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10절-12절: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12절: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했으니까 진리를 사랑함은 아들을 사랑함이 되는 거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뭘 사랑한다? 진리를 사랑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면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다. 또 아버지를 사랑하면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버린다면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지키는 것이 들어있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등한시 한다. 그러니 거짓말쟁이다.
사랑의 표현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든지,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든지,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면 사랑을 한다는 표현이 어떤 방법으로건 들어간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표현이 안 들어가는 사람은 뭐냐? 로봇이냐?
진리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게 된다. 아들은 누구를 잘 알게 하느냐? 아버지를 잘 알게 한다. 아들은 천국을 상속을 받는다. ‘아들’ 하면 상속을 받는다는 것이 들어있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의 소원 목적을 잘 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원 목적을 잘 안다.
그렇다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 목적을 잘 아느냐? 모르고 있다면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나는 천국을 상속받는다. 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산다’ 하고 말은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소원 목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걸 진정한 의미에서 어떻게 아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자식이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아들을 사랑치 아니하면 아버지도 모르는 거다.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아는 거니까.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사랑치 아니하면 길에서 진노하심으로 망한다고 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아들을 사랑치 아니하면 길에서 망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예수님을 믿던 안 믿던, 사랑을 하던 안 하던 그것은 인간에게 달린 것인데 아들을 사랑치 아니하면 길을 가다가 망한다고 하니 이게 무슨 말이냐? 아들을 사랑치 않으면 장사를 하다가 망한다는 말인지?
예수를 믿어도 엉터리로 믿는다면 길에서 진노를 받고 망하느냐? 예수를 안 믿으면 당연히 길에서 진노를 받아 망하는 거고? 그렇다면 예수를 믿어도 잘못하면 길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망하고, 예수를 안 믿어도 망한다면 아예 예수를 안 믿고 진노를 받고 망하는 게 좋으냐, 믿을 바에야 확실히 믿고 진노를 안 받고 가는 게 현명한 방법이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가 가정에서 보면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것도 없고, 아버지에게 욕을 한 것도 아니고, 밖에 나가서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고 다만 아버지를 모른다고 할 때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진노를 안 하겠느냐? 아들이 좋아하는 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끊고 있다면 아버지가 가만히 있겠느냐? 당연히 진노를 하게 된다.
인간 나는 하나님께서 육체의 어머니 아버지의 피로 모태에서 뭉쳐서 인격자 도덕성자로 지어서 가치판단 평가를 할 줄 알고 희로애락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을 만들었으니 인간 나의 근본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인간 나는 마땅히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자기가 인간으로 태어났느냐? 그렇다면 태어나자마자 ‘하나님, 왜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 놨습니까? 돌멩이나 강아지로 만들어 놓지 않고 나를 왜 인간으로 만들어 놨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이 세상에서 6, 70년 동안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깨달아서 하나님처럼 속마음이 닮아서, 지혜지식 도덕성 능력성이 잘 닮아서 하늘나라에 들어올 자다. 하늘나라에서 너랑 나랑 재미있게 영원히 살자’ 그렇게 말씀을 하시게 된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은 영원 궁극적인 하늘나라 천국에서 영능의 실력대로 그 천국을 누리며 영원히 살게 하려고 인간 자기를 만들었다. 그러니까 인간 자기는 이 세상에서 돼지처럼 배부르면 이불 속에 들어가서 드러눕고 배고프면 일어나서 퍼먹고 그러는 네가 아니다. 죽음 저 넘어 천국이 있다. 하늘나라가 있다. 그곳에 가서 살 너다.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자기 평생을 바로 살다가 늙어서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게 좋다? 아니다. 귀신이 되어서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게 좋다? 아니다. 땅속에서 지렁이처럼 계속 기어 다니는 게 좋다? 어느 게 좋으냐? 천국에서 살 우리다. 하늘나라가 좋다.
우리가 세상만물을 보고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땅속에서 사는 지렁이가 눈이 필요하냐? 눈을 뜨고 있으면 눈에 흙이 들어갈 것이니 눈을 감고 살아야 한다. 그럴 바에야 아예 눈이 없는 게 좋지. 우리는 이런 걸 정신과 마음으로 보고 ‘예수 믿는 게 뭐다’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하나님과 같이 신령천국을 누리게 해 줄 목적으로 지었으니 인간이 태어난 자체가 하나님과 관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관계를 짓고 살면 내가 죽으면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같이 그 천국을 누리게 되는 것이고, 이 관계를 짓고 살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또 들어있다. 닮아도 열심히 닮으면 상급이 있는 거다. 그러나 이 관계성을 끊고 살면 그 삶은 짐승의 삶과 같은 거다.
인간 자기는 나그네 세상을 살면서 모든 크고 작은 사건 환경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진리말씀을 붙잡고 살면 하나님 당신처럼 인격의 온전자, 영능의 실력자가 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사람의 성공으로 여기신다. 네가 한 평생을 살았느냐? 나이적으로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무슨 일을 하면서 오래 살았느냐? 일을 안 하며 놀면서 오래 사는 게 좋으냐, 이왕 오래 사는 거 일을 하면서 오래 사는 게 더 좋으냐? 어느 게 값어치가 있는 거냐? 후자다.
그러면 일을 하다가 일에 지처서 죽은 사람이 좀 나으냐, 일을 안 하고 놀고 먹고 마시며 오래 오래 산 사람이 나으냐? 일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 좀 낫다. 문제는 자기가 미련해서 빨리 죽었지만 그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갔다. 그런데 일도 하지 않고 놀고 먹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준 게 뭐냐? 인간이라면 유익을 줘야 할 텐데 아무 유익이 없다.
