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사강의(經史講義) 9 ○ 논어(論語) 2 계묘년(1783)에 이현도(李顯道), 정만시(鄭萬始), 조제로(趙濟魯), 이면긍(李勉兢), 김계락(金啓洛), 김희조(金煕朝), 이곤수(李崑秀), 윤행임(尹行恁), 성종인(成種仁), 이청(李晴), 이익진(李翼晉), 서형수(徐瀅修), 심진현(沈晉賢), 신복(申馥), 이유수(李儒修), 강세륜(姜世綸) 등의 대답을 뽑았다
술이(述而)
안자(顔子)의 즐거움을 주자(周子)는 암시만 주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 선우신(鮮于侁)이 ‘도(道)를 즐기는 것’이라고 하자 정자는 허여하지 않고 말하기를, “가령 안자가 도를 즐거움으로 삼았다면 안자가 아닌 것이다.” 하였고, 유불(劉黻)이 정자의 학설을 인용하여 “인(仁)을 즐긴 것이다.”라고 하자 주자가 또한 허여하지 않고 말하기를, “인(仁)을 즐긴 것이 아니라 오직 인(仁) 하였기 때문에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학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천리(天理)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하는 자도 있고, “극기(克己)로 즐거움을 삼았다.”라고 하는 자도 있어서 오늘날까지 서로 옳으니그르니 하고 있은 지가 오래다. 만약 한마디로 잘라 말하고자 하면, 그 즐거움이란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해야만 주자(周子)가 말해 주지 아니한 은미한 뜻에 맞는 것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道)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한다면 인(人)과 도(道)가 둘이 되고, 만약 인(仁)으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한다면 인(仁)도 또한 도(道)이고, 만약 극기(克己)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한다면 즐거움이란 것은 극기를 한 뒤의 일이고, 만약 천리(天理)로 즐거움을 삼았다고 한다면 주자가 이르기를, “즐거움이란 것은 저 낙천지명(樂天知命)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안자의 즐거움은 끝내 끝까지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어류》를 읽었더니, “즐거움은 말이 필요 없다. 마치 하나의 물건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학설이 매우 맛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안자의 가슴속에 본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지(知之)는 격치(格致)에 속하고 호지(好之)는 성의(誠意)에 속한다. 이것은 지(知)와 행(行)의 나뉨이 있으니, 여기서 ‘지지가 호지만 못하다’고 한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런데 낙지(樂之)는 단지 호지의 공효(功效)이고 의성(意誠)에 속하는 것일 뿐이고 보면, 또한 ‘낙지만 못하다’고 하여 마치 별도로 한 층의 계급이 있는 것처럼 한 것은 어째서인가?
[성종인이 대답하였다.]
지(知)와 행(行)은 본디 지지(知之)와 호지(好之)에서 나뉘지만, 덕(德)을 이루는 것은 실로 낙지(樂之)에 있습니다. 성의관(誠意關)이 앞뒤로 통투함이 또한 어찌 한 층의 큰 마디가 아니겠습니까.
위는 술이편(述而篇)이다.
[述而]
顔子之樂。周子引而不發。而鮮于侁以爲樂道。則程子不許曰。使顔子以道爲樂。非顔子矣。劉黻。引程說以爲樂仁。則朱子又不許曰。非是樂仁。惟仁故能樂。於是諸儒競起。有以天理爲樂者。有以克己爲樂者。至于今互相甲乙久矣。如欲一言以蔽。其樂將何指言。然後得周子不發之微旨歟。種仁對。若謂以道爲樂。則人與道爲二。若謂以仁 爲樂。則仁亦道也。若謂以克己爲樂。則樂是克己以後事。若謂以天理爲樂。則朱子云樂不干那樂天知命事矣。然則顔子之樂。終不可窮其說歟。臣嘗讀語類曰。樂不要說得。似有一個物事。此說極有味。知此則顔子胷中。本有自然樂處可見。知之屬於格致。好之屬於誠意。此有知行之分。則此謂知之不如好之固矣。至於樂之。只是好之之功效。而屬於意誠。則亦曰不如樂之者。似若別有一層階級者然。何也。種仁對。知行固分於知好。而成德。實在於樂之。誠意關之透得前後。亦豈非一層大節拍耶。以上述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