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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교인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 3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삼패동교회는 정말 특별한 교회인 것 같아요.
이 뜨거움이 느껴져요. 우리 성도님들의 사랑도 느껴지고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그런 열의와 분위기가 이 교회에 가득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정말 사랑하고 계시고 우리 각자의 심령 심령이 정말 하나님께로 완전히 굴복되어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을 행하실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역사들이 이곳 산페동교회에 더욱 많이 이제보다 더욱더 크게 일어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제가 보건부장인데 보건과 디지털 두 부서를 맡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렇게 건강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가 왜 보건부장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건강을 좀 잘 좀 챙기라고 보건부장 자리에 오게 하신 것 같아요.
근데 제가 잘 못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였냐면은 이제 물을 마시는 걸 잘 못했어요.
그런데 이제 이 물을
많이 마시지 않아서 피부가 좋지 않다는 거 나중에서야 깨달았어요.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어렸을 때부터 제가 피부가 좀 안 좋았거든요.
물을 마시면 금방 좋아지더라고요. 피부가 그래서 우리 여성들도 피부에 뭘 좀 많이 바르시지 말고 물을 많이 드시면 어떻게 될까요?
피부가 촉촉해지면서 좋아져요. 근데 이게 안 촉촉하고 건조하니까 자꾸만 뭐를 우리가 많이 바르는 거예요?
문제는 어디에 있는데요 몸속에 있는데 자꾸만 겉에 문제를 해결해가지고 뭔가를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을 하는 거예요.
죄의 문제도 똑같아요. 죄는 마음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그쵸 그러면 죄가 안 나오려면 어디를 치료받아야 돼요?
마음을 치료받아야 돼요. 근데 마음은 치료를 안 받으려고 그러고 잠깐만 어디를 치료하려고 하는 거예요.
외부적인 어떤 내 태도나 모습을 자꾸만 수정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고쳐질 수가 없어요.
제가 언제 물을 정말 많이 마셔야 되겠다라고 느끼기 시작했냐면 손발이 너무 찬 거예요.
설교하고 나면은 제가 이렇게 악수하시면 제 손이 차죠.
그렇죠 근데 설교할 때는 피가 머릿속으로 다 쏠리나 봐요.
얼마 없는 피가 그래서 꼭 설교하고 난 다음에 한 10분 정도까지는 손이 좀 차더라고요.
한 10분 정도 지나면 이제 다시 따뜻해지는데 근데 물을 많이 이렇게 계속 안 마시다 와 보니까 이게 손발이 점점 이렇게 차갑게 되는 거예요.
근데 물을 정말 많이 안 마시는 분들이 그 수족냉증이라는 것이 이제 걸리시더라고요.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많은 경우에 그 이유가 있어요.
그래서 그런 분들은 여름에도 추워가지고 수면 양말을 신습니다.
그 추위가 일반 우리가 이렇게 경험하는 그 추위가 아니래요.
그래서 아무리 몸을 따뜻하게 하고 막 양말을 겹겹이 신어도 몸이 차가운 거예요.
왜 그럴까요?
혈액순환이 안 되는 거예요. 뭐가 없어가지고요.
물이 없어서 끈적끈적하니까 피가 혈액이 안 도는 거예요.
그래서 물을 마시면 금방 손발이 따뜻해지고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물은 안 마시고 계속 뭐만 하는 거예요.
다리 주무르고 손 주무르고 이거 수면양말 신고 온갖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걸 다 하는 거예요.
해결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돼요. 해결이 안 됩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지 아시겠죠? 우리는 하늘에서 오는 영원한 생수를 마시도록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생수를 마시지 못하면 갈증이 생겨요. 마음에 갈급함이 생기고 이 목마름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목마름을 해결할 길이 없어요. 이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열심히 매진을 하는 사람도 있고 스포츠 경기에 매진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취미 저런 취미 특별히 여러분 우리가 드라마 열중히 보는 이유가 뭡니까?
반응이 없으시네요. 여기는 안 보시는 것 같아요.
근데 상패동 교회 밖에 있는 분들 중에는 드라마를 많이 보시는 분들이 많아요.
왜 볼까요? 드라마를요? 드라마는요 마음이 공허하기 때문에 보는 거예요.
재미있거든요. 영화 드라마 왜 보죠? 마음이 허하기 때문에 보는 거예요.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을 때 안식일에 막 분주히 일하고 방문 다니고 막 설교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사역을 한 다음에 집에 딱 와가지고 자려고 저녁에 탁 눕잖아요.
그러면 뭐가 그렇게 행복한 줄 아세요? 뉴스 보는 게 그렇게 행복한 거예요 아 뭐 뉴스 보는 게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근데 나는 하루 종일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다 왔는데 그 일을 한 것보다 누워가지고 오늘 어떤 일이 있었지 뉴스상에 그걸 누르는 게 그 마음속에 막 편안함을 주면서 막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러죠? 왜 그러죠?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 수로 인해서 텅 비어 있는 거예요.
공허한 거예요. 그래서 그걸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은 다양한 것들을 하는 거예요.
뭐 형편이나 상황에 따라서 자기 수준에 따라서 해요.
어떤 사람은 돈이 없으면 열심히 등산하시는 거고 물론 건강을 위해서도 당연히 하시지만요.
