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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달리즘’의 반달족
먼저 반달족의 이동에 대해 알아보자. 반달족은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오늘날의 스칸디나비아반도 남부와 독일 북서부에 살던 게르만족 일파다. 이들은 훈족의 침입에 쫓겨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하다 지금의 프랑스와 독일지방을 거쳐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했었다. 유럽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참 멀리도 이동한 기구한 운명을 가진 민족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그들의 바람대로 편하게 정착할 수 없었다. 이들 역시 서고트족에게 밀려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모래사막의 땅 현재 북아프리카로 물러나야 했다. 반달족은 튀니스만 북쪽 연안도시 카르타고를 수도로 삼고 그곳에 반달왕국을 세웠다. 비록 이베리아반도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서로마제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문화를 가진 속주 아프리카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반달족은 절치부심 439년에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트리폴리까지 진격했으며, 코르시카·시칠리아·사르데냐 등 지중해의 섬을 하나씩 점령해가고 있었다. 반달족이 지중해를 장악하면서 로마를 침략하는 등 반달왕국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여기에는 환골탈태換骨奪胎의 핵이자, 반달족의 탁월한 지도자 가이세리크가 있었다. 그는 로마를 침략하고자 훈족의 제왕 아틸라와 연합하는가 하면, 그의 기세에 겁먹은 로마 황제 스스로가 사돈의 인연을 맺고자 청했다. 결국 서로마는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얇은 귀로인해 당대의 전략가 아에티우스 장군을 반역죄로 몰아 죽이면서 로마는 에드워드 기번의 표현대로 왼손으로 오른손을 자른 꼴이 되고 말았다. 역사상 가장 무능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도 무사하지 못했다. 혼란의 와중에 병사들 손에 살해당하고 만다.
455년, 그 뒤를 이어 원로의원의 막시무스가 황제로 추대되었지만, 이는 잘못된 선택이었다. 반달족 함대가 출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뒷문을 통해 도망치려다 화난 군중들 손에 잡혀 맞아 죽었다. 어쩌면 황제의 관은 탐이 났지만, 정작 나라를 구할 지혜와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시민폭동으로 죽은 지 3일이 지나자 반달족이 로마를 포위했다. 황제가 죽고 없는 제국에 그나마 지혜로운 교황이 있었다. 그는 3년 전에 말 몇 마디로 아틸라로부터 이탈리아를 구한 경험이 있는 레오 1세였다. 반달왕국 가이세리크는 기독교도이긴 하나 아리우스파였다. 즉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지금의 가톨릭으로 보면 이단이라 할 수 있지만, 로마교황은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었다. 로마 성 밖에서 가이세리크를 만난 교황은 성문을 열어주는 조건으로 반항하지 않는 시민은 죽이지 않고, 재물을 찾아내기 위해 시민에게 고문을 가하지 않으며, 도시를 불태우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반달족은 정직하게도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그 약속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마치 법망의 허점을 피해 재산을 늘려가는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가나 위정자들처럼 말이다. 약탈기간에 대해 조건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반달족은 무려 보름동안 로마를 탈탈 털어갔다. 신전의 지붕도 무사하지 못했고, 신전의 황금촛대는 약과였다. 약속대로 불을 지르지는 않았을 뿐 화려하기만 했던 조각상과 장식품들이 뜯겨나간 로마는 말 그대로 흉측한 몰골로 변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에우독시아 황후와 그의 두 딸마저 배에 싣고 카르타고로 건너갔다. 발렌티아누스 3세가 약속했던 대로 자신의 아들과 공주를 결혼시켜 왕국의 뒤를 잇게 했다.
