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제 1196편
*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祖師))
오도송(悟道頌) 및
선시(禪詩)
오도송(悟道頌)이란 무엇인가 ?
불교(佛敎)를
공부(功夫)하는
수행자(修行者)가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가운데(中) 하나를
오도송(悟道頌)
이라고 한다.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게송(偈頌)의 하나로써
구체적으로
비교해서 설명하면
고승(高僧)이
자신만의 깨달음(覺)을
노래(歌, 句)한 것이
바로
오도송(悟道頌)이며
고승(高僧)이
자신의 임종(臨終) 전에
남겨놓고 가는 노래(歌, 句)를
열반송(涅槃訟)이라고
한다.
게송(偈頌)이란
불교의 가르침(敎義)을
함축(含縮 집약)하여
표현(表現)하는
운문체(韻文體)의
짧은 시구(詩句 문자)를
말하는데
곧 선시(禪詩) 내지
또는 선어(禪語 문장)를
이르는 말이다.
본래(本來)
게(偈)와 송(頌)은
같은 의미로
《게(偈)》
라는 글자(字)는
산스크리트어(梵語)
《가타(gatha)》의
음을 빌려와(音借) 따서
만든 말이고
《송(頌)》
이라는 글자(字)는
《가타(gatha)》를
한문(漢文)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깨달음(正等覺)을 읊은
선승(禪僧)의 게송(偈頌)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게송(偈頌)
즉,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오랫동안
수련과정(修練過程)을
통해 함축된 의미로
세속(사바세계)의
사람(大衆)들에게
무엇인가를 전(傳)하고
말(說法 이야기)하고저
하는 것이며
후세(후학)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적(歷史的)
문헌 기록상(文獻記錄上)
오도송(悟道頌)을
가장 먼저 남긴 이(僧侶)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 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禪師)
이다.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구분이 부질없는 일임에야
사람들은
태어남을 기뻐하고
헤어짐은 슬퍼한다.
오랜 세월
훌륭한 선승(禪僧)이나
선사(禪師) 스님들의
깨달음의 길(佛道行)이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지난(至難)하듯이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남겨진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은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듯
깨달음의 노래는
다시 한번
자신(수행자)의 삶(人生)을
돌이켜보게 하고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여기
역대(歷代)
조사(佛祖師 선사)
스님(高僧)들의
오도송(悟道頌)과
열반송(涅槃訟)을
올려놓으니
행간(行間)의
곳곳(處處)에 숨겨져 있는
깊고 깊은 심오(深奧)한 뜻을
함께 발견(發見)하고
공부(功夫)하며
오늘을 사는
지혜(반야 보리 광명 智慧)를
찾아보시기 바램해 본다.
본론(本論)
불교(佛敎)
역대 선사(歷代 禪師, 祖師)
선시(禪詩)와
임종게(臨終偈) 및
오도송(悟道頌) 설해(說解)
"
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鹿柴)
시불(詩佛)
왕유(王維) 선사
공산불견인(空山不見人)
단문인어성(但聞人語響)
반경입심림(返景入深林)
부조청태상(復照靑苔上)
텅 빈 산에 사람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단지 사람의 말소리만
어슴푸레 들리어 오고
지는 햇살 한 가닥(줄기)
숲 속으로 스며 들어와
푸른 이끼 위를
거듭 비추이고 있네.
"
위(上記)의
시(詩, 게송, 禪詩)를
짓은 이(작자)는
시불(詩佛)로 알려진
왕유(王維, 699~759)이다.
이 시(詩, 게송,
禪詩)를 읽다가 보면
저절로
귀(聽音)가 이울어지는
느낌이 일어난다.
인적(人跡,
사람의 발자취)이 끊어진
깊고 깊은 산중(山中)에
어디선가
사람 소리(聞人語)가
들려온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未知, 미묘한)
도란거리는 말소리에
비로소
닫아 두었던
육근(六根, 眼耳鼻舌身意)이
열리면서
서서히 주위(주변)가
의식(意識, 인지)되어 진다.
숲 속(無明, 無知) 깊이
한 가닥(줄기) 햇살(光明)이
들어와
푸른 이끼 위에
떨어지는 정경(靜景)이
해(太陽)가
서산에 가까워진 시간을
읽게 해 준다.
원 제목이
《녹채(鹿柴)》로
되어 있는데
녹채(鹿柴)란
사슴을 먹여 기르는
나무울짱을
말한다.
왕유가
한 때 망천(輞川)이라는
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은거생활을 할 때
그림을 그리듯이
지어 놓은 시(詩)들이 많다.