어떤 사람은 스포츠 경기를 보러 다니고 어떤 사람은 해외 여행을 막 이쪽저쪽 그냥 막 많은 곳을 보러 다니면서 즐거움을 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맛있는 걸 먹으면서 즐거움을 채워넣으려고 하고 그 외에 다양한 정욕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가지 까지 온가지 방법들을 다 동원해가지고 내채울 수 없는 이 심령의 갈급함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예요.
근데 그 갈급함은요.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뭘로만 채워져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채워지는 거예요.
심령의 갈급함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그 여인이 만났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에요.
그분이 주시는 생수만이 우리의 갈급함과 가람을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그분께 나아가서 그분이 길러주시는 생수를 마시고 우리의 심령과 마음이 따뜻해지도록 해야 되는 거죠.
아침에 물 한 번 마셨으면 하루 종일 안 마셔도 됩니까?
아니죠. 아침에도 마시고 점심에도 마시고 저녁에도 마셔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밤새도록 수분이 부족해지죠. 그죠? 그럼 아침에 일어나자 뭐 해야 돼요?
물을 충분히 마셔줘야 돼요. 근데 우리는 육체적인 물만 마시면 안 되겠죠.
영혼의 물은 어떻게 마시죠? 기도로 마시는 거예요.
기도로. 근데 우리 산패도 교회 성도님들은 기도 정말 열심히 하시죠 네 하루에 적어도 아무리 못해도 30분 이상은 개인 기도하시죠 갑자기 아멘 소리가 작아지려고 해서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여러분 우리 재림교회 성도님들이 정말 기도를 좀 더 했으면 좋겠어요.
기도가 없으면요. 우리의 심령과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절대로 젖어들지 않습니다.
절대로
우리가 과거 예수님을 만났고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했고 용서를 경험했고 거듭남을 경험했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어도 오늘 내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 않으면 그 은혜가 나에게 아무런 생수의 역할을 할 수가 없어요.
영양분을 줄 수 없습니다. 오늘 은혜는 오늘 받는 거예요.
매일매일 그분 앞에 나아가서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매일 1시간씩 기도하면 교회가 얼마나 달라질까요?
우리 교단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이 마지막 사업이 얼마나 힘있게 외쳐질 수 있을까요?
여러분 그러면 정말 좋겠죠 저도 정말 좋겠습니다.
여러분 시간을 내셔서 매일 아침 십자가로 나아가서 그분과 함께 기도하는 일을 정말 등아이 하지 않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충만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성경절 읽고 기도하겠습니다.
요한복음 3장 3절 맨날 저녁마다 읽는 말씀이죠.
제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이 시간 다시 한 번 우리가 주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하늘에서 쏟아부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놀랍고 큰 은혜를 이 시간 이곳에 쏟아부어주심으로 여기에 계신 분들 중에 단 한 분도 우리의 마음을 받고 그것을 받지 못하는 분이 계시지 않고 모두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우리의 심령과 마음이 하늘에서 부어지는 생수로 충만히 채워지는 귀한 한 시간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로마서에 있는 말씀 계속 이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사경회가 우리 어떻게 말씀을 충분히 보는 사회가 되시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로마서의 말씀만 집중적으로 읽어가면서 우리가 지금 함께 살펴보고 있는데요.
로마서 3장 19절부터 있는 말씀들을 오늘 다시 읽으면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다시 한 번 되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제 오늘부터는 정말 중요합니다. 어제와 그저께도 중요했지만 그것은 그냥 우리가 죄인이라는 걸 깨닫는 거예요.
여러분 죄인이라는 걸 아무리 깨달아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아요.
물론 죄인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지만 그러나 죄인이라는 걸 단순히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삶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나 그것을 깨달았다면 오늘부터 보는 말씀이 정말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충만히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다시 한 번 19절 읽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이게 율법의 역할이라 그랬죠. 말하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내가 의인이거나 내가 꽤 괜찮거나 내가 훌륭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입을 틀어막는 역할을 하는 것이 율법의 역할이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해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거울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율법 안에 딱 내 자신을 비춰보면 내 안에 지금 뭐가 묻어 있는지를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 율법을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 율법에서 비춰 나오는 그리스도의 품성이 우리의 죄를 정죄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을 신실하게 하는 사람들은요. 다 자신이 죄되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왜냐하면 거듭남을 경험했다는 얘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율법을 더욱더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는 뜻이에요.
더욱더 분명하게.
그런데 많은 경우에요. 거듭났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하시는 분들이 이렇게 같이 얘기를 해보면 튕겨져 나오는 걸 볼 수가 있어요.
마치 나는 죄가 별로 없는 사람인 것처럼 대화를 딱 해보면은 정말 우리가 너무 죄인이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고 정말 연약한 사람이라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 두 사람이 만나잖아요.
그러면 정말 대화가 은혜롭게 돼요. 그리고 막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고 막 그래요.
우리가 어제 그저께랑 어제랑 우리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깊이 이렇게 가져가니까 우리 마음이 어떻게 돼요?
따뜻해지죠. 그렇죠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서 나오는 마음으로 열리게 돼요.
근데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잊어버리면 마음이 닫혀집니다.
그래서 대화가 튕겨져 나와요. 진실되게 들어가지 않아요.
깊은 대화로 못 들어갑니다. 그리고 영적인 대화는 더더욱이나 깊이 들어가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모인 소그룹이 있잖아요. 냉랭하고 차가워요.
