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백두대간 13차(투타산~댓재)
산 행 일 : 2013. 05. 11.(토)
산행코스 : 천은사~쉰움산 + 투타산(1,353m)~1,243봉~목통령~1,028봉~명주목이~960봉~댓재
(거리 7km+5km)
산행참가 : 25명 + 7명(잠실둔치 뒤풀이)
<산행코스>
지난해 10월 두번째 정기산행 백봉령에서 청옥산까지의 산행을 끝으로 대간산행을 잠시 미루어 두고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남금북정맥을 잇다가, 드디어 오늘 다시금 대간산행을 시작하며 올해의 시산제도 두타산 정상에서 정성스레 모시기로 예정하고 양재를 출발했다.
그동안 함께 근무하는 직원들이 꼭 한번 산행에 따라가 보고 싶어 하기에, 이번 산행이 짧고 두타산만 오르면 되어서 무난할 것 같다고 하니 서슴없이 같이 하겠다고 했다. 젊은 친구들이고 평소 근교 산행을 자주 한다고 하여 별 걱정 없이 야간산행에 따른 주의사항만 몇 가지 이르고는 버스에 함께 올랐다.
동해고속도로를 벗어난 버스가 한참을 더 달려, 산행 시작지점인 삼척시 미로면 천은사 앞에 도착했다.
서늘한 밤공기가 상쾌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날씨는 산행하기 좋은 날이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시산제 제물(祭物)을 나눠지고는 산행을 시작한다.
천은사 입구를 지나는데, 동안(動安) 이승휴 상징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승휴(李承休, 1224~1300)> 자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며, 가리 이씨(加利李氏)의 시조다. 고려 고종 24년(1236) 원정국사(圓靜國師)의 방장(方丈)에 들어가 신서(申諝)에게서 『좌전(左傳)』과 『주역(周易)』 등을 익혔으며, 같은 왕 3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모친이 있는 삼척현(三陟縣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으로 갔다가 마침 몽고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그곳 두타산(頭陀山)의 구동(龜洞)에서 농사를 지으며 봉양하였다. 원종 4년(1263)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 등에게 구관시(求官詩)를 지어 보내고, 이듬해 그들의 천거를 받아 경흥부서기(慶興府書記)에 임명되었다. 그 후 원종~충선왕 대에 식목녹사(式目錄事)·합문지후(閤門祗候)·전중시사(殿中侍史)·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시비서감(試祕書監)·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등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6년(1280)에 감찰사의 관원들과 함께 국왕의 실정 및 국왕 측근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하다가 파직되어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제왕운기』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다. 아들 이연종(李衍宗)이 편집한 문집 『동안거사집(東安居士集)』이 있다. <제왕운기(帝王韻紀)> 고려 후기인 1287년(충렬 13)에 이승휴(李承休)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운율 시 형식으로 쓴 책이다. 상·하 각 1 책씩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에는 서(序)에 이어 중국 역사의 요점을 신화시대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하(夏), 은(殷), 주(周)의 3대와 진(秦), 한(漢) 등을 거쳐 원(元)의 흥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내용을 7언고시 264 귀로 쓴 것이다.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저술하게 된 동기가 고려, 즉 당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본조군왕세계연대’의 끝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이승휴는 몽골의 침입으로 국내 정치 상황이 혼란했던 시기에 신진 유학자로 정치계에 등장하여 파직을 당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경험하였다. 그는 충렬왕의 실정과 부원세력을 비판한 상소를 한 결과 파직당하여 은둔하게 되었고, 이 기간에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따라서 제왕운기는 당시의 대내외적 정치 사회적 현실에 대한 회의와 함께 새로운 사회의 희원(希願)을 시로 적은 것이다. 제왕운기는 정치, 사회 윤리를 바로잡기 위한 의욕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 가치 기준을 역사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또한 원나라의 정치 간섭에 대한 불만이 이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
이어서 "두타산 천은사"라 쓰인 일주문을 지난다.
