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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소백주 (21)쓸쓸한 귀향
넋 나간 듯 마루에 잠시 서서 한손으로 기둥을 짚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이 냉혈 찬 인간이 삼천 냥이나 되는 돈을 꿀꺽 받아 삼켜먹고는 간다는 사람 붙잡기는커녕 노자 돈 한 푼 챙겨 주지 않으니 참으로 기가 막혀 정말로 그 자리에 꺼꾸러져 죽어야만 옳을 지경이었다.
김선비는 순간 두 주먹을 힘껏 부르쥐었다.
“내 저 자를 당장에!……”
김선비는 그렇게 성난 범처럼 낮게 웅얼거리며 이정승의 방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찢어지는 가슴을 가까스로 움켜잡고 사랑방으로 간 그날 아침 김선비는 정말 빈털터리 맨몸으로 달랑 자신의 짐을 챙겨 등에 짊어지고 길을 나서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함께 살던 사랑방 식객 선비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선 몸, 다시 돌아가 노자라도 몇 푼 챙겨달라고 이정승에게 자존심상 도무지 말할 수도 없었고, 또 노자가 없어서 고향에 못 가겠노라고 다시 사랑방에 눌러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김선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딱한 처지를 한탄하며 끓는 울분을 속으로 잘근잘근 씹어 삼키면서 우직하게도 정말로 노자 한 푼 없이 고향을 향해 터벅터벅 발길을 놓는 것이었다.
걸식을 하면서라도 오직 걸어가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마음 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피눈물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길에 무슨 일이 닥칠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때는 춘삼월 멀리 달아났던 남풍이 훈풍을 몰고 돌아와 찬바람 삭막한 눈 덮인 들을 녹여 푸른 풀잎들 무성하게 돋아나는 꽃피는 시절이었다.
겨울바람 따라 왔던 겨울 철새들도 다시 물러가는 차가운 겨울바람 따라 물러나고 그 자리에 여름 철새들이 봄꽃 향기를 따라 와 즐겁게 노래했다.
살구꽃, 복숭아꽃, 자두 꽃 등 각종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들에 민들레꽃 산에 진달래꽃 피는 봄은 역시 생명이 생동하는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아름다운 시절 한번 즐기지 못하고 벼슬길이 좋다고 오로지 벼슬자리하나 챙기기 위하여 공부하고 시험보고 또 공부하고 시험보고 그밖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돈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어 보려 하였건만 이렇게 초라한 행색이 되고 만 자신의 지나온 날을 다시금 회상하며 김선비는 눈가에 솟아나는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이처럼 작별해야만 하는 낯선 한양 땅의 쓸쓸한 봄 하늘을 황량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김선비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말인가?
이정승이란 저 작자! 별 실력도 없고 욕심만 많은 성정 포악한 사람인데도 오직 예쁜 누이 하나 잘 둔 덕으로 어디에 무슨 복이 저리도 많이 들었는지 높은 자리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고, 실력 좋고 마음씨 선량한 사람은 도무지 되는 것 하나 없이 평생을 고통 속에서 헤매다 살다 가기도 해야 하니 도대체 그 까닭을 알길 없는 것이 이놈 인생사인 것만 같았다.
기생 소백주 (22)나무꾼 총각
세상일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그 오묘한 그 무엇이 있기라도 한단 말인가?
김선비는 문득 사랑방에서 식객으로 함께 있었던 어느 선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터덜터덜 홀로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풍수지리에 도통한 지관(地官) 도선이 어느 가을날 높은 산 고갯길을 넘어가는데 배가 고파 한 발짝도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머리가 허옇게 새고 다리근육에 힘이 풀리는 노인의 몸으로 이 산 저 산 산 구경을 재미삼아 다니는 도선도 쇠약해져가는 몸에 더구나 끼니를 때우지 못하고 허기가 지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아이구! 배도 고프고 힘들다! 예서 좀 쉬었다 가자!”
