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내고향 안동 원문보기 글쓴이: 예안예화
|
내고향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역동마을 청고개 도란모티 천전 만촌 향교골 날미 양정을 찾아서 - 내고향오지탐험대
청고개 마루턱에서 바라본 강건너 역동마을,
청량산 육륙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떠들어 대랴 못 믿을 것은 도화(桃花)로다.
그리고 부포리(浮浦里) 우린 그냥 청고(청고개)라고 했던기억만 ...
저기 강 위로는 도산서원 陶山書院 이 보이고,
보이는 곳 저기왼쪽 산길은 송티재랑 부내로 이어지는
길이지 부내가 한눈에 다 보이는구먼 빈 터만. (윗마을 부내 아랫마을 청고개)
이제 텅 비어버린 눈 아래 넓은 땅 청고개라는 부포리(浮浦里),
이곳이 나 태어나고 자란 유년의뜨락이란 말이야,
흔적조차 없어!! 왠지 맘이 짠하기 그지없음이...살며시 이내 맘을 호비네...
바로위에 까만 점이 우리집이였다고 추정해봅니다. 외딴집
청고개 모습이 한눈에 훤히 보이니
반가운 맘이 그지없어 기억의저편 동심의 나래를 살짜기 펼쳐보며.
오른쪽 중간살짝 벗어난 산아래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또럿해 집니다.
그때의흔적이 ^^ 왠지 슬프기도 하고 이젠 그리움만이 배가 됩니다.
꿈속에서도 그리움,
그야말로 다시는 볼수없는 아래과 같은 텅빈 주인잃은 빈 공터...
우야꼬!!! 내미럴 ㅠㅠ
부포리(浮浦里) 유래
부라원(浮羅院),부라촌(浮羅村)
이 마을은 고려 중기부터 조선말기까지 시행해 온 역원공영제도(驛院公營制度)에 의하여 예안현(禮安縣)에 속했던 부라원(浮羅院)이 있었으므로 부라원, 부라리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예안군 동하동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천동과 의동면의 분천동 일부를 병합>하여
부포동(리)이라 해서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으며,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지구가 되었으며,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예안의모습 청고개에서 천전,신역,방잠,외내,도란모치,날미까지......
▷ 부라원(浮羅院) : 옛날 땅은 넓고 사람 수는 적어 여행하는 사람의 유숙처가 없었으므로 浮羅院에 부대건물이 있어
거기서 음식물을 준비해 두면 행인이
그 음식을 먹고 대금을 음식상에 두고 갔던 곳이라 한다.
또 관장의 이취임시 전별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1974년 7월 1일 안동댐 건설로 浮羅院이 수몰되었으므로 북쪽 뒷산 柯陰谷 입구에 이건하였다.
부포에 오래 전부터 살았던 성씨로는 호군(護軍)으로 있던 안동권씨(安東權氏) 경력(經歷) 권간(權簡)의 상세(上世)로부터 살았다고 하며,
그 후 금숙(琴淑)이 권간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기 시작하였으며 조금 뒤에는 진성이씨(眞城李氏)들이 입향하였다고 한다.
수몰전 부포리는 넓은 들이 기름진 100여호의 큰 동리로 산천이 아름답고 들이 넓어 비교적 생계가 넉넉해서인지
예부터 수(壽)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 수향(壽鄕)이라 부를 만큼 장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았다.
현재 부포리에는 역동, 가늠골, 호사골, 햇골 등의 마을이 남아 있으며 가구수는 30여 가구로 예안면에서 적은 수에 속한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내 유년시절 추억의공간... 저기 빨간 승용차가 이 내 맘을 달래는구먼...
다래 쪽 다달아서 바라보는 저곳 청량산 하늘다리도 다보였는데.
시계가 좋지않아서였는지 사진에는 안들어왔구먼,
고요하게 흐르는 강물 그림같은 풍경 역동마을...
그래도 역동마을은 몇집있으이,,,
고려말 유학자 우탁 禹倬 선생의 서원이 있는 곳이라
우탁선생의 아호인 역동 易東이 동네 이름이 된 것이라고 하는데...
울 농암할배 종택에서 하룻밤 묵고, 아침인데. ㅎ 약간 엉성하네.
간밤의 고택체험으로 겨울인데도 넘 시원하게 자서리 약간 궹한듯 ㅋ ^^;; ...
저기 멀리서 연세 많으신 항열낮은 어르신들께서 이쪽으로 오시누마...
|
지서뒤쪽
▶ 호사골·호소골(虎嘯谷)
선성지(宣城誌) 부라(浮羅) 사적(事蹟) 각명(各名) 부분을 보면 호소곡(虎嘯谷)으로 표기하였으며, 마을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그 골이 가장 깊고 긴데 좌우에 있는 조그마한 골의 이름은 모두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선성지의 기록처럼 호소골은 길고 깊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호사골, <호수골>, 호소골 등으로 부른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에 호랑이가 나와서 때때로 울었다고 하여 호소곡이라 이름하였다는 설과
또, 마을 입구에 맹호등(猛虎嶝)이란 산이 있어서 호소곡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안국민학교 ,코를 찔찔흘리면서 가슴엔 하얀 코 손수건을 달고 울 할메손잡고
설레임과 부푼마음으로 교무실에 들어갔었지 사촌 형이랑 함께
어메가 바빠서리 할메한데 부탁드린거지...
덕분에 난 한해 꼬 먹었지만 ( 교장 샘인지 먼지 내보고 왈! 키가 작다고
내 년에 오라나 뭐라나...) 내 운명은 여기서 부터 삐그덕 거렸지....
나 원참!!! 그뒤로 난 샘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음.