그러나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걸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의 소그룹을 가기 시작하면 거기에 눈물이 있어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교회에서 시골교회에서 시무할 때 저희 소그룹 이름이 뭐였냐면 곽티슈 소그룹이었어요.
곽티슈 소그룹 저희 소그룹은 매일 아침마다 만났거든요.
새벽 5시에 집사님 집 한 가정에서 저희가 새벽 5시에 모여가지고 항상 시대의 소망 말씀을 읽고 나누고 함께 기도를 했는데 시작하기 전에 항상 각지슈를 여기다 중간에다 갖다 놓고 시작을 해야 돼요.
꼭 누군가는 울어요. 매일 왜 그럴까요? 우리의 심령이 낮아지는 거예요.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낮은 곳에서 올라가지 않아요.
높은 심령은 결코 하나님의 생수를 받을 수 없어요.
낮아지고 죄된 마음을 품는 사람들 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생수를 충만하게 받는 거예요.
그런데 가끔 거듭남을 경험했다고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어요.
그 이야기는 무슨 뜻이냐면 과거에 거듭남을 경험한 거 맞을 수 있어요.
우리가 판단할 수 없죠. 그런데 지금은 잃어버린 거예요.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은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보게 돼요.
그 빛에 더 가까이 노출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전에 내가 보지 않았던 그런 모든 것들이 다 뭐로 느껴질까요?
죄로 깨달아지고 죄로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세밀한 음성들이 너 이거 죄잖아 얘기하기 시작해요.
그런 경우들이 너무 많아요. 제가 시간이 없어서 다 말씀 못 드리겠는데 아마 여러분들도 그런 경우 많으실 거예요.
가만히 있는데 계속 떠올라요. 하나님이 이거 바로잡아야지 그러면 하는 수 없어요.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워도 가가지고 사실 그대로 말씀을 드려야 되는 거예요.
하나만 좀 얘기해 볼까요? 제가 지지난주인가 동해 삼척지구에 종합감수회를 갔어요.
근데 제가 그날
금요일과 안식일에는 양평교회에서 주말 붕회를 하고 그리고 이제 안식일날 동해삼책지구에서 2시 반에 종합강습회가 시작하는데 제가 그전에 가야 되잖아요.
근데 양평교회 끝나고 이제 식사를 제가 사실 하지 말고 출발했어야 되는데 식사를 하면서 저희 바이블 가이드라는 저희 디지털 선교부 사업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하다 보니까 시간이 벌써 너무 지난 거예요.
그래서 제가 1시쯤 돼서 출발을 해가지고 갔는데 뭐 너무 늦었죠.
근데 가다 보니까 눈이 펑펑 내려가고 대관령이 얼마나 차가 밀리는지 다 끝난 다음에 도착했습니다.
너무 죄송하고 부끄럽고 창피하고 근데 뒤에 가서 딱 앉았는데 선교부장님 옆에 계시는데 선교부장님이 저한테 하 목사님 몇 시에 출발했어요?
이렇게 묻는 거예요. 선교부장이 분당에서 오셨거든요.
더 멀리서 근데 차마 제가 목사님 1시 밥 먹고 1시에 출발해서 이 말을 못하겠는 거예요.
성규 부장님은 분당에서 식사도 못하시고 일찍 출발해서 내려오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저도 모르게 밥 먹고 12시 반 넘어서 출발했어요.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사실이에요. 아니에요.
사실이죠. 제가 12시 반 넘어서 출발했잖아요.
근데 그다음부터 하나님이 마음의 평화를 싹 가져가시는 거예요.
평안히 사라져버려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안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평안을 가져가세요.
근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고 그 은혜 안에 거하지 않으면서 살면 그 은혜가 항상 거둬가져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상태에 있는지 몰라요.
내가 계속 만성 탈수 증상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내가 탈수 증상이 있다고 물 잘 안 마셔도 못 느끼는 거예요.
그러나 항상 물을 촉촉하게 마시고 있는 사람은 목마르면 금방 싸인이 와요.
그것처럼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들은
잘못됐을 때 성령께서 즉시로 말씀해 주세요. 그다음부터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기도하려고 그러면 생각이 나요. 기도하려고 그런 생각에는 야 너 이거 바로 잡아야지 바로잡아야지 그래서 제가 하나님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하나님은 제가 뭘 잘못하면 꼭 야 너 그거 가서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너 거짓말했다고 얘기해 이 꼭 이러세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 너무 부끄러운데 내가 다음에 안 그럴 건데 이거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요?
근데 힘을 안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며칠을 지나고 가고 목사님 제가 그날 1시 넘어서 출발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사님 제가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말씀을 드렸어요. 제가 너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때 제 마음속에 뭐가 생겼을까요? 평안이 다시 회복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이 평안과 우리가 누리는 참된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 없이는 이 세상에 우리가 무엇을 누리며 살든 어떤 좋은 것을 소유하고 살든 우리가 어떤 집에서 살든 여러분 그것이 우리에게 평안이나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안에 즐거움과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그것이 참된 기쁨이고 참된 행복이 되는 거예요.
그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으면 주변에서 우리를 시험하러 들어오더라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막아주세요.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쉽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평안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그런 죄악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그 평안의 관계를 누릴 수 있는지를 지금 로마서가 설명해 주려고 하는 거예요.
이어서 가보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우리 20 21절 읽으면 되죠.
