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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님의 약속
말씀 디도서2:11-15. 2018년 5월 6일 일요일 오전 11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간절하게 구하는 “저 복된 소망”이란 무엇인가?
소망이란 모든 것이 풍성하고 부러울 것이 없고 만족한 상태에서는 필요 없는 단어일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바라는 꿈도 전혀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민족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같은 민족, 즉 남한과 북한이 한 나라의 동일한 민족인데 불행하게도 원치 않은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이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한 많은 민족으로서 나라가 하나가 되고 사랑하는 가족이 다시 만나는 통일이 민족적인 간절한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산가족들의 아픔도 세월이 흐르고 이산의 아픔을 당한 세대가 바뀌면서 이산가족들의 만남이나 통일의 염원이 점점 흐려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6.25 전쟁을 알지 못하는 세대들은 그 전쟁이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는가를 잘 모르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가슴 아프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의 간절한 소원도 없을 것입니다. 가족의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지 못한 신세대들은 골치 아프게 왜 통일을 하려 하느냐? 그냥 이대로 살면 되지 사상도 다르고 생활습관이나 심지어 언어도 많이 다른데 구태여 경제적인 부담을 안고 통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고통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짐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세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산가족의 1세대나 2세대까지는 아직도 통일이 절실합니다. 그것이 생애의 제일의 소원이요 소망입니다.
지난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이 만나게 되고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고 정치적으로는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므로 그토록 소망하던 통일이 가까워졌다는 성급한 바람이 일었으며 우리 민족 모두의 소망인 통일이 문 앞에 이른 것 같은 들뜬 기분입니다. 이산가족은 다시 만남을 절실하게 기다리며 실향민들은 하루 빨리 고향 땅엘 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렇게 국민적인 소망이 있기까지는 국민적인 아픔의 환란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환란을 당한다면 그것은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 한란 뒤에는 우리 모두가 바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전쟁도 가족의 이별도 고향을 떠나는 일도 당하는 자들에게는 상처요, 환란입니다. 그들에게 통일이야말로 소망중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일시적이고 시대적인 소망이 아닌 믿음을 통한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롬 5:1-4)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도다. :2)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3)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체험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우리가 아노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세상에 환란을 기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란 뒤에 올 확실한 소망을 위하여 오늘의 고통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말입니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고등학생이 자기가 가고 싶은 좋은 대학을 가기위해서는 인내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50명을 뽑는 대학에 200명이 몰려온다면 150명을 물리칠 실력을 갖추어야합니다. 그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200명 모두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겠습니까?
제가 뉴스를 들었는데 “지하철 1호선”이라는 뮤지컬이 있습니다. 10년 만에 다시 공연하기 위하여 배우 11명을 뽑는 오디션에 900명이 몰려왔답니다. 그 뮤지컬이 유명하기도 하지만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들은 그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소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하고 더 잠 못 자는 것이 고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 닥친 환란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인 요셉이가 확실한 목표와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모든 어려운 과정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인내하며 오히려 즐기며 기쁨으로 달려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꿈꾸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늘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의 나그네 인생이 겪는 환란들은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길 뿐 아니라 기뻐합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는 한 환란은 어려움이나 두려움이나 고통이 될 수 없습니다. 잠시 잠깐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는 아쉬움들이 있을지라도 영원히 누릴 영광의 소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땅의 것들은 소망이 있는 자들을 실망하게 하지 못합니다.
살찐 사람이 살을 빼려면 우선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합니다. 양도 줄여야합니다.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여름에 수영복을 입고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싶은 젊은이들은 기쁨으로 다이어트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소망이 있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이어트에 따른 고통을 기쁨으로 견디는 사람은 소망을 이룰 것이고 고통으로 끝나는 사람은 소망이 절망으로 자신을 더 괴롭힐 것입니다.
