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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7장 20-26절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을 시작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전체 내용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 5절이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라면, 6절에서 19절은 예수님의 제자들, 그러나 모든 제자가 아니라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명의 제자를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되는 20절에서 26절은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믿게 되는 사람을 위한 기도인데, 이렇게 나눠진다고 해서 우리와 상관없는 기도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할 때 무엇보다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의 모든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고, 이제 죽음을 앞두고 죽음을 향해 가는 그 길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조차 모든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특히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교회론으로 볼 때 그가 우리의 머리시고, 우리는 그의 몸입니다.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삶을 사셨다면, 몸 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제자들을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부터 아버지의 것이었지만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 그들이 지금 열 한 명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되 세상 가운데 살면서도 보전해 주시도록 기도하시며,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며, 동일한 의미에서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해 달라고 기도하시며, 오히려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로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은 분명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로 부르신 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의 가르침이 모든 신자에게 주어지지 않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지만, 내용 자체는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살피게 되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20절에 보시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라고 할 때 직접적인 대상은 사도들의 복음 전도를 통해 믿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도들로부터 직접 복음을 전해들은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라고 할 때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라고 말씀하시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엡2:20). 이때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라는 것은 오늘날 사도와 선지자는 없지만, 오히려 목사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지만 그 말씀이 참되다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이 말씀에서 모퉁잇돌이 그리스도임을 밝히시는데,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는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7장 8절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말씀을 사도들에게 주었다고 할 때 그 말씀의 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도에게 주신 바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 참으로 알게 될 뿐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신 줄 믿었습니다. 오늘날 사도는 없지만 목사를 통해 말씀이 신실하게 전파된다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의 가르침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와 동일할 때 그러하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을 때 그러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칼빈은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라고 할 때 우리의 믿음이 사도들이 가르쳐 준 복음에 기초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의 일치,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여전히 믿는 사람들이 더해지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때 예수님 이후 사도들의 복음이 지금까지 증거 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는 원인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입니다. 이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할 때 그 말씀에는 복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율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복음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율법은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초등교사의 역할을 합니다. 또한 율법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뒤 우리 삶의 규범 역할도 합니다. 즉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의의 규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믿음은 복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때(롬10:17) 이 말씀은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들려지지 않는 곳에서는 참된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이 들려져야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7장 안에서도 말씀하시고 17장에 앞서 소위 고별강화 안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복음이 들려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을 세우셨고,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시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의 권위를 위하여 이적도 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가르침 받고, 자신의 입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한다고 해서 누구도 예외 없이 믿음의 자리에 이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가룟 유다는 제외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때 말씀이, 복음이 믿음의 원인이긴 하지만, 말씀이, 복음이 궁극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그럼 궁극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일단 말씀이 들려질 때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듣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말씀과 분리하지 않고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즉 믿음의 궁극적인 원인은 복음을 깨닫게 하시는, 그리고 깨달은 복음에 대하여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부터 택자와 유기자를 구분해 두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가 믿을 수 있는가 할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믿는다고 말씀합니다(행13:48).
결국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다고 할 때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영생으로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믿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해서 그가 사용하시는 도구를 하찮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영원 전부터 작정하시되 선택과 유기를 나눠놓았다고 해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하셨다고 할 때 결과만이 아니라 결과에 이르도록 하는 과정을 마련해 놓으셨다면 과정 없는 결과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고, 또 이런 점에서 목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가르치는 바가 그것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그러나 동시에 이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궁극적인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리는데, 6절과 7절입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말씀을 전하는 자 입장에서는 도구된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자 입장에서는 그 사실과 함께 말씀 사역자들이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믿게 한 사역자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권면을 하기도 합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5:17)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믿게 될, 다시 말해 사도들의 복음을 통해 믿게 될 자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하시는데, 21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분 안에 삼위로 계시다고 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이런 본질적인 면보다는 믿는 자들을 포함시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신자의 하나됨은 아들의 중보자 직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은 칼빈이 설명하는 것처럼 중보자로서의 신분에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는 측면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달리 말하면 신성에 있어서는 하나일 수밖에 없지만, 지금 예수님은 인성을 취하신 상태에서도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고 계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모든 생애에 있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분으로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 속에 있지만, 그것만을 위한 목적으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라고 할 때, 또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할 때 자신을 유일한 중보자로 여기는 자들, 또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됨,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하나됨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방금도 말했지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고 있고, 또 온전히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순종하는 데 있다면, 우리의 하나됨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복을 획득하십니다. 그런 복을 믿는 자들에게 거저 주시는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하나됨은 지상에서의 어떤 과정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에서 3절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누구를 세우십니까? 에베소서 4장 11절 이하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1-13)
그럼 하나님과 중보자의 하나됨, 중보자를 통해 모든 신자와의 하나됨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바는 무엇인가? 21절 후반부에 보면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복음을 통해 믿게 되는 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하나됨과 같이 하나가 됨으로 세상조차 아버지께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조차 아버지께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할 때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열 두 제자 안에 가룟 유다가 있다는 것은 세상이라고 표현할지라도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도에 있어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요한복음 3장 16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했다고 말하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사랑했다는 것인가? 그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다는 말씀은(롬9:13)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했다고 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 된 것처럼 모든 믿는 자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안에 있기를 원하시는데, 그 이유는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 모든 족속으로 하여금 제자를 삼는 것,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하시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마28:19, 행1:8). 복음의 확장성과 그로 인해 믿는 자들이 더욱 많아지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기도 내용이요, 특별히 그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안에 있기를 기도하시는 이유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20절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입니다. 사도들의 말입니다. 그럼 사도들의 말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하나님의 복음만이 세상으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불신자로 하여금 참된 신자가 되게 하고, 그들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안에 있게 될 때 더욱 복음이 널리널리 증거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22절을 보시면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서 ‘내게 주신 영광’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어렵습니다. 