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로 마음을 모읍니다♱
[찬 송] 32장(만유의 주재)
[공동체 고백] 사도신경
[성시 교독] 교독문 105번(감사절1)
[찬 송] 366장(어두운 내 눈 밝히사)
[강 론]
“둘째 아들처럼(눅15:11-24)”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불편했습니다. 그들이 증오하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어울리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수군거림을 아시고, 예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눅15장). 첫째는 잃은 양을 찾아 즐거워하는 목자의 비유, 둘째는 은전을 찾아 즐거워하는 여인의 비유, 셋째는 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영접하는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리주의자이며 형식주의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아버지하나님의 마음을 알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아버지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여, 세 번째 비유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요구합니다,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이에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각각 그 분깃을 나누어줍니다.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은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먼 외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지요. 큰 흉년이 들어 궁핍해지니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 사람은 아들에게 돼지를 치게 했지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도 배를 불리지 못할 정도로 굶주립니다. 그 과정에서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께 돌아가겠노라 생각합니다. 각성이 일어난 것이죠.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7-19). 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깁니다, “이에 일어나 어버지께로 돌아가니라...(20)”. 기다리던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와 안고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21)”는 둘째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깁니다(22).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우리도 둘째 아들과 같은 탕자라는 생각이 듭니다(기독교는 오래도록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 칭합니다). “내게 주소서”라는 둘째 아들처럼 주권과 자유를 하나님아버지께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권자와 자유인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주권자와 자유인으로 살기를 기뻐하시며, 우리보다 더 원하신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둘째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내게 주소서”라며 자신의 주권과 자유를 요구하며 방자히 행하다가 이웃의 자유를 침해하기 쉽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주권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양심불량 주차 차량을 마음대로 훼손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주권과 자유는 이웃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주권자와 자유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종교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아버지를 외면하는 주권이나 자유는 방임에 가깝고 이웃의 자유를 침해하기 일쑵니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악해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소서”라는 둘째 아들의 요구대로 우리가 자신의 주권과 자유만을 요구하게 된다면, 창조주이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요구합니다, “내게 주소서!” 내 인생을 내게 주소서, 내 자녀를 내게 주소서, 이 세계를 내게 주소서. 이렇게 세상의 중심에 자신을 올려놓으려 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될까요? 누군가는 소외되고 그 주권과 자유도 침해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던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한이 없는 주권과 자유를 주십니다. 혹시, 하나님아버지를 경외하지 않으며 주어진 주권과 자유로 자신의 삶을 허비하지는 않았습니까? 둘째 아들은 그랬습니다.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13)” 우리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가서 삶을 허비하지는 않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둘째 아들과 같은 인생의 흉년이, 참기 힘든 궁핍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14). 그 결과 우리도 누군가에 “붙여 사는” 종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권과 자유를 가끔 제한하시는 것은 이를 경계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도 꼭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아들은 닥친 흉년과 궁핍으로 주어진 주권과 자유를 저당 잡힙니다. 그러나 희망은 그가 각성함으로 찾아옵니다. 어떤 각성입니까? 함께 보시죠.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도 돌아 가니라...(17-20)”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살펴봅시다. 정말 우리가 우리의 삶의 주인이었습니까? 여러분은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다행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여러분은 둘째 아들처럼 뜻하지 않은 흉년과 궁핍으로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눌려 종이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본문의 둘째 아들과 같은 각성으로 희망에 거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어떤 각성입니까? 첫째, 아버지하나님의 품안에서는 종이라도 풍요롭다(자유롭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먹을 수 없었던 궁핍한 아들은(16) 아버지 집안에 있는 풍족한 품꾼들을 생각해 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품안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다 하더라도(무소유) 충분히 풍족할 수 있다는 각성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품안에서는 종이라도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믿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 각성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권과 자유를 요구한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드리죠,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우리가 하나님께 대들듯 자신의 주권과 자유를 주장했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 새로운 길이 열리죠! 그 길이 세 번째 각성으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19)” 우리가 자신의 주권과 자유를 요구한 우(愚)를 뉘우치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동경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그 삶이 참으로 자유롭고 풍요로울 수 있음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그 후,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지난 주일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벧엘로 올라가는 것이죠. 우리에게 있는 우상과 남은 바알(풍요의 신)을 땅에 묻고, 자신을 돌아보아 정결하게 하여 그리스도로 새 옷을 입고 현존하는 예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이, 막연한 수사가 아니라 삶의 힘이 됩니다. 예수를 바라봄이 힘이 되고, 희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돌아감으로서, 예수를 바라봄으로서 새로운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죠.
자, 그럼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대하실까요? 아버지의 종들의 넉넉함, 무작정 자신만의 주권과 자유를 요구한 어리석음을 반성하고, 이제 아들이 아니라 종이라도 되겠다는 각성, 그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대합니까? 여기서 영적 각성으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즐거워 잔치를 벌이는 목자처럼(6), 잃은 은전(드라크마)를 찾아 즐거워 잔치를 벌이는 여인처럼(9), 돌아온 아들을 영접하는 아버지처럼(23,24)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보고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처럼,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처럼 우리를 기쁘게 맞이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찾아내기까지”(4,8), “찾아낸즉”(5,9). “찾아내었노라”(6,9하)며 기뻐하십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종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종이라도 족한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시고, “가락지”를 끼우시며, “신”을 신깁니다. 우리를 종이 아닌 아들의 신분으로 복귀시키시는 것이죠. 진정한 주권과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이 영적 각성을 통해 아버지하나님께 돌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아멘! 이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죠. “살진 송아지”를 잡고 온 집안에 가득한 축제 말입니다. 이런 복을 여러분, 한 분도 빠짐없이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찬 송] 242장(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공동체 기도] 주기도(찬송가 63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