산 고개를 넘어오던 도선이 기진맥진하여 크게 혼잣말로 소리치며 산마루 아래 개울가에 앉아 지친 두 다리를 잠시 멈추고는 바위위에 턱 걸터앉았다.
눈앞에 들어오는 불붙는 단풍이며 형형색색 물들어 가는 산야가 따가운 가을볕에 하염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바로 옆에서 쿵쿵 나무 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선이 소리 나는 쪽을 보니 웬 젊은이가 지게를 받쳐 놓고 도끼질을 하며 나무를 하고 있었는데 도끼질을 그만 두더니 도선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가까이 오는 것을 자세히 보니 머리에 노란 끈 댕기를 묶은 순박하게 생긴 나무꾼총각이 한손에 작은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아이구! 어르신, 많이 시장 하신 모양이시네요. 이 누룽지라도 요기하고 산을 내려가시면 좀 수월하실 겁니다.”
나무꾼 총각이 작은 보자기를 도선 앞으로 쓱 내밀면서 말했다. 누룽지를 싸와서 배고프면 먹으려고 나무위에 걸어 둔 것을 내려다 주는 것이었다.
“어허! 늙은이가 배고프다고 망령이 나서 혼잣소리를 하던 것을 들었던 모양이로구나! 그렇다고 젊은이가 나무하다가 먹으려고 가져 온 것을 나를 주면 어떻게 하느냐?”
도선이 선뜻 내미는 누룽지를 바로 받지 못하고 말했다.
“어르신, 저야 저 아랫동네에 내려가면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염려마시고 드십시오.”
나무꾼 총각이 말했다.
“허허! 그래, 고맙네.”
도선은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배가 고픈 터라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그 누룽지를 받아 맛있게 먹었다.
산 개울물을 마셔가며 누룽지를 다 먹고 난 도선은 한껏 기운이 돋아 힘이 나고 살 것 같았다. 고마운 마음으로 도선이 다시 나무꾼총각을 눈여겨보니 머리에 노란 끈 댕기를 묶은 것이 아무래도 상(喪)을 당한 모양이었다.
“자네 요 근래에 상을 당했는가 보네?”
기생 소백주 (23)금시발복(今時發福)
“예! 실은 아버지가 올봄에 돌아가셨는데 묘 자리를 잡지 못해 아직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시신을 그냥 이엉을 엮어 초분(草墳)을 만들어 덮어 놓았지요.”
나무꾼총각이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내 좋은 묘 자리를 하나 보아 줌세. 따라 오게나.”
도선은 나무꾼총각이 누룽지를 준 것이 너무 고마워 명당자리를 하나 잡아 주려고 했던 것이다. 이리 저리 산세를 살피며 나무꾼총각을 데리고 가던 도선이 산자락 아래 큰 소나무 잔디밭 양지바른 어느 한곳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여기네. 이 자리에 아버지 무덤을 쓰면 금시발복(今時發福) 할 것이야!”
“아이구! 어르신, 이 자리가 그렇게 좋은 자리인가요?”
나무꾼총각이 놀란 눈빛으로 도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네. 이곳에 아버지를 모시게. 그러면 나무를 하지 않아도 넉넉하게 먹고 살 재물이 금방 생길 것이고, 내년이면 어여쁜 아내를 맞아들일 것이고, 또 아들 삼형제를 두어 모두 바른 마음을 지키고 착한 일을 하며 잘 살 것이야! 내 삼년 뒤에 이곳에 와보겠네.”
도선은 나무꾼총각에게 한 끼 누룽지 값으로 좋은 명당자리를 알려주고 그곳을 떠나갔다.
세월이 번개처럼 흘러 삼년 후 어느 가을 날 그곳을 다시 지나가게 된 도선이 그 젊은이를 생각하고는 묘 자리를 잡아준 곳에 가보니 과연 그 자리에 무덤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묘를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잡풀이 무성하고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다.
“왜 이렇게 묘를 허술하게 방치해 둔 것이지! 혹시 부자가 된 그 총각이 변심을 한 것인가? 아니지! 그럴 사람이 결코 아니었는데... 허허! 그렇다면...”