<천은사(天恩寺)> 신라 경덕왕 17년(758년)에 두타삼선(頭陀三仙, 인도에서 온 3명의 승려)이 창건하였다. 흥덕왕 4년(829년)에 범일국사가 극락보전을 건립하여 절의 면모를 갖추었고,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李承休)가 별장을 시주하여 간장암(대장을 다 읽었다는 뜻)을 지었다. 이후 청허 서산대사가 중건하여 흑악사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1899년에 이성계의 4대조 목조릉을 만들면서 이 절을 원찰로 삼고 임금(하늘)의 은혜를 입었다 하여 천은사라 하였다. <두타(頭陀, Dhuta)> 범어 Dhuta의 음역으로, 두다(杜茶). 두다(杜多). 투다(投多)라고도 쓰며, 두수(枓藪). 두수(斗藪). 수치(修治). 기제(棄除)라 번역한다.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것을 말한다. 두수(斗藪)란 번뇌의 때를 떨어 버린다는 의미다.
천은사 경내에는 석가탄신일 준비를 위한 연등이 수없이 걸려있다.
경내에서 두타산 방향 등산로 들머리를 찾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는데, 새벽불공을 위해 탑을 돌고 계시는 승려 한분이 계시기에 길을 물었으나 묵묵부답이다. 하는 수 없이 직접 대웅전 좌측 편으로 가 보았더니 희미한 등로가 있어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기에서 보았던 철교를 건너며 쉰움산 등로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계곡을 따르던 등로가 경사가 급한 산사면으로 들어서며 본격적인 오름길이 시작된다.
혹여나 처음 산행에 참가한 분들이 염려되어 가급적 천천히 오름길을 오르다 보니, 여러 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는 바위 쉼터에 도착한다.
아직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쉼터에서 잠시 목을 축이고는 바로 쉰움산을 향한다.
잠시 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샘터를 지나고,
등로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방향 표시만 있고 거리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가파른 암릉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쉰움산이 지척인 듯하다.
쉰움산 정상부로 오르며 바라본 북쪽 빈내골(비린내골) 방향.
동쪽 삼화동 방향.
바위 암봉인 쉰움산 뒤쪽으로 두타산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이 보인다.
돌아본 쉰움산 전위봉. 천은사에서 계곡을 따르지 않고 능선으로 바로 오르면 저 봉우리를 지나서 오게 된다.
쉰움산 정상을 향해 암릉을 더듬어 오른다.
우측 빈내골 방향 조망.
미로면 좌남골 방향 조망. 계곡 아래쪽에 산행 들머리인 천은사가 자리하고 있다.
암봉 ?
쉰움산 정상부에는 벌써 백두들이 올라 있다.
검은 오석의 쉰움산(五十井山) 정상석이 바위 우물에 박혀있다.
<쉰움산(683m)>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과 동해시 삼화동 경계에 위치하는 산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두타산 중턱에 돌우물 50곳이 있으므로 오십정(五十井)이라 부른다. 그 곁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고을 사람이 봄가을에 제사하며 날씨가 가물면 기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산에는 기암괴석과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석회암 반석이 있는데, 여기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있다. 비가 오면 구멍에 우물처럼 물이 고인다. 그러므로 산 이름이 암석의 생긴 모양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쉰움산 또는 쉰움정산은 오십정산의 한글식 표현이다. 쉰움산 정상부의 돌우물들.
두타산 방향.
쉰움산 정상의 백두들.
두타산 방향 능선에는 돌로 만든 제단이 있다.
쉰움산 정상의 돌우물 숫자를 세어 봐야 하는 건데..ㅉㅉ
두타산 정상으로 이어진 능선이 험난한 오름길을 예고하고 있다.
나도 뒤쳐진 동료직원들과 함께 오십정산 인증을 남긴다.
쉰움산을 뒤로하고 두타산 방향 능선으로 들어서는데,
무속인들이 많이 찾는다는 돌로 만든 제단이 있다.
능선 등로 좌측의 바위가 마치 병풍을 쳐 놓은 듯하고,
우측 편에도 바위와 석축, 소나무가 절묘한 풍광을 그려내고 있다.
앞서간 분들은 언제쯤 이곳을 지났는지 궁금해 하면서 헬기장을 지난다.
나중에 사진을 보니 앞서간 분들은 이곳에서 잠시 쉬었던 모양이다. 사진 찍은 시간이 4분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아,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우리도 포도 한송이 건지는 건데...ㅋㅋ
소나무숲을 지나는데, 이곳도 화마가 휩쓸었는지 소나무 수령이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두타산 정상이 1.2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만나는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정표에 거리 표시가 되어 있다.
