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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강해 (7)
나를 아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으신 주님
시편 139:1~20
I. 서론
페이스북(Facebook)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페이스북은 2004년도에 창립된 회사인데, 세계최대 쇼셜네트워크서비스(SNS, Social Network Service) 회사입니다. 이 페이스북을 창업한 사람이 하버드대학을 중퇴한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입니다. 마크가 페이스북을 창업하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마크는 하버드대학에 2002년도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 곳 기숙사에서 크리스천 룸메이트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발람 돈 키(Balaam Don Key)였습니다. 돈은 마크에게 성경을 읽을 것을 권했고, 마크가 성경을 읽겠다고 말하자 몹시 흥분했다고 합니다. 마크 저커버그가 성경을 펼치고, 오늘 본문인 시편 139편 1~4절을 읽게 되었는데, 여기서 큰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마크는 선데이(Sunday)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시편 139편 1~4절을 읽을 때, 무엇인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고, 천사들의 목소리도 듣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천상의 반짝거림은 백라이트 키보드처럼 보였고, 천사들의 소리는 수십억 개의 서버 소리와 같이 들렸습니다. 와~, 이것은 훌륭한 사업 모델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마크는 2004년 2월 하버드대학교 기숙사에서 페이스북 사이트를 개설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버드 대학교 학생들만 이용을 했지만, 머지않아 스탠포드, 콜롬비아, 예일 대학교 학생들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메일을 가진 13세 이상의 모든 이들에게 사이트가 개방되었습니다. 현재 페이스북에 가입한 사람의 수는 약 22억명이라고 합니다. 전세계의 인구가 75억명이라고 하는데, 약 30%의 사람이 페이스북에 가입을 한 것입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숫자입니다. 아직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은 나라도 있을 것이고, 인터넷이 있는 나라라고 하더라도 13세 이하의 어린이와 페이스북에 관심이 없는 노년층도 있을텐데 어떻게 22억명이나 가입을 했을까요?
마크 저커버그가 영감을 얻어 페이스북을 창업하게 된 시편 139편이 진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존 스토트 목사님은 시편 139편을 “모든 시편의 왕관”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만큼 시편 139편은 신앙적인 면뿐만 아니라 시적인 면에서도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시편 139편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시편 139편의 구조를 대략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139편은 크게 4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6절, 7~12절, 13~18절, 19~24절입니다. 시편 139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부분인 19~24절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부분에 시를 지을 당시 시인이었던 다윗의 상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II. 본론
1. 시인 다윗의 상황
19~20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19절에 “악인”이 등장합니다. 이 악인의 특징은 1)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며 2) 다윗을 따라다니고 있고 3) 주님에 대하여 악하게 말하고 4) 주님의 원수들이며 5) 주님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를 하는 자들입니다. 이 악인들이 누구인지는 본문에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지금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오는 악인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런 위기의 상황에서 시편 139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그 묵상한 바가 오늘 본문 1~18절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2. 나를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전지하심)
1~6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1~4절을 보시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아신다”는 것입니다: “나를 아시나이다”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밝히 아시오며” “익히 아시오니”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다윗은 지금 악인들의 공격으로 위태로운 상황 가운데 처해 있는데, 다윗의 입술에서 나온 첫 마디는 “여호와께서 나를 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1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여기서 “살펴 본다”는 것은 “대충 훑어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스파이를 적국에 보내서 그 나라의 세부정보를 샅샅이 파헤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의지를 가지고 살펴 보는 것이고, 세세하게 그 정보를 알고자 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형편을 의지를 가지고 살피고 계시고, 다윗의 형편을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2절부터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2절,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밝히 아십니다. 3절, “모든 길, 눕는 것, 모든 행위”를 다 알고 계십니다. (모든 길 – 삶 / 눕는 것 – 쉼 / 모든 행위 – 모든 것) 4절, “다윗이 하는 말”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2절에서 이런 위기 상황에서 내가 하고 있는 생각까지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형편을 의지를 가지고 살피실 뿐만 아니라 세세하고 잘 알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건강문제로 무척 힘들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자녀의 신앙문제로 무척 걱정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잘 알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경제적 문제나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무척 염려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까지도 잘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5절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잘 아시고 계실 뿐만 아니라, 보호하고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여기서 ‘둘러싼다”는 의미는 “보호하시고, 복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욥기에 그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욥 1:9~10,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과 우리 소유를 울타리로 둘러 주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를 불편해 하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몇몇 신학자들은 본 시편 139편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도 합니다. 7절의 말씀은 이런 시각을 돕는 듯 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인이 “주님 앞에서 피한다”는 용어를 썼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구약 신학자 트렘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시편 기자의 태도는 하나님에게서 달아나기 원했지만, 격노하는 바다를 포함해 하나님이 모든 곳에 있으므로 피할 수 없었던 요나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이내 10절의 말씀에 의하여 사라지고 맙니다.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주님을 우리를 인도하시고 붙드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분을 결코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7절에 나오는 질문은 탈출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를 붙들어 어디로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대한 기쁨에 찬 놀라움의 표현이다.”