도선은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혼잣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그 산을 내려가 아랫마을로 갔다.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마을 어귀에서 호미를 들고 들에 나가는 노인이 있어 그를 붙잡고 그 무덤 자리와 나무꾼총각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영감님, 저 위에 무덤을 썼던 나무꾼총각은 잘 사나요?”
“허험! 그 총각 뭐 하러 묻나? 그 총각 벌써 죽었어! 그때 이곳을 지나가던 풍수지관이라는 괴이한 노인이 그 자리가 금시발복할 명당자리라고 가르쳐 주었다며 자기 아버지를 그곳에 모셨는데 그곳에 무덤을 쓰고 이상하게도 병명도 없이 곧바로 죽어버렸어.
아무래도 그 풍수지관이라는 노인 놈 아주 망할 사기꾼이었던 거야! 제 코앞도 모르는 짝대기 풍수였던 거지! 아무것도 모르고 급살 맞아 죽을 자리를 금시발복 명당자리라고 가르쳐 주었으니 말이야! 죄 없는 젊은이만 하나 죽였지! 천벌을 받아 죽을 놈! 에구구! 쯧쯧!...”
노인이 한 무더기 흉악한 욕설을 푸짐하게 쏟아놓으며 안타까움에 혀를 차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24)악인악과(惡因惡果)
“아!...”
도선은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한 끼 자신이 먹을 밥을 아낌없이 배고픈 자에게 선사할 줄 알았던 그 나무꾼총각의 순정한 마음에 감동하여 이런 마음의 소유자라면 발복하여 세상의 소박한 복락을 누려도 좋다고 여겨 자리를 잡아주었건만 결국 참혹한 흉사를 맞았다니 도대체 무엇인가?
도선은 다시 발길을 돌려 그 산에 있는 무덤으로 향했다. 자신이 금시발복 명당자리를 잘못 본 것이 아닐까하고 그 자리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 도착한 도선이 산세를 유심히 살펴보고 나침반을 보며 세심히 뜯어보니 결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조산, 안산, 좌청룡, 우백호, 주산과 배산, 내룡, 외룡 그리고 남출북류(南出北流)의 물길을 두루 갖춘 좋은 명당 터였다. 도선의 눈에는 분명 이곳이 온갖 복락을 세세손손 누릴 금시발복할 자리로 보이는데 실상은 저렇게 급사(急死)하여 죽었다니 도선은 자신이 알지 못할 무한한 비밀이 숨어있는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생각해보며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실감했다.
저 하늘은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무지 도달하지 못할 먼 지경을 아스라이 열어놓고 있었다. 도선은 자신의 한계를 통감하고는 섣불리 아는 체를 하여 나무꾼총각을 죽였구나 하는 책임감으로 비통해 하며 가슴을 쳤다.
“허허! 내 이 어설픈 재주로 생사람 여럿 죽이겠구나! 젊은이 내 죄가 크이! 잘 가시게!”
도선은 굳은 결심을 했다. 서투른 재주로 하늘과 땅을 경솔한 입에 담으며 세치 혀를 놀리면서 사람들을 농락하는 짓은 예서 그만두어야했다. 다시는 그런 천벌 받을 짓을 해서는 아니 되었다. 도선은 품에 간직한 나침반을 꺼내 오른손에 번쩍 들고 그것을 오줌통을 향해 힘껏 내팽개치려는 찰나였다.
“멈춰라!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나무꾼총각의 아비는 살인을 세 번이나 저지른 중죄인이었다. 그러한 자가 어찌 좋은 명당에 들어 갈수 있겠느냐! 명당에 들어가더라도 어찌 발복할 수 있겠느냐! 선인선과(善人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니라! 착한 마음의 나무꾼 총각의 선행은 후생에 거두리라!”
순간 빈 허공이 난데없이 울며 도선의 귓전을 때렸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도선은 먼 허공에서 문득 울려오는 하늘의 소리를 듣고는 멈칫 손을 멈추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사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파란 하늘을 우러르며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고 앉아 크게 소리쳤다.
