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위에
세 분의 의사가 똑같은 진단을 내렸다면 그것은 거의 틀림없는 일이다. 간경변의 진단으로 나는 젊은 시절 긴 여름날을 절망과 좌절 속에서 헤맸다.
내 나이 마흔아홉 살이던 해의 여름방학으로 기억된다. 군산교대에서 교재 편찬을 협의하기 위해서 전국의 교대 영어과 교수가 회동한 일이 있다. 밤이 되면서 나는 신열이 오르고 오한이 나는지라 다음 날은 일찌감치 진찰을 받을 요량이었다. 마침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고명한 내과의사가 있다기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서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다.
연세가 지긋한 원장은 진찰을 마치자 조수에게 몇 가지 검사를 지시했다. 검사의 절차가 별로 복잡하지 않은지 이내 결과가 나왔다. 원장은 간에 이상이 있다며 속히 종합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을 것을 권했다. 황당이니 당황이니 하는 말은 이런 때 적합한 어휘일 듯싶다. 간질환은 고질이며 대부분의 경우 치사율이 높다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다.
의사의 말 한 마디에 온몸의 힘이 빠진 듯 휘뚱거렸다. 그리고 보니 사람처럼 허약한 존재도 드물 듯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외무물(身外無物)' 이라지 않는가. 나는 협의회고 뭐고 다 팽개치고 즉시 발길을 돌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도 황망해서 어디를 어떻게 거쳐 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간 그날로 종합병원에 들려서 간 기능에 관련된 정밀검사를 마쳤다. 며칠을 기다렸더니 결과가 나왔다는 전갈이 왔다. 전하는 검사실 직원의 어조가 별로 밝지 않은 것으로 봐서 결과가 신통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부터 친분이 있는 원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간경변의 증세가 뚜렷하다는 통고를 했다. 그리고 나도 잘 아는 모업체의 주인의 사례를 들어서 설명했다. 나와 비슷한 수치가 나왔는데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앞으로의 치료의 방향은 첫째, 과로를 피하고 안정을 취하되 고단백의 영양분을 섭취하라고 권고했다. 그런 방법 말고는 현 단계로서는 의료의 한계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암시를 했다.
군산병원에서의 검사가 즉석에서 간단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이쪽의 정밀검사에 희망을 걸었었는데 그것마저 무산되고 말았다.나는 허둥대기 시작했다. 집안의 침울한 분위기도 문제였다. 어둔 밤에 막다른 골목에 부딪친 나그네처럼 더듬거리며 단골병원인 회생의원(回生醫院)을 찾아갔다. 그곳 김 원장님은 명의로 알려진 분이지만 내가 이곳을 먼저 찾지 않은 것은 군산의 의사가 종합병원의 정밀검사를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김 원장님께 막 받아온 수치를 제시하며 진찰을 부탁했다. 나는 사실 간경변인지 간경화는 기정사실로 여기고 앞으로의 치료의 방향을 의논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김 원장님은 나의 간에 이상이 있다는 징후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지 않는가. 그리고 검사의 수치만으로 병세를 속단하는 것은 오진의 우려가 있다고 종합병원 측을 완곡하게 비판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대전이나 서울의 종합병원에서 다시 한 번 진찰을 받아보라고 권고했다.나는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이었다. 그리하여 약간 센 어조로 종합병원의 담당의사에게 전화로 따졌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의사였는지 아니면 검사원이었는지는 확실한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답변은 간단했다. “김 원장은 구식 분이어서 의료계의 새로운 경향에 어둔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 고 잘라서 말했다.그리고 나의 경우는 간경변이 틀림없다고 한 번 더 다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어쩔 수 없이 그쪽 논리가 수긍이 가는 느낌이었다. 지푸라기마저 놓친 꼴이어서 처절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아직 꿈을 접기에는 빠른 나이인데 이렇게 무너지고 가장 구실을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 나의 인생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유가 적절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내 몸이 익기도전에 떨어지는 못 먹는 풋감 꼴이 된 것 같았다. 그리하여 어차피 못 먹는 감이면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먼저 대전의 종합병원을 찾아 나섰다.
진찰을 맡은 내과 과장도 역시 간 기능 검사의 수치를 매우 중시하는 듯싶었다. 진찰을 끝내자 이분은 한 술 더 떠서 3개월의 시한을 선언했다. 감으로 치면 꼭지가 거의 다 물러서 곧 떨어질 지경까지 왔다는 뜻일 것이다. 그 뒤 나는 30여 년을 더 살고 있으니 지금 생각하면 세 분 의사의 오진으로 멀쩡한 사람의 인생을 잡쳐버릴 뻔했다는 생각이 든다. 돌팔이 의원들이면 몰라도 버젓한 의사 분들인데 검사의 수치에 너무 집착해서 맥을 잘못 짚은 듯싶다. 그래도 당사자인 나는 3개월이라는 시한(時限)이 한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는 온 세상의 불행을 혼자 도맡은 듯한 절망감으로 심란한 마음 헤아릴 것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공교롭게도 하계휴가 중의 교원 연수의 출강 일정이 잡혀져 있어서 더욱 마음이 착잡했다. 교수들의 전공과목이 다 다르므로 대체 강의를 부탁할 형편도 아니었다. 큰 강당에서 수백 명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인데 강사의 건강을 빙자해서 소홀히 시간만 때우는 농땡이질도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3개월의 시한부 인생이라면 이것이 나의 마지막 강의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심란한 머리가 차츰 차분해지며 강의에 대한 의욕이 솟는 느낌이었다. '크나큰 비관은 크나큰 낙관으로 통 한다'고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외국의 어느 젊은 철학도의 심경을 이해할 듯싶었다. 나는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 을 연상하며 정열적으로 열강을 한 것으로 자부했다. 강의의 반응이나 분위기도 만족스러웠다.