예수 믿으면서 ‘복 주시오. 복 주시오’ 해서 복을 받아서 자기만 오래 오래 잘 먹고 잘 살다가 가는 게 나으냐, 좀 못 살아도 나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살다가 가는 게 좋으냐? ‘그것도 어느 정도라야지’ 하고 토를 붙이고 싶으냐? 우리가 이치적으로 따지면 자기의 신앙 믿음이 금방금방 드러나 버린다. 그런데 자기 신앙에 자꾸 토를 달기 때문에 어중간해서 안 믿는 사람이 볼 때는 믿는 사람 같고, 믿는 사람이 볼 때는 안 믿는 사람 같고. 자기 수준이 그렇게 돼 있는 거다.
사람이 살면서 제일 어려운 게 뭔가 하면 사람이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 이게 제일 어려우면서도 이게 많이 되어있는 사람은 성공을 한 사람이다. 그렇게 보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을 안 믿는 세상은 사람이 성공했다는 것을 뭘 보고 말을 하느냐? 돈 많이 버는 거, 잘 사는 거. 그러나 이런 성공은 잠깐이다. 제일 좋은 것은 사람 만들어지는 이 성공, 이게 참 성공이다. 사람이 바로 만들어진 사람은 영원히 간다. 하늘나라에까지 들어간다. 하나님이 알아준다. ‘너는 성공했구나’ 하신다. 그런데 사람의 사고방식이 왜 이걸 모를까? 가장 쉬운 건데 왜 모를까? 그것은 인간의 미련한 지식 때문이다.
사람 만들어지는 이 성공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사랑 안 했다. 예수님을 사랑 안 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 안 하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사랑을 안 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육신적으로 부자로 살아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망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를 하는 거다. ‘너 이놈, 망했구나.’ 뭐가 망했느냐? 하나님이 진노를 왜 하느냐? 장사를 못해서 진노하시느냐? 사람이 바로 만들어지는 그 면에서 망했기 때문에 진노를 하시는 거다.
우리가 일반적 차원에서 보면 양심이 바르고 마음이 착한데도 못 사는 사람이 있다면 국가법이 와서 ‘왜 못 사느냐?’ 하고 잡아가서 벌을 주느냐, 아니면 아무리 잘 살아도 못된 짓을 한 사람을 잡아다가 벌을 주느냐? 후자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 때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에게 벌을 주겠느냐, 교회에 다녀도 사람 안 된 사람에게 벌을 주겠느냐? 후자다.
‘길에서 망하리니.’ 길에서 망한다? 일을 하다가 망하거나, 장사를 하다가 망하거나 그게 아니라 길에서 망한다고 한다. 무슨 말일까? 지금도 사람들이 길로 많이 다니는데, 정신 사상적으로 인간 앞에 놓인 길은 ‘좁은 길과 넓은 길’ 이 두 길밖에 없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보면 넓은 길로 가는 사람도 있고, 좁은 길로 가는 사람도 있고, 가로 질러서 가는 사람도 있고, 뒤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가는 사람도 있다.
‘길에서 망하리니.’ 창세 이후 세상이 생긴 이후로 인간들은 출생해서 자기 무덤까지 가고 있다. 엄마 태속에서 아기가 태어났다고 하면 나자마자 공동묘지를 향해 가고 있는 거다. 시간이 그 아이를 공동묘지로 끌고 가고 있는 거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걸 못 느끼고 자기의 성공의 미래만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성공을 한다고 해도 그 성공도 여전히 공동묘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 거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모든 사람들은 공동묘지를 향해서 가고 있다. 그런데 ‘누가 빨리 가느냐, 누가 늦게 가느냐’ 하는 시간 차이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죽는 것은 많이 늙은 사람, 그 다음으로 늙은 사람 이런 순서로 죽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자마자 죽는 사람도 있고, 뱃속에서 죽는 사람도 있고, 살다가 2, 30대에 죽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공동묘지에 가는 것은 속단을 할 수가 없다. ‘나는 건강하다’ 그러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네가 교만하구나’ 해서 그 다음 날 그만 병들어 죽게 할 수도 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 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소식을 증거한다.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간다고 하시더라’ 하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진짜냐? 가서 확인을 해봐야지’ 하면서 막 뛰어간다. 그런데 베드로가 나이가 더 많은지 요한이 베드로보다 먼저 뛰어 들어갔다. 생각을 해봐라. 뛰려면 부활 쪽을 향해서 뛰지 뭐하려고 공동묘지를 향해서 서로 다투면서 뛰느냐? 세상 모든 인간이 그렇다. 왜 공동묘지를 향해서 서로 먼저 가려고 뛰느냐? 성경을 통해서 그런 면을 보여준다.
또 성경에 보면 죽은 아들을 상여로 메어 나가는데 앞에서는 선수를 치고 있고, 뒤에서는 호상꾼들이 울면서 뒤따라가고 있다. 지금 죽은 아들이 어디로 가고 있느냐? 공동묘지로 가고 있다. 상여 뒤를 따라가면서 ‘아, 나도 지금 인생길이 공동묘지로 향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한다면 정신이 번쩍 들 텐데 죽은 아들만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상여를 뒤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공동묘지를 향해 가고 있는 건데 그건 모르고 죽은 사람이 보고 싶다고 울고 있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
우리 모두는 표면적으로 볼 때 공동묘지로 가고 있다. 이 인생길에서 공동묘지로 빨리 가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로 믿고 하나님처럼 닮아가야 한다. 그런데 맨날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면 이거 쓰겠느냐? 세상 일이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어디 있느냐? 우리는 예수를 믿으니 이제 죽어도 하늘나라에 가는 거고, 더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상급을 주시는 거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