상
4. '언식'에 대한 검색이 안되었던 장씨 족보/세보/대동보
1) 장씨의 계통
장(張)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92,721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9위입니다.
현재(現在)의 모든 장씨(張氏)는 장정필(張貞弼)ㆍ장순룡(張舜龍)ㆍ장해빈(張海濱) 3계통에 연원을 두고
덕수와 절강 장씨를 제외한 모든 장씨(張氏)가 장정필(張貞弼)의 후예라는 일반적인 통념(通念)에서도
정확한 계대(系代)를 알지 못해 합보(合譜)를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오늘날에 와서 장씨(張氏)는 이본(異本)이라도 통혼(通婚)을 하지 않으며,
인동(仁同)ㆍ결성(結成)을 비롯한 대다수의 장씨(張氏)가 동원(同源) 임을 주장하고 범장씨(凡張氏)의 결속을 다지며
매년 봉행(奉行)되는 태사충헌공(太師忠獻公 : 장정필)의 시향대제(時享大祭)에 함께 참례하고 있다.
아산 장씨는 '蔣'자를 사용합니다.
거창 장씨는 '章'자를 사용합니다.
금천 장씨와 전주 장씨는 '莊'자를 사용합니다.
☞ 참고사항 : 위키백과, 장 (성씨)
2) '언식'으로 검색이 안되었던 서책 정보 모음
강화장씨족보, 1994년.
결성장씨세보 사제공파묘(을축), 1985년.
결성장씨세보 목사공파, 1990년.
구례장씨세계보, 1979년.
구례장씨세보 상하권, 1963년.
나주장씨세보, 1977년.
단양장씨 을해 대동보 1~8권, 1995년.
덕수장씨족보 1~5권, 1988년.
(덕수장씨의 시조 '장순룡'은 아랍계 장군이라고 합니다.
☞ 참고사항 : 위키백과, 덕수장씨)
목천장씨 대동보 1~3권, 1997년.
목천장씨족보 1~8권, 1937년.
부안장씨세보, 단기 4165년.
봉성장씨 족보1~9권, 1923년.
(봉성은 구례의 별호입니다.
☞ 참고사항 : 위키백과, 구례장씨)
순천장씨세보 1~5권, 1922년.
순천장씨족보, 1643년(인조21)
안동장씨각파대동세보 1~15권, (실제 서명 : 인안동장씨사십팔관대동보설) 1926년.
안동장씨각파대동보 1~7권, 1917년.
안동장씨각파대동보 1~12권, 1915년.
안동장씨세보, 영변 사오리파, 1983년.
안동장씨세보 1~2권, 1933년.
안동장씨속수보 1~6권, 1920년.
안동장씨 이천백파세보 : 문헌록, 1928년.
옥구장씨 대동보 상하권, 2004년.
(이 대동보는 이름 색인표를 한글 가나다 순으로 제공했던 거의 유일한 서책인 것 같습니다.
이름 색인표는 조상들의 이름 함자를 찾아보고자 하는 후인들을 위하여 꼭 필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
옥구장씨세보 1~11권, 1936년.
옥구장씨족보 1~3권, 1903년(광무7년)
인동장씨세보 고현파, 1995년.
인동장씨 봉상파세보, 2002년.
인동장씨 석우파계세보, 1999년.
인동장씨족보 : 영흥방천파, 2002년.
인동장씨 옥산군파 세보, 1998년.
인동장씨 용천파보, 1993년.
인동장씨 태상향공파 세보, 2008년.
인동장씨 판서공파세보, 1997년.
인동장씨세보 천지인 3권, 1999년.
장씨대동보 1~4권, 1878(고종15), (인동장씨)
장씨태사공계세보, 1976년.
진천장씨세보 1~2권, 1929년.
절강강씨세보, 1981년.
(절강장씨 시조인 장해빈은 정유재란 때 귀화한 명나라 장군입니다.
☞ 참고사항 : 위키백과, 절강장씨)
지례장씨 가승보, 1987년.
지례장씨세보, 1983년.
창녕장씨 족보, 2003년.
창녕장씨세보 1~6권, 1948년.
태원장씨(충주장씨).
(태원은 현재 충주의 옛 지명으로, 태원장씨의 시조는 장문한입니다. 2000년 현재 전국에 433명이 거주한다고 합니다.
족보의 존재여부는 도서관 검색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참고사항 : 향토문화대전, 『충주장씨』)
흥덕장씨족보 1~2권, 1862년.
흥덕장씨족보, 1988년.
흥덕장씨세보 1~2권, 1885년(고종22)
흥성장씨 사과공 파보, 2000년
(흥성은 흥덕의 옛 지명입니다.
☞ 참고사항 : 위키백과, 흥덕장씨)
흥성장씨세보 1~7권, 1831년(순조 31년).
흥성장씨세보 1~4권, 1901년(광무5)
흥성장씨세보 1~4권, 1859년(철종10)
흥성장씨세보 1~5권, 1865년(고종2)
흥성장씨세보 1~4권, 1824년(순조2)
흥성장씨세보 1~7권, 1880년(고종17)
흥성장씨세보 수~5권, 1913년
흥성장씨대보, 1955년.
