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그리고 여백이 있는 곳] 초원의 집
촘촘하게 들어선 수목 사이로 뾰족이 얼굴을 내민 돌탑들이 낯설고도 신기하다.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 그곳에 ‘초원의 집’이 있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인가.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무엇이 그리 바빠 매정하게 등을 돌리고 살았을까. 반세기라는 세월을 건너 어린 시절의 옛집을 마주하는 마음은, 반가움이나 설렘보다 시큰하고 아릿한 통증으로 다가온다.
나의 유년은 초가삼간 오두막집에 머물러 있다. 우리 집 돌담을 경계로 영준네와 희연네가 어깨를 맞대고 살았고, 발치 아래엔 용태네 집이 정겨웠다. 뒷담 너머 칠성 시장통 주인집의 기세등등하던 삼백 평 밭떼기도 이제는 흔적조차 없다. 그 모든 기억을 품은 채, 오로지 푸른 ‘초원의 집’만이 그 넓은 터를 지키며 의연하게 서 있을 뿐이다. 실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서울 사는 생질이 어쩌다 어머니를 뵈러 내려오는 날이면, 나와 동생까지 불러 점심을 대접하곤 한다. 그 덕에 흩어져 살던 누님과 동생, 우리 삼 남매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다. 이번에는 고향 마을을 한번 들러보자는 누님의 제안이 있었다. 괴산에서 매콤한 코다리 정식으로 속을 채운 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리운 고향길로 향했다.
어느덧 여든을 훌쩍 넘긴 둘째 누님은 아이처럼 설레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고향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내가 사는 청주에서 차로 한 시간이면 닿는 거리이고, 근처에 처남이 살고 있어 일 년에도 몇 번씩 스쳐 지나던 길목이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 위로 유년의 가난이 겹쳐지면 마음은 이내 무거워진다. 홀로 육 남매를 건사하느라 굽은 등이 펴질 날 없던 어머니의 뒷모습과 궁핍으로 얼룩졌던 그 시절의 뼈아픈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스라이 멀어지던 기억을 깨운 것은 낯선 풍경이었다. 흔적조차 사라진 옛 집터 위로 언제부턴가 기묘한 형상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마이산의 영험함을 옮겨놓은 듯한 돌탑들이 줄지어 서 있고, 인자한 성모마리아 상이 그 곁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괴산하면 으레 소설 《임꺽정》의 홍명희 생가나 매콤한 명품 고추가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 명성을 증명하듯 커다란 고추 조형물이 시선을 붙들었고, 이제는 민속촌에서나 볼 법한 연자방아도 보였다. 특히 작고 납작한 돌들을 정교하게 이어 붙여 만든 한반도 지도는 발길을 멈추게 할 만큼 정성이 지극했다.
일상에 치여 고향을 잊고 살던 어느 날이었다. 무심코 TV 채널을 돌리다 익숙한 풍경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그램에 내가 살던 옛 집터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에는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한 남자가 나타나, 이 황무지 같은 땅에 돌로 집을 짓게 된 구곡간장(九曲肝腸)의 사연을 묵묵히 풀어내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30여 년 전부터 주변 땅을 사들여 돌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담담하게 소회를 밝히는 화면 속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진심이 묻어났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옛 집터가 타인의 손길을 거쳐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순간, 비로소 나는 내가 자란 그곳을 다시금 가슴에 새겼다. 수십 년 세월 동안 홀로 돌을 다듬고 세운 정성 덕분일까. 백발이 성성한 주인장의 모습은 바위처럼 단단하고 건강해 보였다.
어릴 적 동생과 뒤엉켜 뛰어놀던 마당 자리에는 이제 여의주를 문 용이 승천할 듯 기백 있게 버티고 서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도 경이로운 풍경이다. 예순 해 전, 이곳은 우리 육 남매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좁은 초가삼간에서 어떻게 그 많은 식구가 몸을 부대끼며 살았나 싶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던 나와 막냇동생에게는 그저 흐릿하고 가난한 풍경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길게 땋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어머니 대신 나를 업고 다독여 재워주던 누님의 온기가 어제 일처럼 새롭다. 문득 먼저 세상을 떠난 두 형님과 누님의 빈자리가 생각나 왈칵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외삼촌, 여기까지 오셨는데 세 분 기념사진 한 장 찍으셔야죠.”
생질의 목소리에 일렁이던 상념에서 퍼뜩 깨어났다. 사진을 찍으려 자리를 잡고 보니, 육 남매가 아닌 삼 남매만 남은 모습이 마치 이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했다.
남들은 고향 하면 으레 애틋한 그리움이나 자랑거리를 늘어놓곤 하지만, 내게 고향은 그리 다정한 이름이 아니었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말이 뼈에 사무치던 시절,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어머니를 붙들고 울고불고 매달리던 비통한 기억이 먼저 고개를 든다. 끝도 보이지 않던 보릿고개, 허리띠를 졸라매며 하루 두 번씩 가파른 앞산을 오르내리며 땔감을 해 나르던 고단함. 내게 고향은 부끄럽고도 시린 흉터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 척박한 땅에서도 꽃은 피어났던가. 혼기가 찬 누님이 빌려온 소설책들『이수일과 심순애』, 『찔레꽃』, 그리고 『임꺽정』까지. 문 틈새로 그 책들을 훔쳐보며 남몰래 가슴 설레던 시간이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문학이라는 꿈의 씨앗을 내 마음속에 심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밤잠을 설쳐가며 소설 한 편과 수필 한 편을 써 내려갔다. 그 투박한 원고 뭉치를 들고 당시 충청일보에 소설을 연재하든 작가를 무작정 찾아갔던 기억이 선하다. 내 원고를 찬찬히 훑어보던 그는 "소설보다는 수필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며 조심스레 권유했다. 그 한마디가 내 문학 인생의 첫 단추가 되었고, 나는 그렇게 수필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수필의 길 또한 평탄한 꽃길은 아니었다. 마음먹은 대로 문장이 풀리지 않아 고뇌하고, 갈등의 파고를 넘을 때마다 펜을 놓아버리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그때마다 나를 다독여 포기하지 않게 이끌어주고, 마침내 월간 「수필 문학」에 추천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고마운 인연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그토록 열망하던 문학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환희는 마치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문학의 언저리를 서성인 지도 삼십여 년. 그 긴 세월 동안 나의 초라했던 유년의 오두막집은 누구나 감탄하는 근사한 ‘초원의 집’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평생을 바쳐 짓고 있는 문학의 집은 여전히 엉성하고 허술하기만 해 부끄러움이 앞선다.
저 ‘초원의 집’ 주인장이 수십 년간 묵묵히 돌탑을 쌓아 올렸듯, 나 또한 언제쯤이면 저토록 견고하고 아름다운 문학의 집을 완성할 수 있을까. 비록 걸음은 더딜지라도 그 완성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경건한 마음으로 자판 위에 손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