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 최초의 성직자(1845년):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년)
순교자(殉敎者)이며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 아명(兒名)은 ‘재복(再福)’ · 보명(譜名-족보상의 이름)은 ‘지식(芝植)’ · 관명(冠名)은 ‘대건(大建)’ · 본관(本貫)은 ‘김해(金海)’이다.
↳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천주교신자인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년)과 모친 고(高)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대건의 조부 김택현(金澤鉉)은 박해 때문에 솔뫼를 떠나게 되었는데,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 때에 서울의 청파(靑坡)를 거쳐 용인(龍仁) 땅 골배마실(경기도 용인 한덕동)에 정착하였다. 그 때 김대건의 나이는 7세였다.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의 부친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은 1836년 초에 모방[Maubant, 한국명:나백다록(羅伯多祿)] 신부가 입국하자 곧 서울의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1795~1839. 성인) 집에 거처하던 모방 신부를 방문하여 그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모방 신부는 서울에서 부활절(4월 5일)을 지내고는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의 공소순방에 나섰는데, 그는 먼저 경기도 용인 지방의 골배마실에 이웃한 ‘은이공소’에 들러 열심하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년 김대건을 대견스럽게 여겨 신학생으로 간택하여 최양업(崔良業) · 최방제(崔方濟)와 함께 마카오(Macao, 중국 광둥 성의 항구도시인 광저우에서 시작되는 주장 강 어귀 서쪽에 있으며, 영국 직할 식민지였다가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맞은편에 있다)의 파리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 영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프 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경리부로 보냈다.
↳ 당시 김대건의 나이 16살 때인 1836년 12월 3일 서울에서 출발하였다.
세 소년(김대건 · 최양업 · 최방제)이 중국 마카오로 갈 때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 부를 비롯하여 정하상(丁夏祥)과 조신철(趙信喆) 등 약 10명도 동행하였다.
↳ 유방제 신부는 조선포교(朝鮮布敎)가 어렵게 되어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정하상 등은 세 소년을 국경까지 인도하는 동시에 새로운 선교사를 영입하게 되어있었다.
일행은 12월 28일 변문(邊門, 평안북도 의주로부터 48㎞ 떨어진 지점인 구련성과 봉황성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서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별정소이며 국경지점이다)에 도착해 대기 중이던 조선선교사 샤스탕[Chastan, 한국명: 정 아각백(鄭 牙各伯)] 신부를 만났고, 세 소년은 샤스탕 신부를 조선 국경까지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을 따라 요동(遼東, 중국 진나라 때 현재의 랴오닝 성의 군 명칭)과 만주를 거쳐 중국대륙을 횡단한 끝에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세 소년(김대건 · 최양업 · 최방제)은 마카오에 도착한지 2개월만인 8월에 마카오에서 일어난 민란(民亂) 때문에 잠시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했는데, 1년이 지난 1838년 11월 27일에는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1820?~1837년)와 사별(死別)해야만 했다.
1839년 아편거래로 인해 광동(廣東)과 마카오에 다시 민란이 일어나 4월초 김대건과 최양업은 또 마닐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칼르리 · 데플레슈 신부가 그들을 동행하였다.
중국 마카오로 다시 돌아온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은 최양업(崔良業, 토마스)과 더불어 같은 해에 소정의 신학과정을 끝내고 연말에 삭발례(削髮禮. 1962~1965년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있었던 품급으로써 제1품에 해당된다)로부터 만23세의 나이에 부제품을 받았으나(1844년 12월 15일) 연령미달 때문에 사제품까지는 받지 못하였다.
김대건(안드레아) 부제(副祭)는 타고난 기지(奇智)와 대담성(大膽性)으로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국경선을 넘는데 성공하여 1845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 그는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 중병(重病)까지 앓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생을 선발하여 교육시키면서 조선지도(朝鮮地圖)를 작성함은 물론 순교자(殉敎者)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으며, 무엇보다도 상해(上海)로 가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상해 행 준비를 완료한 김대건(안드레아) 부제는 4월 30일 11명의 뱃사공들과 같이 작은 배 ‘라파엘’호에 탑승하여 상해를 향해 제물포를 떠났다.
↳ 두 번의 풍파(風波)와 해적(海賊)을 만나는 등 1개월여의 모험 끝에 중국 우송커우(吳淞口, 오송구)를 거쳐 6월 4일 목적지인 상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국 상해에 성공적으로 도착한 김대건(안드레아) 부제는 곧 그의 도착을 페레올 주교(主敎. 라 Eepiscopus, 영 Bishop)에게 알렸고, 이 소식을 들은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Daveluy, 한국명: 안돈이(安敦伊)]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로 왔다.
페레올 주교는 8월 17일(1845년) 상해 부근에 있는 김가항경당(金家巷經堂)에서 김대건 부제(副祭)에게 사제품(司祭品)을 주었다. 이로써 김대건(안드레아)은 한국인 최초의 사제(司祭)가 되었고, 1주일 후에 김 신부는 중국 상해에 있는 만당신학교(萬堂神學校) 성당에서 다블뤼 신부의 보좌를 받으며 첫 미사를 올렸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일행 13명을 라파엘호에 태우고 8월 31일 상해를 출항함으로써 귀국길에 올랐는데, 이번에도 제주도(용수리)에 표착(漂着)하는 등 큰 위험이 없지 않았으나 40여일 동안의 모험 끝에 10월 12일 강경(江景, 지금의 논산시 강경읍) 부근의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할 수 있었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곧바로 상경하여 서울과 그 인근지역, 특히 경기도 용인 지방을 중심으로 교우들을 방문하고 성사(聖事)를 집전하였다. 그의 신앙과 신심과 놀라울 정도의 유창한 말씨는 짧은 시간 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10년 만에 처음으로 만난 어머니 곁에서 부활절(1846년 4월 12일)을 지내고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서 페레올 주교의 지시사항인 선교사(宣敎師. 라 Missionarius, 영 Missionary) 영입을 위한 새 통로개척에 동분서주하였다.
