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지 못한 존재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아름다운 동화 선명한 언어와 유려한 이미지를 구사하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김성규 시인의 두번째 시집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출간되었다.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폐허에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과 삭막한 “세계의 적나라하고 추악한 양상들을 땀내 나는 언어로 기록해나”(조재룡, 해설)가며 부조리한 현실의 이면을 새롭게 인식하는 깊은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서정적인 목소리와 그늘진 삶의 비참한 풍경을 예민하게 포착해내는 냉정한 시선이 돋보이는 “처연한 아름다움과 절절한 울림이 있는”(송찬호, 추천사) 시편들이 불행한 삶의 고통 속에서 희망마저 잃고 살아가는 슬픈 존재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뢰밭 가운데서/한 남자가 일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적도를 따라 걸어가는 중입니다/왜 적도로 가느냐고 묻자,/전쟁이 끝나 우리가 만날 수 없을 때/부서진 건물 사이를 지나/너는 왼쪽으로 걸어/나는 오른쪽으로 걸을게/서로를 찾아 헤매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적도를 향해 걸어가자//지뢰밭 가운데서/한 여자가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적도로 걸어가는 남과 여」 전문)
김성규 시인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한 성찰보다는 “가난이 재난을 찾아가”고 “재난이 가난을 찾아내”(「해열」)는 이 세계의 비극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인다. “반쯤 쪼개진 하늘”(「수박」)에 “돼지비계처럼 떠다니는 구름과 시체의 얼굴로 부풀어오르는 달”(「동면, 폐정,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과 같은 섬뜩한 풍경 속에는 재앙으로 물든 참혹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비장함마저 감돈다. “썩은 물이 흘러넘치고/뱀의 허물처럼 아이들의 꿈이 밤하늘에 떠다”(「동면, 폐정,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니는 폐허의 가시밭 어느 곳에서도 희망의 불씨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올라갈 곳은 없고 오직 떨어질 일만 남”은 고통스러운 지상에 “폭풍이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폭풍 속으로의 긴 여행」) 모른다.
나, 걸었지/모래 우에 발자국 남기며/길은 멀고도 먼 바다/목말라 퍼먹을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뒤를 돌아보았지/누군가의 목소리가 날 부를까/이미 지워진 발자국/되돌아갈 수 없었지/길 끝에는 새로운 길이 있다고/부스러기처럼 씨앗처럼 모래 흩날리는/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제 혼자 걷고 있었지/깨어보니/무언가 집에 놓고 왔을까/이미 지워진 발자국/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으며/목말라 퍼먹을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을까(「유랑」 전문)
“두 눈을 뜨고 노래해도/고통은 바구니에 담겨지지 않”고 “두 눈을 감고 노래해도/고통의 바구니는 줄어들지 않는”(「두 눈을 감고 노래해도」) 비참한 삶 속에서 시인은 죽음과도 같은 폐허를 응시하는 시인은 어쩌면 오히려 죽음 속에서 삶의 자양분을 얻는 듯도 하다. “다시는 가지 말아야 할/그래서 갈 수 밖에 없는 길”(「눈 위에 찍힌 붉은 발자국」)을 밟아나가야 한다고 다짐하는 시인은 “밤마다 베고 자던 구름에도 세금을 매기는”(「얼음궁전」) 비정한 세상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어둠의 불꽃을 피워올린다. “내일은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내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시인은 “어둠 속/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뿔」)이며 “마귀가 불러주는 주문을/온몸으로 받아 적”(「방언(方言)」)는다.
그 소리는 모든 종말의 순간에 울려퍼진다/그 소리는 죽은 자들을 일깨우며/그 소리는 황혼의 무덤 위에서/그 소리는 근육을 터뜨리고 망치를 들어올린다/그 소리는 피 묻은 대장장이의 손으로/그 소리는 모두를 불러모으고/그 소리는 고통 없이 심장을 뚫고/그 소리는 눈먼 자들을 주저앉히며/그 소리는 분노를 녹여/그 소리는 검은 땅에 패배의 씨앗을 흩뿌린다(「쇠나팔」 부분)
무릇 ‘시인’이라 함은 세계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불화하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자이다. 김성규에게 시인이라는 존재는 “자고 일어나면 병이 깊어지는”(「해열」) “예언자”(「예언자」)이자 “위대한 마법사”(「미식가」)이며 “스스로를 형틀에 매달고 살아가려는 망명자”(「심문관」)이다. 자신이 “쓴 시가 지나간 시간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혈국(血國)」)을 알고 있기에 시인은 “이제까지 쓴 것들을 다 버리고 다시 써야”(「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 한다고 자신을 다그치면서,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를 심장 속에 새겨넣”(「정원사」)고 “독을 뿜지 않기 위해 혓바닥을 입속에 말아넣”(「중독자」)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아무도 장님인 저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습죠 땅속으로 파고들어간 방 한 칸, 누가 뭐래도 이 방은 우리의 왕국입니다요(…)//흙으로 묻어놓은 입구를 따라 병든 쥐들이 인도하는 길을 걸으면 어머니는 간과 신장을 팔아 통증의 왕국을 선물하셨네 기억은 언제나 뒤엉켜 꿈을 꾼 흔적들, 천국은 언제쯤 아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우리를 기다리는 고통이 있다면 누가 뭐래도 이곳은 우리의 왕국이라네(「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 부분)
재난뿐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시인은 “땅속으로 파고들어간 방 한 칸”(「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을 삶의 구원처로 삼고서 “밤마다 불같은 글을 종이 위에 휘갈기”(「중독자」)며 “몸을 짜서”(「혈국(血國)」) 목숨과도 같은 시를 한편 한편 빚어낸다. “숯덩어리 같은 울음을 삼키며”(「얼음궁전」) “세상이라는 악에서 피워올린 고통의 꽃”(해설)이라 할 만한 김성규의 시는 “백년 동안 쉬지 않고 눈이 내”(「만년설」)리고 “겨울이 끝나고 다시 겨울이 시작되”(「얼음궁전」)는 ‘지금-여기’, 그저 폐허일 뿐인 축복 없는 세계에 던지는 한 줌의 불빛과도 같다.
죽은 물고기를 삼키는/두루미/목을 부르르 떤다//부리에서 삐져나온/푸른 낚싯줄/흘러내리는 핏물/목구멍에 걸린/바늘을 토해내려/날개를/터는 소리//한번 삼킨 것을/토해내기 위해/얇은 발자국 늪지에 남기며/걸어가는 길//살을 파고드는/석양을 바라보며/두루미가 운다(「시인」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