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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2013.9.15.) 이승희 목사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 비유
누가복음 16:19~31 주일오후예배 / 하나님나라 비유 강해
누가는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 비유를 어떤 한 가지 목적으로 15장과 16장에 시리즈로 기록하였을까? 예수님의 비유에는 여러 가지 목적이나 교훈을 찾을 수 있지만 대체로 한 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유일하게 비유에 실명이 거론되었기에 비유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함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그리고 부자는 음부에 갔기에 내세에 대한 교훈, 즉 종말론에 관한 교리를 말씀하고자 함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15장에 잃은 자를 찾는 세 가지 비유 가운데 마지막 탕자의 비유와 16장에 앞부분에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이어 부자와 가난한 나사로의 비유가 나오기에 재물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함인가? 어떻게 보면 마지막 세 번째가 설득력있게 들릴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누가가 복음서와 사도행전 두 책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빈부의 차이에 대한 관심이 많고, 특히
물질에 대한 언급이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수 없기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또 한 번의 교훈을 주시고자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5장을 시작할 때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논쟁을 하고 있다(15:1~2). 바리새인들이 어떤 존재들인가? 율법을 논하면서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모르는 눈먼 소경들이었고, 언약을 논하면서 선지자들의 언약을 성취한 메시야가 예수님이심을 모르는 편협한 성경교사들이었다.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나오는 부자가 바리새인의 모형이며, 부자의 다섯 형제는 한술 더 떠서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올지라도, 실제 요한복음 11장에 나흘만에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났지만 바리새인들이 믿지 않았던 것처럼, 죽은 자가 살아나더라도 믿지 않는 마음이 석화처럼 굳은 자들을 향한 주님의 비유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비록 ‘오는 세대’에 대한 믿음과 미래의 심판을 운운하였어도 그들은 현재 삶이 신앙에 어울리는 삶이 아니었다. 가난한 자들에게 눈 먼자들이었고, 돈을 사랑하는 부자와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은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와 간증할지라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을 자들이다. 결국 이 세상의 그릇된 삶의 태도는 장차 미래의 삶을 결정하게 된다는 교훈을 하고 있다.
제 19 절 호화생활을 하는 부자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눅 16:19)
1. 비유 속의 부자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개수는 대략 30개 정도이다. 그 가운데 ‘부자(a rich man)’가 등장하는 비유는 1/3이 된다. 부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 대부분 하나님을 지칭한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들은 하나같이 긍정적이다. 관대하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이런 부자들을 통해 비유하고자 했다. 단 두 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부정적이다. 어리석은 부자와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경우이다. 그리고 ‘부자(플루시오스, plouvsio")’라는 표현이 직접 거론된 곳은 이 두 비유와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나오는 부자를 포함하여 세 곳이다. 우리 속담에 ‘부자는 많은 사람의 밥상’이라는 말이 있다. 부자에게 ‘가난한자’는 밥상 혜택에서 열외 존재였다. 자신과 같이 있는 자들과 함께 흥청망청 쓸 뿐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이웃은 부자의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2. 자색 옷을 입은 부자
오늘날 염료를 색소를 얻을 수 있는 식물체로 약 2,000여종으로 알고 있다. 뿌리와 덩이줄기를 이용하는 것으로 지초(혹 지치)는 자색염료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고대 시대 역시 염료는 귀하였고 엄청 비쌌다. 고대 로마인들은 자색 염료를 얻기 위해 지중해에서 나는 뿔고둥(Murex)를 무려 10,000마리를 잡아야 겨우 한 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로마의 식민지 나라에서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왕이 왕복으로 입을 수 있었던 자색 옷을 부자가 입고 활보를 했다는 것은 엄청난 부자였음을 시사한다. 또한 왕처럼 허세를 부렸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값비싼 염료를 구할 수 없기에 흰옷을 입었다. 만석군 집안으로 유명했던 경주 최부잣집의 가훈 가운데 ‘며느리가 시집오면 3년간 무명옷을 입혀라’고 한 것은 사회지도자층의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즈’를 생각하게 한다.
3. 그는 졸부였다
조선시대 부자는 토지가 많은 사람이었다. 오늘의 연봉에 해당하는 년간 쌀 수입이 1만석이면 ‘만석군(君)’, 천석이면 ‘천석군(軍)’이라 불렀다. ‘군’과 ‘꾼’의 차이를 알고 있는가? ‘꾼’이라고 하지 않고 ‘군’이다. ‘군’이 제 역할을 못하면 ‘꾼’으로 전락한다. ‘노름꾼’, ‘사기꾼’의 꾼이 바로 이 꾼이다. 만석군이라는 말은 왕이 국가에 큰 공을 세운 보상으로 상당한 넓이의 토지를 주면서 제후(諸侯)로 삼았다. 이것을 봉군(封君)이라고 한다. 간혹 스스로 돈을 벌어 넓은 땅을 소유한 사람을 ‘소봉(素封)’이라고 불렀다. ‘소봉군(素封君)’의 약자이다. 거지 나사로가 구걸하였던 부자가 조선시대 살았다면 ‘군’이 아니라 ‘꾼’에 해당하는 졸부(猝富)였고, 소봉군과 같은 존재이다. 나사로가 바라 봤던 부자는 자기 먹고 마시는 데에만 돈을 쓰는 부자였다. 누가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고 간략하게 졸부를 소개하고 있다. 졸부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는 아주 인색하면서 호화파티를 열어 남에게는 아끼지 않고, 자신의 몸뚱아리로 들어가는 데는 한없이 헤픈 사람이다.