이제는 율법 외에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를 용서해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한 의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이미 구약 성경에서 이 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다 예언해놓고 수없이 반복해서 말해주고 있었던 그 의가 이제는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인이 차별이 없느니라.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사도바울은 계속 그걸 염두에 두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안에서 초창기에 계속 이방인과 유대인들 간의 투쟁이 있어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는 의다.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23절 24절 시작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아멘 여러분 여기 지금 우리가 어떻게 되었대요? 우리가 어떻게 되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예수 안에 있는 성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됐다고요?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될 것이다. 되는 중이다.
되었다. 여러분 국어 모르시는 분 안 계시죠? 이 말의 의미가 뭐죠?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거예요?
여기 보니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 이거 사도 바울이 로마인들한테만 하는 말일까요?
그러면 여기에 앉아 계신 모든 분들도 해당되는 말씀이 맞습니까?
아멘 그러면 여러분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나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이다.
아멘입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이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그런데 저는요.
오랫동안 이 사실을 믿지 못했어요. 안 믿어지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우리의 모든 잘못들과 부족들을 다 개선하고 바꾼 다음에 나아가야 되죠.
아니에요. 그럼 하나님이 우리가 이렇게 지금 죄 가운데 있고 내가 지금 여전히 내 안에 분명히 죄가 있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신 것 맞습니까?
나 회개하지 않았는데요. 회개하지 않았는데 용서해 주신 것 맞습니까?
지금 학자들의 의견이 이제 분분해지기 시작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용서받은 거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회개 다 하셨어요? 하고 있는 중이십니까?
그럼 회의를 아직 안 하신 겁니까?
여러분 제가 이 회개와 용서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어가지고 너무나 많이 힘들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를 누리려면 뭔가 우리 편에서 잘못한 것을 바로잡고 회개를 먼저 해야지만 그 하나님의 용서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맞습니다. 사실은 회개를 누리는 것은 누리는 것은 용서를 누리는 것은 회계가 선행이 돼야 돼요.
그러나 용서를 받는 것은 우리의 회개 없이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지금 무슨 얘기인가 하시는 분들도 계실 거예요.
제가 조금 더 설명을 드릴게요. 제가 예전에 있었던 교회 시골교회에서 제가 어제 잠깐 그 경험을 말씀드렸죠.
제가 분당교회에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했잖아요.
그 평안을 경험했잖아요. 근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나 은혜 이런 거 그 당시에 잘 몰랐어요.
그리고 제게 그게 어떻게 해서 그런 평안이 누려지는 건지도 몰랐어요.
그때로부터 6개월은 정말 완전히 하나님의 성령에 사로잡힌 것처럼 살았어요.
주변에서 아무리 뭐라 그래도 화 안 나고 너무 신기한 거예요.
막 제가 그 당시에 막 걸어다니면서 성경을 읽고 다녔어요.
출근하면서 너무 기쁘고 행복해가지고 근데 그런 기쁨이 어디서 오는지를 도대체 모르겠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살다가 6개월이 지났는데 다 없어져버렸어요.
근데 이게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를 모르니까 다시 어떻게 회복하는지도 잘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이렇게 또 없지만 있는 것처럼 설교하면서 없지만 이걸 누려야 되겠다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속 신앙을 하다가 제가 발령을 받고 시골교회로 간 거예요.
시골교회 가서도 제가 제가 만난 하나님 제가 경험한 것들을 나누면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그런 평안 안으로 들어가자고 요청을 드렸어요.
근데 그런 저의 마음속은 그 은혜 안에 안 있었거든요.
어떻게 그게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를 잘 모르지만 경험은 했기 때문에 내가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설교를 한 거예요.
근데 그런 설교를 듣고도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예수님을 만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를 맨날 붙잡으시고 목사님 고맙다고 내가 정말 목사님 때문에 예수님 만나갖고 너무나 행복하다고 몇 번을 예배가 끝나고 인사를 하시는 거예요.
근데 그럴 때마다 제 마음속에 너무 부담이 있는 거예요.
나는 지금 너무 헤매고 있는데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근데 어느 날 낮에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래서 그날도 목사님 정말 고맙다고 이렇게 인사를 하시는데 제가 너무 찔려가지고 안 되겠다.
내가 목사님 집사님한테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되겠다 하고 집사님 사실은요.
제가 예전에 그 은혜를 경험한 건 맞는데 지금 제가 그 은혜가 제 안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집사님 저를 위해서 좀 기도를 해 주십시오. 그 말씀을 드렸어요.
그런데 그 집사님이 저한테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목사님 제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새벽 4시면 어김없이 하나님이 저를 깨우십니다.
그래서 제가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데
말씀을 볼 때마다 동일한 성경 구절에 자꾸만 눈이 간다는 거예요.
근데 그 성경 구절에 눈이 갈 때마다 목사님이 떠오른다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께서 이 구절을 가서 목사님한테 얘기해 주라고 하는 음성이 들린다는 거예요.
근데 그 구절은 차마 평신도가 목회자한테 얘기하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구절이에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듣는데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 들더라고 너무 창피하고 그래서 제가 집사님 기도해 주세요 하고 집사님 기도해 주시고 집사님은 그 구절이 무슨 구절인지 얘기하지 않고 가셨어요.
그리고 제가 목회실로 들어가고 제가 제 기도 의자에 앉아가지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하나님 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 이렇게 목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고 너무 위선적이고 더 이상 이 단상 위에 서는 것이 너무 싫습니다.
