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유월절에 참여하심
설교 중심 사상: 신자는 사소한 일들에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한 남자가 고속도로를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휴게소에 잠시 들러 기름을 넣고 다시 운전을 이어 갔습니다. 그는 5시간을 더 운전해 가면서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아내가 차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휴게소에서 아내를 태우지 않고 출발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소중한 대상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A.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하는 사소한 일들
유대인 남자에게 12살은 "율법의 아들이라 하여 지금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시기에 남자 아이는 종교적 교훈을 받을 특별한 기회를 가집니다. 예수님도 12살 되던 해, 유월절에 참석하기 위해 부모와 함께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유월절은 3월 말이나 4월 초에 해당하는 시기로 우기가 끝나고 만물이 소생하는 아름다운 계절이었습니다. 외국과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모인 사람들로 인해 예루살렘은 매우 붐볐습니다.
유월절과 이어지는 절기들을 통해 소년 예수님은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 경험이 무엇인지는 설교 뒷부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절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친구들, 친척들과 어울리느라 밤이 되어서야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당시에는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여행했기 때문에 마리아와 요셉은 서로 예수님이 상대방과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두 사람은 큰 걱정에 사로잡혀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부모가 아이를 잃어버리면 당황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도 둘째 아들이 어렸을 때, 엄마를 찾으러 나갔다가 한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며 찾아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부모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의 유아 시절에 헤롯이 저지른 만행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사흘 만에 마리아와 요셉은 랍비 학교에서 교사들을 만나고 있던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누가복음 2:4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마리아가 책망 섞인 말을 예수님께 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은 마리아와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시대의 소망」 83페이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요셉과 마리아가 묵상과 기도로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머무르게 했다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위탁된 직분의 신성성을 깨달았을 것이며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를 등한히 함으로 그들은 구주를 잃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흘 동안 근심하면서 그분을 찾으러 다녔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을 양육하는 놀라운 특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기 동안의 일들과 만났던 사람들에게 정신이 팔려 예수님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예수님을 온종일 잊고 있었습니다. "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큰일을 이루려는 사람은 작은 일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작은 일로 큰 일을 등한히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소년 예수님을 키우는 부모도 아니고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가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이 겪었던 경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자주 반복되고 있습니다. 시대의 소망 83페이지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너무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영생의 소망의 중심이 되시는 그분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과 하늘 천사들과 분리된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하는 자들 가운데 낙담이 빈번히 존재하는 이유이다. 많은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소생과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은 묵상과 경성과 기도를 등한히 함으로 축복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받기 전보다 더욱 심한 결핍에 빠져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에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잡담, 사람을 험담하거나 미워하는 일, 휴대폰이나 SNS의 과도한 사용 그리고 말씀 묵상과 기도를 소홀히 하는 일 등을 통해 예수님과의 분리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삶에 낙담이 자주 찾아오게 됩니다.
한번은 흥미로운 통계 자료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조사된 것은 아니고 있을 법한 상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전화 통화하는 시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남자아이가 남자 친구와 통화하는 시간은 58초입니다. 남자아이가 엄마와 통화하는 시간은 45초로 그보다 짧습니다. 남자아이가 아빠와 통화하는 시간은 더 짧은 20초입니다. 그러나 남자아이가 여자 친구와 통화하는 시간은 1시간 13분 59초입니다. 여자아이가 여자 친구와 통화하는 시간은 2시간 35분 20초로 훨씬 깁니다. 남편이 아내와 통화하는 시간은 3초이고, 엄마가 결혼한 딸과 통화하는 시간은 무려 4시간 5분 15초로 가장 깁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전화했을 때 부재중 통화가 12번이라는 점입니다.
이 재미있는 내용은 남녀의 성향을 보여 주는 동시에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사람이라면,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고 그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루에 얼마나 예수님을 생각하고 그분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그에 비해 사소한 일들에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사소한 일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 있음을 항상 기억하고, 우리의 마음을 살필 수 있기를 바랍니다.
B. 정체성과 사명을 회복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
마리아와 요셉은 절기의 분주함 속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고, 그분을 보호해야 하는 자신들의 사명을 잊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 덕분이었습니다. 랍비 학교에서 마리아의 책망 섞인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 집"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자신의 개인적인 관계를 깨달으셨음을 의미합니다.
12살 소년 예수님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깨닫게 되었을까요?「시대의 소망」 78페이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의식의 모든 행사는 자신의 생명과 관련이 있는 듯 보였다. 새로운 충동이 그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분은 조용하고 열심히 어떤 문제를 풀어내시려고 하는 듯이 보였다. 당신의 사명의 신비가 구주께 공개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땅에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하늘의 음성으로 직접 듣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번제단에서 드려지는 수많은 제물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AD 66년 유월절에 희생 제물로 바쳐진 양의 수가 25만 5.600마리였다고 합니다. 기록이 과장되었을 수 있지만, 유월절마다 많은 희생 제물이 드려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그 모든 희생 의식은 형식주의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소년 예수님에게는 달랐으며, 예식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했습니다. 예수님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제사장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제사장들의 손에서 저항 없이 죽어가는 제물들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또한 거룩한 향연이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도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이러한 예식들의 의미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조금씩 깨달아졌습니다. 구약의 말씀들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서, 예수님은 점차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 곁에 머물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생 제사에 기초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가 필요합니다. 17세기 프랑스의 갈멜 수도원에 니콜라 에르망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군인이었으나 전쟁터에서 큰 부상을 입었고 후에 수도원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렌스 형제로 불렸는데, 처음에는 그런 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자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후에 그가 얻은 깨달음은 하나님 임재 연습」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꼭 큰 일들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작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팬 위에서 구워지는 케이크를 뒤집는 것도 하나님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그 일이 끝나고 다른 할 일들이 없을 때 나는 내게 일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그런 후 나는 왕보다 더 행복해져서 일어납니다. 나로서는 바닥에서 지푸라기 하나를 집어드는 일 마저도 하나님 사랑으로 행하기에 충분합니다."[로렌스 형제, 「하나님 임재 연습 이광식 역 (파주: CH북스, 2017), 83].
로렌스 형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통해,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분을 위해 할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희생 제사 제도를 통해 정체성과 사명을 찾을 수는 없지만, 그 제도의 원형이신 예수님을 바르게 앎으로 재림 신자의 정체성과 사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소망 83페이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명상하는 데 매일 한 시간을 바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한 조목 한 조목씩 연구하고, 각 장면 특히 그분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확실히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우리를 위한 그분의 크신 희생을 깊이 생각할 때에 그분에 대한 신뢰는 더욱 굳어질 것이며 우리의 사랑은 격발되고 더욱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매일 한 시간씩 예수님의 생애, 특히 그분의 마지막 생애를 조목조목 묵상한다면, 그 한 시간은 가장 값진 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단단해집니다. 둘째, 그분에 대한 사랑이 마음에서 솟아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정신에 깊이 물들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재림 신자로서의 분명한 정체성과 그분이 각자에게 주시는 사명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가 예수님을 쉽게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험담과 잡담, 과도한 SNS 사용 등 사소한 일들에 마음을 빼앗겨 예수님을 마음에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우리가 재림 신자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회복하기 위해 예수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생애, 그중에서도 그분의 마지막 장면들을 묵상하는 데 하루한 시간씩을 할애해 봅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에게 약속된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