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서 죽장 방면으로 길을 잡고 가다가 영천댐 방향으로 크게 회전을 하고서 가다보면 자양면소재지를 지나자마자 바로 옆 길가에 자그만 주차장이 나오는데 여기가 영일 정씨 문중 묘역 하천(하절)이다. 보현산과 아래 기룡산을 합하여 모자산이라 불리운다. 기룡산 아래의 이 넓은 명당에는 80여기의 묘역들이 있다. 정말 대단한 명당이다. 수많은 소나무가 무리를 지어 입구에서부터 빽빽하게 묘역을 감싸고 있으며 묘역의 잔디는 눈이 부시도록 황금빛을 발하고 있어 그 웅장한 기운 앞에 온통 압도당하는 기분이다. 앞쪽으로 보이는 드넓은 호수가 영천댐이다. 이 댐의 물은 포항시민들이 마시고, 포스코의 공업용수로도 사용되고 있다. 포항 입장에서 세계문화유산인 양동마을 뒤의 안계댐은 중간 저수지인 셈이다.
기룡산 아래 하천 묘역을 청룡 백호가 세 겹으로 둘러싸는 천하의 명당을 운학雪學스님이 기묘사화로 피신해 온 효자 정윤량에게 점지해 준 것이다. 아버지 정차근의 혈은 기룡의 좌장혈이다. 정윤량, 노수, 김응생, 정거는 포은 정몽주를 배향하는 두 번째 사액서원인 임고서원 창건의 주역들이다. 정윤량은 퇴계의 문인이기도 하다.
심식이 맑은 스님들은 범인들이 감지하지 못하는 지기를 예민하게 느꼈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 사찰들, 왕릉, 이름깨나 하는 양반들의 묘역은 예외 없이 명당들이다.
묘역의 맨 위에 위치한 이 묘소는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로 수복한 영천읍성 전투와 경주읍성 전투에 참가한 의병자들 중 한 분인 호수 정세아 선생의 묘소이다.
충노억수지묘 - 그의 이름은 수억년을 살아야하는 이름이건만...
호수 선생 무덤 아래 그 아드님 백암 정의번과 백암의 종인 억수의 무덤이 있다 백암은 경주성 탈활 작전에 참가하여 3번이나 적진을 뚫고 들어가 아버지를 구하였는데, 그 전쟁의 와중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전사하였다고 생각하고 아들로서 살아 돌아갈 수 없다며 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가 결국 전사하였다. 이 때 종 억수에게는 같이 죽지 말고 살아 돌아가라고 하였다. 억수는 신하는 임금을, 아들은 아버지를, 노비는 주인을 따라 충성하고 절의를 지키는 것이 윤리라고 들었다며, 백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인을 따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해마다 묘사 때 문중에서는 억수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살아난 호수 선생은 아들의 주검을 찾지 못하고 결국 경주에서 영천으로 초혼하여 평소 입던 옷과 갓을 두고 빈소를 차리고 장례는 아들 친구들이 보내어 온 애도의 시를 관에 넣고 치렀다. 그래서 백암의 이 무덤은 '시총(詩塚)'이라 불린다. 백암 정공의 "시총"은 세계에서 유일한 詩 무덤일 것이다. 문학하는 시인, 문인들은 반드시 이 무덤에 와야 할 성지가 아닐까 싶다. 조일전쟁 당시 조선 사람들을 수도 없이 잡아가서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치우고, 수도 없이 많은 조선인들의 코도 베고, 귀도 베어 주렁주렁 목걸이를 하다가 비총(코무덤), 이총(귀무덤)을 만든 섬나라 왜놈의 야만성에 비하면, 우리는 이렇게 시총을 만들었다- 얼마나 대단한 문명 민족인가? 일본은 조선의 도공과 금속활자와 수많은 불교문화재들을 임란 때 약탈하여 갔다. 일본의 도자기가 네덜란드를 통하여 유럽 시장을 제패하였고, 도자기 포장지였던 다색목판화 우키요에는 고호 같은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낳게 하였다.
세호는 좌우 둘다 상승하는 즉 올라가야 하는 것이어늘...
한 겨울 날씨라지만 의외로 포근함을 알 수 있음은 의당 이곳이 명당임에랴. 맨 위 묘소를 둘러보며 아래로 내려오는 길에 마주친 망주석의 세호를 보는 재미도 솔솔한데, 어느 한 곳에서 의외의 그림을 보게 되었다.
허~참 이걸 어떻게 해석하나... 갑자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 애국가가 생각난다. |
출처: 포항역사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보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