훗날 에우독시아 황후는 교황 레오 1세의 간청으로 여생을 비잔티움에서 보낸다. 이 일로 인해 교황 레오 1세는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른다. 훈제국의 아틸라로부터 로마유린을 막은 것은 물론, 반달족으로부터 그나마 로마를 지켜낸 탁월한 용기와 지혜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에우독시아 황후를 야만인들로부터 석방시켜 자유의 몸으로 돌아오게 한 것 등 거듭된 위기에서 로마의 피해를 최소화한 그를 두고 시민들의 믿음은 세속의 힘까지 안겨주는 정치적인 확장의 계기가 된다. 레오 1세는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로써 날개를 달자, 그에게 인정받기 위한 권력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반달왕국의 로마 약탈을 두고 훗날 서유럽 중심의 역사가들은 새로운 용어를 하나 만들어 냈다. 바로 ‘반달리즘’이다. 제1부 ‘로마제국 편’ 각주에 언급했던 것처럼 프랑스 혁명 당시 공포정치를 일삼던 자코뱅당에 대해 성직자 앙리 그레구아르가 반달족의 로마 약탈을 비교하면서 시작된 말이다. 서구 문명을 파괴했다는 야만인이란 편견에서 한 치의 벗어남도 없다. 에드워드 기번 역시 반달족의 모습을 거의 흑인과 동양인이 뒤섞인 괴물에 가깝게 표현했으며, 회화에도 이 편견은 이어진다. 옷을 제대로 걸치지 못한 거무튀튀한 피부의 병사들이 뽀얀 로마의 아녀자들을 겁탈하는 모습은 러시아 신고전주의 화가 칼 파블로비치의 그림에 나오는 장면이다. 기실 반달족은 라틴족보다 피부가 더 희고 뽀얗다. 키도 더 커고 무엇보다 지중해 해상무역을 장악하면서 문화의 정점을 경험했다. 복장 역시 로마인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성한 침략전쟁의 선봉에 섰던 반달족의 운명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534년 비잔티움제국의 위대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당시 당대의 명장 벨리사리우스 의해 멸망하고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진다. 나라만 없어졌을 뿐 그의 후손들은 유럽인들 속에 뒤섞여 뿌리를 이어왔을 것이다.
* 서로마 황제에 오른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
게르만족 일파인 동고트족 역시 훈족의 침략을 피해 서쪽으로 쫓겨난 민족이다. 현재의 지도로 보면 흑해를 끼고 있는 우크라이나 남부지방에 살던 중 훈족에게 가장 먼저 격파를 당하면서 치욕을 맛본 후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마와 비잔티움제국 사이에서 줄다리기외교를 벌이며 시간을 끌었다.
453년 훈족의 제왕 아틸라가 죽고 동고트왕국은 광복을 맞았다. 476년이 되자 오도아케르가 서로마를 점령하고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킨다. 동로마, 즉 비잔티움 황제 제노(Zeno)로서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제노는 오도아케르에게 총독의 칭호를 내리고 서로마를 통치하도록 허락한다.
오도아케르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권력과 지위를 누리자 제노는 마냥 두고 보지만 않았다. 오도아케르를 응징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인물이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다. 테오도리쿠스는 여덟 살 때 비잔티움에 인질로 보내져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비잔티움 궁전에서 보내는 동안 여인의 치마폭에 휘둘리거나 좌절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곳의 고전문화와 게르만의 정신을 결합하는 등 부족의 부활을 위해 마음을 굳건하게 다졌다. 469년에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전쟁터였다. 그의 첫 째 희망은 기특하게도 자신의 민족에게 안정된 터전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일생을 이 하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무려 20년간 전쟁터를 누비게 된다. 471년이 되면서 그의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자 그 꿈은 한발 짝 다가설 수 있었다. 아버지 뒤를 이어 동고트 왕에 등극한 테오도리쿠스는 488년, 비잔티움 황제 제논과 경쟁, 혹은 협치의 줄타기를 하면서 나라를 안정시킨다. 이때 비잔티움 황제 제논이 테오도리쿠스에게 모종의 제안을 한다. 은근히 동로마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오도아케르를 무너트리고 그곳을 맡아 다스리라는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렇게 밀약은 이루어졌다.
테오도리쿠스에 의해 또다시 동고트는 민족의 대이동, 즉 엑소더스가 연출된다. 테오도리쿠스는 병사들뿐만 아니라 동고트족 전체가 말과 노새는 물론 가재도구를 싣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린 아들을 목마 태운 아버지, 어머니와 그 뒤를 따르는 노새, 마차에 탄 노인, 염소를 모는 아이 등 이들의 이동은 중부유럽의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는 자유의 바람과 같았다. 이 모두가 한꺼번에 움직이자 당연히 이동의 속도도 매우 느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때가 이르자 테오도리쿠스는 비잔티움제국의 집정관의 신분이 되어 이탈리아를 위협하는 존재로 다가왔다. 서로마를 무너트린 오도아케르는 경악했다. 누가 봐도 이들과의 전쟁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으나 오도아케르는 테오도리쿠스의 창이 자신을 향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테오도리쿠스와 오도아케르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전일퇴가 거듭되면서 희생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느슨하기만 했던 오도아케르 측의 희생이 더 컸다. 동고트족은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면서 수도 라벤나를 포위하게 된다. 결국 위기에 몰린 오도아케르는 휴전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493년 2월, 양측은 전쟁이 끝났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면서 휴전협정을 맺었다. 협약은 오도아케르와 테오도리쿠스가 공동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고, 라벤나 궁전 역시 함께 사용한다는 제법 그럴싸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오월동주吳越同舟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해 3월이 되면서 테오도리쿠스는 오도아케르를 만찬장에 초대해 단숨에 죽여 버린다. 서로마를 멸망시켰던 오도아케르는 이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고야 말았다.