일단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영광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바로 그 영광을 그들에게, 즉 사도들의 복음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을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었는가?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은, 그리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신자에게 주신 영광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경우는 이 영광을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죄로 말미암아 지워버려진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회복하게 되고 찾는 데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서만 그의 생생한 형상일 뿐 아니라, 그가 우리와 함께 지닌 그의 인성에까지도 아버지의 영광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만큼 그는 그의 지체들을 그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여기서 어느 누구나 인장반지로 찍혀지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자신에게 새겨지지 않을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취급 받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매튜 풀 주석은 이 영광에 대해 몇 가지 견해들을 제시하면서 베드로후서 1장 4절과 관련해서 보는 것이 가장 근접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은 모든 신자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에베소서 2장에 보면 다음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2:12-19) 이 말씀에 근거하자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십자가가 둘을 하나로 만듭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7장 1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아들을 영화롭게 해 달라는 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입니다. 2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가, 죽음이 어떻게 영광일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바로 그 영광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주십니다. 그리고 이때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물론 모든 신자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결과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만인가? 주석가들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도 있습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광을 친히 받은 자들이라면, 다시 말해 참된 신자라면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라도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데 모든 성도가 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한 자가 되도록 동일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고, 자신을 내어주시기에 앞서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시는 겁니다. 저들로 하나게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하나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할 때 23절은 조금 더 상세히 설명합니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결국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온전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있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 일을 하시는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를 통해 일하시는가? 신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야 하고, 그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습니다.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 17장 17절을 통해 우리의 거룩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말미암는다고 했는데, 사실 온전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모든 신자는 다른 목적이 아니라 온전함을 목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세상 앞에 무엇을 드러낼 수 있는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다는 것,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것처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신다는 것을(요13:1)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하되 온전함을 이루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노력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앞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앞서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앞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겁니다.
24절입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하자면 택자요, 때가 되어 참된 믿음을 가지게 된 사람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해 달라는 것, 그래서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시므로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게 해 달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 그 마지막 자리에 이르게 되기를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보전해 달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있을 때 결국 우리는 마지막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가감 없이 보게 됩니다. 때문에 지금 예수님은 표현 자체는 다를지라도 제자들을 보전해 주시도록 기도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가 하나님의 보전 가운데 있기를 기도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보전하심은 예수님께서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이 내용이 이루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 나라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속한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보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인의 은총입니다. 견인이라는 말 자체는 한자나 영어나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내 힘으로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인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 로마서 8장입니다. 28절부터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원문을 살펴 번역하자면 그 아들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에까지 이르게 되느냐? 영화롭게 하셨다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35절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즉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신하는데, 38절과 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의 복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 이것이 복으로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전하심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붙드시는 역사가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23절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하시는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율법의 말씀은 우리에게 유용합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율법은 그리스도를 믿기 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율법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삶의 규범의 역할을 합니다.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거기에 무엇이 필요한가? 말씀이 필요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율법의 교훈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5절과 26절을 보시면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세상과 세상에 있지만 사도들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자를 대조하십니다.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알았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저희도’, 다시 말해 사도들의 복음을 통해 믿게 된 자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알게 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습니다. 알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알게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믿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알아가도록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알아감으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저희 안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 사랑의 확신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로마서 8장을 언급했지만 39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를 통해 나타내시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하기까지 하십니다. 신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분명하게 배워나가면서 확신 가운데 서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세상은,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버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복음이 들려져도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지만 마지막 때 복음이 들려졌던, 들려지지 않았든 핑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모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저들 가운데 알게 하신 역사가 있고, 계속해서 알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식을 계속해서 얻게 하셔서 결국 무엇을 알게 하시는가?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할 뿐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인 아들이 우리 안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런 내용에서 우리가 조금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부를 때 의로우신 아버지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1절에서는 이런 표현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을 위하여 저들을 보전해 달라고 할 때 예수님은 ‘거룩하신 아버지여’라고 부르십니다. 세상에서 보전하도록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거룩하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가? 세상에 속한 자와 비록 세상에 거주하고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의 대조 속에 나타납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좀 더 근원적으로 올라가자면 택자와 유기자라는 대조 속에서 하나님을 의롭다고 부르고 있는 겁니다. 그 말은 이런 구분이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되 가룟 유다가 이 기도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늘 항상 의로우십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시되 그들도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안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밖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가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와 죽음을 비참하게 봅니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저주의 상징이기에 더욱 비참하게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요, 하나님의 뜻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길을 예수님께서는 가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셔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온전함을 이루는 것에 있습니다. 죽음과 부활 이후 승천하여 올라가신 그곳에 이르도록 하는 것, 그래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견인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겁니다. 때문에 이런 하나님께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지만 그 과정 속에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심으로 이루십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도 그 일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거룩하게 하는 방편으로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말씀과 기도가 가장 기본으로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그 뜻대로 살 수 없는 우리 자신이기에 늘 하나님께 구하여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