집을 사려고 적금을 붓는 사람들은 지금 먹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있습니다. 지금 유행하는 패션을 따라 사고 싶은 옷을 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가고 싶은 여행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집을 사겠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이 크면 클수록 현재 당하는 환란은 괴로움이 아니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세계 여행을 꿈꾸고 소망하는 시온이는 가끔 생기는 용돈을 쓰지 않고 저금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군것질 하는 것을 볼 때면 자기도 군것질을 하고 싶지만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참고 인내합니다. 아빠 생일이나 가족들 생일이 되면 작은 선물이라도 사고 싶지만 참고 견딥니다. 대학생이 되면 세계여행을 하고 싶은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오늘 하고 싶고 사고 싶은 것들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세계 공용어인 영어도 열심히 합니다. 공부해도 잊어버리면 또 합니다. 잊어버릴 때마다 속상하고 포기하고 싶지만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다시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산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한 준비기간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에겐 산 소망입니다. 우리의 생활방식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빌 3:20) “우리의 생활 방식은 하늘에 있으며 거기로부터 또한 우리가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하늘로부터 오실 우리의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정말 복된 소망입니다.
주님은 지상사역 동안에 까닭 없이 미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분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분이 다시 오시는 목적은 자신의 생명으로 구원 받은 자신의 사람들을 큰 환란 전에 데려 가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주님이 데리러 오시기까지는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이나 환란은 각각 다르겠지만 그런 것들을 괴로워하기 보다는 기뻐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복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는 구약의 많은 예언들이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보면서 앞으로 성취될 약속들을 믿음으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다시 오심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신 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반드시 이루어 질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그 약속이 복된 소망인 것입니다.
(딛 2:11-15)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 :12) 우리를 가르치시되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13)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느니라. :14)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정결하게 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5) 이것들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꾸짖고 아무도 너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
주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죽어 주시기 위해 오셨고 고통당하시려고 오셨고 생명을 내 놓으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러 오셨습니다. 그분의 지상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요, 환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움의 대상이었으며 시험의 대상이었으며 조롱의 대상이었으나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당연한 일들로 받아 들이셨습니다.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나 그 은혜를 모든 사람이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주께서 자신의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치 아니한 것과 세상에 속한 정욕들을 우리가 거부하고”살아갑니다. “저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신”분의 뜻대로 살아가야합니다.
이런 것들은 이론이나 지식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원수 마귀의 유혹과 속임수에 노출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이기셨으며 우리 모두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십니다.
(요 16:33)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터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사람으로는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실패했지만 누구든지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분이 승리를 가져다주시는 분이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고전 15: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주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면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승리합니다.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 모든 곳에서 그분을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것이 이미 승리한 것이고 이긴 것입니다. (요일 5:4) “무엇이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제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며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해야할 일들이며 기쁨으로 견뎌야할 일들입니다. 이러한 삶이 복된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별된 모습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권능과 영광 가운데 자신의 피로 구원 받은 사람들을 채어 가시기 위하여 공중에 오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간직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당하는 가지가지의 시험이나 고통이나 환란을 소망 없는 세상 사람들같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자신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믿는다면 지금 당하는 각양 환란들을 인내하고 기뻐해야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그 나팔소리를 듣기 전에 죽음이 온다 해도 복된 소망이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슬퍼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믿을 진대 우리를 데려 가시기 위해 공중에 오심의 약속을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살전 4:13-18)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데려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곧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결코 잠자는 자들보다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친히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
구원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공중에 오시기 전에 죽는 것은 그분 안에서 잠자며 안식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휴거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구하러 오셨던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현 세상에서 맑은 정신을 가지고 의롭게 하나님의 뜻대로”살아가면 됩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나팔소리와 동시에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출세하고 권력을 얻는 일이 목적이 아닙니다. 돈을 모아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았으므로 그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것이 이 땅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는 것입니다.
(마 6:20) “오직 너희 자신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서는 좀과 녹이 부패시키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도둑들이 뚫지도 훔치지도 못하느니라.” 여러분의 자신을 위하여 가능하면 많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시기 바랍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복된 소망이 있습니다.
하늘에 쌓는 보화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포함한 모든 헌물과 선한 행위들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도 오늘보다 더 낳은 삶을 살고 싶어서 저축을 합니다. 우리가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도 더욱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저 복된 소망이란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그 만남을 더욱 풍성케 하는 것이 그분으로부터 받을 보상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으로 모든 소망을 이룬 사람과 주님께 받을 보상이 많은 사람의 소망은 어떠하겠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줄 보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주리라.”
