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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 창조주(創造主)를 찾아서
지혜(智慧)로 도달된 큰 우주의 섭리(攝理)는 합당한 논거(論據)를
제시하기 어렵고
지성으로 분석되는 세계는 비록 세밀하고 정교하나,
그 세계는 반(半)으로 줄어든다.
(觀物之理以慧覺(관물지이이혜각), 難備當?(난비당거), 域以從知(역이종지), 雖爲細精(수위세정), 然(연), 其界減半之(기계감반지))
물리학자들의 오만에 가까울 정도의 장담, 즉 '신의 정체를 물리학에서 더 빨리 찾아낼 수 있다'는 주장은 실현되었다. 완벽히 해부를 했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학문 분야보다 더 빨리 도달하였다는 의미이다.
인류사가 진행되어 오면서 오래 전에 이 땅을 다녀간 성자들은 창조주와 우주 원리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의 목소리가 종교의 경전을 통해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성자들이 말한 대우주의 주재자이신 당신의 모습과 오늘의 물리학자들이 밝혀 낸 모습은 아주 유사하게 닮아가고 있다.
'우물에서 나오면 나올수록 세상이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마침내 그 곳을 벗어나면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세계는 점점 확장되어 가는 역설적인 경우가 바로 인간의 능력과 우주의 근본 원리와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와 문자로 옮겨질 수 없는 정신적 세계의 흐름은 밝혀낼 수 없고 설명될 수도 없다. 인간의 사고와 인식 범위 내에서만 문자가 생겨날 수 있으며, 이 범위를 벗어나면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우주 정신이라는 절대적 지식은 인간의 두뇌로 측정될 수도, 표현될 수도 없다. 성자들의 가르침이 정확히 전달될 수 없는 한계 또한 여기에 있다. 종교가 교리의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수많은 종파로 분열되는 것만 보더라도 이는 명백한 것이다. 이렇게 깨달음에 의한 절대적 세계와 언어ㆍ문자로 표현되는 절대적 세계는 영원히 서로 일치될 수 없는 간격이 필연적으로 생기기 마련이다. 만일 성자들의 사상이 정확하게 전달되어 받아 들여졌다면, 인류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을 것이다.
오랫동안 성자들의 사상은 합리성과 과학성과는 관계없는 다만 가르침 그 자체로 간주되어 왔다. 이리하여 성현들의 사상은 당연히 과학적 연구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냉철한 합리주의에 근거를 두고 인류의 지성으로 이룩된 현대 물리학의 세계는, 동양의 성자들이 밝혔던 사상과 매우 근접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즉, 실험과 치밀한 검증으로 뒷바침되는 서구의 이성이, 비록 일부일지라도 궁극의 절대적 세계를 밝혀주는 수준까지 도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5787년이라는 인류사의 한 주기 속에서, 인간의 순수 이성으로 이룰 수 있는 문명이 극대점까지 도달하였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학의 성과가 평가절하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동양의 성자들이 밝힌 궁극의 원리 또한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논의될 필요 없는, 가치 없는 하나의 관념론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장은 성자들의 사상이 자연 과학이라고 하는 날카로운 이성적 업적과 만나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물리학에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다만 현대 물리학이 밝혀낸 절대적 존재에 대해서 논의될 것이다. 그러므로 읽어가는데 큰 부담은 없을 것으로 본다.
여기서는 오늘날의 현대 물리학이 어느 지점까지 와 있는가. 즉, 현대 물리학의 현주소에 초점이 모아질 것이다. 그러나 단지 성과에 대한 단순한 확인을 하는 것은 아니다.
원자 물리학에서 밝혀낸 미시적 세계는 단순한 물리학의 세계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물질의 영역을 넘어 정신 세계라고 하는 낮선 영역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리학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은 물질과 공간은 서로 구분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발견이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실로 과학의 진보와 퇴보를 거듭하여 왔다. 그 과정을 다시 돌이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과학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서양의 중세는 종교적 세계관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과학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회교권에서 들어오는 과학 지식은 중세인들에게 자극을 주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나는 문예 부흥과 십자군 운동의 실패는 이러한 움직임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의 절대적 권력과 봉건주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진실이 교회의 권령에 눌리는 경험을 뼈저리게 받아 들인 서구인들은 종교와 과학, 물질과 정신을 분리시키고 있었다.