중국의 어선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 5월 14일(1846년) 7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서울 마포를 출발하여 인천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에 도달하여 청나라 어선과 접촉하였고, 그때 편지와 지도를 탁송(託送)하고 순위도(巡威島, 황해도 옹진군 흥미면에 속하는 섬)로 돌아왔을 때인 6월 5일 그곳 관헌(官憲)에게 체포되었다.
등산진영(登山鎭營)에서의 취조에 이어 5일후 해주감영(海州監營)으로 이송된 뒤 4차례의 문초를 받았고, 중국어선에 탁송했던 편지와 지도의 압수와 더불어 사건이 심각해짐에 따라 김 신부는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捕廳)에 구속되었다(6월 21일).
↳ 그 다음날부터 좌우포청(左右捕廳)에서 7월 19일까지 무려 40여 차례의 문초를 받았다.
9월 15일 연석(筵席)에서 영의정(領議政) 권돈인(權敦仁)은 김대건이 외국인과 교섭했다는 죄목(罪目)으로 그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할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대신(大臣)들도 이에 동조함에 따라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에게 군문효수형이 내려졌다.
↳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그 다음날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 사람의 머리를 베어 장대에 매달음으로써 백성들을 경계하던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1846년 9월 16일).
김 신부의 성해(聖骸)는 40일후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안장되었는데, 1901년 용산신학교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1951년에 서울 중구 혜화동 대신학교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김 신부는 1857년에 가경자(可敬者. 라 Venerabilis, 영 Venerable, 시복 후보자에게 잠정적으로 주어지는 존칭)에 올랐고, 1925년에 복자위(福者位)에 올랐다가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계기로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hn Paul II, 제264대 교황. 재위:1978년 10월 16일~2005년 4월 2일. 재218대 교황 하드리아노 6세 이후 455년만의 이탈리아 외 출신의 교황이자 역사상 최초의 슬라브계 교황. 27년여 재임한 교황으로써 역사상 3번째로 장기간 교황좌에 있었다)에 의해 다른 한국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諡聖)됨으로써 성인(聖人) 반열에 올랐다.
☞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1949년부터 한국천주교회 모든 성직자(聖職者)의 주보성인(主保聖人. 라 Patronus, 영 Patron saint)이며, 그의 동상(銅像)이 ‘애국선열 동상건립위원회’에 의해 1972년 5월 14일 절두산성당(切頭山聖堂) 광장에 건립되었다.
솔뫼(松山)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성직자인 성 김대건(1821~1846년,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이다.
↳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忠南 唐津郡 牛江面 松山理)에 위치한 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靑靑)하다고하여 솔뫼[송산(松山)]라고 불렀다.
솔뫼는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曾祖父) 김진후(金震厚 비오, 1739~1814년)가 50세에 영세한 이후 교구마을이 되었는데, 김진후는 그가 면천군수로 있을 때 ‘내포지방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1759~1801년. 순교자)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은 뒤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신해년(辛亥年)과 신유년(辛酉年) 박해 때 체포되어 10여년의 옥살이 끝에 해미감옥(海美監獄)에서 옥사(獄死)하였다.
김진후의 셋째아들 김한현(金漢鉉)[일명: 종한(宗漢)]이 순교하였고(1816년), 1839년에는 다시 둘째아들 김택현의 아들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년. 성인)이 순교하였으며, 1846년에는 김제준의 아들 성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가 순교하였다.
19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맞아 그의 후손들이 김대건 신부의 집터와 뒷동산 4,600평을 매입하였고, 1976년 대전교구는 ‘솔뫼 성역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1977년에는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동상과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가문은 32년에 걸쳐 4대가 순교(殉敎. 라 Martyrium, 영 Martyrdom)하는 영광의 가문이 되었으므로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불리게 되었다.
순위도(巡威島)
황해도 옹진군 옹진반도 남단에 있는 섬이며,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된 곳이다.
↳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는 폐레올[Ferreol, 한국성:고(高)] 주교로부터 서해를 통한 성직자 영입로를 개척하라는 명을 받아 1846년 5월 14일 7명의 교우와 함께 마포를 떠나 인천을 거쳐 백령도까지 갔고, 그곳에서 중국 어부들과 접촉하여 6통의 편지와 2통의 지도를 중국교회에 전달케 하고 귀환도중 순위도(巡威島)에 정박했다가 6월 5일 체포되어 등산진(登山鎭)과 해주감영(海州監營)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9월 16일 새남터(현, 서울 용산구 서부이촌동 199번지)에서 순교(殉敎)하였다.
은이공소(~公所)
성 김대건(안드레아, 1821~1846) 신부(神父. 라 Pater, 영 Father)가 서품(敍品. 라 Ordinatio, 영 Ordination)을 받고 귀국한 뒤 공소(公所)를 처음 차린 곳이다.
↳ 김대건 신부가 조부(祖父) 김택현(金澤鉉)을 따라 솔뫼에서 이사 온 뒤, 15세 때 마카오로 떠나기 전까지 8년 동안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골배마실(현,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한덕동)에 이웃한 은이 마을에 있던 공소(公所)이다.
☞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이며, 일찍부터 복음이 뿌려진 ‘은이’에는 1821년부터 1846년 5월까지 모방[Maubant, 한국성:나(羅)] 신부가 사목활동을 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