주님은 연보(헌금)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밭에 씨를 뿌리는 비유를 예를 들었습니다. 이는 이웃을 향하여 손을 크게 벌리느냐? 인색하게 아끼느냐? 에도 적용이 될 것이고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일에도 적용이 될 것입니다. 이 성경구절은 씨를 뿌리는 양의 문제와 더불어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인색한 마음으로 소량을 뿌린다면 인색하게 소량을 거두게 되고 풍성하게 뿌리는 자는 풍성하게 거두리라 하셨습니다.
(고후 9:6) “다만 내가 말하려는 바는 이것이니 곧 인색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인색하게 거둘 것이요, 풍성하게 뿌리는 자는 또한 풍성하게 거두리라는 것이라.”
우리나라 공직자 윤리도덕 강령에는 해서는 안 될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부동산을 살 때 세금을 적게 내려고 다운 계약서를 쓰는 것입니다. 이중계약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세금 분깃점이 3억이라면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2억 5천이라 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엄연한 불법이며 발각이 될 때에는 탈세의 불법자로 낙인찍히고 많은 세금을 추징당할뿐더러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그 지역에 살지도 않으면서 서류상으로만 그곳에 사는 것으로 위장전입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차후에 발각되면 공직자로서는 실격입니다. 이는 평소에도 얼마나 정직한 삶을 살았는가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월급쟁이는 소득세를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불성실 신고를 하여 세금을 적게 내는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하지 말아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속이려하는 것은 보상의 대단한 손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낱낱이 들러날 것이며 받을 보상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소득세를 적게 내려고 5백만 원을 번 사람이 2백만 원 벌었다고 거짓 신고한다면 옳지 못한 일이며 언젠가 밝혀지면 속인 부분에 대해서는 토해내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3백만 원을 벌게 하셨는데 2백만 원만 번 것같이 헌물에서 깎는다면 인색하게 드리는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받을 보상을 잃을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과 복된 소망을 바라는 사람들은 풍성하게 뿌리려고 노력하도록 권고합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주신 교리도 아닙니다. 그러나 소득의 십분의 일은 믿음의 고백을 행위로 나타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의 액수가 아니라 마음속 믿음의 선한 양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주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는 고백이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린아이에게는 알아듣기 어려운 단단한 음식에 해당하는 말이지만 장성한 자들에게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주님은 십분의 일이나 액수와 상관없이 가난한 과부의 생활비 전부인 동전 두개를 모두 드린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이 곧 가난한 과부의 마음속에 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율법이나 누구의 권고나 억지로 한 것이 아닌 즐거이 낸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눅 21:1-4) “그분께서 위를 보시며 부자들이 성전 보고에 예물을 넣는 것을 보시고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거기에 이 렙돈을 넣는 것도 보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넣었도다. :4) 이들은 다 풍족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헌물로 넣었거니와 그 과부는 빈궁한 가운데서 자기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생활비 전부를 드릴 믿음은 없을지라도 수입이 있게 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인 소득의 십분의 일은 정직하게 드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두 사람이 동업을 하는데 A라는 사람은 자금을 대고 B라는 사람은 기술을 제공하여 수입을 얻은 것에서 한 사람에게 90%를 갖게 하고 자기는 10%만 갖는다면 그에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성도들이 입술로는 나의 생명까지 주님께 드리겠다고 고백하면서 유독 물질 즉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에 대해서는 인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인색하게 하거나 억지로 하거나 얼마를 할까 흥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하지 않을 수는 없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다 하자니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이는 마지못해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주님께서 직장주시고 건강주시고 환경 주시고 얻은 수입의 90%는 네가 갖고 10%는 베푸신 은혜에 감사의 표시로 주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고후 9:7)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여러분이 영적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성경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수입이 얼마든 간에 내가 내고 싶은 만큼만 내라는 말씀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국민들의 불성실 소득신고자와 같이 5백만원 소득이 있을 때나 3백만원 소득이 있을 때나 자기 마음속에 정했다며 항상 똑같은 액수를 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자기가 작정한 것보다 수입이 줄어들었다면 거기서도 줄일까요? 세월이 흘러도 수입이 늘어도 물가가 올라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동일하다면 그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마음속에 정한 대로”라는 말은 어떤 사람의 권유나 규례에 이끌려 하는 것이나 자기 형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마음과 마음속에 감사함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생명을 드리기 전에 수입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까울 것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을 갖고 이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믿음의 분량에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누구나 막론하고 육신의 욕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주님께 드리는 대신 자기가 인심 쓰듯 자기마음속에 정한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선 내 마음이 어떤 것을 정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 생각해야합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기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기본적인 믿음의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십분의 일은 구약에서 율법시대 뿐만 아니라 율법이 오기 훨씬 전에도 있었고 신약에서도 언급하며 하나님의 약속들을 가진 자들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을 다루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기 훨씬 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나타난 멜기세덱이 약속들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통로로 십분의 일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히 7:6) “혈통이 그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고 약속들을 가진 그를 축복하였느니라.”