강의가 끝나고 나자 머릿속은 다시 번민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생명의 본능 앞에는 염치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맥을 못 추는 듯싶었다. 오죽했으면 새퉁빠지게 몇 해째 간질환으로 투병 중인 옛 동료를 찾을 생각을 했을 것인가.
서울의 모 여중의 교장으로 재직 중인데 용산구의 어느 뒷골목의 그의 거처를 물어물어 찾은 것이다. 집을 알려주던 이웃사람은 그가 요즘은 출근은 고사하고 기동도 못할 정도로 위중하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동안 문병 한 번 못간 터였는데 그는 나의 처지를 동정하며 좌절하지 말라고 오히려 격려까지 해주었다. 나도 그의 야윈 신색(神色)을 우려하며 손을 잡아주었다. 병마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50의 고비도 못 넘길 것이 뻔한 두 인생의 낙오자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하소연을 하는 서글픈 장면인 셈이었다. 나는 다음날 갈 데까지 가본다는 심정으로 서울대병원에 매달리기로 했다. 극형의 언도를 받은 피의자가 마지막에 대법관의 온정에 기대를 걸고 상고하는 심정인지도 모른다.
무덥고 긴 여름날은 지루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날의 일진이 비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몇 시간 기다린 끝에 우리나라 간질환의 제1인자로 알려진 김정룡(金丁龍) 박사의 특진 차례가 온 것이다.김 박사는 세심한 진찰 끝에 나의 간장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분도 지방병원의 간 기능 검사의 수치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 듯싶었다. 어디서 내린 진단이냐고 나에게 다그치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구식 의술이라고 내리쳐본 공주 회생의원의 김 원장님과 맥이 통하는 듯싶었다.
김 박사는 자신의 진찰이 확실한 것을 다짐하기 위해서라며 몇 가지 검사를 지시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동안 머릿속에 못이 박힌 선입견을 불식시키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군산을 기점으로 한 달 가까운 시일이 흘렀다. 여름방학 중이었는데도 나의 시한부 소문은 직장 안팎으로 파다한 듯했다.
가깝게 지내는 직장의 동료들이 소문을 듣고 문병(?) 차 들렀다. 직장의 동태를 전하면서 나의 재생 불능을 기정사실로 단정하고 막보는 동료들도 없지는 않았다. 내가 맡고 있는 보직인 도서관장에 눈독을 들이고 나의 강의시간을 빠개서 나눌 논의도 한 듯하다.그때 우리 대학은 학생수가 현저히 줄어드는 경향이어서 한 시간이라도 더 내 앞에 큰 감을 놓으려고 다들 암중모색하던 시기였다. 지금은 많은 세월이 흐른 시점이고 또 그런 일에 관련된 동료들도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와서 이런 말을 궁시렁거리고 보니 누워서 뭐 뱉는다는 속담이 떠올라서 낯 뜨거운 느낌이 없지 않다.
한편 내가 병원 문턱을 들락거리자 이웃집에서는 눈치를 채고 하수구를 우리 집 쪽으로 돌렸다. 오랫동안 두 집 사이에 현안으로 내려오던 일이었는데 이번이 좋은 기회다 싶어서 재빨리 해치운 것 같다. 그쪽 부인이 집사람에게 사전에 통고는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지경인데 하수구 따위가 무슨 문제냐고 묵인했다고 한다. 직장도 그렇고 이웃도 그렇고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는다는 고약한 세태를 실감했다.
서울대병원에서는 검사한 지 1주일 만에 간의 기능이 정상임을 확인해 주었다. 모든 의혹이 깨끗하게 풀리는 순간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감에 충만 된 사나이도 드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가끔 나의 머리에는 삼중고의 여성 헬렌 켈러 여사의 'Out of Darkness'의 한 구절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 글은 여사가 만 일곱 살이 채 안 된 어느 날 처음으로 사물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유명한 글이다.
‘나는 그날 굉장히 많은 새 단어들을 배웠다.그것은 꽃이 피어난 아아론의 지팡이처럼
내 눈앞에 세계를 꽂 피우게 할 말들이었다.’
아아론의 지팡이는 구약성서 민수기(民數記) 17장에 나오는 설화인데 지팡이에서 기적적으로 움이 트고 꽃이 피어 편도(扁桃)가 열렸다는 내용이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그 중대한 하루 해가 다 가고 침대에 누워 그날이 가져다준 환희를 만끽하며 다가오는 새날을 난생 처음 열망하고 있던
나보다 더 행복한 아이는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웠으리라' 라고.
나는 맥을 잘못 짚은 세 분 의사 덕분에 그동안 겪은 고뇌의 나날을 생각하면 울어야 할는지 웃어야 할는지 착잡했다. 그러나 서울대학병원에서 마지막으로 검사 결과가 나오던 날 나도 주체하지 못할 만치 행복감이 충만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15년쯤 뒤에 겪은 오진 제2막은 나의 졸문 '해동무렵' 에서 다룬 바 있다.그밖에도 크고 작은 거듭된 오진으로 겪은 고뇌의 나날을 생각하면 야속한 마음 금할 길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오진이 나에게 크나큰 행복감을 안겨준 셈이라고 자위해 본다. 그리고 그 위에 우리의 한평생이 행복과 불행으로 꼭 한발 새끼줄과 같다는 말이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