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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씨를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후열
지씨,정씨의 유래sfklsdf| 2006.08.28 19:39 |조회 2435|신고
지백호와 지충강의 후손라고 하는 충주지씨와 봉주지씨, 지백호와 신라의 개국공신 지충강와의 혈연관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 할수 없다.
지씨의 유래
(중국)
中朝
我池本自中國來故,其見(현)於歷史紀籍者,采錄于篇首῁
(우리 지씨가 본래 중국으로부터 온 까닭에, 그 역사와 기적에 나타난 것을 책머리에 채록하여 둔다)
統譜曰,池望出西河,以居爲氏῁
(통보에 이르기를, 지(池)는 멀리 서하에서 나왔고, 거주지로서 성씨를 삼았다)
韻書曰,林郭園池,以居爲氏῁風俗通曰,蓋姓有九,或氏于號,或氏于諡,或氏于爵,或氏于國,或氏于官,或氏于字,或氏于居,或氏于事,或氏于職,以號唐禹夏殷也,以諡戴武宣穆也,以爵王公候伯也,以國曺魯宋衛也,以]官司馬司徒司空司城也,以字伯仲叔季,以居城國園池也,以事巫卜陶丘也,以職三島五鹿靑牛白馬也.
(운서에 이르기를, 임씨, 곽씨, 원씨, 지씨는 거주지로서 성씨를 삼았다. - 풍속통에 이르기를 대개 성씨는 아홉종류가 있는데, 어떤 성씨는 號에서 그 성을 취하고, 어떤 성씨는 諡에서, 어떤 성씨는 爵位에서, 어떤 성씨는 國名에서, 어떤 성씨는 벼슬이름에서, 어떤 성씨는 字에서, 어떤 성씨는 거주지에서, 어떤 성씨는 하는 일에서, 어떤 성씨는 職業에서 성을 취했다. 號로서 취한 성씨는 당, 우, 하, 은씨이고, 諡로서는 대, 무, 선, 목씨이고, 爵位로서는 왕, 공, 후, 백씨이고 나라로서는 조, 노, 송, 위씨이고, 벼슬이름으로서는 사마, 사도, 사공, 사성씨이고, 字로서는 백, 중, 숙, 계씨이고, 거주지로서는 성, 국, 원, 지씨이고, 하는 일로서는 무, 복, 도, 구씨이고, 직업으로서는 삼도, 오록, 청우, 백마씨이다)
燮理於秦,占魁於[宋] 本註,池子華爲秦相,池夢鯉爲宋咸淳特科壯元.
(秦나라에서 섭리하고(燮理: 고르게 다스림), 宋나라에서 우두머리를 점하다. - 본주는 지자화가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고, 지몽리는 송나라 함순(;年號)간에 특과 장원하였음을 말한다)
中牟賢令,長溪名儒 本註,漢池瑗爲中牟令,有賢名,宋池光庭,端平進士,文學馳名,長溪人
(중모지방에 어진 수령, 장계지방의 이름난 선비. - 본주는 다음을 말한다. 즉, 한나라때 지원이 중모령이 되어, 어진 명성이 있었고, 송나라때 지광정이 단평(;年號)간에 진사가 되고,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장계사람이다.)