저를 바꿔주시든지 너무 회개하고 싶은데 제발 회개 좀 하게 좀 도와달라고 제가 간절히 4시간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회계를 했을까요? 꼭 물어보는 게 못한 것 같죠?
회개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는 건지 모르겠는 거예요.
회개를 하고 싶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마음 내가 정말 죄인이고 내가 너무나 부족하고 너무나 부족한 목회자의 너무나 부족한 신앙인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회개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회개가 일어나는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 형편들 가운데 있습니다.
이렇게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데 그럼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정말 삶이 너무나 힘들고 피폐했었어요.
정말 제가 여기 진짜로 쓰지는 않았는데요. 여기 마음으로 사직서를 여기다 써갖고 다녔어요.
여러분들은 그 고통은 모르실 거예요. 설교자가 아니시니까 근데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없고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면서 내 마음속에 있지 않은 말을 청중들 앞에 설교해야 될 때 목회자가 느끼는 그 절망감은 아마 얼마큼 그 무게가 힘든 것인지 잘 모르실 겁니다.
정말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막 여기까지 막 올라왔었어요.
여러분 어떻게 하면 우리가 회개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평강과 기쁨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제가 그 당시에 얼마큼 절망적인 상태 안에 들어갔었냐 하면 이거 얘기하면 또 시간이 없어질 것 같은데 그래도 이해를 좀 돕기 위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루는 저희 아이가 그 당시 6살 첫째가 이렇게 어렸을 때예요.
근데 엄마가 안식일에 흰옷으로 완전 드레스를 다 맞춰놨어요.
신발까지 흰색으로 그리고 저희 사택이 교회랑 한 10m 이렇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밖에 주차장이라서 제가 문을 열고 신발 신고 나오려고 그러는데 구두가 뭐가 묻어 있어요?
미리 좀 닦아놨어야 되는데 제가 구두약을 묻혀서 살짝 이렇게 좀 닦고 나가려고 하는데 저희 아들이 오더니 자기도 구두소를 한번 닦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너는 흰색 신발이니까 이걸 닦으면 안 된다 그랬더니 막 떼를 쓰기 시작하는 거예요.
자기도 달라고 막 떼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안 된다고 계속 얘기를 하다가 지금 시간이 없으니까 그럼 한번 해봐 하고 제 구두를 닦아갖고 약이 안 묻게 한 다음에 구두소를 줬어요.
자기 신발을 닦다가 보니까 제 손에 뭐가 들려져 있죠?
구두약이 들려져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도 이걸 찍어서 닦아야 되겠다는 거야.
아빠처럼 굳이 야 이건 진짜 안 돼 이걸 묻히면 너 신발은 까매져 그랬더니 얘가 그걸 하고 싶은 마음에 막 계속 떼를 쓰고 방방방 뛰면서 울다가 저는 어렸을 때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근데 저랑 똑같대요.
손이 구두약에 푹 빠졌어요. 이렇게 뛰다가 훅 빠지니까 손을 딱 보더니 아기를 키우신 어머님들 그다음 동작이 뭐였을까요?
정말 제가 그 순간에 이성을 잃었어요. 제가 절대로 성도님들이 있는 앞에서는 제가 화를 안 냈거든요.
제 체면이 있죠. 제 위신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그래도 거룩하고 좀 의로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나요?
그래서 제가 절대로 화를 안 냈는데 그때 장로님들이 옆에서 지나가시는 것이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통제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아예 손을 탁 잡아가지고 질질 끌고 안방으로 데려들어가고 확 집어던졌어요.
야 넌 도대체 아빠 말을 왜 이렇게 안 듣는 거야 하고 소리를 소리를 지르고 마음이 진정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하다가 애한테 어떻게 제가 뭐 어떻게 할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너 나가라고 나가라고 나가고 제가 문을 쾅 닫고 그 침대 앞에 딱 앉았는데 막 절망감이 막 몰려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럴 때 사단이 아주 좋은 찬스를 잡았죠. 그렇죠 그래서 막 불화살을 막 쏘는 거예요.
여기다 대고
너가 목사냐부터 시작해가지고 너가 그러고도 오늘 설교할 수 있겠느냐부터 시작해가지고 너는 오늘
설교단에 올라가면 너는 분명히 망신당하고 내려올 거야부터 시작해가지고 막 온갖 생각들을 막 다 밀어넣는 거예요.
와 정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막 정말 너무 막 돌아버릴 것 같은 거예요.
고개를 딱 들었는데 화장대 앞에 차키가 보이는 거예요.
근데 제가 있었던 곳이 해발 한 600m 정도 강릉으로 내려왔다.
다시 대관령은 아니지만 그 산턱으로 올라와야 되는 교회였거든요.
저 차 키를 들고 나가서 차를 운전하고 저 꼬불꼬불한 저 길로 내려가다 낭떠러지로 그냥 딱 떨어져서 죽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여기까지 탁 올라오는 거야.
정말 막 그 생각이 저는 한 번도 자살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그때 유일하게 딱 느꼈어요. 정말 아마 그 당시에 제가 정신과를 갔었으면 아마 초기 우울증 진단을 받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 마음에 기쁨이 없었어요. 근데 강단 앞에서는 웃어야죠.
그리고 아이들이 막 말 안 저기 아이가 셋인데 저는 어렸을 때 말을 잘 들었던 것 같은데
근데 그 아이들이 굉장히 어린 아이들이에요. 지금 생각해 봐도 그러니까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문제인 거예요.
