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二의世 눅十六章十九-三十一節 回顧와 展望 淸夕
新約聖書 言二之世. 一過去 一未來, 互相對立. 過去以旣知之人物 成世界時地制限 成自然歷史 에네지微動變化卽 死之世.
未來卽 神永遠 無淚無病之新世界. 与旧世無關 永遠時間之延長也. 有限引伸 至無限入處. 兩間有懺悔痛哭者 有奮發勇進者, 徒悔無爲者 爲墮也 徒奮無悔易失也. 人之行 常隨此二者 而飜覆 過世有明國暗國, 明當取 暗當去 而莫古死事也. 雖暗不足悲 雖明不足喜. 但向前已耳.
且來世 亦有暗國明國, 何者明, 何者暗? 我不可知卽 當以古爲鑑 而奮進也. 猶大之列王 歷代皆爲我鑑 而但以參古爲事. 朝鮮中國 是也. 但以取新爲事 改更是也. 此時回顧与展望 分焉. 回顧祖述堯舜, 展望遠望天國. 於是鑑敎之三生分焉.
理在卽 三生之一也. 吾之現在 皆關二之世. 不可悲顧 不可盲進. 吾等當以基督爲標準. 過去之善惡 一切捨之. 未來之燦爛 雖死當取. 基督無二世貫. 今古眞理自在 從基督則 無可悔者 常時常足故也. 如無標準之東之西 現在之勞力 皆如擊空捉風. 頭已白 而不久入地, 豈不可悲也? 主望京而哭者 猶人之生活 自繩自縛 慘然. 不覺而恣行 死亡之事, 主爲此以哭. 紅袍与乞人 昭昭爲鑑 而世人皆願紅袍 不願乞人 人之常情也.
未來何必 紅袍無福乎? 富而信 蓄財天國, 多設敎會 又救貧民 又爲王於天國 豈非至願乎? 只 貧者 今世雖貧 來世共至國爲富爲王, 亦是非至願乎?
104. 둘의 세계 / 누가복음 16:19-31 회고와 전망 삼청교회 저녁예배
신약성서에 둘의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과거이고 하나는 미래인데, 서로 대립합니다. 과거는 기존의 알려진 인물들로 이루어진 세계로서 시간과 지역의 제한이 있습니다. 자연과 역사를 이룬 과거는 에너지(Energy)의 작은 움직임으로 변화하였으니 죽음의 세계입니다.
미래는 눈물도 질병도 없는 하나님의 영원한 새 세계입니다. 구세계와는 무관하니 영원한 시간의 연장입니다. 유한(有限)을 끌어다 무한(無限)에 도달하게 한 곳입니다. 이 양자 사이에 참회와 통곡이 있는 사람은 분발하여 용감하게 나아가는 것이고, 도무지 회개함이 없는 자는 떨어지고 도무지 분발함도 회개함도 없는 자는 쉬이 낙오합니다. 사람의 나아감은 항상 이 둘을 따라가는 것이나 번복하여서 과거의 세계에는 밝은 나라와 어두운 나라가 있었습니다. 밝음은 당연히 취하고 어두움은 당연히 제거하여서 옛날에 있었던 사망의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는 비록 암흑이라고 슬퍼할 것도 없고 설사 밝아도 기뻐할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다만 앞을 향할 뿐입니다.
또 내세(來世) 역시 암흑의 나라와 광명의 나라가 있는데, 어느 것이 밝고, 어느 것이 어둡습니까? 내가 알 수 없으니 의당히 옛날로서 거울을 삼고 떨쳐서 나아가야 합니다. 유대의 여러 왕들은 역대에 모두 우리의 거울이 되며 다만 옛날을 참고로 삼습니다. 조선과 중국도 그러합니다. 다만 새로움으로 일을 삼아 다시 고침이 이것입니다. 이 시간에 과거를 회고(回顧)하고 미래를 전망(展望)하는 분깃점입니다. 회고는 고대로 거슬러 요순(堯舜)의 기록을 서술하여 밝히고, 미래의 전망은 멀리 천국까지 바라다봅니다. 이에 거울을 삼아 과거 미래 현재의 삼생(三生)을 나누고자 합니다.
현재는 곧 삼생의 하나입니다. 우리의 현재는 모두 다른 두 개의 세계와 관계됩니다. 과거를 슬프게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미래를 무턱대고 나아가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리스도로서 표준을 삼아야 합니다. 과거의 선악은 일체를 제거하고, 미래의 찬란함은 죽더라도 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두 세계를 관통함이 없으니 현재에 관계합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진리는 자유로이 있으니 그리스도를 따르면 후회함이 없으리니 언제나 늘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동(東)인가 서(西)인가 표준이 없을 것 같으면 현재의 노력이 모두 다 허공을 치고 바람을 잡는 것 같이 헛될 뿐인데, 자신의 머리는 벌써 희어지고 땅속에 들어갈 날 머지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습니까? 주님이 예루살렘을 바라다보시고 우신 것은 유대인의 생활이 스스로 택한 말과 행동에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결과가 너무나 참혹하였기 때문입니다. 깨닫지 못하고 방자히 사망의 일을 하니, 주님이 이 때문에 우신 것입니다.
홍포와 거지의 경우가 소소히 거울이 되지만 세상 사람들은 홍포를 원하고 거지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니 인간이 보통으로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미래는 어찌하여 홍포에 복이 없습니까? 부유하고 믿어서 천국에 재산을 쌓으면, 교회를 많이 설립하고 또 빈민들 구제하면 천국에서 왕 노릇할 것이니 어찌 지극히 원함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가난한 자는 이 세상에서 비록 가난하더라도 내세에는 한가지로 천국에 이르러 부유하고 왕 노릇할 것이므로 이 역시 지극히 원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