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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호씨를 그렇게 잊지 못하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사진을 찍으러 온 <한겨레21>의 박승화 기자도 렌즈를 들여다보다 말했다. “아, 얼굴이 기억나는 것 같군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한겨레21>이 창간될 무렵 이생호씨는 한겨레 사옥 안에 있는 서울은행 만리동 지점에서 근무했다는 것이다.
어쭈, 이 사람 보게?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빗대어 ‘살아 있는(生) 호랑이(虎)’라는 별명을 이생호씨에게 붙여주었다. 그를 만나 단 몇분만 이야기해보면 그것이 괜한 별명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사람이 도대체 말을 가리지 않는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자기 잇속이나 차리겠다고 다시 집어삼키는 짓 따위는 이생호씨 사전에 없다.
우리나라 노동조합 가운데 최근 들어 금융노조만큼 열심히 싸운 조직도 드물다. “총파업 두번씩이나 한 노동조합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잘했거나 못했거나 그것이 금융노조의 자신감이다. 그 대부분의 투쟁현장마다 집회가 진행되는 무대 뒤에서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이생호씨를 볼 수 있었다.
이생호씨가 서울은행에 취업한 것은 남자 직원들과의 차별성으로 악명 높은 ‘여행원’ 제도가 그냥 남아 있던 1983년 4월이었다. 집과 은행만 오가면서 짬나면 산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범생이’ 생활을 하다가 88년, 친구의 권유로 ‘민족학교’에 나가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떴다. “그곳에서 지하철·의료보험 노조활동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배우는 모든 것들이 새로웠어요. ‘민족학교’ 이후 소모임 활동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은행 안에도 소모임들을 만들었어요. 그때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과 함께 결국 지금까지 온 거예요.”
문화패 소모임 활동, 노동조합 분회장을 거쳐 97년, 노동조합 23대 집행부가 출범할 때 여성부장으로 결합했다가 1년 뒤쯤 교육부장을 맡은 이생호씨 앞에는 산더미 같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놓이면서 서울은행이 퇴출 금융기관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자 고객 예금이 엄청나게 빠져나가기 시작했어요. 지점에 총회하러 다니며 조합원들 만나보면 ‘손님 바짓가랑이 붙잡고 하루에도 몇번씩 울었다’는 거예요. 그 상태로 며칠 더 가면 퇴출 조치와 무관하게 은행이 저절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노동조합에게는 조합원들을 조직하면서 은행도 살려내야 하는 두 가지 사명이 떨어진 거지요. ‘상생(相生)의 시대를 열자’는 슬로건은 그래서 나왔어요. 300개가량 되는 점포를 간부 한 사람이 스무개 정도씩 나눠맡아 아침저녁으로 다니면서 조합원 총회를 열었어요. 은행노조로서는 특이하게 우리는 현장활동을 시작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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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서 어머니의 임종을 맞다
IMF 사태를 만난 한국경제의 ‘전선’ 맨 앞에서 서울은행 노조가 그렇게 열심히 싸우고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온통 그 일에만 매달려 새벽에 집을 나오면 한밤중에나 겨우 들어갈 때였는데 엄마가 폐암 진단을 받으셨어요. 9개월 뒤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찾아뵙지도 못했어요. 일주일에 한번꼴로 가서 엄마 옆에서 자고 나오는 것이 고작이었어요. 엄마 돌아가신 날은 대의원대회 전날이었어요. 대의원대회 준비를 하는데 임종하실 것 같다고 연락이 와서 집에 들어갔지요. 다음날 새벽에 돌아가셨어요.”