“아아! 이게 분명 하늘 님의 소리인가! 내 아직 그 이치를 알지 못했소이다! 바로 그것이었구나! 사람의 하는 일에 하늘과 땅이 감응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도선은 엎드려 고개를 땅이 닿도록 깊숙이 수그리고 가슴의 소리를 외쳤다.
기생 소백주 (25)성사재천(成事在天)
“사람이 하는 일이 선량한 이치로 하늘과 땅에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만이 그것이 어울려 생명이 봄날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었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서로 탐욕으로 사악하게 어긋난다면 가을날 된서리를 맞고 죽어가는 초목의 신세가 되고 말지 않겠는가! 뿌린 대로 거두는 것 그게 우주자연의 이치로다. 사람이 바르지 못하면 결국 하늘도 땅도 모든 것을 되돌리고 마는 것 아니겠는가! 어허! 내가 그 까닭을 아직 깨달아 알지 못하였구나!”
도선은 하늘을 우러르며 혼잣소리로 크게 외치고는 버리려던 나침반을 다시 품안에 넣으며 먼 허공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삼국지연의의 촉나라의 제갈량이 위나라의 사마중달을 표주박 지형의 호로곡(胡盧谷)으로 유인하여 화공(火攻)으로 전멸시켜버리려는 전략이 성공직전에 이르렀는데, 때 아닌 폭우가 내려 솟아오르던 불길이 꺼져버리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때 제갈량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며 외쳤다.
“모사재인 성사재천 불가강야!(謀事在人 成事在天 不可强也, 모사는 사람이 하는 것이나 성사는 하늘이 시켜주는 것이로구나! 아아! 억지로는 아니 되는구나!)”
천하의 성현재사(聖賢才士)도 하늘의 뜻은 결코 어그러트릴 수 없다는 것을 도선은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일까? ?
나무꾼총각의 죽은 아버지는 세 명이나 사람을 살인한 죄를 지은 사람이었기에 그러한 흉악한 살인죄를 저지르고 죽은 사람을 천하의 풍수지관이 제 아무리 천하명당에 묘를 쓰더라도 결국 그 백골이 혈 자리를 반치라도 비켜나 틀어지게 누워 버려 발복(發福)은 커녕 급살 같은 대 흉사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 우주대자연의 이치라는 것이었다.
하늘의 이치! 그러기에 성현 공자(孔子)는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필망(必亡)이라고 했던가!
공자는 평생 주나라의 주례(周禮)를 쓴 주공(周公) 단(旦)을 흠모하고 사랑했지 않은가! 주공은 할아버지 문왕, 둘째형 무왕 그리고 강태공과 함께 상나라의 폭군 주(紂)를 죽이고 주나라를 연 개국의 영웅 중 한사람이었다.
형 무왕이 일찍 죽고 열세 살의 어린 조카 성왕이 즉위하자 두 동생이 왕 자리를 노리고 반란을 했다. 조카가 나이가 어리니 왕위에 오르라던 신하들의 권유에 ‘왕 자리에 눈이 멀어 어린 조카를 몰아내는 천하의 무례한 자로 만들려고 하느냐! 이다음에 죽어 저승에 가서 아비와 형을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이냐!’ 라고 꾸짖던 주공은 손수 갑옷을 입고 군사를 몰고 나가 탐욕에 눈 먼 두 동생을 징벌했다.
또한 촉의 황제 유비현덕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재상(宰相) 제갈량을 불러 내 아들 유선이 정치를 못할 양이면 그대가 직접 황제에 등극하라는 말에 제갈량은 ‘저를 고작 촉의 황제 자리나 탐내는 자로 보았던 것입니까? 저는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제하고 세상의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가져오는 일에 헌신하려고 당신과 함께했던 것입니다.’ 라고 답했다지 않는가!
