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1장 탄생은 깨달음을 위한 것이었다 5. 서울에서 새 학문을 배우다
보통학교를 마친 뒤 서울로 유학을 떠나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했다. 문선명의 학구열은 높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평안도 정주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던 것으로 보아 집안에 최소한의 경제적 여유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상공실무학교는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흑석동이 있던 사립 상공강습소였는데 1939년 2월에 각종 학교로 인가를 신청했으며 16일에 경성부 학무과를 통하여 인가 사령이 교부되었다. 그리하여 4월부터 신입생을 모집키로 했다. 문선명은 1938년 4월 12일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였다. 정식 학교로 인가되기 전에 입학을 한 것이다.
그런데 통일교 자료에서는 "경성상공실무학교는 1934년 6월 경성부 연건동에 설립했다. 그리고 1936년 6월에 흑석정(黒石町), 즉 지금의 흑석 1동 225-6으로 이전한 후 1945년 10월 까지 운영했다. 그 후 변화를 거듭해 오늘날의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고등학교로 정착했다"고 나와 있다. 반면 백과사전에서는 "1935년 3월 제1회 졸업생 35명을 배출하였고, 1936년 6월 경기도 시흥으로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39년 2월 경성상공실무학교, 1944년 3월 경성농공실무학교로 개편하고, 1945년까지 11회에 걸쳐 총 2,20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또 통일교 자료는 "1941년 3월 8일 제3회로 졸업하셨다"고 나와 있는데 백과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문선명은 7회 졸업생이 되어야 한다. 또 시흥에 있는 학교를 다녔어야 하는데 약간의 모순이 발생한다. 어쩌면 동아일보와 백과사전의 기록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하튼 문선명은 흑석동에 살면서 경성상공실무학교를 다녔다.
그의 학적 기록에는 "명랑하고 활발하며, 꾸밈없이 진지하고, 강인하고 건전하며, 스스로 앞서서 모든 일에 대해 열심히 한다", "신체가 건강하고, 출석 상황이 양호하며, 특히 축구를 좋아한다"라고 평가돼 있다.
흑석동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녔는데 난생 처음 서울로 올라온 문선명에게 각인된 것은 엄청난 추위였다. 그는 "서울의 겨울은 무척 추웠다"고 회고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더 추운 법인데 평안도에서 남쪽인 서울로 내려왔음에도 더 추웠다고 말한 것은 아마 타향 땅의 낯설음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회고에 따르면, 산등성이에 있던 자취집은 우물이 깊어 두레박줄이 10발 이상 들어 갔으며, 끈이 자주 끊어지는 바람에 쇠사슬을 엮어 썼는데 우물물을 퍼 올릴 때마다 두레박줄에 손이 쩍쩍 달라붙었다 한다.
손재주가 좋은 문선명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뜨개질을 해서 스웨터도 떠 입고 두꺼운 양말이나 모자, 장갑도 직접 뜨개질을 해서 만들어 입었다. 하지만 한겨울에도 방에 불을 넣어본 적이 없었다. 불을 넣을 형편도 못되었고 지붕 아래 누워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했다. 밥을 먹을 때는 반찬을 하나 이상 밥상에 올려본 적도 없었다. 고난의 학창시절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당시를 살았던 다른 고학생들의 기록 역시 대동소이하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던 지방 학생들의 고행은 비슷비슷하다.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1960년대까지 엄청난 고생을 하면서 학업을 한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그렇다 하여 문선명의 고행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여하튼 학생 문선명은 반찬 하나만 먹었던 것이 습관이 되어 평생토록 짭짤하게 간이 된 반찬 한두 가지만 있으면 밥을 먹었다. 점심은 먹지 않았는데 그런 고단한 삶은 40살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시절 좌우명은 '우주주관(宇宙主管) 바라기 전에 자아주관(自我主管) 완성하자'였다. 이는 지금도 통일교 신도들에게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다. '내 몸을 먼저 단련한 후에야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구할 힘이 있다'는 뜻이다. 회고에 따르면, 그는 학급 청소를 혼자 도맡아 했으며 말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래서 급우들은 그를² 어려워하며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고민이 있으면 찾아와 의논하는 일이 잦았다 한다. 학적부의 기록 '명랑하고 활발하며'와 다른 부분이다.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교사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해서 낭패스럽게 만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느린 평안도 말투를 교정하려고, 또 말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하기 훈련도 했다. 하숙집 아주머니의 빠른 말투에 자극 받아 골방에 들어가 '가갸거겨 갈날달랄…' 소리를 내어 빨리 말하는 연습을 6개월이나 했다. 그는 "남들이 한 마디 할 때 열 마디 할 만큼 말이 빨라졌다"고 밝혔다. 이것이 훗날 목사로서, 설교자로서 큰 몫을 했겠지만 사실 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기는 쉽지 않다.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고, 일본 유학 시절에 일본어를 배워 유창하게 했음에도 그의 말에는 평안도 사투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세련된 서울말을 구사하지 못했는데 문선명이 성공한 요인에는 '약간은 촌스러운 말투'도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멋지고 세련된 표준어보다 투박하고 빠르고 거친 말속에서 사람들은 그의 진정성을 느꼈을 것이다. 만일 문선명이 아나운서처럼 말을 세련되게 했다면 통일교의 역사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호기심 많은 소년 시절에 그는 고향의 모든 산과 들판을 뒤지고 다녔던 것처럼 서울에서도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었다. 그때 서울에는 전차가 다녔고 차비가 5전이었는데 늘 걸어서 다녔다. 그 돈을 모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다 한다. 고향에서 올라오는 학비(생활비) 역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다 쓸 정도였다.