테오도리쿠스는 지금까지 지탱했던 동고트왕국이라는 허물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스스로 자의紫衣를 입음으로써 서로마 황제에 올랐다. 그럼에도 자신은 비잔티움 황제의 신민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등 제논과 합의를 깨트리지 않았다. 기실 로마 멸망은 수도 천도를 비롯해, 경제력 저하, 야민 이민족의 동화에 따른 문화적 융합, 인구의 감소에 따른 도시의 쇠퇴, 이민족 침략에 반기를 들지 않았던 로마시민 등 복합적 원인이었지만, 고대 로마제국의 종말의 시점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었다.
새롭게 등극한 야만 이민족의 황제를 로마 시민은 환영도 거부도 하지 않았다. 동고트족보다 더 많은 숫자의 우위에 점한 로마 사람들은 저 멀리 떨어진 비잔티움의 황제의 독주보다 비록 야만족이라고 할지라도 테오도리쿠스 총독이 다스리는 것에 대체로 만족해했다. 단언컨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비잔티움제국과의 이질적인 요소가 이를 부추겼을 것이다. 비록 종교는 아리우스파의 신앙을 지지한 까닭에 로마시민들로부터 큰 신임을 얻지는 못했으나, 로마인을 요직에 앉히는 등 친 로마정책을 펼친 테오도리쿠스는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고려태조 왕건이 그랬듯 여타 게르만족들과 혼인정책으로 변방을 안정시켰다. 또한 아주 작은 분란의 씨앗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 스스로 비잔티움 황제 제논에게 충성을 보였다. 이탈리아에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스토아학파를 계승한 보에티우스 같은 당대의 철학자의 탄생도 그의 로마식 문화정책으로부터였다. 그가 다스렸던 33년의 치세는 안정과 번영으로 영광의 기록으로 남았다. 526년 여름날에 그는 세상을 등진다. 그로부터 채 1년도 되지 않아서 비잔티움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공동 황제로 등극하면서 540년 서로마는 다시 비잔티움 제국의 그늘에 들어가게 된다.
비잔티움의 명장 벨리사리우스가 535년부터 540년 동안 나폴리와 로마, 그리고 동고트족 수도 라벤나를 평정하면서 옛 로마의 영광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혼자만의 야심이었다. 이미 서로마 사람들은 비잔티움제국과 하나의 끈으로 연결하는 데 반감을 넘어 불만이 이끼처럼 쌓여있었다. 동·서로마가 분리된 이후 오랜 세월동안 이질적인 요소를 너무나 많이 생산해 낸 것이 결국 프랑크제국의 등장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테오도리쿠스가 죽고 난 뒤 라벤나는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무릎을 꿇었다고는 하나 그 원인은 권력침탈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서로마 내분에 있었다.
서고트족의 멀고도 먼 이동
지금의 흑해 주변 루마니아 지역에서 넓게 분포해 살고 있던 서고트족 역시 훈족은 물론 반달족에게까지 쫓겨 고단한 이동을 이어갔던 민족이다. 이들의 이동경로를 보면 발칸반도로 남하해 콘스탄티노플을 지나 그리스 국경까지 내려가 아드리아해를 끼고 달마티아해변을 거치면서 발칸반도를 완주해 중부유럽으로 이동한다. 서고트족이 막상 이탈리아에 도착했으나 이미 이곳에는 동고트족이 버티고 있었다. 서고트족은 프랑크족에게마저 패하면서 서쪽으로 이동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베리아반도까지 진출한 서고트족은 그곳에서 위세를 떨치던 반달족(이미 이전에 자신들의 종족에게 타격을 준 적이 있던)을 아프리카로 밀어내고 서고트왕국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그도 길게 가지는 않았다. 250여년 뒤, 자중지란에 이어 권력에 눈이 먼 왕에 의해 이민족 이슬람을 끌어들여 자멸했다.