제 20a 절 가난한 나사로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 16:20~21)
1. 나사로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마치 이 이야기가 실화와 같은 분위기로 말씀을 한다. 가난한 나사로의 신상을 몇 가지로 간략하게 소개한다.
첫째, 이름은 나사로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라는 뜻을 가진 엘리에잘(Eleazar)의 약칭이다. 그는 환난 날에 유일한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였다(시 46:1). 그리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였다. 누가는 이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소유하고 살기 때문이다. 비록 잔고는 마이너스이고, 몸은 불구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진 빵부스러기로 연명하며 늘 허기에 차서 살았을지라도 불의를 행하지 않았다. 둘째, 경제 상태는 ‘가난한 자’다.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하고자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먹고자 갈망하였다(longing to eat). 부정형과 함께 쓰이는 에피뒤메오‘( ejpiqumevw)’은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욕구(needs)를 의미한다.
셋째, 건강상태는 피부병을 앓고 있는 환자다. 가난하여 제대로 위생관리와 영양보충을 할 수 없기에 나사로는 ‘헬코스(e{lko", 상처, 헌데, 종기)’로 고생하고 있었다. ‘종기나 궤양이 생기다’라는 동사 ‘헬코오(eJlkovw)’는 신약성경에서 본문에만 사용되고 있다.
넷째, 대문 앞에 버려진 채 있어야 하는 신체장애자이다. 나사로가 신체장애자라는 것을 알게 하는 힌트는 ‘버려진 채’라는 헬라어 과거완료 수동태 ‘에페브레토(ejbevblhto)’이다. 거지로서 편한 자세로 오래 있기 위해 누워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앉아 구걸하고 싶어도 헌데로 인해 더 이상 앉지 못하는 불구의 신체를 말한다.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부자들이 호화파티를 열 때 테이블 사이를 기어 다니며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모아 먹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나사로를 주인장인 부자뿐만 아니라 파티에 참석하는 부자들도 그를 개보다 더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부자 입장에서는 누추하고 볼품없는 나사로가 화려한 파티장에 어울리지 않지만 기어 다니면서 빵부스러기를 치우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므로 두 가지 유익이 발생한다. 빵부스러기를 땅바닥에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그 당시 식탁문화에 있어서 음식을 낭비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허드렛 일을 나사로가 대신 하여 주는 것에 대해 허용하므로 자신이 마치 관용이 있고 가난한 이웃에 대해 너그러운 사람인양 착각했을지 모른다.
2. 복되도다 가난한 자여!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마태복음의 팔복은 5장에 있다. 마태가 유대공동체을 겨냥해서 팔복을 쓸 때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시작한다. 그러나 누가는 이방인들을 향한 복음서이기에 ‘심령’이라는 단어는 빼고 그냥 ‘복이 있도다 가난한 자여(마카리오이 호이 프튜코이, makavrioi oiJ ptwcoiv)’에게 복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가 말하는 ‘가난한 자’는 실제적으로 가난한 자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제자들처럼 살기 까닭에 가난을 몸소 경험하는 자들이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구원을 받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부유한 자요, 정말 부자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가난한 자’가 되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부하였고, 앞으로 세관에서 직장 생활할 때 이웃의 물질을 착복하므로 자신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돈을 사랑하는 자의 길을 거부한 것이다.
3.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
예수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난 자리에서 여인이 원하는 것을 거절하시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본문의 분위기는 다르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들의 파티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얻기 위해 테이블 밑을 기어 다녔을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테이블에서 떨어지는 음식은 부스러기나 뼈다귀가 아니다. 당시 빵부스러기를 땅바닥에 방치하는 것은 빵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겼다. 테이블 밑에 빵 부스러기를 방치하는 것은 가난하게 되는 징조로 보았다. 부자들이 즐기는 연회 식탁에 앉는 손님들은 손가락으로 고기를 먹으면서 손에 묻은 기름을 없애기 위해 빵조각을 사용하곤 했다. 이 빵조각은 고기와 함께 먹거나 오늘날 같이 쨈을 발라 먹을 수 없었다. 쓰레기통이 아닌 상 밑으로 그냥 던지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사로가 떨어진 빵조각을 수거하러 다니면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했다. 하지만 기름기가 묻은 빵조각이 손에서 주물럭거리고 바닥에 던졌을 때 빵조각형태가 산산이 부서진 것을 상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런 상황이 실제하면 알갱이같이 부서진 빵부스러기에 묻은 흙이나 먼지를 떨어내고 입에 넣기란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경쟁자가 있었으니 개가 순발력있게 그나마 먹음직스러운 빵조각이 있다고 하면 날름 집어 먹었을 것을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무튼 상식적으로 빵조각의 형태를 유지 하지 않고 알갱이로 부서진 빵부스러기를 일일이 줍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요즈음 같이 방바닥이 카페트나 대리석으로 말끔히 깔려 있고 청소가 잘 된 상태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라면 사정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메마른 중동의 식탁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흙먼지로 인해 지저분하지 않았겠는가? 손님들은 접시에 담겨 있는 빵조각은 양식 먹을 때처럼 식용이 아니다. 그리고 빵조각에 기름 묻은 손을 닦은 뒤 다시 접시에 담아 두는 것은 전염병을 야기할 수 있었다.