기생 소백주 (26)시운(時運)
그 이야기를 들은 김 선비는 무슨 진기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머릿속에 간직하고 오래도록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이정승의 집에서 사랑방 식객 노릇을 하던 삼년 동안 김 선비는 같이 지내던 여러 곳에서 올라온 선비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이 오히려 인생사와 세상사를 깊이 통찰할 수 있는 견문을 넓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혼란한 난세를 평정할 인물은 하늘이 낸다고 하더니 인생사도 모든 게 시운(時運)이 적절히 맞아야 했다. 세상에 쓸 만한 훌륭한 인물이 나오려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하는 것 아닌가하고 김 선비는 오래전부터 속으로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첫째는 천운(天運)이 좋아야 했다. 조상 대대로 착한 일을 해서 덕을 많이 쌓아 인심을 얻고 좋은 명당에 들어가야 했다.
둘째는 지운(地運)이 좋아야 했다. 지운은 바로 자신이 뿌리를 박고 사는 현세의 부모의 덕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제대로 교육하고 키울만한 학식이나 재력이 넉넉해야 했다. 학식이 없더라도 재물이 넉넉하면 훌륭한 스승을 사서 교육을 시킬 수 있었으니 그것은 부모를 잘 만나야 가능한 일이었다.
셋째는 인운(人運)이 좋아야했다. 스스로 타고난 재주와 끈기가 남들보다 월등하고 비상해야 했고 또 인품도 고매해야 했다. 천운도 지운도 좋지만 스스로 타고 난 인운이 재주도 없고 또 끈기가 남들에 비해 부족하고 성품이 모질고 악독하다면 아무래도 세상에 올바른 뜻을 펼치지는 못할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면 능히 천하를 평정할 인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그 인재가 어느 시운(時運)을 만나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춘삼월 호시절을 만나면 그 기운이 봄날 화초 같으나 구시월 모진 바람을 만나면 그 기운은 겨울날 얼음장 같을 것이다. 봄날에는 화사하고 위엄 있는 모란이 왕이겠으나 가을날에는 저 모진 찬바람이 왕일 것이다.
봄날의 인자한 왕 밑에서는 만백성이 꽃과 생명을 노래하겠으나 모진 찬바람 같은 포악한 왕 밑에서는 만백성은 어서 봄이 오기를 바라는 소망을 품고 인고의 시절을 버티는 폭설에 묻힌 띵띵 얼어붙은 저 보리밭의 보리이파리일 것이다.
뛰어난 영웅호걸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좋은 시절을 만나면 더욱 좋은 시절로 만들어 발전해 나갈 것이겠고 또 차가운 북풍 휘몰아치는 간악한 폭정의 시절을 만났다면 능히 그에 맞서 그것을 물리치고 사람이 살만한 새로운 세상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겠으나 그것이 어찌 한갓 범인(凡人)으로서야 쉬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리하여 영웅으로 타고 나지 못한 그렇고 그런 세상 사람들은 바람 부는 대로 물결 흐르는 대로 그저 한 목숨 부지하기 위하여 혹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세상이 혼탁하면 혼탁한 대로 세속의 명리에 젖어 시절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27)천명(天命)
그렇다면 공자가 흠모했던 주나라 주공 단도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도 모두 천운과 지운과 인운을 다 잘 타고났던 존재들인가? 그렇다면 시운은 어떠한가? 주공 단은 스스로 어린 조카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를 것을 사양했고, 제갈량 또한 황제에 오르라는 유비현덕의 말을 거절했다.
주공은 예도에 따라 형의 아들 어린 조카 성왕을 보필하는 것을 천명(天命)으로 여겼고, 제갈량은 황제자리가 아니라 백성의 안위와 평화를 천명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미 그러한 하찮은 인간에게 하늘이 부여해준 운이란 것을 뛰어넘어버린 깊은 경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황제라는 권력을 뛰어넘은 현자(賢者)로 대대로 칭송받고 숭앙받지 아니한가!