녹채(鹿柴)를
선시(禪詩)의 일품(一品)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왕유)의 생애가
돈독한 불심(佛心)으로
선수행(禪修行)의
정신(精神)을 잃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32살 때
부인(아내)을 사별하고
평생을 혼자 살면서
시심(詩心)을
불심(佛心)으로 승화시켰던
사람이었다.
유마거사를 좋아하였고
유마힐(維摩詰)
세 글자가 묘하게도
유(維)는 이름이 되었고
마힐(摩詰)은
자호(字號)로 쓰기도
하였다.
※
왕유(王維, 699~759)는
당(唐) 나라
전성기(全盛期)의
대시인(문장가, 大詩人)이요
그림을 그리는
이름(명망)있는 화가(畵家)였던
사람(人物)이다.
이백(李白,
이태백, 701~762,
당나라 시대의 시인(大詩人)
자(字)는 태백(太白)
호(號)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도연명(陶渊明,
365~427, 중국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詩人)의
한 사람으로
은둔자(隱遁者),
전원시인(田園詩人)의
최고로 꼽히는 인물))
등(etc)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
소동파(蘇東坡,
본명 소식(蘇軾) 1037~1101,
중국 북송 시대
시인(大詩人)이자 문장가
학자(學者), 정치가로
자(字)는 자첨(子瞻)
호(號)는 동파거사(東坡居士)
송시(宋詩)의
성격을 확립하는 데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대시인(大詩人)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문장가(大文章家)였고
중국(中國)
문학사(文學史)에서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를 대표하는 인물(人物)
등(etc)에게
많은 영향을 줌))
그리고
두보(杜甫, 712~ 770,
당나라 중기 관리이자
문인(文人)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시인(大詩人))와
더불어
당시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人物)로
불교(佛敎)에
깊이 심취(深聚)하여
많은 시(詩, 게송, 禪詩)를
썼기 때문에
시불(詩佛,
시를 짓는 부처님)이라고
사람(사바대중)들에게
불려지기도 했다.
또한
자연시(自然親和的 詩)의
제1인자로 손 꼽히었으며
그(왕유(王維))의
시(詩, 게송, 禪詩)를 좋아했던
대종(唐, 代宗)으로 부터
천하(天下)의
문종(文宗, 시문(詩文)을
열고닫는 시초를 연 사람))
이라는 격찬(覡讚)을
받기도 했다.
그림(畵)에도
재주(재능)가 매우 뛰어나
장안(長安)의
절(寺刹, 승가람마, 사찰)
자은사(慈恩寺)에 그린
벽화(壁畵)
백묘화(白描畵,
흰 고양이 그림)와
금벽청록(金碧靑綠)의
풍경을 그린 산수화(山水畵)가
절찬(節讚, 절대적인 찬사)을
받기도 하였다.
벼슬(관직)이
상서우승(尙書右丞)이었을 때
세상과 운명(運命)을 달리하고
사망(死亡)하였으므로
왕우승(王右丞)
이라고도 불리우며
저서(著書)로는
《왕우승문집(王右丞文集)》
10권(10券)이 남아 있다.
당시의
고승(高僧大德, 祖師)들과
교유(交流)가 넓었으며
특히
중국 선종(中國 禪宗)
육조 혜능(第 6代 祖師 慧能)의
제자(上首弟子)이며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설법(說法)을 책(冊)으로 엮어
편찬(編撰)한
[육조단경(祖壇經)] 저자(著者)
하택신회(荷澤神會,
685~760) 선사(禪師)를
의지(依支)해서
참선(명상, 參禪,
修行修行)을 하기도 했다.
불교(佛敎)
경전(經典)에도 해박(解博)한
지식(知識)을 갖고 있었으며
행서(行書)를 빠르게 쓰는
속사(速寫)를 하기 위하여
짜임새와
필획(筆劃)을 생략하여
곡선(曲線) 위주로 흘려 쓰는
한자서체(漢字書體)
초서(草書)에도
매우 능(能)했다고
전(傳)한다
"
ㅡㅡㅡㅡㅡㅡㅡ
※
원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극히 개인적 견해(見解)와
해석(解釋)으로
오역(誤譯)
오판(誤判)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글 내용 가운데
잘못 된 부분은 옳고 바르게
지적(指摘)해 주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 마음그릇 心椀 드림 -
ㅡㅡㅡㅡㅡㅡㅡㅡ
마음그릇 心椀과
함께 배우는 불교
《== 다음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