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전주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정치적 학살>
전쟁 전인 1949년 3월 전주에서는 전북도경으로 이송된 50여 명의 주민들이 경찰에 의해 전주 황방산 또는 산동이에서 집단희생되었다.
<형무소사건>
형무소가 있었던 전주에서도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할 시기에 전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들이 집단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9년 8월 전주형무소 재소자 수는 1,533명이었으며, 형무소 간수의 증언에 의하면 전쟁발발 당시 1,900의 재소자가 수용되어 있었는데 이중 정치범은 1,500여 명이었다. 이들 정치범들은 1950년 7월 4일부터 20일까지 형무소 인근 공동묘지에서 7사단 3연대와 5사단 15연대 헌병대에게 총살당했다.
재소자 학살은 7월 4일부터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당시 희생자들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된 150명으로서 7사단 3연대 군인들이 인근 공동묘지(현재 한국전력 전주지사)에서 경기관총으로 총살했다. 이 모습은 전주형무소 근무자 여러 명이 직접 목격했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7월 17일까지 1,200명을 공동묘지에서 총살했으며, 그 뒤 형무소가 최종 철수할 때인 20일까지 400명이 다시 황방산에서 총살당했다. 이로보아 전주형무소에서 희생된 재소자는 모두 1,6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15연대 군인이었던 김씨(김창순, 19세)에 의하면, 15연대는 당시 전주중학교에 주둔했으며 헌병대는 전주중학교 인근 종이공장 앞 도랑 건너에 함께 주둔했다. 총살은 헌병대가 했는데, 전주형무소 수감자를 산으로 데려가 꿇어 앉혀 놓고 집단 총살했으며, 15연대는 이 후에도 한동안 전주에 주둔했다.
이 사건에 있어 특이한 점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전북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전주형무소로 연행된 경우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완도 신지면에서 3․1절 기념집회, 메이데이 집회에 참석했던 15명이 이 사건으로 집단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완도 신지면에서는 1947년 경찰발포로 2명이 사망한 이래로 1949년 9월까지 곳곳에서 완도경찰과 해남경찰 등에 의해 학살당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한 후 국군과 경찰은 전주, 김제, 임실, 남원 등에서 7월 19일부터 20일까지 주둔했으며, 7월 20일 전주에서 남원으로 철수했다. 곳곳에서 소규모 탐색전을 치른 후 23일까지 전주-임실 부근에서는 전선의 변동은 없었으나 전남지역에서 광주가 점령당했다. 24일에는 남원이 점령당했다.
인민군이 전주지역을 점령하기 전 후퇴하던 국군에 의해 국민보도연맹사건이 일어났다.
전주(완주)지역에서는 가해 측 인사들의 증언을 통해 국민보도연맹원 수백 명이 완주 동상면, 전주 효자동 일대 등에서 총살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전북지방경찰국 사찰과에 근무한 전씨(전전희)는 “각 경찰서에서 다루기 힘든 거물급들은 도경 유치장에 검속되어 있었고 전주경찰서에 구금되었던 예비검속자들도 대부분 도경으로 이송되었다. 도경 유치장은 12개 방이 있고 한 방마다 20~30명 정도 있었기 때문에 꽉 차면 350명까지 있었다. 도경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들 중에는 여자들도 많이 있었고 그 중에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보도연맹원들은 구금기간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여름철이라 덥고, 먹는 것이 부족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잤기 때문에 유치장 안에서 자연사한 사람이 많았다”라고 하였다. 그는 학살경위에 대해서 “초기에는 일선 경찰서에서 검속한 보도연맹원들 중 우두머리급들을 도경에서 인수했는데 후퇴가 임박해서는 이송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일선에서 처리하였다.
처음에는 갑종들을 먼저 죽이고 후퇴할 무렵에는 다 죽였다. 도경 유치장에 있던 보도연맹원들 살해장소는 여러 곳인데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지휘관이었던 사찰3계장이 선정하였으며 주로는 야산이 많았던 완주군 동상면을 이용하였고 이외에도 정읍 내장산골목에서도 일부 죽인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하였다.
전쟁 발발 당시 전주형무소 형무관으로 근무했던 이씨(이순기)는 “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전주시 화산동 소재 강당재, 전주시 효자동 일대, 완주군 상관면 일대, 완주군 동상면 일대, 전주시 덕진동 소재 건지산, 완주군 용진면 소리개재 등 주로 야산 골짜기에서 사살되었다.”라고 하였다. 당시 희생자가 4,500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에도 인민군 측에 의해 연행되었던 전주형무소 수감자들이 1950년 9월 26일과 27일 이틀에 걸쳐 희생되었다. 당시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최씨가 1952년 했던 진술(KWC #728)에 의하면 당시 수감자 중 700여 명이 석방되었으며, 남은 수감자들이 형무소 작업장에 파진 참호 등에서 타살당했다고 한다.
『6·25사변 피살자명부』에 이 시기 희생 장소가 전주형무소로 기재된 희생자는 모두 313명이었다. 일부 증언에 의하면 미군의 진주시까지도 형무소내 수감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죽음을 모면했다.(KWC #733 박00 진술) 미 25사단이 전주에 진입한 날은 9월 28일이었다. 당시 전주형무소에 감금되었던 홍성경찰서 소속 경찰관이었던 강씨는 음력 8월 16일 즉 1950년 9월 27일 풀려나 홍성으로 복귀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후퇴하는 인민군 측이 9월 26일은 학살했으나 27일은 석방했다는 것이 되므로 다른 사건들과 비교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어쨌든 아직까지 사건이 저질러진 구체적인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상 전주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을 종합하면 다음 <표>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