그러나 조선의 세조, 수양대군은 어떠한가? 수양은 형인 문종이 죽고 열세 살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그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수양은 애초에 왕위에 오를 천운을 타고 나지 못했다. 왕의 천운을 타고 나지 못한 자가 왕이 되기 위하여서는 왕의 천운을 타고난 자를 죽여야 했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끝없는 살육으로 이어졌다.
하늘의 순리대로 왕의 천운을 타고 난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탐욕으로 왕위에 오른 수양이 누린 세월은 몇 해인가? 고작 14년이었다. 그동안 아들이 죽어 나가고 딸이 등을 돌렸다. 4촌 형이고 오빠이던 단종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아 차지한 아버지 수양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도의(道義)와 권력의 속성을 파악할 나이였던 그들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14년 동안 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비롯해 사육신(死六臣)등 숱한 반대파들을 죽이고 애초에 자신에게 없는 운이었던 왕위를 억지로 잡아 누렸던 세조는 과연 그 순간에 무엇을 느꼈을까? 숨 끊어진 순간 하루아침에 티끌로 사라져 가버릴 짜릿한 권력 맛을 마약처럼 만끽 했던 것일까? 과연 하늘의 이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김선비는 작금의 조선이라는 나라를 생각해 보면 볼수록 유교의 나라가 절대로 아니라는 생각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유교의 성현 공자가 꿈속에서도 흠모해 마지않았던 주공 단은 어린 조카의 왕위를 결코 넘보지 않았고 간악한 자에게 모함을 받아 쫓기면서 까지도 결코 마음 변하지 않고 끝까지 보필했다. 그리하여 주공 단은 성현 공자의 이상적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에게 쫓김을 당했다. 유교에서 가장 큰 덕목으로 여기는 효(孝)를 이방원은 어기고 아버지 이성계가 낳은 신덕왕후의 아들들을 죽이고 마침내 왕 자리를 거머쥐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이성계의 최고의 동반자 노회한 정치인 정도전도 이방원의 칼날에 쓰러졌다.
고려 왕실을 피로 물들였던 그들은 똑같이 그렇게 피를 내뿜으며 다름 아닌 같은 편인 나이 어린 이방원의 칼날을 받았던 것이다. 더구나 수양은 어떠한가? 주공 단과는 다르게 조카 단종을 유폐시켜 죽이고 왕위를 거머쥔 자가 아닌가! 실상이 이러할 진데 어찌 조선이 충과 효 그리고 인의예지를 숭상하는 유교의 나라란 말인가?
기생 소백주 (28)기이한 방
그렇다면 지금 김선비 자신은 또 어떠한가? 천운도 지운도 인운도 모두 가득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시운은 어떠한가? 작금의 실정은 이정승 같은 외척이 온갖 권세를 누리는 시대였다. 호랑이 없는 산에는 여우가 왕 노릇 한다더니 틀림없이 그런 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선비는 힘이 없어 불의의 세상을 바로 잡지 못한다면 초야에 묻혀 학문을 벗 삼아 욕심 없이 자신의 청정한 가슴에 품은 굳센 뜻 하나 우뚝 지키고 고단하게 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아야 하는데 김선비는 그 간악한 여우에게 모든 집안의 재물을 탈탈 털어 뇌물로 바치고 벼슬을 구걸하려 했으니 인생의 최하위 밑바닥까지 가버렸지 않은가! 천운에 벼슬자리가 없는 것을 뇌물을 바쳐 사려한 것이 아닌가! 천운에 왕 자리가 없는 수양이 살육을 통해 왕위를 거머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늘의 이치에 부당하기는 수양이나 김선비나 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하하하하! 그리하여 불가(佛家)에 이르기를 삼일수심천재보(三日修心千載寶)요, 백년탐물일조진(百年貪物一朝塵)이라 했던가!(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년동안 탐한 재물과 권력은 숨 끊어지는 하루아침 먼지가 되어버리는구나!) 아아! 조선 천지에 나 같은 바보천치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탐욕으로 썩어 빠진 이내 가슴엔 모진 설한풍만 들이치구나!”
