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9장 구속사 강해
실로에 대한 약속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앞으로 데려갔을 때 그의 우려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요셉의 두 아들을 즉시 자기의 소유로 삼고(창 48:5-6)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각각 한 지파씩 기업을 주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12아들에게 각기 한 지파씩 기업을 주었지만 결국 요셉에게만은 2지파의 기업을 주게된 셈이다. 이러한 축복은 요셉이 그의 종족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보호하는 큰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다. 나아가 야곱은 아모리 족속의 분깃까지도 요셉의 아들들에게 주었다. 이렇게 하여 요셉의 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영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 후 야곱은 각기 아들들에게 기업을 나누어주며 축복을 하였다. 놀라운 일이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곧 장자인 르우벤에게 장자의 명분이 돌아가지 않은 것이다. 그는 야곱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창 35:22) 장자로서 받을 축복에서 제외되고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거룩한 할례 의식을 이용해 세겜 성 사람들을 죽인 사건(창 34장)의 주동자로 역시 장자의 축복에서 밀려났다. 대신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른 유다는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라”(창 49:10)는 축복을 받았다. 그리고 장자의 축복은 요셉에게로 돌아갔다(창 49:25-26).
1. 유다가 받은 축복에 대하여
유다가 야곱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실로’(הלישׁ:안식을 주는 자)의 등장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한다. 특히 창세기 37장 이후부터 요셉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사 이후의 이야기에서 유다의 위치에 대하여 새롭게 관심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창세기 37장 이후의 기록을 자세히 보면 요셉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야곱의 12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12아들들이 각각 어떤 속성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야곱의 유업을 누가 이어받게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38장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유다는 이방 여인을 취했기 때문에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을 잃어버리고 이방인과 혼합되어 가고 있었다. 나아가 유다의 유업을 이을 장자 엘의 죽음은 결국 유다가 자부인 다말과 관계를 맺고 쌍둥이 아들을 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창세기 38장).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가 숨겨져 있다. 그러한 유다를 택하여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다시 말하면 유다가 선택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의지의 발로였다는 것이다. 오난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깨뜨리려고 했었고 유다자신까지도 셀라를 통해 엘의 뒤를 잇지 않으려 했으나 하나님은 직접 유다를 통해 그 혈통을 잇게 하셨던 것이다.
유다가 큰아들 엘이 죽자 다말에게 둘째 아들 오난을 들여보낸 것은 수혼법(후사가 없이 남편이 죽을 경우 그의 동생이나 가까운 친척이 대신 들어가 후사를 잇게 하는 법)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오난은 다말에게서 날 아들이 자기의 후사가 아니라 형의 후사가 될 것을 싫어해서 땅에 설정(onanism)해 버리자 하나님은 그 행위를 악하게 보시고 오난을 죽이시고 만다.
이 수혼법은 이스라엘에게 중대한 의미가 있다. 후사가 끊어진다는 것은 그 가문이 멸절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후사의 출생은 곧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므로 어느 상황에서도 그 후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해주신 특별한 법이었다. 그런데 오난이 이 법을 어겼으므로 결국 엘의 가계가 끊어지고 엘의 가계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단절되게 됨으로 그 행위는 큰 죄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난을 죄 없다 아니하시고 죽이셨던 것이다.
그러자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 역시 다말과 상관하다 혹시 잃을까하여 두려워해서인지 셀라가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다말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말을 집에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그러나 셀라가 장성한 뒤에도 다말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자 다말은 스스로 면박을 취하고 (이런 행위는 당시 창기들이 하는 관습이었다)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맺고 베레스와 세라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성경은 자세하게 기록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유다의 허리에서 인류의 구세주이자 아담-노아-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성취자가 되실 메시아가 나와야 하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엘이 후사가 없이 죽고 난 후에 동생 오난이 다말에게서 후사를 이을 아들을 생산하여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난은 자기의 개인적인 감정이 앞서서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을 무시하고 후사를 생산하지 않은 것은 곧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며 전 인류의 구속과 언약을 깨뜨리는 죄악이었던 것이다. 왜 하나님은 유다를 통해 메시아를 예비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유다의 계보에서 실로가 탄생하리라는 예언이다. 그동안 창세기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초점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약속은 노아를 이어 아브라함과 족장들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야곱이 유다를 축복하는 과정에서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2. 실로에 대한 약속
실로(shiloh=평강의 왕)라는 이름과 함께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49:8)라는 축복은 마침내 모든 원수를 물리치고 정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평강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다 주실 분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유발시키고 남음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물론 인간의 가계에서 출생하실 것이지만 거기엔 하나님의 초역사적인 간섭과 창세기 3:15이후의 신실하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결정체인 것이다. 특히 구원의 약속과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히브리인의 계보만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인물들까지 동원하고 계심을 볼 때 메시아의 구원사역이 히브리인에게만 극한 되어 있지 않고 전 인류를 포함하고 있음을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볼 때 메시아는 초역사적이며 우주적인 구속사역을 펼치실 분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인간의 가계를 구성할 인물을 결정하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즉 메시아는 단순히 인간의 족보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후사를 낳고, 낳고 해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그 인물 하나 하나까지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특별한 간섭을 통하여 마침내 메시아를 이 땅에 출생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점이 곧 우리 인간과 다른 출생을 가지신 메시아의 탁월성인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요셉에게만 우리의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약속의 씨이시며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경로를 걸쳐 탄생하게 되는가를 알 수 있는 유다의 계보에도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메시아가 어떻게 우리에게 오셨는가를 기록한 책이며 바로 그 메시아가 아담-노아-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성취자임을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언약의 씨인 평강의 왕에 대한 소망을 주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간절히 소망했기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묻힐 것을 유언으로 당부했던 것이다(창 49:29-32). 또한 요셉 역시 자신의 시신을 애굽 땅에 묻지 않고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창 50:25)고 후손들에게 엄하게 맹세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소망하며 애굽에 소망을 두지 않도록 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약속을 믿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에서 큰 민족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가 성취되어지는 시발점이다. 출애굽기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