後漢蔡邕陳留東昏庫上里社碑曰惟斯庫上里曰東昏縣者衛地古陽武之戶涨鄕也秦時池子華爲丞相漢興陳平由此爲社下宰遂相高祖克平天下爲右丞相孝平之世虞延爲太尉熹平中延曾孫放爲尙書令宰相繼踵咸出里乃斯社所相乃樹碑作頌 見(현)淵鑑類函(연감유현에 나온다)
(후한 때, 채옹진이 동혼 고상리에 사비(社碑)를 두면서 말했다. 오직 이 고상리만을 동혼현이라 한 것은 위나라 땅으로 옛적 양무가 살던 고향 마을이기 때문이다. 진나라 때에는 (이곳 출신의) 지자화가 승상이 되고,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는 진평이 이곳에서 유래하여 사하재가 되어 마침내 한(漢) 고조(高祖)를 도와 천하를 능히 평정하여 우승상이 되고, 효평간에는 우연(虞延)이 태위가 되고, 희평중에는 연(延)의 증손 방(放)이 상서령이 되니, 재상이 끊이지 않고 이어서 모두 이 마을에서 나오니 이는 곧 이 社가 도운 것이요, 그리하여 비석을 세워 이를 기리노라)
중국의 지씨 역사 인물
池子華 秦丞相
(지자화. 진나라 승상)
池瑗 漢中牟令
(지원. 한나라 중모령)
池鄂 宋治平二年進士,候官人
(지악. 송나라(이후 宋나라) 치평 2년에 진사가 되다. 후관사람이다)
池聘 嘉定間,知宜州,平陽人
(지빙. 가정(;年號)간에 의주지방의 知事가 되다. 평양사람이다)
池從周 字子文,嘉定特科壯元,受業于朱子,黃巖人
(지종주. 자는 자문, 가정에 특과장원하고 주자에게 수업하다. 황암사람이다)
池光庭 端平進士,高州文學,長溪人
(지광정. 단평간에 진사가 되다. 고주문학에 속한다. 장계사람이다)
池夢鯉 咸淳甲戊特科壯元
(지몽리. 함순 갑무년에 특과장원하다)
池浩 皇明成化中,爲廣東香山知縣,徐州人
(지호. 황명(이후 明나라) 성화 중에 광동 향산의 지현이 되다. 서주사람이다)
池龍 正德進士,瞵鹿衛人
(지용. 정덕(:年號)간에 진사가 되다. 탁록위 사람이다)
池麟 正德中鋸鹿訓,汾州人
(지린. 정덕중에 거록훈(?)이 되다. 분주사람이다)
池浴德 嘉定進士,福建同安人
(지욕덕. 가정간에 진사가 되다. 복건 동안사람이다)
池榮 字仲先,號大明先生,精醫理
(지영. 자는 중선, 호는 대명선생, 의술에 정통하였다)
한국 지씨의 유래
삼국유사의 ‘신라 시조 박혁거세편’을 보면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던 육촌(六村) 중 진지촌(珍支村)의 촌장이 지백호(기원전 57년 전후)라 나와있다. 그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신라 고대사에 보면 신라 51년(기원전 7년) 신라 시대에 지충강(신라개국공신)이 8학사의 일원으로 조정대신에 역임되었으니 곧 고관대작 재상직이란 말이다. 이렇게 지백호의 후손도 재상직을하며 대를 이었음이 증명된다. 그 후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 지씨가 경주 정씨로 성을 하사받았고 곧 본피부 최씨의 조상이다. 하지만 524년이 지난 무열왕 시대에도 계속 지백호라 호칭된 것으로 미루어 그의 후손 중 계속 지씨를 사용한 후손이 있었음이 밝혀진다. 이 사실들은 삼국유사의 내용과 박정희 대통령의 방침에 따라 신라시대의 문물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학술조사단에 의해 숭덕전 서장에서 발굴된 것이다.
우리들이 이미 매스컴을 통해서 신라 고적에서 많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사실 중에 지가(池家)에 대한 고대 자료가 있다는 것은 아는 이가 많지 않다.
