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반송 신리마을
임란공신을 추모하는 재실, 상의사(尙義祠)
신리(新里)마을은 해운대구 반송2동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던 자연마을이다. 신리마을 앞으로는 석대동 옹기골에서 고촌역(신명역,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으로 가는 소리길(소로길)이 있었다. 이 소리길 중간 지점인 지경리에 주막이 생기고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여 신리(새마을)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반송유선방송 앞에서 석대교를 지나 반송마을로 가는 옛 길이 아직 남아 있다. 신리 주막에는 기장·철마 사람들이 경유하는 휴게소 구실을 한 왕래의 거점이었다.
신리마을은 동부산대학 입구를 지나 반송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왼쪽에 보면 수성탕(목욕탕) 일대로 석대천을 경계로 한 지역에 있다. 석대천 앞에는 큰 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주택단지로 변하였다. 신리마을은 석대·운봉 마을을 지나 반송마을로 가는 옛길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리마을 앞을 지나는 석대천은 수영강의 지류로서 기장군 철마면 안평저수지 상류 산정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고촌 마을을 지나 신리마을 앞을 거쳐 강 좌안으로 유입된다. 하천 길이는 7,775m이며, 유역면적은 22.55㎢이다.
마을 내에는 상의사(尙義祠)운송재(雲松齋)(반송 2동 370-22번지)가 있다. 상의사(尙義祠), 운송재(雲松齋)는 남평 문씨(南平文氏) 의안공파 동래 거벌 문중(東萊派宗中)의 임진왜란 때 순절한 문덕겸(文德謙)과 문세휘(文世輝) 등을 추모하는 재실이다. 향사는 음력 4월 14일이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1년에 동래에서 기장으로 가는 신작로(新作路)가 개통되면서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이 신작로를 만들 때 석대의 불근디(반송 석표왼쪽 옹기골), 새지골, 제공골 등의 돌을 깨어서 만들었다. 신작로가 개통되면서 신리 마을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오면서 마을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는 남원 양씨(南原梁氏)가 20호를 이룬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기장으로 가는 도로변이 빌딩과 버스종점으로 번화가를 이루고 있다.
무지개산에는 연못과 우물에 얽힌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신리마을 뒷산 무지개산 중턱에 개운사(반송2동 419번지)가 창건되기 전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연못 대신 바위 구멍에서 물이 나와 우물을 형성하고 있다. 개운사가 자리잡은 이 골짜기를 찹은골이라 불러왔다. 찹은골은 반송지역에서도 유독 기온이 낮고 차가워서 찹은골인데, 이곳은 다른 지역보다 봄에 피는 목련, 진달래, 개나리 등이 한 달 가량 늦게 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