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심장에 귀를 대다
안개가 바다를 덮는 morning이 있다. 파도도, 바람도, 바위의 윤곽마저도 스스로의 이름을 잃는 시간.
그날, 나는 그 바다 앞에 홀로 서 있었다. 짙게 내려앉은 안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수천 개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바다는 원래 바람과 함께 서사시를 부르는 존재인데 오늘만큼은 낮게 깔린 안개가 바다의 목소리를 가져간 듯했다. 모든 소리가 무뎌지고, 모든 경계가 흐려지고, 굳건한 바위조차 덩어리처럼 부유해 보이는 순간. 나는 그 부유하는 바위들이 오랫동안 잔혹한 파도와 싸워온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그 단단한 바위조차 안개 앞에서는 실루엣만 남겨 놓은 채 자신의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있었다.
안개는 그런 힘이 있었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를 지워버리는 힘. 모양을 흐리고, 어제를 숨기고, 그 위에 아주 조용한 시간을 덧입히는 힘. 나는 그 앞에서 문득,
사람도 가끔은 이런 안개에 잠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너무 뚜렷해서 아픈 기억, 너무 선명해서 무거운 관계, 너무 날카로워서 마음을 베는 말들. 그 모든 ‘선명함’이 잠시 흐려지는 시간이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안개가 바다를 품어버린 것처럼 나 또한 내 하루를 덮었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안개가 만든 그 반투명한 세계 안에서 오히려 또렷한 평온을 느꼈다.
바람이 불면 안개는 흩어지고, 바람이 멈추면 다시 모여든다. 흔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흩어짐과 모임을 반복하며 자기만의 리듬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혹시 내 마음도 안개와 닮아 있는 건 아닐까. 때로는 누구도 볼 수 없게 숨고,
때로는 모든 것을 드러내며 파도처럼 요동치는 마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 울린 감정들은 안개처럼 천천히 떠오르다 어느 순간 문득 시야를 가려버린다. 내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조차 모르게 만드는 감정의 안개. 그런 날에는 앞을 보려고 애쓰는 대신 그저 잠시 멈춰 서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안개가 모든 것을 감추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실, 숨겨진 진실이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쉼표’가 들어 있다. 바위들이 안개 속에서 더 단단해 보이는 건 그들이 바다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쉬어가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 바위들처럼 잠시 쉼이 필요했다. 나는 발밑의 젖은 돌부리를 바라보았다. 안개의 심장은 지금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요한 박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박동에 귀를 대듯 나는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안개는 나를 감싸고, 겨울의 냄새와 바다의 잔향을 솔솔 품어냈다. 서늘한 공기 속에서 내 마음도 숨을 고르게 쉬기 시작했다. 어쩌면 안개란, 사라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것들일지 모른다. 반짝였다 사라지는 삶의 순간처럼, 치열한 하루 속에서 겨우 만난 작은 여백처럼. 그리고 오늘, 나는 그 여백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안개가 걷히고 나면 바다는 다시 바다의 얼굴을 되찾을 것이다. 바위는 제자리에서 다시 파도를 맞이할 것이고 하늘은 또 다른 빛을 내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안개 속에서 하룻동안 내 마음에 남은 그 부드러운 흔적을. 모든 것이 흐려지는 세계에서 오히려 더 선명해진 나의 중심을. 오늘의 안개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한 줄기 고요한 자국을 남겨 놓았다. 그리고 나는 그 자국을 따라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단단히 또 하루를 걸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