그 경로와 사연을 간략하게 알아보자. 비지고트족(Visigoths), 즉 서고트족 왕 아타나리크는 훈족과 동고트족에게 밀려 100만여 명의 백성을 이끌고 남쪽을 향했다. 그러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도나우강을 건너 지금의 불가리아 땅으로 이주했다. 이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서고트왕 아타나리크는 당시 비잔티움제국 황제였던 발렌스에게 무릎을 꿇고 발칸의 동부 트라키아 땅에 들어가 살 것을 청원했다. 발렌스는 이들을 은근히 반겼다. 이들이 군대 징집을 면하기 위해 바치는 거액의 황금으로 제국의 재정을 튼실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발렌스는 속내를 감추고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다가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 한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조건을 걸었다. 서고트족 20만 병사는 도나우강을 건너는 동시에 무장해제 할 것, 그리고 어린아이는 제국의 속주로 나누어 부모와 떨어져 살아갈 것 등이었다. 감히 부모 된 입장에서 아이들 목숨을 담보로 제국에게 대항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국에도 부패 관료들이 있었다. 물욕에 눈이 먼 관료들에게 여자노예와 황금을 안겨주는 것은 물론, 앞으로도 상납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발렌스가 내건 조건은 허공의 메아리였다. 이것이 발렌스 황제의 죽음을 재촉할 줄 누가 알았을까.
집을 잃고 광야를 떠도는 민족의 설움은 약간의 차별에도 피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다. 비잔티움제국은 이들 서고트족을 마치 포로처럼 취급하면서 깔보기 시작했다. 마치 우리 일제강점기처럼 저급한 하층민이나 식민지 속주로 생각하면서 사사건건 치욕을 안겨주었다. 이들을 마치 전쟁포로 취급을 하는가 하면, 처음 약속한 토지할당은커녕 약간의 경제활동에도 엄청난 세금으로 돌아왔고, 물가 역시 이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요구했다. 빵 한 조각이 금 한 덩이었을 정도였다니 할 말을 잊는다. 억누르면 결국 터지게 마련이다. 드디어 서고트족의 분노가 폭발하고야 말았다.
378년, 흥분한 서고트족은 숨겨준 병장기를 들었다. 본격적인 전투에 임하기 전에 이미 양측 간 크고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이때부터 서고트족 군사들은 로마군 병사의 흉내를 냈다. 마치 전략의 아버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펼쳤던 전술을 그대로 따라해 한니발을 물리친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장군과 같았다. 서고트족은 전투복은 물론 무기까지, 그리고 기병대까지 온전히 갖춘 정예의 부대가 꾸려졌다. 무엇보다 당시 로마군에 편입되어 있던 서고트족 병사들이 아드리아노플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단단히 했다.
드디어 아드리아노플에서 한판 대결이 시작되었다. 로마군과 서고트족의 군사 양측모두 기병과 보병으로 형성되었으며 전형적인 고대 전투양식을 띠고 있었다. 전투력 역시 엇비슷했다. 전쟁은 우습게 시작되었다. 로마 기병은 자신들의 전투능력을 의심치 않았다. 이들은 뒤따라오는 보병이 도착하기도 전에 서고트족의 진영으로 치고 들어갔다. 그러나 의외였다. 서고트 군사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큰 상처만 입고 물러나야 했다. 이때 도착한 로마군 보병은 서고트 진영의 허술한 왼쪽 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이 역시 후속부대의 지원이 있어야 했음에도 한 번 패배를 맛본 기병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간 로마병사들은 협소한 공간에 발 디딜 틈 없이 몰렸고, 서고트 군사들이 숨통을 조여오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가 전멸하고 말았다. 결국 기병이 없는 로마 보병의 옆구리가 허약해지고, 서고트 기병들이 이틈을 파고들었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 군사가 몰리면 다른 허약한 곳을 치고 들어오는 서고트 보병들의 협공으로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로마황제 발렌스가 전사했고, 로마군 3분의 2가 전사했다. 서고트군은 그동안 맺힌 한을 죽음의 굿판을 벌이듯 제국을 종횡무진 누비며 쑥대밭을 만들어버렸다.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두고 고대가 끝나고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전쟁사상 보병에 대한 중장기병重裝騎兵의 첫 승리라는 의미도 부여했다. 서로마 멸망과정을 두고 고대와 중세를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는 서유럽 역사가들이 시야암전증視野暗箭症에 걸린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종이를 둘둘 말아 기다란 두루마기 속을 들어다보는 것 같은, 일정한 초점만 보일 뿐 주변이 보이지 않은 증상에 걸려 있어서다. 어느 한 시점의 사건을 두고 고대와 중세를 나누는 것은 역사가가 아닌 필자가 보더라도 생떼다. 한 시대를 구분하는 데는 어느 복합적인 사건이 원인을 제공하고, 문화와 경제 등과 같은 이질적인 요소가 겹치면서 점진적으로 변한다. 또 중장기병의 첫 승리라는 해석도 오류다. 로마군의 전술적인 오판이었지 결코 보병에 대한 기병의 압도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각설하고, 이 전투를 지켜본 여타 야만 이민족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들도 잘만 하면 로마와 맞붙어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발렌스의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민족 군사를 뽑아 이들을 로마군에 편입시켜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소속만 로마군이었지 지휘체계는 자신들의 부족 출신 장군의 명령하달을 받았다. 이로써 봉건군주제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된다.
