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다윗의 신앙고백’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다윗이라고 하면 어떤 인물입니까. 그는 나이 서른에 왕이 되어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주 되신 예수님도 바로 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게 되었던 것이죠.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위대한 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다윗이 어렸을 때부터 먼저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직 전쟁에 나갈 나이가 되지 않은 청년 다윗, 아니, 어쩌면 소년 다윗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구체적인 나이가 기록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무리 많이 잡아도 스무 살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장성한 첫째 형, 둘째 형 그리고
셋째 형들은 전쟁터에 나갑니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렸던 막내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7절~18절을 보면 다윗의 아버지 이새가 심부름을 명합니다.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들의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
말하자면 형들한테 도시락 심부름을 가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락들을 들고 전쟁터 쪽에 갔더니, 거기서 다윗은 마침 블레셋
군에서 골리앗을 목격합니다.
이 골리앗을 보니 벌써 외모부터 덩치가 보통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7장 4절에 의하면 그의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지금 길이로 2미터 93센티, 그러니까 거의 3미터나 되는 거인이었습니다. 이 괴물과도 같은 골리앗을 다윗이 물리칩니다. 이것이
무슨 삼국지 대결장면이나, 아니면 무협지 소설 같았으면 전투묘사가 화려하게 기록될 수도 있었겠지만, 철저하게 사실에 입각한 성경
기록은 어떻습니까.
사무엘상 17장 48절~49절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어떻게 기록되어 있어요? 예, 단 두 구절입니다. 돌멩이를 물매로 던졌더니 블레셋 사람 이마에 박혔다는 것이에요. 참 놀랍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처럼 다윗은 멋진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이 이야기를 모두 아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니까>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맞나요? 예, 맞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도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예,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한 가지 묻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우리가 있는 이 곳이 전쟁터로 바뀌었습니다. 판타지
영화 같은 것을 보면 그런 것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내가 정신을 차려보니까 지금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기
보니까 키가 3미터나 되는 골리앗이 나를 노려보고 있어요. 제 손을 보니까 돌과 물매가 쥐어져 있습니다.
자, 여러분께서는 지금 다윗과 함께 했던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 우리와도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했던 것처럼 지금 저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면서 물매로 돌을 던질 수 있겠어요? 못해요? 왜 못해요? 믿음이 부족해서요?
그렇다면 저는 어떨까요?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제가 골리앗 앞에 서게 됐어요. 저는 할 수 있나요? 아뇨. 못합니다. 왜요? 믿음이
부족해서요? 아뇨. 믿음이 부족하고 뭐고를 떠나서 물매를 써본 일도 없어요. 그런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래봬도
얼마나 겁이 많은데요.
그러면 다윗은 어땠을까요.
사무엘상 17장 34절~35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다윗은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힘은 대단했습니다. 여느 책에 청년 다윗을 그려놓은 그림들을 보면 그냥 평범하거나 다소 왜소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만, 이 기록을 보십시오. 사자나 곰이 새끼 양을 물어가면, 그 입에서 새끼를 구해냈고, 그 뿐만 아니라 공격해오면, 그
수염을 잡아서 쳐죽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청년 다윗은, 비록 나이가 어려서 전쟁터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야말로 삼손 뺨치는
장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해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렀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순간을 위해 철저히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다윗은 형제들 중에서 가장 막내였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명하시기를 이새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 중
하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새 집을 찾아가서는, 네 아들을 데려오라고 했는데, 그가 데려온 아들들을 보니까 모두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어떻게 합니까.
사무엘상 16장 11절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그래서 마지막으로 불려온 것이 누군가 하면, 그가 바로 다윗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 집에서도 찬밥신세였습니다. 맨날
형들은 장손이다 뭐다 하면서 대우를 받았지만 막내 다윗은 허드렛일만 했습니다. 힘든 일, 볼품없는 일만 골라서 시킵니다. 양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것도 다윗 말처럼 맹수들이 공격해보면 물리치기도 해야 하는 궂을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궂은 일,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힘들고 고단한 그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골리앗을 물리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훈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의 훈련으로 인하여 다윗은 당당하게 골리앗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리고 이미 수 십
번, 수 백 번도 더 던져봤던 물매를 익숙한 솜씨로 골리앗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은, 바로 하루 아침에 이스라엘의 영웅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매를 던져본 일이 있습니까? 저요?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갑자기 골리앗 앞에 저를 세우시고는, 평생
해보지도 않은 물매를 갑자기 던지게 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세요.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만약에 우리가 정말로 물매를 던져야 할 일이 있다면, 그 전에 미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철저하게 준비를 시키실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힘들고 고단하고, 내가 지금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다윗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다윗은 불평 불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쓰임 받았던 것이지요. 우리도 힘들고 고단할 때는, 이것도 분명 하나님께서 나를 크게 쓰시기 위한,
특별훈련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자,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은 이처럼 화려하게 성경 속, 이스라엘 역사 속에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이제
젊은 나이에 골리앗을 물리친 영웅 다윗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 그는 왕으로부터 군대장이라는 벼슬까지 하사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디 그 뿐입니까?
