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자꾸 분별심이 들어 고민입니다.
자꾸 누구는 어떤 것 같다,
나는 뭐가 좋고 뭐가 싫다,
이거는 이러면 안 되지 않나,
이런 거는 이렇게 해야 되지 않나,
제가 이런 마음이 자꾸 든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제 곁에 지금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남편이랑 엄청 싸웁니다.
제가 임신 중인데도 한번 싸우면 굉장히 살벌하게 싸우게 돼요.
남편은 ‘현미경 쓰고 들여다보지 말고 제발 대충 살자’ 이렇게 말하지만,
저는 과거에 싸웠던 일까지 다시 꺼내며 싸우게 돼요.
싸우면서도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기한테 나쁜 영향이 간다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스님께서 좀 지혜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변:
“몰라서 개선하지 못하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면 배워서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습관은 달라요.
습관을 인도 말로는 ‘까르마(Karma)’라고 하고,
불교 용어로는 ‘업식(業識)’이라고 해요.
업식은 알아도 잘 안 고쳐져요.
몰랐을 때 알게 해주는 것은 제가 도와줄 수 있지만,
알아도 안 고쳐지는 것은 다른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가 없어요.
습관을 고치는 방법
알지만 안 고쳐질 때 해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첫째, 그냥 지금 이대로 살면서 손실을 감수하는 겁니다.
둘째, 손실이 너무 크면 죽기를 작정하고 고치는 거예요.
습관을 고치기 위해 목숨이라도 걸 정도로 각오를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습관은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왜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운명이란 곧 까르마 혹은 습관을 말해요.
습관이 얼마나 고치기 어려우면
예부터 ‘천성이 그런데 어떡하겠어,
천성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기에 고칠 수가 없다’라고 말했겠습니까?
‘천성이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되었다’ 이런 말까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늘 화내고 짜증 내던 사람이 갑자기 상냥하게 웃으면
주변에서 ‘저 사람이 죽을 때가 다 되었나?’ 이런 말을 하잖아요.
그만큼 까르마 혹은 습관은 고치기가 어렵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운명론이 나오게 된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정해진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다 변합니다.
이를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형성된 것이며 유지되다가 변하게 됩니다.
다만 그 변화가 어려우냐 쉬우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려운 게 있으면 지레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해 버리잖아요.
그래서 변화를 포기하고 운명이라고 받아들여서 그냥 생긴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도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에요.
또 하나의 방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운명을 한번 바꿔보는 것입니다.
단, 운명을 바꾸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정신작용의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이 많이 발달했잖아요.
정신분석학이며 상담심리학 같은 것이 나오면서,
질문자가 말한 것과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괜히 불안이 심하거나, 자꾸 자괴감이 들거나, 남을 보면 자꾸 짜증이 나고 열등의식이 생기거나, 우울감이 자꾸 느껴지거나, 이런 상태의 심각도를 분류해서 일정 기준을 넘으면 정신질환으로 취급합니다.
모든 사람의 심리 상태를 분포도로 그려보면 큰 포물선을 이루는데,
이 포물선에서
95% 안에 들어오면 ‘정상’이라고 말하고
95% 밖으로 나가면 ‘비정상’이라고 말해요.
그러니 사실 정신질환이냐 아니냐는 엄밀하게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학자들이 그 기준을 정하는 거죠.
옛날에는
이런 사람을 특이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질환이라고 평가합니다.
시비심은 누구나 있게 마련이지만
질문자의 남편이 표현한 대로 현미경 들여다보듯이 따지는 것도
일종의 질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질문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리고 주위에서도 좀 심하다고 할 정도라면, 질환이라고 봐야 해요.
그래서 일단은 신경정신과에 가서 의사와 상담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꼭 병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의 성격에는 여러 유형이 있거든요.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은감성이 좀 무디고,
지나치게 감성적인 사람은 이성적 판단이 좀 부족하죠.
