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리 함
평화를 지키려거든 전쟁을 대비하라는 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과옥조의 진리이다. 이는 진영논리를 벗어나 누구나 명심하고 항상 잊지 말아야할 역사의 교훈이다. 일단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해야 상대방이 얕보지 않는 일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우리는 일본과의 오랜 구원(舊怨)을 가슴에 안고 산다. 이를 어떻게 승화하여 양국관계를 정립할 것인가의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후배들이 일본을 제대로 배우고 이해하길 바란다.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군과 일본군 간에 최후의 결전을 한 곳이다. 특히 이 섬에 거주하던 많은 원주민들이 전쟁의 참화에 휩쓸려 1/3이 사망한 곳이다. 원래 유구왕국(琉球王國)이라고 알려진 나라가 1895년에 일본에 병합되었으며, 지금은 미국의 중요한 군사기지로 대 중국 최첨단의 수비수 역할을 하는 곳이다.
몇 해 전에 이 섬을 찾아 내부 고속도로를 따라 일주를 한 일이 있었다. 전쟁 당시 미군은 섬의 북부 지역에 상륙하여 남으로 공격했는데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은 본토 방어를 위해서는 약 3백만의 장병이 필요하고, 수많은 전상자가 발생할 것으로 판단했다. 동시에 미국도 무수한 사상자의 발생을 예측하고 전쟁의 종식을 위해 서둘러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낸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4월1일에 시작하여 81일 간이나 계속된 태평양 최대의 전투로서 작은 유황도 전투를 빼놓고는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였다.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자살 특공대가 대거 출현하였다. 일본 해군의 가미가제 자살 특공대의 공격을 받아 20척의 미군 함선이 격침되었고 157 척이 파괴되었다. 가미가제 작전에 동원된 수많은 젊은이들과 1,100기의 항공기가 희생되었다. 차후에 출격해서 전사한 육군 항공대 소속 특공 조종사 중 적어도 11명이 한국인으로 알려졌다.
지난 설날 무렵에 처음으로 하와이에 여행을 갔다. 어렵게 직계 가족 10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 중에 하루는 진주만을 방문하였다. 진주만(Pearl Harbor)은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섬, 호놀룰루의 서쪽에 위치한 천혜의 만(灣)으로, 미국의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여기에 있다. 과거 영화로만 알고 있었던 진주만의 참상을 확인하고 그 교훈을 새겨보았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을 지형과 비교해보고, ‘진주만을 잊지 말자’며 전 미국 국민이 한데 뭉쳐 싸웠던 과정을 살펴보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수장된 「아리조나 함」에서 떠오르는 기름띠와 전사자의 명단이 부착된 기념비는 그 날의 참상을 말해주고 있고, 현장에는 미국인의 추모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생존했던 소수의 장병들이 사후에 다시 수중의 전우 곁으로 돌아간 사실 앞에 처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당시 희망 시 형제 혹은 부자간에 함께 승선하여 복무토록 했는데 이후에는 한 집안의 대를 위해 이 방침을 변경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지금은 『선상 박물관』으로 운영되는 「미주리 함」에 올라 관람을 하면서 설명을 들었다. 함포 외교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도처의 약소국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던 일이 떠올랐다. 특히 전함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강력한 무기의 장착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였다. 크기뿐만 아니라 배수톤수도 어지간한 항공모함 수준이었다.
배의 구석구석을 구경하였다. 거대한 포와 함장 실, 승무원 침실과 식당, 각 종 사무실과 창고, 여러 전시물이 있는데 비좁은 통로로 상하층이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맥아더」 원수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던 역사적인 장소에는 팻말과 함께 그 날의 사진이 있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무엇보다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와 항복 문서에 서명을 했던 일본국의 대표자는 A급 전범이자 외무대신인 「시게미쯔 마모루」로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부상을 입어 의족을 착용한 상태였다고 하여 묘한 감흥을 주었다.