池門이 그동안 편수 간행된 문헌지와 족보에는 고려 광종때 지경 선생이 시조로 처음
오신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백호와 지충강 선생은 알려진 시조 지경선생 보다 1000년 전에 신라에서 고관대작의 재상직에 있었으니 필시 그 후손들이 국내에서 대를 이었으리라. 또 봉주지씨와 경주정씨와 충주지씨의 혈연관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도 고대는 소상히 증빙할 수 없듯이 지가의 역사도 또한 소상하게 고증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앞에서도 서술하였듯이 충주 지씨의 시조인 지경은 중국 당나라 때인 서기 903년 10월 15일에 태어나셨다고 하며, 중원홍농(中原弘農) 사람으로 자는 자운(自雲)이요, 호는 암곡(巖谷)이니, 송의 태조가 천하를 통일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던 시절에 송나라의 태학사(太學士)란 벼슬에 계시면서, 새 나라의 문물제도를 구비하는데 노력하시다가 사신으로서 고려에 오시게 되었다. 그때가 고려의 제4대왕 광종 2년(서기951년)인데, 고려가 개국된지 40년 밖에 되지 않아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정비하고 있던 때이라, 고려 조정에서는 송나라에서 오신 시조할아버지의 식견과 경험이 긴요하던 때였다. 그래서 시조할아버지께 고려에 그냥 눌러 계실 것을 간청하였고, 고려인들이 새로운 학문과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진지한 자세에 감동하시어 본국의 승인을 얻어 이를 쾌히 승낙하시니 이 때가 광종 11년(서기960년)이었으며 여기서부터 충주지씨(忠州 池氏)가 시작된다. 그 후 시조 지경은 고려초기의 미비한 문물제도를 정립하시어 많은 공을 이루시니 조정에서는 위에서 세 번째 차례인 "금자광녹대부(金紫光綠大夫)"라는 높은 벼슬을 내리고, 지금의 수상급에 해당하는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라는 직위를 내리셨다. 태보란 삼사의 하나로 임금의 고문으로 국가 최고의 명예직이며, 평장사는 내사시낭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이름인데 오늘날 수상 급에 해당되는 최고 벼슬로 고려의 문하부에 속하였다. 고려 목종 6년 서기 1003년 9월 9일에 향년 101세로 서거하시니, 시호 (諡號 ; 功이 많은 신하가 죽은 뒤에 왕이 내려주는 호)는 선의공(宣懿公)이다.
충주를 본관으로 정하게 된 것은 시조할아버지의 5세손 되는 지종해(池宗海)께서 고려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란 높은 벼슬을 지내시고 식읍(공이 많은 신하에게 어느 고을을 맡겨 군(君)으로 봉하였기로 이로부터 충주가 본관(本貫)이 된 것이다.
-시조할아버지의 묘소는 평안남도 중화군 간동면 부원리 화문동에 있는데 남북이 분단되어 직접 찾아 참배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피눈물나는 원통함이 아닐 수 없으며 근래에 와서 충주시내에 추모비를 세워 제사를 모시고 있다.
-광주시 금호동 소재 2만여평 임야 전답에 병천사를 짓고 그곳에 충원부원군 용기공, 철산부사 여해, 충성군계 공등 삼대조상의 위패와 존영을 모셔놓고, 매년 영호남 일대의 유림들이 운집한 가운데 큰 제사를 봉행한다. 서기 1979년에는 지방문화재 75호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보호하고 있으며, 충신각은 충남 서천군 판교면 후동리에 있다.
[족보 발행]
-신유보 : 광해군 13년(1621년)에 간행
-갑자보 : 영조 20년(1744년)에 간행
-기축보 : 영조 45년(1769년)에 간행
-계축보 : 철종 4년(1863년)에 간행
-을사보 : 광무 9년(1905년)에 간행
-정묘보 : 일제시대 (1927년)에 간행
-갑오보 : 해방이후 (1954년)에 간행
-기유보 : 근대이후 (1969년)에 간행
-경오보 : 현대이후 (1990년)에 간행
-합동보 : 현대이후 (1995년)에 간행
[재실과 선조 제향일]
◎재실
-병천사 : 충주지문출신 충신, 선조 영정 봉안 - 음력 3월 13일
-의충사 : 음력 9월 13일
-저존재 : 시조 선의공, 귀명 등 29위 내외분 봉안 - 10월 셋째 일요일
-영언제 : 참의공계 하동, 노량종중 재실 - 음력 10월 20일
-경모재 : 음력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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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제향일
-16세 지복룡 : (관직)문하찬성사 - 음력 10월 7일
-16세 지용도 : 충의공 고려상원수 - 음력 10월 8일
-17세 지용기 : 충원부원군 문하평장사 - 음 10월 7일
-18세 지유용 : 의주 목사공 - 음력 10월 4일(이분이 중시조임)
-19세 지 개 : 선공감직장 - 음력 10월 4일
-19세 지 호 : 한성부소윤 - 음력 10월 4일
-21세 지봉원 : 충청절세사 우송공 - 음 11월 9일
충주지씨의 시조 선의공 지경(903~1003)할아버지
[-시조 지 경 (지 경) 公 (서기 903-1003) 께서는
중국 당나라 때인 서기 903년 10월 15일에 태어나셨다고 하며, 중원홍농(中原弘農) 사람으로 字는 자운(自雲)이요, 호(號)는 암곡(巖谷)이니, 송(宋)의 태조(太組)가 천하를 통일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던 시절에 宋나라의 태학사(太學士)란 벼슬에 계시면서, 새 나라의 문물제도를 구비하는데 노력하시다가 사신으로서 고려에 오시게 되었다.
