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春日漫興 (춘일만흥/ 봄날의 흥취를 노래함)
幽 禽 啄 蠹 響 彭 鏗 (유금탁두향팽갱) 깊은 산속에 사는 새들의 나무를 쪼는 소리가
夢 裏 疑 聞 叩 戶 聲 (몽리의문고호성) 꿈속 잠결에 들으니 대문 두드리는 소리로세
睡 起 拳 簾 山 雨 歇 (수기권렴산우헐) 잠에서 깨어 주렴걷고 내다보니 비는 그치고
不 知 春 草 上 階 生 (부지춘초상계생) 이름모를 봄풀들 댓돌 사이로 뾰죽이 돋아나
<어 휘>
漫 興 : 저절로 일어나는 흥취
幽 禽 : 조용한 곳에서 사는 새
啄 蠹 : 나무에서 벌레를 쪼아 먹다
彭 鏗 : 1)팽조(彭祖)를 지칭, 팽조는 神仙의 이름 2)소리의 형용
<지은 이>
권필(權韠, 1569-1612),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본관은 안동이며 1569년 3월 漢陽 玄石村에서
태어났다. 19세 發解(발해)에서 수석을 하고, 覆試(복시)에서 수석을 하였으나 글자 하나를 잘못 써서 낙방
(落榜)되자 이후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楊州(양주) 淨土寺(정토사)에서 독서하며 지냈다.
23세 建儲(건저) 문제로 江界에 귀양가 있던 鄭澈(정철)을 李安訥(이안눌)과 함께 찾아뵈고, 이듬 해 4월에
友人 具容(구용)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상소, 和議(화의)를 주장해 나라를 그르친 죄로 柳成龍과 李山海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다. 이 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江華의 누님 집으로 피난을 하였다.
31세 4월, 江都에 우거 중에 松, 竹, 梅, 菊, 蓮을 읊은 層詩(층시) 5篇을 짓고 호남을 여행하였으며, 이듬 해
전남 長城郡(장성군) 黃溪(황계)에 우거하면서 趙緯韓 (조위한) 형제와 교유하고, 〈土泉洞宿聯句 /토천동숙
련구〉를 지었다. 33세 봄에, 江都(강도)로 다시 들어갔다.
이 해 겨울에, 중국 사신 顧天埈(고천준)과 崔廷健(최정건) 이 나왔을 때, 遠接使 李廷龜(이정구)의 천거로
製述官(제술관)으로 수행, 6개월을 義州에서 보냈다. 사진(寫進)한 詩藁(시고) 數十篇(수십편)을 보고 선조가
칭찬하고 順陵(순릉) 參奉(참봉)에 제수하였는 데 숙배(肅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 東岳(동악) 李安訥(이안눌), 鶴谷(학곡) 洪瑞鳳(홍서봉), 南郭(남곽) 朴東說(박동열), 南牕(남창) 金玄成
(김현성), 車天輅 (차천로) 등이 함께 遠接使의 幕僚(막료)가 되었는데, 모두 公에게 으뜸자리를 사양하였다고
한다. 월사(月沙) 李廷龜(이정구)가 예조 판서로 있을 때에, 공의 가난함을 딱하게 여겨 童蒙敎官 (동몽교관)에
제수하였으나, 몇 되 곡식을 얻으려고 허리를 굽히고 싶지 않다고 하며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후에 江華(강화)로 들어가 五川가에 草堂(초당)을 짓고 살며, 찾아오는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38세에 명나라
사신 朱之蕃(주지번)과 梁有年(양유년)이 나왔을 때에 원접사 柳根(유근)이 저자를 제술관으로 천거했으나
병으로 義州(의주)에 수행하지 못하고 서울의 接賓(접빈)에만 참여하다. 이후로는 交遊(교유)를 끊고 오직
李安訥(이안눌), 李春英(이춘영), 趙緯韓(조위한) 등 몇몇 友人들만 만났다.
43세에 任叔英(임숙영)이 科擧(과거) 對策(대책)에 光海君의 잘못을 비판하는 글귀를 써서 削科(삭과)되자,
이듬 해〈宮柳詩/궁류시〉를 지어 이를 풍자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왕에게 親鞫(친국)을 당하였다. 이 해 4월,
李恒福(이항복)의 伸寃(신원)으로 減死(감사)되어 慶源(경원)에 유배되어 귀양길에 올랐으나 4월 7일, 崇仁門
(숭인문)을 나가던 중 길가의 民家(민가)에서 졸하여 高陽 (고양) 渭陽里(위양리) 先塋(선영)에 묻혔다.
오늘 소개하는 시는 봄날의 흥취를 노래하면서, 시인이 머무는 곳의 주변 정황을 잘 포착하여 이를 세련된
기법으로 표현해 주고 있다. 시인은 일생 강직하면서도 다감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세상을 주유하면서 주옥
같은 시편들을 세상에 많이 남긴 빼어난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