서구의 합리주의는 하나의 이론으로 확립될 때까지 거쳐야 하는 절차를 철저히 요구하였다. 그러므로 결론의 유도 과정이 생략되거나 신뢰할 수 없으면, 결과에 대해서도 철저한 불신을 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검증에 의해서 결론의 도출 과정이 인정되지 않는 한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물질과 정신을 엄격히 구분하려는 서구의 근대적 합리주의에, 그리스인들의 물질관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철학관들에게서 보았던 물질관에는 통일된 견해는 없었으며 그들도 대립적인 물질관을 갖고 있었다.
소아시아의 밀레토스 태생인 루키포스(Leukippis. B.C. 5세기 경)는 상당히 신비스런 물질관을 갖고 있었다. 즉, 그는 모든 물체는 더 이상 분해시킬 수 없는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은 공간에서 운동하면서, 모이면 물체로 존재하지만 흩어지면 다시 사라진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물질관은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B.C. 460~371)에 의해 발전되어 원자라는 개념으로 탄생되었다. 그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의미에서 아토모스(Atomos)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원자가 된다.
그리스 철학자들 사이에서 보였던 가장 큰 관심은, 물체를 어느 정도까지 분해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여기서 루키포스, 데모크리토스와 플라톤의 견해 차이는 인상적인 것이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종적인 입자를 아톰(Atom)이라 부르며, 만물은 아톰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한 데모크리토스의 물질관과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플라톤의 견해는 근본적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 때 그리스의 원자론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것이 지배적인 입장이었다. 여기서 4원소설을 주장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다시 한 번 합리주의를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움직일 수 없는 영향력을 주었던 것이다(물질의 세계에 관한 끝없는 탐구는, 물질을 고정된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는 물질과 정신을 명확히 구분하는 이분법적 사고로 현대 물리학과 어울릴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양자의 구분하에 성립되었던 물리학은 고전적 물질관으로 남게 되었다).
현대 물리학이 밝혀낸 진실을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와 우주는 구분되는 별개가 아니며, 사물은 변화해 가는 과정으로서의 우주의 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결과는 예전 성현들이 언급한 세계관과 일치하고 있다고 할 정도이다. 즉, 동양적 지성과 지혜에서 발현되는 가르침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이 갖고 있던 물질관, 즉, 정신과 물질을 엄격히 구분하는 이원론에 뿌리를 둔 고전 물리학의 폐기, 혹은 수정을 의미한다. 데카르트의 철학 사상은 근대 과학을 토대로 하여 성립된 사상이며, 근대과학은 데모크리토스적 물질관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이런 근대 과학을 정리한 뉴턴(Issac Newton)은 고전 물리학의 세계에 오랫동안 영향력을 주었다.
서구 문화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자면 현미경의 문화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동양의 그것은 자연과 자아에 대해 조용히 관조하면서 터득한 지혜의 문화로 볼 수 있다. 이같이 양자는 대칭 관계에 있다.
서양의 세계는 물질을 끝없이 쪼개는 정교하고 세련된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우주라는 전체에서 보아야 한다는 통일적 세계관에 의해 영향 받은 곳이 동양이다. 즉, 나와 우주를 분리시켜 고찰하지 않는 조화성, 통일성을 띠고 있었다.
동양의 지혜에서는 서구의 과학, 특히 물리학을 모래알을 무한히 쪼개는 듯한 지극히 협소한 학문이라는 편견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분석하여 들어간 물질의 내부 세계는 놀랍게도 우주의 그 무엇을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도달하기 위해 오차를 최대한 줄이는 실험 기구와 수학적 기호와 정교한 언어를 창조시켜야만 했다. 또한 세련된 논리 전개를 필요로 함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룩한 결과에 대해서는그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서 동양의 성현들은 대자연과 자신을 부단히 동조시키려는 과정에서 우주의 신비를 터득했고, 자신의 위상을 재발견했던 것이다.