그때가 고려의 제4대왕 광종 2년(서기951년)인데, 고려가 개국된지 40년 밖에 되지 않아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정비하고 있던 때이라, 고려 조정에서는 송나라에서 오신 시조할아버지의 식견과 경험이 긴요하던 때였다. 그래서 시조할아버지께 고려에 그냥 눌러 계실 것을 간청하였고, 고려인들이 새로운 학문과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진지한 자세에 감동하시어 본국의 승인을 얻어 이를 쾌히 승낙하시었다. 이때가 광종 11년(서기960년)이었으며 여기서부터 忠州 池氏가 시작됩니다.
고려초기의 미비한 문물제도를 정립하시어 많은 공을 이루시니 조정에서는 위에서 세 번째 차례인 "금자광녹대부(金紫光綠大夫)"라는 높은 벼슬을 내리고,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라는 직위를 내리셨다. 태보(太保)란 삼사의 하나로 임금의 고문으로 국가 최고의 명예직이며, 평장사(平章事)는 내사시낭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이름인데 오늘날 수상 급에 해당되는 최고 벼슬로 고려의 문하부(門下部)에 속하였다. 고려 목종 6년 서기 1003년 9월 9일에 향년 101세로 서거하시니, 시호 (諡號 ; 功이 많은 신하가 죽은 뒤에 왕이 내려주는 호)는 선의공(宣懿公)이요, 묘소는 당악 화산정(唐岳華山亭), 지금의 평안남도 중화군 간동면 부원리 화문동 화산정입니다. 고려 때는 평장사(수상급) 36명을 배출한 명문 거족으로 융성하였습니다.
[충주지씨 종훈(宗訓)]
언(言)과 애(愛)로 단합(團合)하자
봉선(奉先)하고 개후(啓後)하자
봉산 지씨의 시조 지채문(智蔡文)은 고려 때의 명장인데, 그의 선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 할 수 없다. 다만 경주정씨 시조 지백호와 신라의 개국공신 지충강는 그는 후손와 충주지씨 시조 지경와의 혈연관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 할수 없다.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군이 내침했을 때 많은 전공을 세웠고, 또 왕의 피난길을 호종하여 신변의 위기를 막아 난이 평정된 후 공으로 토지를 하사받고 무관으로서 우상시(右常侍)를 겸직했다. 후에 상장군(上將軍)·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덕종이 즉위하자 일등공신에 추록되었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봉산(鳳山 : 봉주의 별호)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경주정씨시조는 지백호(智伯虎). 신라초의 진지촌장(珍支村長)이었다.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공으로 신라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졌다. 경주정씨의 시조가 된 것은 신라 유리왕 때 시조의 5세손 동충이 鄭氏로 사성(賜姓)된데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경주정씨는 모두가 지백호를 시조로 하여 기세(起世)하고 있다. 그 뒤 후손들은 연일. 동래.온양. 초계. 하동. 진양. 진주 등 120여 성씨로 分貫된다. 경주정씨 本宗은 계림, 월성 등으로 쓰여지다 고려조에 문과에 올라 정당문학과 평장사를 역임하고 월성군에 봉해진 문정공 정진원(鄭珍原)이 경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그를 中祖로 하고 있다. 경주정씨는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4파로 분파되어 2천여년 동안 78세의 大宗을 이루고 있다. 시조의 44대손 창열공(彰烈公)은 위(偉)와 교(僑) 두 아들을 두었다. 위의 아들 현영(玄英)은 고려조에 문하시중을 지내고 문헌으로 시호를 받아 문헌공파가 되었다. 조선조의 개국공신인 희계(熙啓)는 시호를 양경으로 받아 양경공파가 되었다. 고려조의 부마 이기는 월성위에 책봉되어 월성위공파라 했으며 고려조에 평장사를 역임한 필(弼)은 평장공파를 이루었다.