제 마음에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으니까 모든 것이 다 힘든 거예요.
그냥 그래서 이렇게 화를 내면 율법이 저를 정제하는 거예요.
너 예수님과 같지 않네 목회자가 이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하겠어 제가 무슨 사회적으로 무슨 어떤 큰 비난을 받아놓을 만한 어떤 죄를 짓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예수님과 같지 못한 그런 품성과 제 마음속에 있는 그런 이기심과 교만과 그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그런 죄악들이 저를 너무나 강렬하게 저를 지적하는 거예요.
죄인이라고 그러니까 참다 참다 참다 아이들한테 화를 한 번 내면은 그다음부터는 막 이 절망의 감정이 밀려오면서 헤어져 나오지 못하는 거예요.
막 일주일 2주씩 막 이렇게 밖에 나가서는 안 그러는데 집에 들어오면 기쁨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그런 감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죠?
저는 정말 이거 도대체 이 감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거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 거냐 그것이 너무나도 큰 저에게 숙제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다 보면 이거 다 못 읽으니까 일단 좀 읽으면서 제가 더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절망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세요.
그래서 이러한 고뇌와 절망감을 맞닥뜨리는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과정이 결코 헛된 시간들은 아니에요. 그러나 더 빨리 배울 수 있다면 훨씬 더 좋은 것이겠죠.
여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이미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뭐 했다고요?
근데 그 당시에 저를 사로잡고 있던 생각은 뭐였냐 하면 내가 이렇게 해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나 이 생각이 저를 압도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니까 계속 우울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죄가 언제 용서받죠?
질문을 제가 아주 아주 트리키한 질문을 드린 거예요.
대답을 잘하셔야 됩니다. 우리의 죄가 언제 용서받죠?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이 답은 꼭 나옵니다.
죄를 고백할 때라는 답도 꼭 나와요. 그것도 틀린 답은 아니에요.
사실은요. 그런데요. 이제 용서라는 측면, 죄를 지은 인간을 용서하는 측면에서 봤을 때는요.
우리는 성경에서 이미 용서를 받았다라고 선언하고 있어요.
그럼 우리가 언제 용서를 받았을까요? 많은 분들이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용서받았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맞는 대답 틀린 답이 아니에요. 그러나 더 정확한 대답은 뭘까요?
그다음에 하나밖에 더 없는데요. 답이 죄인이라고 느끼는 것보다 2천 년 전이 훨씬 전이잖아요.
그죠? 십자가에서 용서받았다는 것도 맞아요. 그러면 십자가에서 용서받았다면 그 이후에 다 용서받은 거잖아요.
그죠? 근데 그보다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돼.
그럼 답은 하나밖에 안 나와요. 언제 용서받았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던 그 순간에 용서받은 거예요.
여러분 이 생각을 가장 중요한 생각입니다. 이거를 여러분 딱 머릿속에 기억하셔야 돼요.
잘 보세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한 그 순간에
아담과 하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 장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창세기 3장에 아담 가오가 하나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회개의 장면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와요. 어떤 장면은 나오죠? 이 사람 하나님이 만드신 이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만드신 이 뱀 때문에 책임을 누구한테 전가해요?
하나님께 전가하고 있어요. 근데 그런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여러분 아담 가와가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고 했어요.
근데 왜 안 죽었죠? 여러분 아담 가오 죽었습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하니까 어떤 분이 아니 아담 가오 죽었잖아요.
이렇게 대답하시더라고요. 여러분 아담 가오 죽었습니까?
안 죽었습니까? 안 죽었어요 아담 가을은 잠자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건 죽음이 아니에요. 성경은 그걸 죽음으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아담 가오는 잠자고 있는 거예요. 왜 그들은 자의 상태에 들어갔을까요?
죽지 않고요.
성경은 범죄하면 분명히 선악과를 먹으면 분명히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죽는다. 근데 왜 아담과 가 안 죽었냐 이거예요.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안 죽은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아담 가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면 그 장소에서 죽어야 돼요.
하나님을 거절한 결과가 죽음이니까. 근데 아담과는 죽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 용서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양을 잡아서 앞으로 하나님이 너희의 죗값을 대신 책임질 거야.
그래서 그 책임진다는 약속 하에 아담 가와를 용서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 약속대로 4천 년 뒤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값을 치르신 거예요.
값을 용서는 이미 4천 년 전에 베푸셨고 지금으로부터 6천 년 전에 용서가 베풀어졌고 그 용서를 베풀기 위한 자격이 필요하잖아요.
그죠? 그래서 그 값을 십자가에서 치른 거예요. 그럼 여러분 우리 용서 언제 받았죠?
6천 년 전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분들이 이것이 분명하지가 않아요. 저도 오랫동안 이것이 분명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내 죄의 문제를 자꾸만 내가 어떻게 해결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조금 의롭게 해야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정로회계단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냐면 회계장에 여러분 집에 가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이 점에 있어서 실패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라고 되어 있어요.
근데 그러면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회개해야 된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못 나간다는 거예요.
여러분 회개가 먼저일까요? 용서가 먼저일까요?
용서가 먼저예요. 어떤 사람이 회개를 하냐면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회개를 하는 거예요.
제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게 해달라고 회개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그렇게 부르짖는데 왜 회개가 안 됐을까요?