우주의 원리를 직관에 의해 터득한 결과는 서양에서의 그것처럼 세련된 방법으로 설명될 수 없다. 서구의 지성인들이 흔히 지적하는 것처럼, 궁극의 세계에 대한 접근 방법도 타당성을 검증할 수 없고 얻은 결론 역시 검증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형이상학적 방법과 과정을 통해 얻은 절대적 세계 역시 형이상학이 될 수밖에 없다. 언어의 정교함마저 발달되지 않아 세밀한 설명을 남겨 놓을 수 없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점들이 서구의 물리학자는 고사하고 사상가들로부터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이유가 된다. 그런데 비과학의 상징처럼 간주됬던 동양의 성현이 밝혀 놓은 세계관에, 현대 물리학이 극도로 접근하고 있어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는 고전 물리학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동양의 지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됨은 자연스런 시대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동양의 초경험적 지혜에 관해서 서구의 젊은 학자들이 기울이는 비상한 관심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중국에서 오랫동안《주역(周易)》을 연구한 것은 대표적 예가 되고 있다.
데카르트의 근대적 철학 사상, 즉, 정신과 물질을 양분시키는 이분법적 철학 토대가 고전 물리학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본다면, 서구의 발전 방향을 후퇴시키는 역작용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밝혀지지 않은 사실에 사상적 근거를 부여하고 물질 문명이 출발할 때, 전체적 혼란 또한 피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먼저 서구인들은 사고 체계에 근본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성자의 가르침과 종교 경전의 내용을 동일시하는 일반적 시각이 그것이다. 엄격히 말한다면 성현들의 사상과 그들을 정점으로 해서 형성된 종교의 경전은 별개의 것이다. 종교 경전에 성현들의 가르침이 변질되지 않은 채 반영되었다고 확신할 수 없고, 성자를 따르던 추종자들의 개인적 주관이 개입되지 않았다고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이 각 종교, 혹은 종파에서 실제로 흔히 발견되고 있음을 볼 때, 유독 필자만이 갖는 우려가 아님은 명백하다. 각 종교의 성직자들이 설교하는 내용과 성자들의 가르침 사이에 모숨되는 점이 발연되고 있음은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 장에서는 성현들의 직접적 가르침에 충실히 접근하고자 한다. 또한 이 과정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성현들의 사상과 서구의 합리주의의 산물인 현대 물리학이 궁극적인 곳에서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전달하는 데 최대 목적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과학과 성현의 지혜는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 양자는 조화될 수 있는 상보적(相補的)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데 근본 취지가 있다.
오래 전부터 물질은 최소 단위인 원자들로 이루어졌다고 믿어 왔다. 이 원자는 다시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구성되어있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바로 이들이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로 간주되었다. 이 입자들은 여전히 고정된 물질의 기본 단위로서 파악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양자론에 의해 여지 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는 원자 구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출발되었고 이때부터 고전 물리학의 개념은 토대 그 자체를 상실하였던 것이다.
1911년 러더포드는 알파(α)입자를 금으로 만든 얇은 막에 방사시켜, 알파 입자의 산란 실험을 통해, 원자의 내부 구조를 알아 냈다. 즉, 그는 이 알파 입자를 원자에 방사시켜 주면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자는 견고하고 고정된 입자라고 오래 전부터 믿어져 왔다. 그런데 그가 목격한 원자의 내부 세계는, 전자라는 미세한 입자들이 핵(核)에 묶여져, 핵의 주위를 회전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원자의 내부 구조가 미세한 입자들이 회전하는 공간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힌 이 실험으로, 공간과 물질을 구분하는 고전적 물리학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부정시켜 버렸다. 더욱이 양자론에서는 이런 입자들이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추상적 존재인 것이다.
결국 물질의 궁극적 세계는 그것을 구성하는, 독립적이며 개성을 갖는 고정된 단위로서의 원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소립자의 세계는 보는 관점에 따라 입자성을 띠기도 하고 파동성을 띠기도 하는, 고정된 실체를 상실하고 있다. 또한 이 입자들은 공간이라는 영역과 결코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물체의 질량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견고한 최종 구성체로 되어 있다는 관점이 고전 물리학의 물질관이다. 그런데 상대성 이론에서는 고정된 단위로 나눌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나아가 질량은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밝혀 주었다. 그리고 그 에너지 역시 움직이는 양(量)인 것이다.