다윗 덕분에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 군대가 이제 돌아옵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사울 왕도 있고 다윗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호하는
소리를 보십시오.
사무엘상 18장 7절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이제 오히려 사울보다도 다윗이 전쟁에서 공이 더 크다고 사람들이 외치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과 온 유다의 민심은 이제 다윗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사울마저도 이제 다윗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어디까지 가게 되냐 하면 사무엘상 18장 29절,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도 다윗을 모두 따랐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이제 화려한 다윗의 시대가 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시대가 열리기는커녕, 다윗을 시기한 사울에 의해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견디다 못해 사울로부터 도망치게 됩니다. 사울은 틈만 나면 계속 다윗을 찾아내어 잡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 기간이 몇
년이요? 예, 적게 잡아 10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다윗과 그의 일행이 사울을 피해 엔게디 광야에 머물러 있을 때의 일을 기록합니다. 본문 1절을 봅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사울과 다윗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 왕이요, 다윗은 둘째 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 때 당시 이 둘은 어떤 입장입니까. 사울은 이스라엘 최고 통치자이고, 이에 반해 다윗은, 신망은 있었으나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한국이나 다른 나라들을 보아도 권력을 쥐고 있으면 그에게 모든 정보가 집중됩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죠. 이스라엘도
똑같습니다. 왕이 다윗을 찾았더니, 다윗의 위치에 대한 정보가 속속들이 들어옵니다.
사울은 주저하지 않고 다윗 추격에 나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니 3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추격했다고 합니다.
당시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사무엘상 23장 13절에 의하면 대략 600명 가량이 다윗을 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추격한 사울의 군대 수는 3천명이었습니다. 단순계산으로 다섯 배에 해당 되는 숫자입니다만, 이는 그야말로 숫자만 봤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오늘 본문 2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이는 그냥 군인 3천 명이 아니에요. 온 이스라엘에서 특별히 선발한 3천 명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말하자면 정예부대. 요즘 말로
한다면 특수부대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당시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요? 이는 사무엘상 22장 2절에 보면 초창기
다윗과 함께 한 400명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나와 있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이게 무엇을 말합니까. 말하자면 사울 왕 당시, 그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400명이나 600명이 아닌, 사울이 거느리고 온 병력과 같은 숫자인 3000명이었다 한다 하더라도 그 힘이 똑같겠습니까?
하물며 다윗 쪽은 숫자마저 1/5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는 제대로 전쟁이 시작된다면 붙어보나마나 뻔한 상태입니다. 이미 승부는
났습니다. 싸워볼 것도 없어요. 사울의 압승, 다윗의 참패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 3절~4절을 봅니다.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지금도 이 엔게디라고 하는 곳에는 크고 작은 동굴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고 합니다. 사울과 그의 군대가 추격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니까,
다윗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아마도 여러 동굴에 흩어져서 숨었겠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2절에 보면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용변을 보기 위해서 동굴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신학자들은 해석합니다.
그래서 볼 일을 보려고 혼자서 그 많은 동굴 중 하나에 들어갔는데, 웬걸, 마침 그 동굴에는 다윗과 그 일행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 평민도 아닌 왕이라는 신분이니 밖에서 안 보이는 곳에서 볼일을 보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에, 동굴 안쪽까지 들어왔겠지요. 대낮이라
하더라도 동굴 안쪽에는 빛이 안 들어옵니다. 환한 밖에서 방금 들어왔으니 사울은 동굴 속이 어둡고 해서 잘 안 보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미리 동굴 안에 숨어 있던 다윗과 그의 일행들은 어땠겠습니까. 이미 오랫동안 어두운 동굴 안에 있었던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보였을 것입니다.