김선비는 누가 듣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미친놈같이 큰 소리로 처량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남으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하염없이 따라 걸었다.
점심도 쫄쫄 굶고 바삐 걷는다고 걸었는데 땅거미가 질 무렵 당도한 곳은 수원이었다. 허기가 질대로 진 몸에 기운이 다 빠져 머리에 어질어질 현기증이 났다. 지나오면서 배고픈 속에 우물물만 잔뜩 들이켰더니 더욱 시장기가 더하였다. 엽전 한 닢 없는 자신의 처지에 과연 어디에 들어가 시장기를 때우고 잠을 청해 다시 길을 떠날 것인가? 바보처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먼 길을 떠나온 자신을 생각하면서 김선비는 답답한 가슴을 치며 어디 기가 막힐 구원자라도 있을 양 막연한 기대를 하며 수원거리를 이리저리 헤맸다.
한참 거리를 헤매는데 길모퉁이 담벼락 앞에 사람들이 여럿 모여 웅성거리는 것이었다. 김선비는 무슨 일인가 하고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벽에 붙어있는 기이(奇異)한 방(訪)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용인즉 ‘수원 기생 소백주가 서방님으로 삼을 글 잘 짓는 선비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요?”
김선비는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영문을 몰라 검은 수염을 늘어뜨린 넓은 갓을 쓴 옆 선비에게 물었다.
“그대는 아직 저것을 모른단 말인가?”
기생 소백주 (29)식자우환(識字憂患)
그 선비의 이야기인 즉 글 잘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재산 많은 아름다운 절세미인(絶世美人) 수원 최고의 기생 소백주가 글 잘 짓는 선비를 찾아 남편으로 삼겠다고 그새 이년도 넘게 저 방을 붙여놓고 수많은 글 잘하는 선비들을 제 집으로 불러들여 지은 글을 본다는 것이었다.
이 나라에 소문난 수많은 선비들이 기생 소백주의 미모와 재주와 재산을 보고 그녀의 남편이 되겠다고 그 앞에 나아가 글을 지어 올렸으나 지금껏 죄다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실은 우리도 지금 그 소백주 집에 다녀온다오. 죄다 떨어졌지만 아무튼 거기 가면 안주로 나온 수육 한 접시에 술 한 잔은 그냥 얻어먹을 수 있다오. 당신도 한번 가보시구려!”
“으음!.......”
그 선비의 말에 김선비는 쪼르륵거리는 허기진 배를 매만지며 입 안 가득 고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잖아도 하루 종일 걸어온 몸에 곡기를 하지 못해 죽겠는데 한 접시 수육 안주에 술 한 잔을 생각하니 대번 입 안에 질질 단침이 돌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글을 잘 지어 재주도 많고 돈도 많은 조선 최고의 미인이라는 기생 소백주의 마음에 들어 그의 남편이 된다면야 꿈에라도 덩실덩실 춤을 출 일이겠지만 내로라는 글 잘하는 선비들도 죄다 낙방했다는데 그것은 꿈에도 바랄 일이 아니겠지만 아무튼 이 고통스러운 시장기를 우선 면할 수 있다고 하니 발이 보이지 않게 잽싸게 그곳으로 달려가고 볼 일이었다.
‘허어, 산입에 거미줄 안친다고 하더니!’ 김선비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잽싸게 기생 소백주 집을 향해 마치 여우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발이 안보이게 바람처럼 내달리는 것이었다. 한동안 정신없이 내달리던 김선비가 ‘에헴!’하고 큰기침을 하고는 갑자기 길 가운데 우뚝 멈춰 섰다. 한 끼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한갓 노류장화(路柳墻花) 기생의 글 시험 질에나 체통(體統) 없이 놀아나려 들다니 자신의 꼴이 참으로 참담했기 때문이었다.
저 나관중은 인류사의 불후의 명작 삼국지연의에 수호전을 남겼고, 조설근은 천하 명작 홍루몽(紅樓夢)을 썼지 아니한가! 더구나 시선(詩仙)이라 일컫는 이백은 당나라의 황제 현종이 총애하는 양귀비를 전한 왕조를 망하게 한 악녀 조비연에 비유하는 시 청평조사 제 2수를 황제의 면전에서 휘갈겨 쓰지 않았는가!