가파른 암릉을 잠시 오르면,
무릉계곡과 두타산성 방향 갈림길에 도착한다.
돌아본 갈림길 모습에서, 몇 해 전 가을 단풍산행 때 대간 서쪽 중봉산에서 고적대로 올라, 두타산을 거쳐 이곳을 지났던 기억이 새롭다.
전망바위에서 고적대를 배경으로 지점 막내가 앳된 포즈를 잡아준다. 오늘 두타산을 오르는 실력이 우려했던 것보다는 좋은 편이다.
가야 할 두타산이 가까이 보이고,
청옥산 고적대 방향은 아직도 겨울산의 흔적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한 듯하다.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고적대 방향.
고적대 방향 파노라마.
주변 조망을 즐기며 쉬엄쉬엄 오르는 도중에도, 선두들은 성큼성큼 두타산 정상에 접근했다.
두타산 정상에서 시산제를 거행하기로 되어 있는데, 동반한 동료들의 걸음이 체되는 듯하여 천천히 오라 이르고는 헐레벌떡 왔더니.. 역시나!! 두타산 정상에 도착하니 시산제 준비를 마치고 회장님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신다.
<두타산(頭陀山, 1,353m)> 산 이름인 두타(頭陀)는 불교용어로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 수행을 한다'는 뜻이다. 동해시와 삼척시 경계에 위치하며, 동해시 삼화동에서 서남쪽으로 약 10.2km 떨어져 있다. 태백산맥의 주봉(主峰)을 이루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무릉계곡, 동쪽으로는 고천계곡, 남쪽으로는 태백산군, 서쪽으로는 중봉산 12당골이 있다. 서쪽으로 4km 떨어져 있는 청옥산(靑玉山, 1,404m)을 포함하여 두타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삼척시의 영적인 모산(母山)으로서 신앙의 대상이며, 예술의 연원(淵源)이라 하여 오십정산제당(五十井山祭堂)이 있고, 예로부터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두타산과 서쪽의 청옥산을 잇는 의가등(衣架嶝)은 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은 가경(佳景)을 이룬다. 또한 북쪽으로 삼화사(三和寺)에 이르는 14km의 계곡에는 국민관광지인 무릉계곡와 조선시대 석축산성인 두타산성, 둥글게 패인 바위 위에 크고 작은 50개의 구멍이 있는 오십정(또는 쉰우물)을 비롯하여, 오십천(五十川)·학소대·옥류동·관음사·관음폭포·선녀탕·쌍폭포·천은사(天恩寺)·금란정·용추(龍湫)폭포 등의 명승 고적지가 있다. 무릉계곡의 수백 명이 앉을 만한 넓이의 무릉반석에는 조선 전기(前期) 4대 명필가의 하나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석각(石刻)과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을 비롯하여 수많은 명사들의 시가 새겨져 있다. 두타산 정상에서 07:03에 찍은 사진이니 30여분쯤 늦게 도착했다.
두타산 정상에 먼저 도착하신 분들이 벌써 시산제 준비를 마치고, 뒤쳐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늘 백두들과 함께한 배낭들도 시산제 준비를 마쳤고,
뒤쳐진 초보 두분은 아직이지만, 너무 지체되지 않게 2014년 백두산우회 시산제를 거행한다.
- 안전산행 기원문 -
단기 4346년 계사년 5월 둘째 토요일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을 맞아 저희 백두산우회 회원 일동은, 한반도의 등줄기 백두대간에서 우뚝 솟은 이곳 두타산에서 이 땅의 모든 산하를 굽어보시며, 그 속의 모든 생명들을 지켜주시는 천지신명과 산신님께 경건한 마음으로 고(告)하나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1010여 년 전 지리산에서 백두대간을 걷기 시작한 이래, 매달 두 번씩 산에 올라 이제 그 오른 산의 이름만 하여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어찌 사람의 마음 만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동안 저희들은 한반도의 산줄기와 명산을 걸으며, 몸과 마음을 수련할 수 있었고, 자연의 오묘한 진면목을 보고, 느끼고, 들을 수 있었으며 회원 서로서로의 우의를 두터이 함은 물론, 이제는 저희 스스로 삶의 이치를 조금씩 더듬어 간다고 감히 아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9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이 땅의 아픈 역사와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며, 이렇게 무사히 산행을 할 수 있음은, 신령님의 보살핌 없이 어찌 가능하였겠습니까!