이를 보고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한테 말합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사울을 죽일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당신 손에
붙이셨습니다. 이제 단숨에 사울을 죽이십시오. 그리고 이스라엘 왕이 되십시오. 이렇게 다윗 부하들은 다윗에게 바로 지금 사울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상황은 어땠습니까. 이미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민심도 사울을 떠났습니다. 오히려 민심은 새로운 영웅 다윗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사울만 제거해버린다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 다윗이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윗이 사울 곁을 보니 사울이 입고 있었던 겉옷이 보였습니다. 이는 아마도 사울이
볼일을 보기 위해서 옆에 벗어두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다윗은 가만히 일어나 사울의 겉옷을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사울의 몸이 아닌
겉옷의 한 자락을 잘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부하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봅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우리는 앞서 다윗이 얼마나 힘이 강한 사람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절대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자와 곰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왜소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골리앗을 이긴 것이 아니라, 충분히 골리앗에 맞서 싸울 만한 훈련을
거쳐왔던 용사였던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그가 단순히 겁이 많아서 사울을 미처 죽이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충분히 사울을 공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동굴에서 그 순간 혼자였으나 다윗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부하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더라도 부하한테 공격명령만 내린다면 단숨에 사울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저 겉옷자락만 베었는데, 그것마저도 마음이 찔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다윗이 말하기를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이 순간 다윗과 함께 있었다면, 그의 말에 대해 <아멘>
하고 따를 수 있겠지요. 하지만 만약에 우리도 당시 다른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이후 다윗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하이구, 이렇게 절호의 기회를 놓쳐?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 이제 언제 올지도 모르는 기회인데 이걸 놓치나. 아니, 줘도 못해? 이거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는 뭔가 좀 대단한 인물인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히 잘못 봤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이보시오. 다윗 선생. 우리가 지금 처자식 다 버리고, 당신만 바라보고 이렇게 도망 다니고 있지 않소. 그런데 이렇게
결정적인 기회를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걸 걷어차버린다는 게 말이 되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실망을 한 사람들은 없을까, 그리고 실망을 한 나머지 다윗 곁을 떠난 사람도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그랬을까요. 예, 다윗은 기다렸습니다. 무엇을 기다려요? 예,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일 때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싸인을 해서 그 자리에 앉힌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대로 해? 그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는 제가 다니던 회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 회사는 모든 신입사원을 사장이 뽑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원이 지각도 자주
하고 무단결근도 하고 해서 아주 문제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원의 상사인 부장이 그 신입사원을 해고시켰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나요? 아니요. 회사에서는 규정이 있습니다. 직원한테 문제가 있고 몇 번이고 반복되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해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부장이 취한 행위는, 회사 규정 자체만 본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화를 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겠어요? 예, 바로 사장입니다. 사장한테 있어서는 부장도 부하직원이고 신입사원도
부하직원입니다. 그 신입사원은 다른 직원과 마찬가지로 사장인 내가 뽑았는데, 내 허락도 없이 왜 부장 네 마음대로 잘랐냐는 것이에요.
이것도 사장 말을 들어보면 틀린 말이 아닙니다.
다윗도 아마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일이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지
않는가.
정말 힘도 없고 나약한 사람이 이렇게 생각했다면 자기 변명이요, 핑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다윗은 그 순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신이 직접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맡겼던 것이지요. 이것이야말로 바로 다윗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결국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하는 과정에서 길보아 산 위에서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의 손에 사울의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왕이 되는데, 그의 나이 서른이었습니다.
만약에 다윗이 그 때 엔게디 동굴 속에서 사울을 공격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훨씬 더 빨리 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치지 말아라>라고 하는 철칙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다름 아닌 다윗 자신을 지켜주는 중요한 방패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라고 위기가 없었겠습니까. 다윗이 왕으로 있는 동안에도 수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사울이 아직 왕으로 있는
상황에서 사울을 죽이고 왕 자리에 앉았다면, 이는 국민들에게 <아, 왕을 죽일 수도 있구나,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구나>라고 하는 대단히 안 좋은 선례를 만들어버리는 결과가 되어,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다음에는, 결국 다윗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리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현명한 다윗의 행동 덕분에, 스스로가 왕이 된 후에 아무리
위기가 닥치더라도 다윗을 죽이려는 이들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분명히 주목해야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다리지 않고, 사람의 생각 만으로 판단하고 행한다면, 그야말로 더 큰 기회를 놓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는 자기 스스로를
위기에 빠뜨리게 될 수도 있는, 돌이킬 수 없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다윗의 신앙고백인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맡기는 믿음,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믿음을 갖고, 마침내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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