로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서고트족은 비잔티움의 성벽이 견고한 것을 확인하고 방향을 틀어 그리스 아테네를 비롯해 여러 도시를 약탈했다. 결국 비잔티움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는 서고트족에게 도나우강 남쪽에 정착을 허락했다. 그러나 이 또한 로마의 책략이었다. 서고트족은 뒤로는 무시무시한 훈족, 앞에는 로마의 틈바구니에 오도 가도 못하는,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고트족은 이판사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이들은 물러설 수 없는 배수진이 아니라 허를 찌르는 선택을 한다. 이들의 상대는 훈족도 아니고, 비잔티움도 아니었다. 바로 이탈리아반도였다. 누구의 전략이었던 간에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다.
로마의 속주로서 로마 변방을 지키는 서고트 군사들은 자신들의 부족 지휘명령계통에 따라 움직였다. 서고트 왕 알리리크(Alaric, 재위 395∼410)는 자신의 부족만이 아니라 휘하에 반달족 군사(로마 상비군 소속) 1만 5천명이 합세해 게르만족 연합군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401년 12월 이들 연합군은 그해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통해 포강 유역 평야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서로마에는 당대의 명장 반달족 출신의 스틸리코가 있었다. 반달족 장군은 반달족 군사들을 당당하게 물리쳤다. 그리고 스틸리코는 동족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다. 전쟁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알라리크에게 황금 4천 파운드의 공물을 주어 그를 달래자며 로마 원로원 설득에 성공한다. 이들을 여전히 로마제국의 병사로 받아들이는 제국 변방의 안정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때 서로마를 통치하던 황제 호노리우스는 수도를 라벤나로 옮긴다.
여기서 잠깐, 395년 서로마 황제이자 호노리우스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는 임종을 앞두고 동서로마 분열에 결정적인 유언을 남긴다. 동로마, 즉 비잔티움은 17세 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서로마는 열 살 난 호노리우스에게 각각 분할 통치하도록 했다. 이로써 동·서로마는 완전히 독립적인 두 개의 제국으로 나눠지게 된다. 이 원인이 여러 가지겠지만, 서고트족의 로마 침략이 이를 부추긴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서로마 수도를 라벤나로 옮긴 호노리우스는 해마다 보내던 공물을 중단하는 등 본격적으로 게르만족을 홀대하면서 철저하게 이들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그의 강경노선이 맞아 떨어졌다. 406년, 반달족과 알란족, 동고트족 연합군이 침략하자 스틸리코 장군은 훈족과 서고트족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이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진골이 아닌,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육두품 이상의 벼슬을 할 수 없었던 신라말기처럼, 야만 이민족출신 스틸리코는 너무 깊숙이 로마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스틸리코의 승승장구를 시기한 원로원 의원들은 그가 게르만족, 즉 적과 내통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충동질했다. 이를 눈치 챈 스틸리코는 성당에 몸을 숨겼지만, 결국 붙잡혀 목이 잘리고 만다. 성급하고 너무나 뼈아픈 판단이었다. 제국의 명장을 자신들 손으로 제거하자 지휘자를 잃은 로마의 군사들은 멘탈붕괴에 빠졌다. 젊은이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전쟁터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함과 죽음을 함께 넘나들면서 자신의 용기를 믿어주는 지도자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더 넓게는 제국에 대한 애정도 있을 수 있지만, 예부터 남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목숨을 바친다고 했다.