어떤 대상으로서의 물체는 고정되었다고 보아 왔다. 이런 관찰은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양자론에서 밝혀 주었던 것이다. 물질의 미시적 세계는 부단히 운동하면서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따라서 사물의 고정성이란 기존의 관념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는 정지되어 있는 물체, 고정된 최소 단위가 존재한다는 것에 토대를 두고 있는 고전적 물리학의 근본적 파기를 뜻하기도 한다.
공간과 물질은 부단히 서로의 모습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현대 문명의 경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이른바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공식(E = mC²)은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도 지칭된다.
에너지의 형태는 변화될 수 있지만, 그 총량은 언제나 불변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 등식을 피상적으로 본다면, 질량(m)이 에너지(E)로 변환될 때에는 질량에 광속의 제곱을 곱한 양의 에너지로 변한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나 이 등식은 자연계의 원리, 즉 자연계를 움직이는 근본 원리까지 설명하는 현대 문명의 금자탑을 상징하고 있다. 즉, 절대적인 창조도, 절대적인 소멸도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질량은 다만 에너지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질량의 미시적 세계는, 공간에서 소립자(물질)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운동을 무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소맂바들을 더 쪼갤 수 있는 방법은 에너지에 의해 충돌시키는 것인데, 이것 역시 한계가 있다. 그 에너지에 의해 또 다른 소립자들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을 쪼갤 수도 있지만 쪼갤 수 없기도 하다.
원자 물리학의 최고봉을 상징하는 것은, 순수한 에너지에서 물질(소립자)을 발생시켰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보아 물질과 에너지의 구분은 사라지게 되었다.
디락(Dirac)의 예언은 물질의 미시 세계에 대한 정보를 더욱 확실히 해 주었다. 그는 전자와 질량은 같으면서도 반대되는 전하를 갖는 반전자(反電子)가 있다고 예언한 것이다. 2년 후, 그가 예언한 대로 반전자는 확인되었다. 현재 이 것을 양전자(Positron)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로써 모든 입자에는 동일한 질량을 갖고 있으면서 전하만 다른 반입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 입자와 반입자(反粒子)는 높은 에너지에 의해 생성시킬 수도 있고 반대로 다시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도 있다.
이런 입자들의 근본적 성질을 연구하는 데 입자 가속기(粒子加速機)가 사용되고 있다. 이런 실험에 의해 관찰된 입자들은 백만분의 1초보다도 더 적안 짧은 수명을 갖고 있다. 즉, 입자라는 미시적 세계는 무한히 계속 운동하면서 생멸(生滅)하고 있는 것이다. 공간이야말로 만물이 탄생하는 창조적 모태임이 밝혀졌다.
공간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꾸어 놓는 중대한 계기가 있으니, 곧 장(場-field)의 이론이 나오면서 부터였다. 즉, 양자의 장 이론은 공간은 물질과 더 이상 구분하지 않으므로 진리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상대성 이론에서 보면 물질과 그 중력의 장은 서로 구분될 수 없고, 그 중력의 장 역시 공간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리고 질량을 갖는 모든 물체는 중력을 갖고, 이 중력이 공간과 시간을 휘어지게 한다. 실제 우주 공간에서 빛의 진로가 휘어지는 현상이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이는 바로 질량을 가진 물체의 중력장에 의해 휘어짐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질량을 가진 물체의 주위 공간은 휘어져 있으며, 이 휘어짐의 정도는 그 물체의 질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또한 공간과 시간도 구분될 수 없다. 이 시간은 질량을 갖는 물체의 크기에 따라 다른 속도로 시간이 진행되는 것이다. 이렇게 물체 주변의 휘어진 공간인 중력장의 크기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흐르게 된다. 간단한 예를 들면 지구상에서 작동하는 시계를 태양 혹은 목성과 같이 지구보다 더 큰 질량 근처에 놓으면 시간이 늦게 가는 것이다.
자연계는 장에 기초한 전자기력, 중력, 원자력이라는 3가지 힘이 서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힘은 빛과 같은 속도인 30만㎞/sec의 속력으로, 파동의 형태를 띠면서 우주 공간 어디서나 진행하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고 있다.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우주 공간에서 무엇이 파동치고 있다는 말인가?'