용서받은 걸 믿지 못하는 거예요.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 회개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먼저 용서를 하나님이 이미 6천 년 전에 베푸신 그 용서를 내가 받아들여야지만 그다음에 내 마음이 회개 안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을 오해하기 때문에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받은 거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용서받은 거예요.
이 부분을 오해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전도사님 잠깐 나와보시겠습니까?
이걸 들고 저한테 주세요. 떨어뜨려서 주는 거예요.
들어가세요. 전도사님이 저한테 물 줬습니까? 안 줬습니까?
제가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하나님이 용서 베푸셨어요?
안 베푸셨어요? 받아요? 안 받아요 하나님이 온 인류의 용서를 베푸셨습니까?
안 베푸셨습니까? 모든 사람의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셨습니까?
안 하셨습니까? 했죠 안 믿는 거예요.
이미 용서했다고 하나님이 분명히 성경에 말씀하시는데 그 사실을 믿지 않는 거예요.
받아들이질 않는 거예요. 믿음이 손이라 그랬잖아요.
받아야죠. 믿음으로 믿어야 받는 거예요. 아멘입니까?
여러분 여기는 단번에 믿으시네요. 너무 특별한 교회예요.
저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너무나 오랫동안 마음속에 평안이 없었던 거예요.
제가 그 죄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내가 이걸 바로잡아야 돼 바로잡아야 돼 엄청 씨름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가지고는 평생 가도 우리 마음속에 평안이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탕자가 언제 회개했죠? 대답 잘하셔야 됩니다.
탕자 언제 회개했습니까?
시점을 얘기해 보십시오. 시점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결심하는 그 순간은 회계가 아니었어요.
아버지 사람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을 그때가 회계라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 그것은 성경적인 회계가 아니에요. 회계장을 읽어보면 그것은 두려움에서 이 상황 가운데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싶었던 거예요.
너무 비참하거든요. 아버지 집에 먹을 것이 많거든요.
그러니까 삶을 좀 편안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아버지께로 간 것이지 회개해서 간 게 아니에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밖에서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힘들다가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나옵니다.
여러분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에요. 물론 회계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참된 회개는 아니에요.
그러면 탕자는 언제 회개했을까요? 이미 나를 용서하고 기다리고 계셨던 아버지를 본 거예요.
맨발로 뛰어나와서 나를 맞이하시는 그 아버지가
내가 떠나가고 배은 망덕하고 하나님께 이렇게 내가 죄를 짓고 내가 아버지 앞에 정말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나를 향한 그 사랑이 한 번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그 따뜻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깨달았을 때 그는 오열하면서 회개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 사랑이 우리를 회개케 하는 거예요. 그 용서가 이미 베풀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고 붙잡아져야 우리 마음속에 통곡과 오열과 더불어서 그런 나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솟구쳐 올라오는 거예요.
그것이 회개입니다. 근데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려면 내 편에서 뭔가 어떤 것을 해야지 회개를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유 때문에 엘렌 와잇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정신에 사로잡혀서 참된 회개를 경험할 수 없다라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회개를 하고 싶다면 뭘 해야 돼요?
믿어야 돼요?
믿어야 돼요. 이거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뭘 믿어야 되죠?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어야 되는 거예요.
이거를 믿기 시작하면 오늘 당장 오늘 저녁부터 우리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해요.
이게 무슨 엄청난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무슨 고행을 해가지고 우리의 품성을 바꿔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그 사랑을 믿기 시작하면 그분의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바꿔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제가 정말 이 은혜를 깨닫고 싶은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되는지는 모르겠고 이 책도 보고 첫 책도 보고 로마서도 수없이 읽는데 이게 안 받아들여지니까 이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거예요.
제 마음속에 시원하게 그러는 중에 제가 하루는 아이들을 성서원에서 아이들을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거든요.
근데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어떤 똑똑한 아이가 목사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이렇게 묻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고 대답을 해줬냐면 그거는 우리가 아는 게 아니고 믿는 거야 믿는 거야 하고 얘기를 해줬어요.
근데 그 순간에 갑자기 이만한 큰 망치가 나무 망치처럼 느껴지는 망치가 제 뒤에 여기를 꽝 하고 때리는 거예요.
그러더니 제 귓가에 큰 음성이 들렸어요. 너 안 믿잖아 제 귓가에 뚜렷하게 너 안 믿잖아 그 음성이 아주 쪼롱쪼롱하게 제 귀까지 들렸어요.
제가 너무 깜짝 놀래가지고 수업을 마치고 정리하고 제가 목회실에 가서 가만히 앉아서 그 음성이 뭐지 하나님께서 나한테 들려주신 음성인가 이 음성이 뭐지 도대체 막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제가 무릎을 탁 쳤어요. 이미 나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대신 그 죗값을 치르시고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놓으셨었구나라는 사실이 그 그날 딱 깨달아지는 거야.
그 순간에 제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평강이 밀려오기 시작하는데 심이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구나.
이미 하나님의 평강과 용서가 나에게 주어진 것이구나.
그 선물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에게 주어진 것이구나.
와 너무 막 감사한 거예요. 마음이. 그리고 제가 교회 밖을 딱 나왔는데 갑자기 태양빛이 이전에 본 태양빛이 아니에요.