천지신명 이시여 !
오늘 이 자리에서 다지는 우리 모두의 마음이 모진 풍상 속에서도 늘 우리의 가슴에 뜨겁게 살아서, 어느 날, 어느 산에서도, 안전하고 행복한 산행이 되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무거운 배낭을 둘러멘 우리의 어깨가 편안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험한 산과 골짜기를 넘나드는 우리의 두 다리가 지치지 않도록 해 주시며,
목이 타는 그 순간에 수통의 감로수가 떨어지지 않게 보살펴 주소서. 산을 들거나 날 때, 우리의 발자국 자국마다, 당신의 관용과 아량으로 봄날의 햇살처럼 늘 포근한 산행이 될 수 있도록 살펴 주시고..
아울러 늘 함께하는 우리 백두산우회 회원 모든 이의 가슴에 ,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가정의 평안함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멀리 타국으로의 원정 산행 길에도, 늘 신령님의 보살핌이 함께하기를 기원 드립니다. 오늘 저희가 정성껏 준비한 술과 음식을 우리의 기원과 함께 즐거이 거두어 주시길 바라오며, 다시 한번 절과 함께, 한 순배를 크게 올리나이다.
단기 4346년 4월 2일 (서기 2013년 5월11일)
백두대간 투타산 산정에서 백두산우회 회원 일동
두타 신령님께, 그동안의 보살핌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쭈~~욱! 그리고 시간이 나시면 모든 회원들의 가정사도 좀 챙겨 달라고...
신령님께 드릴 제물을 이 높은 곳까지 지고올라 정성들여 진설해 놓고,
한민족의 번영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의 수고도 기리고,
종현을 드리는 손승천 총무님 내외분.
시산제는 짧게 !
음복례는 길게 !
철쭉이 망울을 지으며 둘러 있는 두타산 정상에서,
두타신령님의 보살핌 아래 편안한 잠시를 즐기며,
백두들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두타산 정상을 한참동안 마음껏 사용한다.
주변에서는 바람난 여인이 치마자락을 훌쩍 들어 올리며 유혹하고 있다.
청옥산 방향.
서쪽 정전 방향의 저 수많은 산들 중에 가리왕산도 있으리라 !
서쪽 방향 파노라마(우측 끝이 청옥산이다)
계사년 백두산우회 시산제를 마치고, 두타산 정상에서 천지신명의 가호를 외친다.
두타산을 뒤로하고 댓재를 향해, 2014년도 대간산행 첫발을 내 딛는다.
백두들이 떠난 두타산 정상 이정표.
청옥산까지의 4km능선은 숙제로 남겨두고,
시원스런 청옥산과 고적대 방향 조망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어서 !
서울도 저쪽 어디쯤에 있을 텐데..
아직도 나뭇가지들이 겨울 모습을 하고 있는 두타산 정상을 뒤로한다.
얼레지꽃이 가지말라 유혹하지만,
그래도 가야한다. 댓재로 !
철쭉이 꽃망을을 막 터트리려 하고 있고,
모진 풍설을 이기며 살아온 흔적인 "등골이 휜다!"도 지나니,
어느틈에 두타산에서 1.3km를 왔다.
호젓한 백두대간 댓재 가는 길!
오늘 처음 따라나선 긴 산행에 무척 고생이 많은 곽팀장. (중신 좀 해 주세요!)
09:38 통골재를 지난다.
<통골재(980m)> 목통령이라고도 부르며, 두타산 남쪽의 허리가 잘록한 노루목이다. 특별한 이정표는 없지만 우측 하장면 거무소계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다. 허나 좌측 삼척시 미로면으로 내려서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넘나드는 고개는 아니고 단순한 허리부분이다. 목통령은 원래 순수한 우리말로 동물의 '목'에 해당하는 '목통'이다. 한자어로 표기하는 '木桶嶺'은 적당히 음차한 것이다. 통골재 이정표.
댓재를 향하다가 돌아본 투타산이 듬직하니 지켜보고 있다.
늦게 핀 진달래가 겨울산의 기운을 밀어내고 있는 능선길을 따라, 아름들이 소나무가 긴 새월의 풍상을 예기해 주고 있다.