우주 공간에서 진동하는 실체를 밝혀 내지 못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는 오감에 의해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현대 물리학자들은, 공간이야말로 물질이 생겨나는 참[眞진]이라고 결론지었다. 즉, 우주 공간은 진동하는 장(場)으로 부른다. 이 공간의 장(場)이 극도로 응축되었을 때 물질이 탄생하며, 이는 다시 장(場)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현대 물리학이 밝혀 낸 우주의 신비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장(場)을 유일한 실재(實在)로 보았다.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물질을, 장(場)이 극도로 응축된 공간의 영역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물질의 미시 세계에서 관찰되는 소립자는 장력(場力)이 극도로 집중된 공간 영역이었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공간은 물질이 태어나는 곳이며 따라서 공간과 물질은 구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수천 년 전의 성현들은 자연계에 흐르는 근본 원리를 통찰(洞察)하고 있었다. 즉, 현대 물리학이 밝힌 정신과 물질은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은, 성현들의 사상과 일치되는 것으로서 극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동양에서는 우주의 현상과 만물이 탄생하고 사라지는 실재(實在)를 허(虛), 무(無), 공(空), 도(道) 혹은 기(氣)로 지칭되고 있다. 그러면 서구의 합리주의가 이룩한 업적인 공간과 물질, 즉 정신과 물질이 구분될 수 없는,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는 발견이 동양의 사상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고찰해 보자.
■ 장횡거(張橫渠)가 밝힌 기(氣)
양자론에서의 장(場)이 동양의 유교 철학에서는 기(氣)로 대치될 수 있다. 즉, 장(場)과 기(氣)는 모두 동일한 개념인 것이다. 대우주에 충만해 있는 기(氣)를, 원자 물리학에서는 장(場 : field)으로 부르고 있다.
송(宋)대의 유교 학파 중 미신을 배격하고 자연과학을 존중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이가 곧 관중(關中)의 학풍이다. 또한 이를 대표하는 학자가 바로 장횡거(場橫渠)였다.
횡거(橫渠)가 저술한《정몽(正夢)》을 대하면 마치 아인슈타인이 송대(宋代)에 태어나 그의 양자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이다. 즉, 그는 기(氣)라는 개념을 동원해서 양자론에서와 같이 물질의 탄생, 변화, 소멸이라는 변화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우주의 근본 원리라고 확신에 찬 장담을 하고 있다.
장재(張載)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氣)가 모이면 그것은 우리가 볼 수 있는 형태가 되나, 기(氣)가 흩어지면 우리가 볼 수 없게 되어 형태는 사라진다. 그런 까닭으로 기(氣)가 모였을 때 하나의 형태가 순간적인 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기(氣)가 흩어졌을 때 형태는 없는 것이다 라고 성급히 말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성인은 자연계를 관조(觀照)하면서 어둡고 밝은 까닭을 안다고 단지 말했을 뿐, 있고 없는 까닭을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출처)
註;장횡거(張橫渠) : 장재(張載)라고도 불리우며 자(字)는 자후(子厚). 중국 송대(宋代)에 활동한 대표적 기(氣)철학자로서, 대표적인 저서들로《횡거역설(橫渠易說)》,《경학이굴(經學理窟)》,《정몽(正夢)》등을 남기고 있다.
장재(裝載)는 기일원(氣一元)으로 우주 만물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서 다시 논의가 되겠지만 이곳에서 강조되는 인륜 역시 기(氣)에서 도출시키고 있다.
그는 기(氣)야말로 우주의 참된 실재(實在)이며, 우주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 그는,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우주를 태허(太虛)라는 용어로 쓰고 있다. 이 태허(太虛)가 기(氣)의 무한한 형태이며 기의 본체(本體)인 셈이다.
우리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광활한 우주 공간이므로, 그 깊이와 넓이 또한 측정할 수가 없다. 형태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무변광대한 우주는, 공간 그 자체가 만물이 생겨나는 생명의 원천이며, 또한 기(氣) 그 자체인 것이기도 하다. 그 공간이 기(氣)로써 파악되는 것이므로, 공간의 영역이 집약된 것이 물질로 되고 있다. 이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에 따라 만물은 생성되며 변화되어 다시 기(氣)로 거듭 운동을 하게 된다. 그러하기에는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허는 형체가 없으나 기(氣)의 근원이며, 이 기(氣)가 모여지고 흩어지는 변화는 객체에 불과할 따름이다. 태허는 형상이 없으며 기의 본체이다. 기가 응집되고 흩어지는 것은 변화의 표면적 상태일 뿐이다.'
