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
ㅡ최원
우리는 회현동의 오래된 삼류 호텔 술집에 함께 있었다 명신과 나는 술을 나르고 미주는 술을 따랐다 아진은 미주의 옆자리에서 사내들에게 쉽게 가슴을 꺼내 보이던 여자 미주는 아름다운 구슬처럼 화장한 검은 눈이 도도한 여자 그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사내는 없을 것이므로 미주가 지나칠 때 이는 바람 앞에서 명신과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그것이 그녀의 영혼이라고 생각했던 명신은 언제부턴가 미주의 앞에서 말을 쉽게 잊었다 미주는 많은 사내들이 찾는 여자였으므로 취한 메뚜기처럼 룸을 옮겨 다니곤 했는데, 그러다 사내들에게 들키곤 했는데, 명신은 미주 대신 따귀를 맞았고 미주는 호텔 룸 키를 들고 사내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날 술집에서 명신은 마른 화초처럼 취했다 어릴수록 흔한 일에 분노했고 명신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막 전역한 명신은 눈이 붉은 사내 미주와 아진을 꼬드겨 질척하게 놀아 볼까 반쪽짜리 농을 치던 나를 노려볼 때도 복학할 때까지 만이라고 더듬더듬 말할 때도 그랬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내들은 미주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룻밤 사랑하고 한동안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긴 시간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긴 시간 잊곤 하며 시간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몇 년 후 명신은 지하철 기관사가 됐다고 마지막 전화를 했다 그렇게 흘러가던 시간의 끝인 어느 아침 출근길 미주를 본 것이다 내가 열차에서 내리고 반대 방향에서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모이고 해 뜰 무렵 헤어지던 시절의 기억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 원숙한 여인은 미주였을 것이다 찌익찌익 옷상자에 박스테이프 붙이는 소리가 먼지처럼 매캐하던 회현동의 지하철역이었으므로 미주여야 했다 명신 또한 그 시각 뜨거운 바람을 몰고 들어오던 열차의 운전석에서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아직 열차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어야 하는 것이다 한 시절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듯, 어둠 속을 달리던 명신에게 인파 속에서도 그 시절의 사랑을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의무였을 것이다 그날 거기에 미주가 있었고 내가 미주를 봤으며 명신도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을 시간이라는 말을 뼈저리게 공감하며 명신의 붉은 눈은 미주를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나와 아진, 그리고 낡은 술집에서의 한때를 기억해 냈어야 한다 그 시절의 표정으로 문 닫는 것을 잠깐 잊어도 좋았을 것이나 명신은 미주를 향한 욕망 혹은 채우지 못한 욕정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떠올리며 열차를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운행은 순조로울 것이고 명신은 조금은 들뜬 그러나 중년의 목소리로 차내 방송을 했을 것이다 문 닫습니다 열차 출발합니다 이 열차는 당고개를 출발하여 오이도까지 가는 열차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특별한 날의 특별한 방송을 중년의 명신은 했을 것이다 지하를 벗어나 중천을 향해 서서히 기어오르는 태양빛 가득한 지상을 언덕을 지나 평지로 때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흰 구름의 동쪽에서 노을 짙은 서쪽으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바랄 법한 생을 빗댄 방송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쁜 출근길 말 없는 사람들이 생은 어찌 됐건 해피엔딩이라고 믿으며 출근 도장을 찍을 것이고 하루를 또다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바라듯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 상투적인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이유이지 않은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가볍게 쥔 주먹에서 사연의 모래가 유행가처럼 흘러내려 세상은 뿌연 삶의 색이다
/<시작>2015년 신인상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