요즈음 식당에서는 손을 씻을 수 있는 물티슈를 준비하지만 당시 연회에서 손을 씻을 수 있는 그릇에 물이 아닌 빵이 제공되었다. 부자들이 손으로 빵을 쥐고 주물럭거리다가 땅바닥에 던졌을 때 빵의 모양은 온데간데 없고 빵 부스러기가 흙바닥에 뒹굴렀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거지 나사로는 자신의 식욕을 채우지 못하고 굶주려야 했을 것이다.
제 20b 절 가난한 나사로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눅 16:20~21)
1. 노블레스 오블리주
경주 사람들은 명부(名富)로서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었던 경주 최부자를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경주의 비공식 임금(君)으로 존중하였다. 최부잣집은 1년 소작 수입이 쌀 3000석 정도였는데 이 가운데 1000석은 손님 대접에 썼다. 손님이 떠날 때 하루 분의 식량을 손에 쥐어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가 굶어 죽어갈 때 그 집 부자는 하늘이 낸 부자 거상 임상옥처럼 빈민구제에 관심이 없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이웃사랑을 상실한 유대인이었고, 상류층의 도덕적 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난쟁이 행진’에 비추어 볼 때 재산을 키로 바꾼 뒤 키 순서대로 줄을 지어 행진을 하는 데 나사로는 너무 작아 보이지 않고, 부자는 머리가 구름 위에 노는 사람에 해당한다.
2. 욥과 나사로
나사로가 헌데를 앓고 있으며 누워 있었다면 동방의 최고의 재벌이었던 욥이 악창을 겪으며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이 과거 부자로 있을 때 결코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았음을 성토하고 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는 나사로와 비슷한 참담한 지경에 누워 있어야 했다.
우리나라 12대 300년 동안 ‘만석군’을 이어간 경주 최부자집의 ‘부자 철학’ 또한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했다고 하지 않는가? 경주 최부자와 함께 독립운동에 거금을 희사한 진주씨 지수면의 5백년 만석군이었던 허씨 문중이 있는데 필자의 외할머니 ‘허성애’ 문중이다. 의부(義富)인 허씨 문중 역시 흉년에 배고픈 사람에게 먹여주고, 공공사업에 돈을 썼다고 한다.
제 22 절 빈자와 부자의 귀천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 16:22)
1. 아름다운 귀천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에서 인생살이를 소풍에 비유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인생은 한나절 소풍처럼 해가 기울 무렵 빈 도시락만 들고 하산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인간적으로 보면 부자에게는 한 평생을 소풍처럼 살았을지 모르지만 나사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얻을 하나님의 나라를(6:20) 소풍처럼 생각하고 떠났을지 모른다. 그는 ‘하나님이 돕는다’라는 뜻의 ‘나사로’라는 이름만 남길 뿐 죽어 곧장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에서 호화호식하며 가난한 이웃을 외면한 부자는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한 푼도 저승길 노잣돈으로 챙기지 못한 채 죽어 장사되고 ‘음부(하데스, a{/dh")’로 떨어지고 말았다. 부자는 마귀에 사로잡혀 가는 표현은 하지 않는다. 유대 민간전승은 보통 의인(義人)이 천사들에 의해 옮겨지는 것을 말하고 있기에 비유를 말씀하는 화자나 듣는 청자가 나사로를 ‘의인’의 반열에 세우고 있다.
2. 아브라함의 품
이 땅에서 ‘가난한 자’의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나사로는 땅에서 이미 복을 받은 인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꺼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게 되었다(눅 12:32). 나사로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을 때 아브라함의 품에 앉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앉았다는 것은 구약의 성도들 중에서 최고로 특권을 받은 자들과 동일한 반열에 앉아 잔치상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아브라함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상에 앉게 되었다. 지상에 있을 때와 완전히 반전이다. 땅에 있을 때는 부자가 식탁에 앉아 허세를 부렸고 가난한 나사로는 테이블 밑을 땅거미처럼 기어다니는 불쌍한 존재였다. 그런데 저승에서,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나사로가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한 잔치상의 상석에 앉게 되었고,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 빵조각은커녕 물한모금조차 얻을 수 없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3. 끔찍한 귀천
“부자로 죽는 것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은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가 한 말이다. 초기 고전 문헌에 보면 ‘음부’란 육체를 떠난 영혼이 거주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낱말로 사용되었다. 부자는 율법의 요약인 ‘사랑의 이중 계명을 따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과 돌봄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하는,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맘몬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야 하고, 가난한 자들의 도움이 되어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가난한 자들이란 비단 경제적, 사회적 궁핍을 겪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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