요즘은 자기의 성격이나 성향을 분석해서 여러 유형으로 나눕니다.
테스트를 해보고 상담을 받아보면 ‘나는 이런 성격이구나’ 하고 알 수 있죠.
그게 100% 맞는 건 아니지만
대강이라도 ‘나는 이런 성격이구나’ 하고 자각을 할 수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어느 정도 자각이 되면
남편에게 이렇게 말해서 갈등을 좀 누그러뜨릴 수 있겠죠.
‘여보, 나는 이런 성격이니까 이럴 때는 당신이 좀 이해해 줘’
이렇게 성격이나 특성으로 보고 서로 인정하며 사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성격이나 특성으로 보기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고 판단이 되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불안 심리가 심하면 약물 치료를 좀 해야 해요.
신경과민도 근본적으로는 호르몬을 포함하여
어떤 특정 물질이 분비되는 양과 빈도에 따라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분비되는 양이 많으면 좀 중화를 시키고,
적으면 좀 보충하는 식으로 약물을 통해 조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질문자는 지금 임신 중이라 하니
호르몬 변화에 따른 영향으로 극단적인 심리 상태를 겪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요.
트라우마(trauma, 외상),
즉 어릴 때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야 합니다.
주로 심리 상담을 통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학에서는 이렇게 다양한 접근을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어떻게 치료를 할까요?
현대의학의 개념으로 불교를 바라보면
불교 수행은 일종의 자가 치료라고 할 수 있어요.
병원에 가는 것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서 치료하는 것에 해당합니다.
타인의 도움을 받아서 치료를 해야 하는 경우는
방금 말씀드린 포물선에서 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은 증상이 심해서 자가 치료가 어렵습니다.
자기 혼자 아무리 애를 써본들 변화가 어렵기 때문에 의사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해요.
대다수 95%의 사람들은 본인의 특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특성을 인정하고 살 것인지,
좀 개선을 할 것인지, 둘 중에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개선을 하려면 우선 원리를 먼저 알아야 해요.
‘이건 습관이구나.
어릴 때부터 형성된 것이구나.
형성된 것이니 바꿀 수도 있구나.’
이걸 본인이 자각하고 난 뒤에 조금씩 고쳐나가는 거예요.
고치려면 당연히 저항이 따르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원리를 알고 노력을 해야 해요.
어떤 습관은 너무 어릴 때 형성된 것이어서 현재 내 노력으로는 잘 바뀌지 않습니다.
이럴 때 질문자 같은 사람은 ‘나는 해봤자 안 돼!’ 하면서 자학 증상이 생기기 쉬워요.
그렇기 때문에 우선 내 습관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해요.
예를 들어 나는 화를 잘 내는 성격인데,
그걸 전기충격기로 지져가면서 고치려고 해도 도무지 안 고쳐진다고 합시다.
그럴 때는 그냥 솔직하게 내 성격을 인정하고, 남편에게도 이렇게 말해두는 거예요.
‘여보, 나는 어떤 자극을 받으면 나도 모르게 화가 일어나서 뚜껑이 펑펑 열리니까 그때만 좀 기다려줘. 내가 그때는 눈에 뵈는 게 없어. 그러니 당신이 ‘저게 또 미쳤구나’ 하고 잠깐 피해줘. 그렇게 해주면 나도 몇 분 지나지 않아 제정신이 돌아올 거야.’
이렇게 자기 모습을 인정하고 살면 됩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남편이 ‘나는 그래도 너하고는 못 살겠다’라고 하면 이혼하는 것도 감수해야 하고,
자기 성질 때문에 친구를 잃는 것도 감수해야 해요.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질문자도 그 정도로 심하다면,
첫째, 병원에 가서 한번 체크해 보세요.
진단 결과 정도가 심하다고 하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치료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하면 수행을 하면 됩니다.
수행은 무엇일까요?
마음 작용의 원리를 알아서 원리에 따라 노력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노력해 봐도 잘 고쳐지지 않으면 현실을 인정하고 과보를 받는 거예요.