흥성장씨세보 권4, 1918년.
흥성장씨세보 권1, 1925년.
한양장씨 족보, 2000년.
5. 『일성록』에서의 '장언식' 검색 결과
'장언식'으로 『일성록』을 검색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성록』 1788년(정조 12년)에 나오는 '무겸 장언식'이 청교 장언식일 가능성에 대하여 타진해 보았고,
이 경우 정사론의 집필 연대가 1812년(임신년, 순조 13년)일 수도 있습니다.
☞ 참고사항 : 『일성록』에서 '장언식' 검색에 대하여』, http://blog.daum.net/woo-139/173
장씨세보 검색에서는 청교 장언식 공뿐만 아니라, 『일성록』 1788년(정조 12년)에 나오는 '무겸 장언식'도 검색이 안되었습니다.
6. 무과 방목에서 '장언식' 검색 결과
조선의 과거는 문무를 같이 중시하는 의미에서, 문과와 무과를 같이 치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무과 방목의 경우는 문과 방목의 뒷부분에 합본 형태로 발간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방목은 이런 저런 이유로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무과 방목의 경우 약 17%만 전해진다고 합니다.
<표 1. 현전하는 조선시대 무과방목수>왕조 | 무과실시횟수 | 현전방목수(%) | 왕조 | 무과실시횟수 | 현전방목수(%) |
---|
태종 | 11 | · | 인조 | 52 | 17 (32.7) |
세종 | 21 | · | 효종 | 15 | 4 (26.7) |
문종 | 2 | · | 현종 | 24 | 7 (29.2) |
단종 | 3 | 1 (33.3) | 숙종 | 78 | 36 (46.2) |
세조 | 23 | · | 경종 | 9 | 2 (22.2) |
예종 | 1 | · | 영조 | 126 | 20 (15.9) |
성종 | 29 | 1 (3.5) | 정조 | 41 | 9 (22.0) |
연산군 | 13 | · | 순조 | 51 | 8 (15.7) |
중종 | 57 | 6 (10.5) | 헌종 | 23 | 3 (13.0) |
명종 | 26 | 3 (11.5) | 철종 | 26 | 1 (3.8) |
선조 | 61 | 14 (23.0) | 고종 | 81 | 3 (3.8) |
광해군 | 28 | 3 (10.7) | 계 | 801 | 138 (17.3) |
☞ <표 1>의 출처 : 정해은, 『무과방목(武科榜目) 해제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people.aks.ac.kr/front/haeje/haeje.aks?h=MU
<표1>에서 정조 이후의 현전 무과 방목의 비율은 11%도 채 안됩니다
조선시대 과거합격자 명단은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에서 검색이 가능합니다.
☞ 참고사항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한국역대과거합격자, http://www.koreanhistory.or.kr/directory.do?pageType=listRecords&khSubjectCode=KH.09.08.000
안타깝게도 여기에서도 청교 장언식 공의 이름은 검색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1782년(임인년, 정조6년)에 출생하고,
1806년(병인년, 순조 6년) 무과에 합격한 인동 장씨 '장언식(張彦植)'만 검색되었습니다.
☞ 참고사항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한국역대과거합격자에서 '장언식' 검색 결과, http://people.aks.ac.kr/front/tabCon/exm/exmView.aks?exmId=EXM_UV_6JOc_9999_038033
다음의 사진은 1806년 '언식'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는 무보의 내용입니다.
☞ 위 사진의 출처 : 무보 상하권, 중앙국립도서관 소장, 작성 연대는 순조 전후로 추정.
무보는 무인 집안의 가계도를 성씨별로 정리한 무인 세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무예와 군역을 생업으로 하는 무가가 형성되었던 것 같습니다.
☞ 무보에 관한 참고 사항 : (사)전통문화콘텐츠연구소, 『조선시대 무과시험』 6. 문무과
정사론 제4에서도 무가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우리 동국의 무예가 위엄이 있는 것은,
이러한 방식으로 익혀서 자기를 바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가의 오랜 전통이다. - 정사론 한글풀이 제4 -
장씨세보 검색에서는 청교 장언식 공뿐만 아니라, 병인년 무과 방목에 나오는 1806년(병인년, 순조 6년)에 무과에 합격한 '장언식(1782년 출생, 父 張友汲)'도 검색이 안되었습니다.
7. 분석 및 맺음말
1) 정사론의 집필 연대 추정
청교 장언식 공은 정사론에서 을미년 무과에 급제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을미년은 각각 1967년, 1907년, 1847년, 1787년, 1727년 등이 됩니다.
그런데 무과는 1894년(갑오년, 고종 31년)에 폐지되었기에,
청교 장언식 공의 급제한 정미년은 최소한 1847년 이전이 됩니다.
만약 청교 장언식 공이 1847년 정미년에 급제를 했다면,
청교 장언식 공은 1808년(무진년, 순조 8년)생이 되며,
정사론의 집필 연대는 1872년(임신년, 고종 9년)이 됩니다.
