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회 光州특위
88년 6월 15일 '5월 광주'는 합법적인 논의의 장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다.
4.13 護憲 반대-6.29-與小野大로 이어지는 봇물같은 민의의 함성에 당시 권력의 핵심에 엄존해 있던 가해자들도 어쩔 수 없이 청문회라는 형식의 진상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회는 88년 6월 27일 본회의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구성을 결의, 민정 12.평민 7.민주 5.공화 3.무소속 1명 등 28명의 위원을 선임했다.
사건의 철저한 진상규명과 광주시민과 국민들의 명예회복, 피해자배상 및 사후처리, 민족적 비극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강구, 책임자처벌 등 5개항이 특위의 임무였다.
특위는 이에따라 같은해 7월 8일 평민당의 문동환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12월 30일까지 모두 32회 전체회의를 갖고 7월18일부터 90년 1월9일까지 47회의 간사회의, 89년 12월31일 全斗煥 전대통령의 증언청취등 사실상 6개월여동안 진상조사활동을 폈다.
특위는 이 기간동안 정부측에 모두 3백62건의 자료를 요구하여 1백65건을 제출받았고 자료검증소위.현장검증소위.한미관계소위.특별법제정 및 사후대책소위원회를 구성해 청문회.문서검증.유골감정의뢰.미국측의 개입여부 조사등 활동을 폈다.
특히 청문회는 89년 11월부터 다음해 12월 31일 全斗煥의 증언을 듣는 것을 끝으로 모두 19차에 걸쳐 70명의 증인으로부터 증언을 청취했다. 증인선정은 5.18민주화운동의 발발동기.전개과정.사후대책 등 크게 3개범주로 나누었으며 불출석 증인은 崔圭夏 전대통령등 13명이었다. 또 미국측의 개입여부와 관련 글라이스틴 前주한대사, 위컴 前주한미군사령관에게 서면질의해 답변을 받아내기도 했다. 증언을 거부한 최규하증인에 대해서는 불출석의 죄와 국회모욕의 죄로 고발조치했고 출국금지를 요청했다.
소위원회별 활동을 보면 문서검증받은 국방부.육군본부.육군 제1문서보존소.총무처에 대하여 2차에 걸쳐 문서검증을 실시 관련문서에 대한 서류검증을 했다. 자료검증소위는 광주교도소.광주지방검찰청.광주기독교병원.전대병원 등에 들러 5.18수감자 명단.변사조사.부상자 치료일지 등을 챙겼다.
현장검증소위는 암매장된 시신 발굴에 주력, 주남마을.송아동 및 효천지역, 녹동마을앞 부엉산등에 대한 유골발굴 및 검증에 나섰다.
광주특위의 이같은 활동을 통해 '5.17은 구체화된 정권찬탈행위였다'고 검증해 내는등 크게 8개의 진상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다. 91년 5월 신민당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발간한 광주특위 1차보고서는 당시 특위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5월의 광주항쟁을 경험한 한국사회는 독재권력의 전략적 공세의 지위가 전략적 수세의 지위로, 그 체제와 모순을 극복하려는 민족.민주운동 세력의 전략적 수세의 지위가 전략적 공세의 지위로 변화되어 가는 역사적 연속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80년 5월 광주항쟁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광주항쟁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국회 조사활동을 통해 밝혀진 객관적인 사실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결국 광주항쟁에 대한 완결적 진상규명은 역사의 과제로 남아 있음을 인식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역사의 순풍을 거슬러 추악한 양심들에 참회의 새살이 돋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광주항쟁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통해 뼈저린 교훈을 공유하고자 우리는 여기 역사의 한 작은 외침으로 광주항쟁의 주요내용을 밝히려 한다..."
보고서는 이어 ▲신군부세력의 12.12 쿠데타와 광주항쟁의 관계 ▲80년초 전군에 걸쳐 실시된 폭동진압훈련 ▲5.17은 구체화된 정권찬탈행위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조작 ▲항쟁초기 계엄군의 과잉진압실상 ▲계엄군의 집단발포와 양민학살의 진상 ▲계엄군의 퇴각이후 광주 상황 ▲광주항쟁의 유혈진압과 미국의 역할등에 대한 진상조사를 특위의 성과로 들었다. 요약하면 신군부는 12.12에서 5.17로 이어지는 정권찬탈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고 미국은 이를 방조한 의혹이 짙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조사가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문동환위원장은 보고서의 권두언에서 "많은 증인들의 출석 거부, 정부의 자료제출 거부, 제출된 자료의 조작, 많은 증인들의 위증 혹은 궤변으로 조사는 계속 난관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고 술회하고 있다.
사실 그랬다. 무엇보다 특위활동 과정에서 진상조사를 어렵게 했던 것은 가해자들이 핵심을 이루는 여당측이 들고 나온 양비론이었다. 군인들의 과잉진압도 있었으나 광주시민들의 폭력시위가 과잉진압을 자초했다는 식의 여당측 논리는 청문회가 가해자들에게 정치적 면죄부를 주려한다는 비난을 살정도로 피해자들을 분노케 했다.
무엇보다 과연 발포 명령자는 누구이고 양민학살에 대한 책임을 누가질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가해자들의 철저한 은폐 때문에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구성 당시부터 태생적 한계를 갖고 출발한 특위로선 더 이상 진상을 밝혀낼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게 '성과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보다 그 이후의 역사진행 방향을 살펴보는게 도움이 될 듯 싶다. 가해자들이 권력의 핵심에 엄존해 있는 상황에서 사법권을 갖지않은 입법부가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가슴아픈 비극이라할 5.18의 진상을 밝히려 했다는게 사실 무리였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광주특위는 89년 12월31일 5공특위와 연석회의에서 全斗煥증인에 대한 증언을 듣는 것으로 사실상 그 활동을 마감한다.
90년 1월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으로 여야 공동 보고서 한건 만들지 못한채 진상규명을 후일로 미뤄야 했다. 3당 합당의 주역중 하나였던 金泳三대통령이 93년 5월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5.13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이후 특별법제정, 全斗煥.盧泰愚구속수감 및 재판회부로 이어지기까지 5.18은 가해자들에게 한동안 이미 금전으로 보상해버린 과거사가 됐다.
<특별취재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