그런데 배의 오른편 뒤쪽에 약간 손상된 부분이 있었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당시 오끼나와 전투 중인 1945년 4월 11일에 가미가제의 공습을 받은 지점인데 그대로 보존한다고 하였다. 이 배는 이후 한국전쟁과 걸프전에도 참전하여 몇 차례 정비를 하면서도 그 흔적을 남겨둔 것이다. 무엇보다도 함정에 부딪히면서 외부로 튀어 나온 조종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준 사진 자료가 남아 있어 놀랐다. 항공기는 왼쪽 날개가 함체에 부딪치며 기체가 갑판에 뒤집어진 채 추락했다고 한다. 항공기에 달려있던 폭탄 2발은 운 좋게 불발하여 함 자체의 손상은 미미했고 항공유화재도 금방 진압되었다. 상황이 끝나고 미주리의 함장인 「윌리엄 캘러헌」은 시신을 수습하여 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차원에서 수장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두 명의 미군 병사가 밤 세워 대형 일장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치열한 전쟁의 와중에 그런 인간애의 진수를 보여준 함장의 인품은 진정한 미국의 힘을 상징하고 있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나고 조종사의 유족과 연락이 되어 은혜에 감사한다며 동봉했던 가족사진까지 현장에 부착해 둔 사실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온 가족이 함께한 사진 속에서 조종사는 비행기 장난감을 손에 쥔 모습이었다. 배안의 다른 전시실에는 그 조종사로부터 회수한 유품까지도 전시되어 있었다. 오늘 날에도 일본이 미국 앞에서는 큰 소리를 치지 못하는 이유도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운 인도주의적인 처사에 감복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영국에서 전쟁사를 전공하여 평소 탁월한 실력과 인품이 훌륭한 두주불사의 한 선배님은 주석에서 곧장 일본군의 성장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현대 중국사에도 해박하여 막힘이 없는 세세한 역사적 사실과 정확한 평가 앞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최고수준의 업무와 인적교유를 지향하면서 한 때 이 나라의 대북 정책을 주관하던 핵심 브레인으로 「김 정일」과의 단독 사진을 겸연쩍게 보여 주시던 진정한 보수의 상징이시다. 필자의 결혼식과 선친의 장례식에도 불원천리를 마다않고 참석했으며, 민간 신분으로 태국군부와의 교류행사에 역대 선배님들과 필자를 포함한 동료 4명을 방콕에 초대하기도 하였다. ‘청와대는 재난의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는 말 한마디로 나락(奈落)에 떨어진 「꼿꼿 장수」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정확한 판단은 꾸준한 노력에 의한 수준 높은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억지 주장에 편승하여 균형감각을 상실한 채 전문가로 행세하는 논객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겨우 소설 『대망』과 『어느 병사의 수기』 수준 정도의 일본지식이 전부인 나로서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마침 2016년에 막 출간된 1천 페이지가 넘는 『쇼와 육군』을 읽으면서 다소나마 일본군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진즉 현직에 있을 때 일본군의 실상에 대한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이 매우 아쉬웠다. 입으로만 극일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우선 일본에 대한 깊은 이해와 무엇을 배우고 버려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중국에 대해서도 같은 대비가 필요하다고 본다. 두루뭉술한 접근이 아닌 실용적인 국가이익을 중시하는 슬기로운 지혜가 필요하다.
참 군인을 양성한다는 사관학교에서도 일본군에 대한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일방적인 교육으로 유연한 사고력을 제한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고위 관료조차 대세와는 무관한 독립투사의 한 줌 경력에 대해 버럭 하면서도 정작 극복의 대상에 대한 대비는 소홀한 실정이다. 문제의 제기는 있을지언정 현명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하는 까닭에 국가의 에너지만 낭비한 셈이다. 모두가 진지한 토의와 반성을 통한 새로운 대국적인 접근으로 국가의 대전략을 준비할 시기라고 본다.
(2024.4.29.작성/5.8.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