정미년을 1847년 이전으로 소급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하여,
백천 김세현님은 『정사론(正射論) 소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① 연호 표기를 안한 점 :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정사론에서는 조선 국왕의 연호도 표기하지 않았음.
② 서지 상태가 양호한 점 :
조선에서는 전통 궁술에 대한 저술이 금기시 되었기 때문에,
궁술에 대한 저술은 1880년 별기군 창설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함.
③ 장씨 항렬에서 '언'자나 '식'자의 항렬이 주로 조선 말기부터 근세에 분포함.
☞ 참고사항 : 김세현, 『정사론(正射論) 소고』, 온깍지궁사회 국궁논문집 제 7집, 2009년.
☞ 다운로드 링크 : http://cafe.daum.net/onkagzy/GI4B/25?docid=14uDEGI4B2520120120131347
이 글에서도 '장언식' 검색 결과의 분포를 보면,
1819년에서 부터 1885년 정도까지 분포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 이 글의 제한점
본능적으로 인간은 넓은 시야의 스캔을 합니다.
인간이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시야를 좁혀 상대방의 눈의 형태와 색깔, 코의 모양, 입술의 형태와 색깔 등등을 분석하고,
그 분석 결과로 '아~! 누구~'라고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한 톨의 음식을 위해 거친 숲 속을 탐험하면서,
소리 죽여 매복하고 있는 포식자가 나타난 곳의 미세한 환경 변화을 분석하고,
그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회피할 것이냐 투쟁할 것이냐를 선택하여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넓은 시야의 스캔 능력은 본능적인 것으로서,
상황을 인지하고 그 인지의 결과물을 기존의 학습 결과와 비교를 하는,
찰나의 과정이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문자를 사용하고 문자에 익숙해진 이후로,
문자를 스캔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 줄, 문장, 단락 또는 페이지 등을 한 번에 스캔할 수 있는 능력을 '속독'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스캔한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인식 능력 부족에서 발생하는 현상일 뿐 입니다.
만약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 '언식'에 대한 검색에 오류가 발생했다면,
그것은 필자의 스캔 능력의 정확도 부족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문 원전을 한문 텍스트 입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오류는,
원전의 한문을 번역할 수 있는 한문으로 인지하는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한문 원전 입력에서 효율을 높이면서도 오류를 가장 많이 줄이는 방법 중 하나는,
두 명 이상의 번역자가 따로 입력을 한 후에,
입력의 결과물을 상호 대조하는 방법입니다.
한문으로 된 200여 권이 넘는 정보량에서,
특정 인물을 검색하는 과정은 지루할 수도 있기에,
감히 알바생을 고용하여 고통을 강요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글의 제한점은 검색의 신뢰도가 낮을 수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알바생을 고용하지 않았던 필자의 부족함에서 기인한다고 할 것입니다.
3) 희망 사항
추후로 무과방목이나 장씨세보 등에서 청교 장언식 공에 대한 기록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만약 그와 같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사론의 집필 연대를 확정할 수 있는 근거의 하나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활쏘기에 매진하며 나라의 안위를 걱정했던,
조선 장군 한 분의 삶을 재조명할 수 있는,
국궁계의 소중한 사료가 될 수 있을 것 입니다.
爲國家聖代之勸武
非特吾鄕之論射也
국가의 태평성세를 위한 무예를 권함에 있어,
우리나라의 활쏘기를 논하는 것보다 특별한 것은 없다. - 정사론 한글풀이 맺음말 -
카페 게시글
정사론의 활쏘기
장씨세보에서 '언식' 검색 중간 자료 (추가 검색 중입니다)
西路 홍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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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14
18.01.21 10:41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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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대해봅니다.
질문 하나 있습니다. 육량전이 촉이 육량이라는 주장이 있던데 살대 까지하면 8~9량 정도된다던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조선의 궁술에서는
'살의 무게가 6량이라 이러한 이름이 붙었으며, 일반적으로 '육량'이라고 부른다.'
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촉의 무게만 6량이라는 것은?
쫌? 오버쎈쓰?
@오늘즐거운(홍성우) 저도 의아합니다.
국궁신문기사에는 일본측 자료를 참고했다던데 촉이 6량이면 살대는 도대체 얼마나 되어야 비행안정성을 가질지...
자료 정리에 항상 감탄 합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화살의 무게도 촉이 아닌 화살 전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허면 육량전 또한 촉이 아닌 화살 전체무게를 말하는것이 맞다고 봅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육량전의 무게에 관하여,
두가지 경우 모두 맞는 것 같아요.
대한궁술원에 글을 남겼지만,
무게 기준의 변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육량전의 무게? 8량 vs 6량
http://m.cafe.daum.net/koreagungsulwon/6kqY/3729?
장님 코끼리 만지기 같기에,
섣부른 단정은 제 살 깍아 먹기가 될 것 같습니다.
무과 방목과 일성록에서 '장언식'으로 검색한 내용을 추가하였습니다.
그 동안 메인 정보처이었던
국립중앙도서관 고문서실이 휴관(2018년 5월 말까지)함에 따라서,
자료 추가 속도가 지연됨을 공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