내 유년의 시절은 샘들땜에 별로 건질게 없음....^^ㅠㅠ
구) 예안 전경
수몰전 청고개에서 본 역동 마을입니다.
아파트 문화 속에서 초가집은 정감이 넘치고 평화가 넘치는 것 같습니다.
그리움도 쌓여 갑니다.
예안, 저 멀리 뱀 꼬리처럼 산허리에 길이 또렷한게 어릴적 깜당고무신 밑바닥이
다 달도로 걸어서 학교다니던 생각이...
천전동(상천에서 중천)
◇ 임경대(臨鏡臺):호소골 아래에 있는 못안마 위에 있다.
의촌리로 가는 큰 길가에 성성재(惺惺齋) 금란수(琴蘭秀, 1530∼1604) 선생의 종택이 있으며,
길 건너 아래에 선생의 정자인 성재(惺齋)가 있다.
임경대는 성재 앞을 흐르는 동계(東溪) 가의 바위를 말하는데,
바위의 전면에 '臨鏡臺'와 '活源塘'이란 글씨가 음각(陰刻)되어 있다.
조금 당겨서 보이도록
동부동에서 서부동 이구섬까지
◇ 민왕대(愍王臺):역동 북쪽에 있는 바위로 높이 50m, 너비 4.5m이며
고려 공민왕이 쉬어 간 곳이라 한다.
이구섬의 모습 예안중학교도 보이고 ,,,
▶ 역동(易東)·화왕촌(火王村)·북계(北溪)
이 마을은 처음에 화왕촌이라 불렀으나 후에 북계라고 고쳤으며 그 후 역동으로 불렀다.
늑정( 亭) 권시중(權是中, 1572∼1644) 선생이 편찬한 선성지(宣城誌)의 북계사적(北溪事蹟) 조를 보면
마을이름을 화왕이라고 부르다가 북계라고 고친 유래가 잘 나타난다.
'마을은 현 동쪽 9리쯤에 있는데 속명은 화왕(火王)이다.
천전(중천의 모습)
만력 기해(己亥, 1599)년에 내〔김시중〕가 면계(綿溪)로부터 이 마을로 터를 옮겨 '화왕'이라는 명칭은 매우 용렬하고 평범하여
진로(陳盧) 두 선생이 사시던 마을 이름에 의거하여 '북계'라고 고쳤다.
그리하여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에게 질문을 하니 선생에서는
매우 그것을 옳게 여겨서 드디어 북계로 고쳤다.
이로부터 원근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북계로 불렀다.
화왕이라는 명칭이 일시에 끊어지니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마을은 곧 청량산 서쪽 자락 낙수(낙동강) 동쪽 언덕이다.
청고개 모습
부라촌(浮羅村)이 동쪽에 있고, 광문봉(廣文峯)이 우뚝하게 북쪽에 솟아서 주산(主山)이 되고 운봉(雲峯)이 서쪽에 솟아 있고 부용봉(芙蓉峯)은 남쪽에 빼어나 있다.
운봉으로부터 부용봉에 이르기까지는 구불구불 3, 4리를 내려와 이 마을의 안산(案山)이 된다.
그 형세가 마치 병풍을 펼쳐 놓고서 이 마을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문과에 급제한 권경달(權景達)이 옛부터 이 마을에 살았고, 훈도 남륙(南 )이
울진 사람으로서 권경달의 사위가 되어 이 마을에 살게 되었으며,
윤우(尹宇)는 안동 사람으로서 역시 남륙의 사위가 되어서 이곳에 살았으나
일찍 죽었고 자손이 있다.'
이 마을이 지금의 소지명인 '역동'으로 부르게 된 계기는 1570(선조 3)에 퇴계(退溪) 선생의 발의로
이 마을의 오담(鰲潭)가에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2∼1342) 선생을 기리는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면서부터이다.
1684년(숙종 10)에 '易東'이라 사액되었는데 역동이란 우탁 선생이 역(易)을 해득하여
이 땅에서 강학함으로서 역(易)이 동쪽(우리나라)에 전해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역동서원은 1868년 훼철되어 1966년 지방 유림의 발기로 1969년 안동시 송천동에 복원되었다.
◇ 성성재(惺惺齋):성성재(惺惺齋)가 25세 때 이곳 동계 가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학문에 힘썼는데,
그 스승 퇴계 선생이 친필로 '惺齋'라고 두 자를 내려주면서 면려(勉勵)하시고,
이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팔영시(八詠詩)를 남기고 바위에 이름을 지었다.
선성지의 기록을 보면 '주인은 현감 금난수인데 새로 정사를 지어서
자신을 수양하는 장소로 삼았다.
퇴계 선생께서 이곳에 유람하시고 인해서 대(臺)와 당(塘)과 재(齋)의 이름을 지었는데,
재는 성성(惺惺)이요, 당은 활원(活源)이며, 세 개의 대는 하나는 임경(臨鏡),
두 번째는 풍호(風乎), 세 번째는 총춘(摠春)이며, 또 각처에 모두 시(詩)가 있다'고 하였다
도란모티,날미,양정까지
▶ 가늠골·가음곡(柯陰谷)
한자로 가음곡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 가늠골이 되었으며 8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뒷산 능선정상에 신선바위가 있는데 편편한 바위 위에 윷판모양의 구멍이 새겨져 있다.
만촌,새총모티(우리집도보이고),작고개,향교골,서부뚝,이구섬..........
항상 고향이 그리운 것은 나만의 일일까?,,, 아~
언제나 가고픈 곳, 내고향 안동. 꿈속의 고향 이어라 !
내고향 예안을 돌려 도고,,ㅡ! -
수몰을 반대하며 그렇게도 외쳤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