(출처)
양자 물리학에서 장(場)에 바탕을 둔 소립자(물질)의 세계를 밝힌 부분과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까?
결국 우주 만물은 기(氣)의 응집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며, 그 기(氣)는 우주 공간 자체를 형성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어떤 생명체와 물질은 독존(獨存)하는 것이 결코 아닌 공간과의 관계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삼라만상은「기(氣)의 바다」에 떠 있는 형국이며, 그 공간은 살아 있는 창고 그 자체인 것이다. 이는 우주 그 자체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며,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뜻한다.
광활한 우주 공간에 무(無)란 존재할 수 없다. 우주 공간 자체가 기(氣)이며 그 기는 곧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살아 숨쉬는 그 공간에서 모든 만물은 생성되고 변화하며 더불어 그 곳은 다시 돌아가야 하는 곳, 궁극적인 생명의 고향인 것이다.
양자론에서는 소립자들이 장(場=氣)의 극도로 응축된 상태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리고 이는 변화하는 운동을 거듭하면서 다시 장(場=氣)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장재의 말은 이와 같이 지혜로움과 밝음으로 가득하다.
기(氣)로써 이루어진 광활한 공간, 즉 태허(太虛)는 태허 그 자체인 기(氣)가 좁은 공간 영역에 집중됨으로써, 생명체를 비롯한 만물이 탄생되는 것이며, 탄생된 것들은 변화 운동을 거듭하여 간다. 그리고 본래의 자리인 그곳으로 환원 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인 것이다.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변화하는 만물은 살아 있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우주와 만물은 살아 움직이는 활기찬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기(氣)가 진동을 하며 운동해야 만물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횡거(橫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태허(太虛)는 기(氣)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태허의 기(氣)는 모여서 만물을 이루지 않음이 없고, 만물은 흩어져 다시 태허(太虛)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에 의해 드나드니[出入], 이것이 부득이 하여 그런 것이다.'
(출처)
중국의 근대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 풍우란(馮友蘭)의 해석을 통해 이 문구를 재음미해 보자.
'기(氣)는 흩어지고 나면 다시 모이게 되는 것이며, 모여지고 나면 다시 흩어지게 되어 있다. 기(氣)가 응집되면 만물이 형성되는 것이며, 또한 기(氣)가 흩어지면 모든 만물은 다시 형상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 같은 순환 작용은 쉼이 없이 계속되는데, 이러한 것 역시 우주 공간에서 발생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출처)
태허(太虛) 그 자체인 기(氣)에서 만물은 생겨나는 것이니, 곧 기(氣)는 만물의 어머니로 비유될 수 있다.
소립자의 세계에서 관찰되는 현상, 즉 물질은 거듭 생겨나며 계속해서 다시 공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입자가 갖는 파동성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장, 곧 기(氣)의 본질은 파동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탄생과 변화, 그리고 다시 공간으로 순환되는 일련의 과정은 기(氣)가 갖는 파동성에 기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부득이하며 또한 당연한 현상으로서 우주의 불변하는 원리이다. 이 불변의 순환 원리를, 동양의 지혜로써 통찰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의 혜안(慧眼)은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양자론에서의 장(場)은 소립자(물질)가 언제든지 발생될 가능성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밝혀낸 위대한 업적이 바로, 아무 것도 없다고 믿어 왔던 공간이 사실은 만유(萬有)를 창조시킬 잠재성을 내포하고 있는 영역으로서의 공간임을 깨우쳤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물질을 구성하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 같은 기본적 입자들을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종 입자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많이 남아 있음을 보게 된다.
진화론이 타당성을 갖추지 못한 허구적 이론임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학문적 권위를 갖고 너무도 오랫동안 영향을 주어 왔기에 아직도 우리의 뇌리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고전 물리학이 이미 토대를 상실하였음이 분명한데도 우리는 쉽게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정신과 물질을 엄격히 구분하면서 출발한 고전 물리학은 잘못 설계된 거대한 성(城)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의 끝없는 탐구심으로 이 성의 기초가 허물어진 것이며, 이 위에 새로운 지적 산물이 우뚝 선 것이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며, 또 하나의 과학 혁명의 금자탑으로 빛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장재(張載)가 말하는 태허(太虛), 기(氣), 정신(精神)은 본래 하나인 태허, 즉 무변광대한 절대 공간이다. 장재는 태허(太虛) 그 자체인 기(氣)가 곧 만물의 근원이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장재는 말한다.
