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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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 실은 인간이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는, 결국, 인간됨의 근본 한계에 대한 통렬한 이해와 그로 인한 연민을 애도하며, 어렵사리 메시아가, 인간-너머-인간이 된 셈이다.
자신의 흔적을 아는 일, 더 나아가, 자신의 ‘개입’의 무서움을 아는 일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더욱 그 일의 가능성을 흠모한다. 계몽되었다는 건, 이처럼 새로운 시점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성찰하려는 노력에 가닿으려는 몸짓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몸짓은 스스로에게 되먹힐 수밖에 없는 한계 탓에 일종의 ‘암흑물질’이 되어 그 주체의 주변을 소리 없이 어둑시근 맴돌고만 있다.
같은 어구를 두고 지젝이 소환해 낸 라캉의 민활함은 어느 새 잊힌 듯하다. 오로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할 뿐이라는 빤한 사실쯤은 광명천지 자본제에서는 이제 그다지 큰 애로도, 사건도, 그 무엇도 아니니, 어찌 보면 라캉+지젝 복합체의 희미해짐은 수순이다. 알지 못한 채 바라는 욕망의 덧없음이란, 이제 모두에게 있어 그저 그런 일상일 뿐이다. 나스닥 지수의 쉴 새 없는 변동처럼, 별 볼일 없는,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는, 신종 ‘자연’이다.
‘철 들면 염 한다’던 누군가의 우스갯소리는, 인간에게 있어 ‘제자리’ 알기의 어려움을 꾸밈없이 전하고도 남음이 있다. 결국 철 들지 못하는 게 사람일진대, 사람 되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게 사람의 잔인한 운명일진대, 왜 제 자리를 알지 못해 해매는 이 슬픈 동물됨 앞에서 나는 마냥 슬픈 것인가. 나 또한 내 자리를 영영 찾지 못하고 돌아갈 터.
迷兒가 되어 어느 迷路에서 만난 인연이 전부이니, 너는 나의 헤맴을 용서하시라. 나 또한 너의 바장임 앞에 어떤 자침도 들이대지 않은 채 한없이 무능할 것임을 약속해야 하겠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갓 인간일 뿐이(었)다.
아버지, 저들을, 우리를, 인간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