신라 1천년 왕업에 개국공신인 6부 중에서도 경주 한복판을 차지한 정씨들이었지만 신라 때는 인물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전해지는 이름은 신라말엽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권을 독점했던 장보고의 동지 정년(鄭年)이 있다. 그는 젊어서 단짝 친구 장보고와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무관으로 입신했다. 당시 황해에서 날뛰던 해적들로부터 모국 신라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장보고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신라 조정을 설득했다. 그 후 청해진(전남완도)을 근거로 해적들을 소탕하고 서해, 남해항로의 무역권을 독점하게 되자 정년도 뒤따라 귀국, 장보고의 오른팔 노릇을 했다.
중시조 정진후(鄭珍厚)는 고려조 문과에 급제한 뒤 요직을 거쳐 월성(경주)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경주정씨의 중시조가 된 그의 묘소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노곡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1일에 제사를 지낸다.
문헌공파의 파조인 정현영은 시조 지백호의 46대손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뒤 호부상서(戶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조선조의 영의정격)을 역임했으며 후손들은 전남지방에 집성(集姓)하고 있다. 정휘(鄭暉)의 아들인 정희계는 이성계의 쿠데타에 참여, 조선이 들어서자 개국 1등 공신으로 봉해지고 좌참찬과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조선조에 경주정씨는 15명의 문과급제, 30명의 무과급제자를 냈다.
그중 가장 추앙받는 이름은 임진왜란 전쟁의 벽두에 나라의 관문인 부산진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 첫 순국으로 기록된 묵의(墨衣)장군 정발(鄭撥)이다. 중시조 정진후의 7대손, 정희계의 6대손인 정발은 25살에 무과에 올라 해남현감, 거제현령, 사복사정(司僕寺正)등을 거쳤다. 왜란이 나기 석달전 부산진첨절제사로 부임했다. 1592년 4월13일 대륙을 노략질하던 일본 3島(本州. 九州. 四國) 왜구들이 풍신수길의 통솔 아래 전면침략을 감행, 새벽 안개 속에 부산 앞바다를 뒤덮었다. 5백여척 병선에 나누어 탄 침략 왜구의 1진 15만8천여명을 소서행장 등 6명의 장수가 지휘하였다. 鄭장군은 영도(影島) 순찰 중 왜병 전위와 맞부딪쳐 수백명을 참살했했다. 그러나 수가 달려 본성으로 후퇴, 성문을 닫아 걸고 굳게 지켰다. 검은 군복을 입고 진두에 나서 군인을 지휘하는 장군의 모습에서 왜병들 사이에 흑의장군이란 명칭이 붙었다. 다음날 적의 총공격에 장군을 중심으로 뭉친 군민은 남녀노소 없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적을 무찔렀으나 중과부적, 적의 조총에 장군이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장군은 성을 지키며 인근 고을에 특사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왜병의 세력에 놀란 인근 고을 수령들은 대부분 도주, 왜구는 부산진을 점령한 뒤 거의 큰 저항 없이 서울까지 진격했다. 장군의 용전 사실은 전쟁기간 중 조정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뒤늦게야 조정에서는 그에게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장의 시호를 내리는 한편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사당을 지어 배향했다. 충열사는 현재도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에 남아 향사가 받들어지고 장군의 동상도 부산시 초량동에 세워졌다. 정발의 외아들 정근은 충청도 수군절제사 등을 거쳤다.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전라수사로 승진했으며 이괄난 때도 공을 세워 호위대장에 올랐다. 이밖에 정응룡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홍의장군 곽재우와 함께 분투하다 순절했다.
정홍덕은 1419년 문과에 급제 병조판사 등을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단종이 손위(遜位)하고 죽게 되자 벼슬을 떠났다. 그는 처음에는 신하의 절개를 지켜 순절하려 했으나 8순 노모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남원 교룡산 아래로 가서 은거했다. 壇2개를 세우고 매년 단종의 기일과 사육신의 기일에 분향하고 호곡하는 등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2000년 현재 전국에 30만4천명이 살고 있다. 성씨본관별로 27번째 많은 성씨다.
지백호의 후손라고 하는 충주지씨와 봉주지씨, 지백호와 신라의 개국공신 지충강와의 혈연관계에 대해서는 고증할 문헌이 실전되어 정확히 상고 할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