3.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7~12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시로 표현했습니다. 8절, 영원의 차원(하늘, 스올). 9-10절, 공간적 차원(바다 끝). 11~12절, 시간적 차원(흑암, 밤).
8절에 나오는 영원의 차원에 보시면, “스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스올은 히브리어로서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지옥 혹은 무덤입니다. 지옥은 죽은 자가 형벌을 받는 장소이고, 무덤은 죽은 자가 묻히는 장소입니다. 무엇으로 해석하면 더 좋을까요? 8절에 나오는 ‘하늘’이라는 단어가 해석에 도움을 줄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히브리어로 “샤마임”입니다. 헬라어로는 우라노스와 동의어인데, 이 우라노스가 바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하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스올”은 지옥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문맥에 맞습니다.
또한 천국과 지옥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한 이유는 이 부분이 영원의 차원에 대한 시적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는 표현은 다윗이 “지옥에 가겠다 혹은 지옥에 갈 것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옥에 가더라도 거기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신앙의 표현인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표현이고 정말로 하나님의 신뢰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9~10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이 부분은 공간적인 차원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새벽 날개”는 ‘아침에 수평선에서 올라오는 태양의 광선’을 의미합니다. 이 광선은 굉장히 빠른 속력으로 땅 위에 임하게 되는데, 다윗은 이런 광선을 타고, 바다 끝까지 가더라도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왜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고자 할까요? 악인들 때문입니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나를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전능하심)
13절 말씀을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한글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13절 앞에는 히브리어 접속사 “Ki”가 나옵니다. 그 뜻은 “왜냐하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형편을 의지를 가지시고 살피시고 아시며, 또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항상 나와 함께 해 주시는 이유를 묘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나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어떤 분을 이런 표현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나의 육신의 아버지가 계신데, 왜 굳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나를 만드신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여기서 “내장”은 히브리어로 “켈라요트”인데, “콩팥(신장)”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켈라요트”는 단순히 사람의 장기 한 부분을 의미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 혹은 중심을 의미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심장에? 머리에? 히브리인들은 “켈라요트”에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콩팥”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켈라요트”를 하나님께서 내 안에 지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의 태에서 나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만드신 분은 육신의 아버지라기보다 근본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이제, 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고 말씀하셨고, 16절에서는 내가 만들어지기 전에 주님께서 나를 이미 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말이 등장합니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다”고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은 어떤 날을 말하고 있을까요? 이 말씀은 인간의 수명을 말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수명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을 말함이다. 우리의 수명이 얼마나 길겠는지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명의 장단에 대하여 알려할 것이 없다. 책에 다 기록이 되었다 함은 비유니,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들었다는 의미이다.” 본문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내가 이 땅에서 하루도 살기 전에, 내가 죽을 날이 주님의 책에 이미 기록이 되어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7~1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주님께서 나를 생각하시는 그 생각이 너무나 많은데, 그 수가 바다의 모래보다 더 많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아무도 나를 생각해 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실 때가 있으십니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이어지지 않고, 원치 않는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랫동안 기도했지만 응답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잊어버리신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됩니다.
다윗도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악인들이 일어나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고, 악인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쫓아왔던지 바다 끝까지 도망가야 하는 상황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고 고백합니다.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우리가 도저히 셀 수 없을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해 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한 분 한 분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모래보다도 더 많이 생각하는 귀한 분이십니다. 18절 말미에 계속해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여기서 “내가 깰 때”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1) 자다가 깨는 때 2) 죽은 다음 깨어나는 때. 어느 해석이 맞을까요? 둘 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있든지 저 세상에 있든지, 언제나 나와 함께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알아줘야 할 사람, 우리가 함께 있어주어야 할 사람에게로 다가가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받은 그 사랑과 은총을 그들에게도 나누어 주십시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주님께서 큰 영광을 받으시는 복된 한 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