부모님에 관한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어머니는 생전에 생호씨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셨어요 ‘딸아이 하나 잘 키웠다’ 그렇게 생각하셨나 아니면 ‘저 철딱서니 없는 딸이 언제나 철이 드나’ 그런 걱정을 하셨나”
“처음에 내가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는 내 얼굴도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반대하셨어요.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광주항쟁 비디오나 자료집들 보시고는 ‘나쁜 짓 하고 다닌다’고 걱정도 많이 하셨어요. 그렇지만 나중에는 다 이해하셨어요. 6남3녀 가운데 내가 막내인데 혼자만 결혼을 안 했잖아요. 엄마가 누워서도 저만 보면 자꾸 우셔서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었어요. 2주 정도 곡기를 끊고 계시다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셨지만, 마지막에 나를 보시고 반응을 한번 보이시더라고요. 내가 ‘엄마’ 하고 부르니까 눈물을 딱 한 방울 흘리고 돌아가셨어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서울은행과 제일은행에서 40%가량 인원을 감축할 것이라는 발표에 이어 공적자금 받은 금융기관 32% 인원 감축, 5개 은행 퇴출 등이 그 뒤를 따랐다. 서울은행 노조가 독자적으로 파업을 준비하다가 다른 은행 노조들과 합류하며 98년 9월 총파업을 맞았다.
“명동성당부터 우리 건물 앞 입구까지 3만명이 모였어요. 처음에는 은행별로 하기로 했는데 그걸 원천봉쇄하니까 명동으로 쏟아져들어온 거지요. 무대준비도 제대로 못했어요.”
서울은행 노조는 자신들이 쓰려고 준비한 무대장치를 들고 명동성당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생호씨는 무대를 세우는 일부터 시작해서 무대에 올라갈 사람들을 섭외하고, 율동패를 배치하고, 집회가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하는 일을 맡았다.
금융지주회사 설립에 반대하는 2000년 7·11 총파업을 거치며 지금까지 오는 동안 정말 숨돌릴 틈도 없었다. “홍콩상하이은행(HSBC)이 서울은행을 인수하겠다고 나섰다가 포기하고 자빠졌지요, 다음에는 ‘도이치방크’에 자문을 맡겨 해외매각한다고 했다가 실패했지요, 너도나도 매입하겠다고 나서서 마지막에 3군데가 남아 실사하다가 하나은행 합병이 발표됐지요, 합병반대투쟁을 했지만 결국 속전속결로 합병됐지요.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다 감당하면서 굴러왔는지 우리도 신기하다니까요.”
하나은행과의 합병, 숨가쁜 흔적
며칠 전까지 ‘서울은행 본점’ 간판이 걸려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은행 명동사옥’으로 이름이 바뀐 건물의 텅 빈 층에 자리잡은 노조 사무실에서 생호씨가 최근 몇년 동안 걸어온 숨가쁜 흔적을 대충 짚어보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나은행과의 합병이 마지막 고비였겠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생호씨는 손을 가로저으며 말을 막았다. “마지막이라고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며칠 전에도 행장실 항의농성을 했어요. 양쪽 은행 직원들을 서로 섞는 교차 인사발령을 금요일 밤 11시19분에 낸 거예요. 월요일 아침에 들어가서 항의농성을 시작했지요. 발령을 취소하지는 못했지만 대상자들을 불러 일일이 상황 설명을 하고, 앞으로는 신규점포와 통합점포에만 교차발령을 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노동조합과 사전에 충분히 협의하겠다는 약속을 문서로 받아내면서 끝났어요.”
인사고과 평가방법, 임금수준, 승진연한, 동일직급 직원들의 나이, 여직원 차별문제에서부터 직원들 정서까지 모든 것에 차이가 나는 두 은행이 통합된 이후, 하나은행 중심으로 굉장히 빠르게 체제가 바뀌고 있는 지금, 노동조합에는 할 일이 쌓였다고 숨을 몰아쉬면서도 이생호씨는 “우리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다른 노동자들에게 미안해했다.
“금융노조에서는 해고된 사람도 몇명 안 돼요. 그 사람들을 넉넉히 감싸안을 수 있을 만큼 노조역량도 충분하고…. 수억원씩 가압류당한다거나 하는 일도 아직 없어요. 문제는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자들이에요. 금융노조가 그 사람들을 조합에 가입시키기로 한 것은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봐요. 노동자 내부의 불평등을 스스로 해소하기 위해 힘을 기울여야 할 때예요. 그걸 못해내면 우리 노동운동의 미래는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우리의 ‘살아 있는 호랑이’ 이생호가 결혼할 가능성은 당분간 없어 보인다.
하종강|한울노동자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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