반짝반짝반짝 빛나는데 제가 옆에 들꽃들이 그 불꽃들이 야생화들이 쫙 펴 있는데 그 꽃들이 막 움직이면서 막 노래를 하고 막 웃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제 귀에 그래서 막 자기들끼리 막 얘기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그러면서 저한테 막 뭐라 그러냐면 야 얘들아 민호가 이 사랑을 이제야 깨달았대 그런 음성이 저한테 들리는 거예요.
저쪽에 저 나무들이 막 소나무들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그 나무들이 막 한들한들 막 움직이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셔.
우리는 그 사실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너는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구나 저한테 막 말을 하더라고요.
여러분 그때로부터 제 마음이 하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감사한 거예요.
그전까지는 하나님의 십자가는 저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재림연수원에 들어가면 저는 거기 가면 십자가장을 꼭 읽게 하거든요.
시대 소망 그 마지막 그 뒷부분 십자가 마지막 그 고난 주간에 있었던 그 사건들을 명상하게 하는데 저는 안 했어요.
왜냐하면 그걸 읽어봐야 제 마음속에 감동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감동이 이거는 감동이 없으면 제가 너무 비참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내가 목사인데 이 장면이 왜 나에게는 감동을 주지 않을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인데 왜 나에게는 그 감동이 없을까 그래서 저는 그 부분을 안 읽었어요.
근데 그 이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한 거예요.
마음이 어떻게 됐어요? 바뀐 거예요? 이것을 성경은 세 글자로 뭐라고 얘기할까요?
거듭남이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 경험을 사실 이 경험은
아주 오래전에 있었어야 되는 거예요.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에 할 경험이 아니고 예수님을 처음 믿기 시작할 때 해야 하는 경험인 거예요.
우리가 침례식 때 사람을 물에 담그기 전에 이 경험이 먼저 있고 물로 침례를 줘야 되는 거죠.
30분인데 오늘 3절 4절밖에 못 읽었네요. 어떻게 하면 좋죠?
여러분 제가 조금만 더 읽고 마치겠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이것이 로마서 지금 3장부터 4장과 5장에 걸쳐서 사도바울이 계속하고 있는 핵심 요지예요.
똑같은 말을 정말 입이 아플 정도로 반복하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말을 얘만 가져다가 다른 예를 들면서 계속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너희 이미 용서받은 거야. 그걸 믿는 거야. 그게 구원이고 그게 용서고 그게 기쁨이고 그게 만족이고 그게 행복이고 그게 영원한 생명이야라고 얘기해 주고 있는 거예요.
제가 그걸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어떻게 달라졌냐면 이렇게 달라졌어요.
제가 또 화를 못 참을 때가 있을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아이들한테 야 하고 화를 냈다가 이런 나를 용서해 주셨지.
왜냐하면 여러분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이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 중에 어느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까?
과거의 죄요. 모든 죄를 용서하셨죠? 그렇죠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용서하실 때 우리 태어나 있었습니까?
안 태어나 있었습니까? 안 태어나 있었잖아요. 그죠?
근데 이미 다 용서받은 거예요. 십자가에서 우리가 미래에 지을 죄, 그 미래에 지을 죄를 어떻게 짓지도 않았는데 용서를 해주시지.
그럼 여러분 어제 우리가 지은 죄는 2천년 전에는 무슨 죄였어요?
미래의 죄였어요 우리가 용서받은 것은 미래의 죄를 용서받은 거예요.
이미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다 용서받은 거예요.
그 사실을 우리가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빠가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예수님 이런 죄는 이런 이런 죄인을 용서해 주셨지 끊임없이 끊임없이 내 죄가 떠오를 때마다 그 죄를 가지고 즉시 어디 앞으로 가는 거예요 십자가 앞으로 왜요?
거기서 용서받았거든요.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우리와 같은 이 더럽고 추악한 모든 죄를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구원하신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 사실을 믿게 될 때 우리의 모든 삶과 우리의 모든 생애를 그분께 아낌없이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새 마음을 받는다는 뜻이에요. 그게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는 거예요.
그 거듭남을 경험하게 될 때 더 이상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께만 우리의 온 마음을 드리고 나아가고자 하는 거예요.
니고데모는 그 경험을 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적어도 그는 양심적이었고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계속해서 마음속에 담았어요.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 같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그 예수님의 그 밤중에 하신 그 말씀을 그가 끊임없이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보았을 때 이것이 그 의미였구나.
나와 같은 이런 죄인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선결해질 수 없는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라는 것을 그가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거기서 거듭남을 경험하고 그 이후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거예요.
그래서 이 시간을 은혜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모든 인류에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졌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가 맨발로 뛰어나가서 여러분 내 말 좀 들어보라고 여러분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았다고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여러분 그렇게 외치고 싶은 그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그 심령이 우리 심령 가운데서 올라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구원이니까 말이죠. 그걸 설명하는 이 부분을
제가 읽고 좀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24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재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관가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시니라.
그런 즉 자랑할 때가 어디 있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여러분 너무나 크신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이 사실을 우리가 언제든지 잊지 않고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새기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와 같이 더럽고 추악하고 죄 많고 불쌍한 이런 인생들을 어찌 그렇게 값없이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과 사랑과 그 은혜를 우리가 이제부터 영원한 세대 동안 찬양하고 싶고 주의 이름을 높이고 싶습니다.
하나님 그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그러들지 않게 하여 주시고 이제 시작된 이 은혜가 주님 오시는 그날을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 가운데까지 자라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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