오래전 중국에서의 일이다. 지휘관이 전쟁터에서 부상 입은 병사를 보자 자신의 입으로 병사의 상처에 난 피고름을 짜내주었다. 병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때마침 아들을 찾아온 병사의 어머니는 이 모습을 보고 대성통곡을 했다. 까닭인 즉, 병사의 형 역시 그랬고, 전쟁터에서 장군을 대신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잠시 빗나갔다. 스틸리코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서고트의 알라리크는 광분했다. 물론 약속한 황금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또 하나 정착지를 찾지 못했던 서고트족으로서는 안정된 기반의 영토 확보가 가장 중요했다. 알라리크는 지금의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지방에 정착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서방황제 호노리우스가 이를 거절했다. 치욕을 느낀 알라리크는 군사를 일으켜 라벤나를 공격해 들어갔다. 이때가 408년이다. 알라리크는 로마를 포위하고 교통을 차단하면서 수로를 끊었다. 그리고 생활필수품을 운반하던 테베레강을 봉쇄하자 로마는 두 손발을 다 들어야 했다. 로마에 입성한 알라리크는 호노리우스를 폐위하고 후임에 로마시장이었던 아탈루스를 황제에 세운다. 로마로서는 치욕적이었지만, 굴종을 감내해야 했다. 아탈루스가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앉힌 알라리크를 로마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졌다. 알라리크 역시 총사령관 자리에 만족해하며 자신의 군사가 로마를 약탈하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이때 라벤나에 몸을 숨기고 있던 호노리우스는 새 황제가 된 아탈루스의 군대가 북아프리카에서 자신의 군사들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호노리우스는 쾌재를 불렀다. 이때 알라리크는 다시 이상한 판단을 내린다. 자신의 손으로 세운 아탈루수를 황제에서 끌어내리고 다시금 호노리우스를 복원시킨다. 그럼에도 호노리우스는 알라리크에게 약속한 공물을 보내지 않았다. 더 나아가 호노리우스는 지난 날 약속은 모두 폐기 되었다고 선언한다.
410년 화난 알라리크는 군대를 동원해 로마 성벽에 다시 나타났다. 결사항전을 다짐했던 로마군의 용기는 한낮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로마에 살던 서고트족들이 야밤을 틈타 성문을 활짝 열었던 것이다. 이민족에 의해 로마가 점령당한 것은 기원전 390년 켈트족에 의해 7개월 간 탈탈 털린 이후 두 번째다. 알라리크는 관습대로 병사들에게 6일간 약탈을 허용한다. 훗날 서구 역사가들에게도 이 날은 치욕의 기록으로 남는다. 하여튼 알라리크는 일반인들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아니, 엉뚱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 스스로 황제가 되어 이탈리아를 통치할 수도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그러지 않았다. 아주 신사적으로(아마 스스로 로마군 총사령관이란 견장을 무게 있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약탈을 마친 이들이 물러났고, 이들이 떠난 로마는 교회만 남기고 모든 것이 무너지고 불탔다. 로마는 상처뿐인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알라리크의 운도 여기까지였다. 그해 아프리카 원정길에 폭풍우를 만나 물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 만약 알라리크가 호노리우스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면 어찌 되었을까? 최소한 물귀신이 되는 운명은 피했을 것이고, 서로마의 미래도 그 어떤 식으로든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알라리크의 뒤를 이어 서고트의 왕좌에 오른 아타울푸스는 비록 아리우스파이긴 해도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리고 로마를 도와 412년 갈리아로 군사를 몰아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는 이오비누스와 세바스티아누스를 응징하고, 남부 갈리아 일대를 평정하는 기염을 토했다.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서고트족에게 뜨거운 맛을 본 터라 아타울푸스에게 화친의 손을 내밀었다. 아타울푸스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 로마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이자 호노리우스의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가 서고트족의 인질로 잡혀있었다. 414년 아타울푸스와 갈라 플라키디아는 현재 프랑스 남부도시 나르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아타울푸스는 본격적으로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호노리우스는 서고트족을 못마땅해 했다. 415년, 결국 자신의 휘하 장수(기실 실권을 장악한 정치군인, 훗날 콘스탄티우스 3세 황제에 오른다)로 서고트족을 이베리아 반도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베리아 반도로 쫓겨 가긴 했어도 아타울푸스로서는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몰랐다. 불의의 습격을 받아 객사 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이때 이베리아반도는 무주공산, 아니 프랑크족에게 밀리고 밀려서 서진을 이어갔던 반달족이 이곳에 정착하고 있었다. 반달족 외에도 에비·아란족 등 여러 게르만족의 각축장으로 변해있었다. 아타울푸스는 이들을 아프리카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안달루시아를 서고트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아타울푸스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415년 바르셀로나에서 그가 가장 믿었던 시복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후 왕후 갈라 플라키디아가 이를 계승한다. 그러나 417년 갈라 플라키디아는 로마 장군이자, 자신의 남편을 몰아낸 콘스탄티우스 3세와 재혼해 훗날 황제에 오를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낳는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황제에 오른 그해 421년에 갑작스레 죽어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등극하자 그녀가 섭정을 펼치기도 했다.