이렇게 접근하면 됩니다.
안 고쳐지면 그냥 성질 좀 내고 살면 됩니다.
남편이 ‘너하고 못 살겠다’ 하고 떠나면 ‘오케이.
내 성질에 누가 같이 살겠어’ 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이가 민감하게 반응하면 ‘내 자식인데 누구를 닮았겠어?
나 닮았겠지’ 이렇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이가 자라서 화를 내도 ‘그래, 화를 내려무나.
네 엄마도 그랬다’ 이렇게 수용하면 됩니다.
이렇게 자기 성격을 인정하고 사는 것도 굉장한 수행입니다.
이런 방법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런데 스님, 저는 수행하고 싶거든요.
절을 할 때 명심할 수 있는 기도문 같은 걸
스님께서 주셨으면 좋겠어요.”
“주로 머리 나쁜 사람들이 다리 아프게 절을 하는 거예요.
수행에는 기도문보다 결심과 노력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짜증을 내면 애한테 나쁘잖아요.
그러면 짜증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더라도
‘애한테 나쁘다는데 엄마인 내가 이런 짓을 할까 보냐!’ 하고 혀를 확 깨물어야 해요
그래서 혀에서 피를 흘릴 정도로 각오를 해야 합니다.
수행이란 그렇게 단호한 마음으로 해야 진척이 있습니다.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안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안 그러면 매일 300배 절을 하면서 이렇게 기도해 보세요.
‘여보, 나하고 살아줘서 고마워. 내가 가끔 미쳐서 성질을 낼 때가 있는데,
그래도 이런 나와 함께 살아줘서 감사해.’
이렇게 좀 적극적으로 임해야 개선이 됩니다.
그냥 적당하게 해서는 개선을 하기가 어려워요.
그리고 이미 지은 인연은 과보를 달게 받아야 합니다.
과거에 나쁜 행위를 한 것이 있으면
그로 인해 돌아오는 나쁜 과보를 받아야 해요.
대신 앞으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이처럼 수행을 하려면 조금 야무지게 해야 돼요.
<돌멩이, 꽃 비유>
돌멩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큰 게 있고, 작은 게 있고, 색깔이며 무늬며 모양이며 제각각이에요.
꽃도 모양, 크기, 빛깔이 다 다릅니다.
같은 종류의 꽃이라 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 한 송이도 100% 똑같은 건 없어요.
이처럼 세상 사람은 성격, 행동, 가치관 등이 저마다 다릅니다.
질문자와 남편도 서로 다른 게 당연해요.
자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입맛도 다르고 생활 습관도 다릅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질문자는 현미경 갖고 들여다보듯이
그렇게 남편을 내내 들여다보면서 틀렸다고 따지는 거예요.
현미경이라니 남편이 참 표현을 잘했네요.
같이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너는 현미경 갖고 들여다보듯이 따진다’라고 말할 정도예요? (웃음)
저는 그 얘기를 들으니까 남편이 불쌍해 보이네요.
그러니 본인을 좀 살펴보세요.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개선의 여지가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거나 스트레스받지는 말고요.
그렇다고 한꺼번에 개선하려고 애쓰지는 마세요.
한꺼번에 고치려고 하면 너무 힘들어서 금방 포기하게 되니까요.
이렇게 남편에게 물어보세요.
‘우선 내가 큰 것 한 가지만 고칠게. 제일 문제가 뭔지 얘기해 줘.’
이렇게 해서 100일을 노력해 보고,
그다음에 또 남편에게 한 가지를 더 얘기해 달라고 해서
그걸 갖고 100일을 노력해 보고, 이렇게 하면 조금씩 개선이 돼요.
그러면 남편이 ‘성질은 뭐 같지만 그래도 미쳤다가 금방 돌아오네.
같이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요. 그
렇게만 되어도 굉장한 발전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야무지게 수행을 해보겠습니다.”
“얘기를 솔직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