멜기세덱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나타났음을 믿으신다면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가 드린 십분의 일을 받고 축복했다는 말씀에 유의해야 할 줄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득 중에서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게 주님께 드리고 십분의 아홉보다 더 많이 내가 갖는 것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복된 소망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그 표현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인색하지 않은 믿음의 고백이라 생각합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쌓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적금을 드는 사람은 적금을 타게 될 날을 기대하는 만큼 하늘에 보화를 많이 쌓는 사람들은 복된 소망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보상을 가지고 오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에서도 불성실 소득신고를 하는 자들은 결국은 불법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성실세금 납부자들에게는 포상을 합니다.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주님의 손에 우리에게 주실 보상이 더 많이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복된 소망을 가진 자들의 신앙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같이 율법을 지키려고 헌물을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과 주님을 만날 복된 약속과 주님께서 주실 보상에 소망이 있다면 축복의 통로를 막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와 같이 불성실 소득 신고자가 불법이 들어날 때 한꺼번에 추징당하는 일은 없을지라도 행함이 없는 자들이 풍성한 보상을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과 복된 소망을 가진 여러분들은 그분의 손에 여러분에게 주실 풍성한 보상이 있게 하시는 지혜와 믿음의 행위가 있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분의 손에 보상이 있다는 약속도 믿는 것이 정상입니다.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 하지 않아도 되느냐? 논하는 사람은 성경지식이 없거나 영적인 갓난아이라 할 것입니다. 십분의 일이나 십일조나 용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일조가 율법이다 아니다 따진다면 일단 교리를 떠나서 헌금하기 싫다는 말이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구원 받은 한 성도가 십일조 교인이 되기까지는 3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척교회에 십일조 교인이 10명만 되면 재정이 어려워 교회 문 닫는 일은 없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은 강요에 의해서 하는 것보다 자원하는 마음과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헌물은 가난하거나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어보고 깊이 생각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소제목이 “풍성한 재정적 선물”입니다.
(고후 8:1-5) “또한 형제들아,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고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로 하여금 풍성하고 너그러운 선물을 넘치도록 하게 하였도다.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닿는 데까지 하였을 뿐 아니라 참으로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하였고 :4)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아 줄 것과 또 성도들을 섬기는 교제의 일을 맡아 줄 것을 우리에게 매우 간절히 구하였노라. :5) 그들은 우리가 바라던 것과 달리 이 일을 행하되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면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나 선교사들을 돕는 헌물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가 나는 선물이요 희생물입니다. (빌 4:18)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
(고후 9:5) “그러므로 그 형제들을 권면하여 그들이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후한 선물 곧 전에 너희가 통보 받은 적이 있는 그 후한 선물을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줄로 내가 생각하였나니 그리하여야 바로 그 일이 후한 선물답게 준비되고 탐욕에서 난 것 같지 아니하리라.”
이 땅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십일조를 한다면 이는 탐욕에서 난 것입니다. 어느 목사와 같이 제대로 된 십일조를 삼년만 하면 집을 사게 된다는 말은 사기 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럼 말씀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구원이 진심으로 감사하다면 정직하게 믿음을 행위로 들어내 보여 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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