갈라 플라키디아가 떠나고 없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왕국은 알라리크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왈리아가 계승한다. 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지방인 보르도와 푸아티에, 톨로즈 등을 포함한 아키텐 지방에 서고트족을 정착시킨다. 한편 서고트족에게 밀려 쫓겨난 알란족은 피레네산맥에서 바다에 이르는 에브르강을 따라 정착하면서 지금의 포르투갈인 루시타니아 각지로 흩어져서 정착했다. 포르투갈인의 기원인 셈이다.
이로써 서고트왕국은 프랑스 남서부 아키텐 지역과 현재 에스파냐의 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거듭 말한 것처럼 왕족들 간 왕위 계승문제로 늘 소란했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250여 년이 흐르고 702년이 되면서 서고트 왕 위티사는 귀족들이 돌아가면서 왕좌에 오르는, 혹은 귀족들의 투표로 왕을 선출하는 제도에 브레이크를 건다. 자신의 아들 아길라를 후계자로 만들고, 자신이 죽으면 왕위를 계승하게끔 법을 바꿔버린 것이다. 당연하게도 분노한 귀족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막상 왕인 위티사가 살해당하자 아길라를 지지하는 편과 전통대로 왕을 선출하려는 측으로 나뉘어 권력암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귀족들의 투표로 선출된 로드리고 공과 아길라 간의 힘의 대결은 군대를 더 많이 보유한 귀족들의 승률이 높았다. 위기를 느낀 아길라는 이민족을 끌어들여 자신의 왕권을 지키려 했다. 아길라는 지브롤터해협 건너 아랍인과 베르베르인 등이 모여 사는 무어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냈다. 탕헤르의 무어인 영주 빈누사이르로서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 채 굴러왔다. 그는 늘 삭막하고 무더운 아프리카보다 바다 건너 따뜻한 기후를 가진 풍요의 땅 이베리아반도에 쳐들어갈 구실을 찾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 스스로가 병사를 보내달라니 한판 잔치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었을 게다. 빈누사이르는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에게 1만 2천 명의 병사를 딸려 14킬로미터 남짓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로 보낸다. 이때가 711년이다. 이슬람 군대는 단숨에 로드리고 군을 격파하고, 도움을 요청했던 아길라 군대까지 쓸어버렸다. 그리고 이들을 북쪽 산악지대 아스투리아스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이베리아반도는 이슬람의 천국으로 변했다.
서고트 왕국의 종말의 원인은 내부 분열에 있었다. 개인의 권력욕에 눈이 멀어 이민족을 끌어들이면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732년 북진을 이어가던 이슬람군은 푸아티에와 투르에서 프랑크왕국 카를 마르텔(훗날 카를 대제의 할아버지) 군대에게 패함으로써 피레네산맥에서 진격을 멈춘다. 이때 피레네산맥을 경계로 가톨릭과 이슬람으로 나눠진다. 물론 훗날 가톨릭교도들의 국토 되찾기 운동, 즉 레콘키스타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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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지식백과 ‘샤를마뉴 [Charlemagne]’ - 서유럽을 통일하고 황제에 즉위한 카롤링거 왕조의 군주 (인물세계사)
* 허인 신성 로마 제국 《이탈리아사》, 2005. 3. 1., 위키미디어 커먼즈
첫댓글 그럼요... 계약은 6하원칙에 따라 시간(일시), 장소, 어떻게 등 내용이 분명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