또한 시성(詩聖)이라 일컫는 두보는 또 어떠한가! 그의 명시 석호리(石壕吏)에서 전쟁의 참상을 겪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슴 저리게 노래하지 않았는가!
이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는데도 글을 배운 자로서 가난하고 불우한 삶을 살면서도 그 글을 세상에 펼쳐 천하만민(天下萬民)의 숭앙을 받고 있지 아니한가! 김선비는 문득 가슴가득 몰려드는 자괴감으로 별빛 돋아나는 밤하늘을 우러러보며 혼잣말로 탄식하는 것이었다.
“어허! 참으로 식자우환(識字憂患)이로구나! 세상에서 글줄을 좀 배운 자로 살아가기가 이토록 힘든 일이란 것을……내 미처 몰랐구나! 몰랐구나!”
기생 소백주 (30)기생 소백주
수원의 어느 관기의 딸로 태어난 소백주는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이 결정 지워져 버렸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기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 소위 이 나라의 잘나가는 관리나 양반이라는 부류에게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몸을 팔아야 하는 운명, 어려부터 가야금 튕기는 법을 배우고, 춤을 배우고, 노래를 배우고, 글줄에 시문(詩文)을 익히면서 사내들의 눈과 마음을 홀려 그들의 환심을 사 돈을 얻어 살림을 꾸리고 또 어린 기생들을 길러 그들의 그늘아래서 꽃피우는 뒤울안의 향기롭고 아리따운 정원이어야 했다.
결국 사랑도 없고, 꿈도 없고 오직 그들을 위한 가무와 쾌락을 선사하고 돌아서면 허전한 눈물만 있어야했다. 소백주도 기생(妓生)이라는 그런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어미가 갔던 길을 천형(天刑)으로 받아들이며 그 길속에서 아낌없이 피어 향기를 품어내는 어여쁜 꽃이어야 했다.
소백주는 바람 없는 맑은 봄밤 동산에 둥실 떠오르는 달덩이 같은 아름다운 새하얀 꽃이었다. 가야금을 튕기면서 노래를 부를라치면 사내들은 그 가락에 취해 느물거리는 나비가 되었다. 소백주가 버드나무가지처럼 휘늘어진 몸매로 춤을 출라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내들은 넋을 잃고 빠져 들어오는 한 마리 발정한 수캐에 불과했다.
아름다운 소백주 앞에서 한갓 불티같은 사내의 지위와 학식과 재력과 인격은 찰나에 무장해제 되어버렸고, 심지어 산중에서 수행깨나 했다는 수행승마저 삽시간에 그 마음이 봄볕에 얼음장처럼 찰나에 녹아 허물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호호호호호!”
소백주는 당대의 뭇 사내들을 치마폭에 두루 감싸 안고 휘두르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만해졌다. 아니 오만해졌다기보다는 사내들의 하는 꼴이 그녀를 오만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었다. 구중궁궐(九重宮闕) 임금님 빼고는 모든 사내란 사내를 다 경험한 소백주는 어느 날 인생의 허무가 물밀듯 가슴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한 여인으로 태어나 한 사내를 진정으로 사랑해 보지도 못하고 오직 그들의 눈요깃거리로 하룻밤 노리개로 전락해 살아온 삶이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술과 웃음과 몸을 팔아 수많은 재물을 챙기고 사내들의 품에 놀아나며 또한 그들을 희롱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참맛은 아니라는 회의(懷疑)가 불현듯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사랑받고 싶은 멋있는 사내는 하룻밤 노리개로나 생각하고 끌어안고 한번 이글거리는 숯불처럼 발갛게 달아오르면 그 길로 다시 오지 않았고, 속물들은 오로지 순간의 쾌락의 대상으로나 생각하니 그것이 그녀를 못 견디게 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