씩씩한 젊은 소나무들의 잘 자란 모습에, 우리의 젊은이들도 모진풍상 이겨내며 저리 자랐으면...
10여분 전에 이곳을 지난 백두들의 산행 모습.
지점의 막내는 힘든줄도 모르고 씩씩하다.
자그만 봉우리를 지나는데, 댓재에서 출발한 한무리의 산객들이 쉬고 있다.
댓재로 향하는 대간길은 잘 자란 소나무들로 한결 운치를 더하고 있고,
완만한 능선 내림길에 작은 봉우리를 지나 잠시 올라서면 1021봉 정상이다.
1021봉 정상에서는 두타산 뒷쪽으로 청옥산도 보이고,
두타산이 거대한 고래인 듯 보인다.
삼척시 미로면 방향으로는, 산이 끝나는 곳 부터가 동해다 ! 아니다 바다가 시작되는 곳 까지가 산이다 !
당겨본 동해항.
단체 산행에서 맨 뒤에 간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은 모양인지, 담소도 멈추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제촉한다.
댓재가 점점 가까와 지고,
1000봉 쯤을 지난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하여 명주목이 쯤도 지나고,
<명주목이> 정선군 임계면 가목리에 속하는 여러 마을 중 하나이다. 명주목이(고개)의 원래 이름은 '데바지령'이며, 그 뜻은 삼척지방을 넘나들던 고개로 협소한 계곡의 지류를 따라 오르기가 힘들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조구만 봉우리도 좌측으로 우회하여 지나면,
앞쪽으로 햇댓등이 다가선다.
<햇대등(963m)> 산신각에 빗대어 나름대로 풀어 보는 내용은 이렇다.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산신이 강신하기 가장 좋은 곳에 횟대를 세우고 산신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루었다. 여기서 말하는 횟대란 대나무(生竹)를 말하며, 두 개의 대나무를 잘라서 통째로 세우고 꼭대기에 오색천을 걸었다. 횟대는 경상도와 북한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햇대'로 변음되는 사투리로, '햇대'는 '댓재'와 합하여 '햇댓'이라 한 것으로 보이며, 등(登)은 산줄기에서 전망하기 좋게 튀어나온 부분을 말하는 것이므로, 세 뜻을 합성하여 '햇대등'이라 지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앞서간 백두들과의 간격이 얼만큼인지 짐작이 어려워, 햇대등 직전에 사면을 따라 댓재로 바로 이어지는 우회로를 선택하자,
댓재까지 전나무 조림지 사이로 등로가 편안히 이어진다.
댓재 날머리 도착.
선두팀과 시간상으로 25분 정도 차이가 난다. 햇대등을 우회하길 잘 하였다 싶다.
따스한 봄기운을 머금고 올라오는 봄나물을 체취하는 봄처녀들.
두타 청옥 등산 안내도.
댓재 산신각.
댓재 도로 개설 기념탑.
<댓재(810m)>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산 146-1번지에 위치한 고개다. <산경표>에는 죽현, 대동여지도에는 죽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릿대(산죽)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죽현 또는 죽치령이라고도 불리며, 1984년 10월 지금의 도로가 개통되기까지는 영동(강릉지방)과 영서(원주지방)를 넘나들던 옛 고갯길로서 보행자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댓재 전경.
다음 구간 들머리 옆에 있는 댓재 이정석을 담고는 땀을 닦으려 강릉으로 향한다.
매번 가던 강릉의 목욕탕에 땀을 닦고,
오세민씨 추천으로 자주 들르는 농촌식당에서,
맛깔스런 한정식으로,
다소 여유로운 산행의 여운을 이어 본다.
빈접시들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간다.
늦은 점심을 양껏 먹고는 서울로 향한다.
시산제 뒷풀이를 위해 김영식님께서 잠실 둔치에 정성스레 마련한 자리 !
여기가 본격적인 뒷풀이 장소 였구먼 !
여유로운 도시의 정취를 함께 느끼며 시산제의 뒷예기를 이어간다.
이제 백두산우회의 반은 여성이다.
그래도 기죽지 않는 백두의 남자들. 그러나 새상이 바뀌었는데 우쩔것이여 !!!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계속되길 신령께 부탁드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