"한번은 학교 가는 길에 숨이 넘어갈 것처럼 아픈 사람을 만났다. 어찌나 불쌍한지 발이 떨어지지 않아 그 사람을 업고 5리나 떨어진 병원으로 내달렸다. 때마침 주머니에 들어 있던 학비를 탈탈 털어 병원비로 내고 나니 돈이 한 푼도 남지 않았다. 학비를 못내 학교에서 독촉을 받는 것을 보고 친구들이 돈을 한푼 두푼 모아주었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90살의 남자가 자신을 미화시키고, 추켜세우기 위해 거짓 일화를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선명이 다른 사람에게 그처럼 많이 베풀었다면 '왜 통일교는 그토록 돈이 많은가?'라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여기에서 잠깐 통일교와 돈의 문제를 따져보자. 사람들은 '통일교는 돈이 많다'고 생각한다. 이는 틀린 생각은 아니다. 나아가 그 돈은 '신도들의 재산을 강제적으로 갈취해서 빼앗은 돈'이라 생각하며, 일부에서는 그렇게 공개적으로 주장한다. 또 인터넷을 검색하면 통일교에 대한 정보, 기사, 댓글, 해설, 공격, 비난, 옹호, 토론이 난무한다.
'통일교를 믿으면 집안이 망하므로 절대 믿지 마세요. 통일교는 아무 여자나 데려다가 강간하는 집단입니다. 통일교는 교묘한 수단으로 돈을 빼앗아 갑니다. 더 이상 돈이 없으면 쫓아냅니다…'
이 주장들을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또 아무런 괸심이 없다면 관심 자체를 가질 필요도 없다. 통일교가 돈이 많은 바탕은 간단히 말해 '종교와 기업을 병행했기' 때문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제6장 경제와 기술로 세계 발전에 이바지하다)에서 상세히 소개한다.
서울의 구석구석을 탐방하다가 종로 3가의 유곽 (옛날에는 종로 3가에 사창가가 있었는데 줄여서 '종삼'이라 불렀다)을 찾아가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눈물로 권고를 했으며, 한강다리 밑 빈민촌에 가서 머리를 깎아주는 봉사활동도 했다. 교회도 열심히 다녔다. 흑석동에 있는 명수대예수교회와 한강 건너편 백사장에 있던 서빙고교회에 다녔다. 문선명의 신앙 활동은 다음의 기록에 근거한다.
오순절교회는 일제하에 독선적 교회행정과 교리 및 체제 중심의 신앙 양태에 저항의식을 가진 이들이 주도한 한국적 성령운동의 일환이었다. 이들은 미국에서 유입된 오순절운동에 접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취지의 새로운 교회운동을 모색했다. 1928년 미국인 간호원 럼제이(M.C.Rumsey)선교사가 단독 내한해 용산에 오순절교회를 세웠다. 신사참배 강요와 조직적 탄압에 맞서 힘겹게 싸우느라 큰 발전은 보지 못했다.서빙고동 오순절교회의 초기 신도로서 인근에 거주했던 박운식 가족이 흑석동으로 이사했다. 그때 서빙고교회의 후원으로 초가(草家) 교회가 개척되었다. 한편 1930년대 초 초교파적 부흥운동의 여파로 제도권 교회의 이단 징계를 받은 이용도 목사를 중심으로 이호빈, 백남주, 한준명, 박계주 등 116명이 1933년 6월에 평양 신양리에서 새예수 교회 창립을 결의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이용도 목사가 지병으로 원산에서 타계하자 그가 후계자로 지명했던 이호빈 목사를 후임으로 선출했다.
서울의 새예수교회 산파역을 했던 분은 강숙경 부인이다. 강씨는 내자동 자택에서 새예수교회를 운영했는데 평양에서 이호빈, 박재봉 목사, 한의정 복음사 등이 자주 내려와 부흥집회를 가졌다. 그 무렵 학생 문선명은 오순절교회에서 강숙경의 둘째 딸 이기봉 가족과 만나 새예수교회를 다녔다. 1939년 가을에 강씨의 주선으로 흑석3동에 교회를 세우고, 이듬해 '예수교 명수대예배당'으로 간판을 걸었다. 문선명은 경성상공실무학교 2학년 때 교회 신축공사의 주역이 되었다.
-「참부모님의 생애와 섭리」 제1장-5.서울 흑석동 학창시절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님을 했는데 아이들이 많이 좋아했다. 명수대 뒤에는 달마산이 있는데 바윗돌에 올라 밤새 기도하는 일이 많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에 열중했는데 한번 기도에 들어가면 눈물콧물 범벅이 될 정도로 기도를 했다. 같이 하숙하던 친구들은 그가 산에 올라 밤새 기도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흑석동 시절 자취집 주인이었던 이기완(이기봉의 언니) 아주머니는 문선명에게 무척 잘해 주었는데 여든이 넘어 타계할 때까지 50여 년 동안 인연을 맺었다. 자취집 근처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던 송씨 아주머니도 그 시절 큰 은인이었다. 문선명은 작은 일이라도 일단 신세를 지면 평생 잊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나중에 그 은혜를 전부 갚았다. "그 사람을 못 만나더라도 그 고마움을 다른 사람에게 갚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선명이 학창시절을 보낸 흑석동은 통일교 성지 중 한 곳이다. 1965년 제1차 세계 순회를 마치고 12월 31일 오후 1시를 기해 세계 40개국에 120개 성지를 정했다. 서울에는 7대 성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흑석동이다. 또한 명수대 학사교회, 흑석 2동 49-19 옛 하숙집, 흑석 1동 173-186 흑석교회를 매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