'태허(太虛)로 말미암아 하늘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며, 기(氣)의 조화로움으로 말미암아 도(道)라는 이름이 생겼다. 허와 기가 합해져(性)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성과 지각(持覺)이 합해져 심(心)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출처)
원자 물리학에 의해 관찰된 미시적 공간은 물질의 창조적 모태(母胎)였다. 그러므로 공간과 물질 사이의 관계만 고려 대상이며, 정신은 여전히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장횡거의 철학은 기일원론(氣一元論) 입장에 있다. 즉, 공간은 곧 장(場)이라고 하는 물리학적 입장과 같다. 태허는 곧 기(太虛卽氣) 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는 분명「유물론적 순환론」의 논조를 가진다. 그러나 장재는 허와 기를 구분하고 있다. 태허는 곧 기라고 하면서 허와 기를 구분하는 것이 얼핏 모순인 것처럼 보이나, 이는 음기(陰氣)와 양기(陽氣)로 구분되는 상대론적 공간을 강력히 상정하는 것이다. 정신을 시사하는 허를 기와 구분시킴으로써 그는 단순히 유물론적 입장을 벗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물리학적 공간의 의미를 뛰어 넘고 있는 것이다.
서구의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본 창조주는, 전 우주를 지배하고 통치하며 군림하는 절대자라고 하는 통념이 뿌리깊이 박혀 있다. 그러나 동양의 지혜에서 터득한 창조주의 모습은, 우주를 소리 없이 운행하는 대원리(大原理)로서의 우주정신(宇宙精神)이라 파악되고 있어, 동ㆍ서양의 근본적 인식의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이는 동방(東方)의 성현들이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서, 과학과 날카로운 대립을 보인다.
다시 장재의 말을 들어 보자.
'천지(天地)의 기(氣)는 무한히 응축되고 해체되는 현상을 보여 주나, 모두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원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기(氣)가 흩어져 '보이지 않는 상태'로 돌아갈지라도 그 자체는 감소됨이 없고, 기(氣)가 응집되어 형상을 이루게 될지라도, 그 자체는 증가함이 없다.'
(출저)
기(氣)가 극도로 응축되어 형체를 이루었을 때와, 다시 기(氣)가 흩어져 형태를 상실했을 때의 2가지 현상에 있어, 기(氣)가 증가, 혹은 감소되는 것이 아닌, 형체의 변화에 관계없이 상호변환만 있음을 뜻한다. 즉, 기(氣)는 증가도 감소도 없으며, 절대적 생성도 절대적 소멸도 없음을 밝혀 그 뜻을 명확히 하고 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광대한 절대 공간[太虛태허] 그 자체가 기(氣)가 되니 [太虛卽氣], 기(氣)는 발생한 후 종국적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태허(太虛)는 곧 하늘(天)이요, 태허(太虛)는 곧 기(氣)이기 때문에, 이 기(氣)야 말로 만물의 뿌리이며, 핵(核)이며, 참된 유일의 실재(實在)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허(太虛)와 기(氣) 그리고 그것에 의해 창조된 모든 피조물은 구분될 수 없다. 따라서 태허(太虛)가 기(氣)또는 피조물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보는 것은 결코 타당한 이론이 될 수 없다.
원자 물리학에서 말하는 바, 장(場)에서 소립자(물질)는 탄생되고 부단히 운동하면서 다시 장(場)으로 복귀한다. 이렇게 다시 장(場)으로 돌아감을 절대적 소멸로 보는 것은 에너지 보존 법칙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다. 에너지는 질량으로, 질량은 다시 에너지로 형태를 계속 변환시키는 것이므로 절대적 소멸, 즉 죽음이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늘 이 자연의 법칙을 상기해야 한다.
