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킬링필드의 학살자 '폴 포트'
'샐로스 사르(Saloth Sar, 1925~ 1998)'는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크메르 루주』 의 지도자, 흔히 '포트'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이름이 아니라,
영어의 Political Potential 또는, 프랑스어 Politique Potentielle의 줄임말
이다. '폴 포트' 라는 준말이 어디에서 유래(由來)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집권기간 중 지주(地主), 자본주의자 및 반대파 200만명을 숙청(肅淸)
하였으며, 그 밖에 그의 강제 이주 정책과 노동 정책, 흉년, 기근(飢饉) 등의
질병(疾病)으로 다수의 '캄보디아' 국민이 아사(餓死)하였다.
'폴 포트' 는 재임 동안 '원리주의적 공산주의'에 따라, 강제적인 농업화
정책을 시행하여 많은 국민들을 심문과 고문 등으로 죽게 만든 이른 바
'킬링 필드(Killing Field)'로 유명하다.
중학교 재학 중 '폴 포트' 는 역사 교사의 수업 중, '앙코르 와트' 제국
(帝國)의 영화(榮華)를 想起시키며, 식민(植民)통치 하의 연약한 조국의
현실을 토로(吐露)하는 것을 보고, 그로부터 크게 감명(感銘)을 받게 된다.
그는 1949년에 무선공학을 연구하기 위해 장학금으로 프랑스 파리에
유학(留學)했다. 유학 중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신생(新生)의 '크메르
루주 공산주의 그룹' 에 참가 했다.
1952년 익명으로 학생잡지를 통해 "캄보디아 王政에 반기(反旗)를
들어 '군주제(君主制)는 없애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
그 해 '폴 포트' 는 친구들과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다가, 그것이 공산주의(共産主義)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귀국 후 그는 1954년 프놈펜의 한 사립학교 교사로 채용되었다.
한편, 1955년 3월 『시아누크』는 국왕(國王)에서 퇴위(退位)하고, 정당을
조직하는 데 참여한다. 그는 그 인기와 권력으로 '공산주의 세력'을 일소
하여, 1955년 선거를 통해 모든 의석(議席)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계(政界) 에서는 좌 - 우파의 대립이 끊임 없이 일어났으며,
『시아누크』가 필요에 따라서 좌파의 중용과 탄압을 반복했기 때문에,
'폴 포트' 나 '이엔 사리', '큐 삼판' 등의 좌파 지도자들은 정글로 도피하게
된다.
시아누크 국왕(1922~2013)
1967년에 '폴 포트' 는 중국(中國)의 지원으로 반정부(反政府)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캄보디아 공산당' 은 후에 『크메르 루주』 로서 알려져,
동당(同黨)의 무장 조직은 '폴 포트파' 로 불리게 되었다.
'폴 포트' 는 그 사상적 배경을 '모택동 주의' 에서 변형하여 적용을 하였다.
『크메르 루주』는 완전 평등주의의 '토지 균등 분배론'을 생각하고 사회주의의
중간단계를 피하고, 공산주의의 달성을 목표로 했다.
1970년대 초 캄보디아 거의 전역에 대한 광범위한 대규모의 미군의 무차별
폭격과 무능력했던 '론 놀 정부'의 부패 행위에 염증을 느꼈던 국민 대부분이
'론 놀 정부'를 멀리하게 되었으며, 이는 '폴 포트' 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73년, 미국이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고, 동시에 남 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은
캄보디아를 떠났지만, 『크메르 루주』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노로돔 시아누크』 정부와 '론 놀 장군'의 군사정부에 대한 정적(政敵)으로서
'폴 포트' 는 『크메르 루주』게릴라 부대를 이끌었다.
미국의 지원이 없어지자 '론 놀 정권'은 곧 바로 붕괴되었고,
1975년 4월17일에 『크메르 루주』는 '캄보디아 내전(內戰)'에서 승리하고,
프놈펜을 점령했다. 1975년 『크메르 루주』군(軍)은 프놈펜을 점령한 후
주민들을 곧 피난시켰다.
1976년 5월 13일, '폴 포트' 는 '민주 캄푸치아' 의 수상(首相)에 정식으로
취임하였고, 지방에서 대규모 숙청을 시작해, 철저한 국가 개조(改造)를
실시하였다. '폴 포트' 가 목표로 한 것은 중국의 모택동주의를 기반으로 한
〈공산주의 사회〉이며, 자본주의 요소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侵攻)'으로 정부가 무너진 1979년 1월까지
『크메르 루주』정부의 총리로 일했다.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정권을
잃고, 북쪽 국경 밀림지대로 달아나 게릴라전을 수행했으며, 교육받은 중산
계급과 정부의 적(敵)으로 보이는 사람들 모두를 대상으로 한 『크메르 루주』
군의 조직적인 소탕(掃蕩)작전은 1979년까지 최소한 100만 명의 캄보디아인
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잔혹한 대량 학살과 게릴라 전에 거부감을 느낀 '베트남' 등 인접국은 '캄보디아
내전(內戰)'에서 승리하여 세운 '신 캄보디아 공산정부'를 지원했다.
'폴 포트' 는 베트남이 지원하는 '신(新) 캄보디아 정부'에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
『크메르 루주』군을 이끌고 캄보디아 남서부 산악지대로 철수했는데,
'신 캄보디아 정부'는 '폴 포트'가 공산당의 지도자로 있는 한 『크메르 루주』군과
평화협상을 할 생각이 없다고 발표했다.
1985년 '폴 포트' 는 『크메르 루주』의 정치적·군사적 지도자 직에서 공식적으로
사퇴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산악 게릴라전을
지도하였다. 1997년 6월 자신의 과거 동료들에게 긴급 체포되었으며, 7월에
열린 공개 재판에서 반역죄를 선고 받고, 창고(倉庫)에 연금되었다가, 1998년
가택(家宅)연금 상태에서 병(病)으로 사망했다.
『크메르 루주』는 3년 7개월간 전체 인구 600만 명 중 1/3에 해당하는 200만명에
가까운 국민들을 학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