장재는 기(氣)를 물[水]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물은 조건에 따라 얼음[氷]으로도 나타나고, 공기중의 수증기로도 기화되며, 다시 물로 환원되는 순환 관계에 있다. 마찬가지로 기(氣)가 응집되고 해체되어 흩어지는 현상은 현상계에서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거듭 강조하는 바와 같이 기(氣) 자체는 증가도 감소도 없이 불변인 것이다. 즉, 물과 얼음에 비유하면서, 얼면 응결되어 얼음이 되고, 다시 녹으면 물로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氣)가 응축되면 만물은 창조되는 것이고, 기(氣)가 흩어지면 다시 무변광대한 공간[太虛]으로 돌아가는 순환 관계에 있음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장재는 말한다.
'기(氣)가 응집된 것이 흩어져 태허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얼음이 녹아 물로 되는 것과 같다.'
(출처)
이는 태허(太虛)가 기(氣)를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태허(太虛)와 기(氣)를 구분될 수 없는 유일한 실재(實在)로 파악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이론과 양자의 장(場)이론에서 밝혀준 것처럼 소립자들은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의 영역과 구분될 수 없다. 즉, 물체의 입자와 공간을 구별할 수 없음은 곧 물질=공간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켜 주는 것이다. 소립자들은 다만 장(場=氣)의 응결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는 물질의 발생과 소멸은 장(場)의 계속 정지됨이 없이 운동하는 성격에서 비롯됨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 및 무생물체는 그의 모습이「변화해 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아울러 보여 준다.
이와 함께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宇宙우주]은 과학자들이 밝혀 낸 것처럼 무엇인가 허공에서 진동하는 참된 실체(實體)인 기(氣)로 구성된 것이다. 이는 명백한 우주의 진리로서 동ㆍ서양의 접합점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대우주의 변화 원리인 진리를 중국의 현인(賢人) 장재는 이미 정통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꺠우침이 현대 물리학의 방향과 유사함이 발견됨으로 해서 오늘의 주목에 대상이 되고 있음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간은 진동하는 무엇[氣기]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장재는 이미, 공간이 무의미한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극히 짧은 문장으로 남겨 놓았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태허(太虛)가 곧 기(氣)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無)라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출처)
현대 물리학에서 밝혀진 소립자의 세계는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그러므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할 수 없는 이 관계를 어떻게 다시 정립할 것인가, 혹은 어떤 방향으로 이론을 재정립해야 할 것인가에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밝혀 낸 미시적 세계의 관찰을 통해 유추되는 우주의 실상은 한계에 부딪힌 것으로 보인다.
X선과 수학공식을 동원시켜, 우주의 궁극을 밝혀 내는 것에는 이미 그 한계를 노출시켰다. 다만 부분적인 사실만 밝혀 냈을 따름이다.
아직도 적지 않은 과학자들은 이런 동양의 지혜를 흥미거리로 받아들일지 모르며 하나의 신비라고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에서도 수없이 거론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와 연관된 문제를 자연 과학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데서도 명백하다.
동양의 성현들은,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신빙성 없는 방법을 통해 우주의 실상을 터득했다. 하지만 동양의 성현들은 우주 원리에 대한 통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사람의 도리[人倫인륜]의 문제까지 연관시켜 보고 있었다. 즉, 대자연의 운행법칙을, 삶을 통해 준수해야 할 인간의 참된 가치[道德도덕]까지 연결시켜, 인륜을 정립하고 있었다. 이는 서양의 합리주의로는 도저히 도출시켜 낼 수 없는 신비의 원리로서, 그 깊은 의미를 오늘에 되새겨 보아야 한다.
보다 특기할 것은 인륜의 준수를, 만물을 낳은 대자연, 곧 창조주의 뜻으로 받아들여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자칫 유물론적 이론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바로 위에서 말한 사상을 끌어 내고 있어, 유물론적 색채를 극복하고 있다. 이렇게 자연 과확적 학풍에서 우주 정신까지 간파하는 것은 신비스런 일이다.
우주만물은 기(氣)의 운동에 의해 생성된 것이고, 기(氣)는 곧 우주 공간 그 자체[太虛]이다. 그러므로 태허(太虛)는 만유를 탄생시키는 산실(産室)이요, 모태(母胎)가 된다. 즉, 모든 피조물의 어머니는 기(氣)인 것이다. 하나의 모태에서 태어난 피조물은 형제와 같은 관계에 있게 된다. 따라서 편협한 사상, 예컨데 인종주의, 침략적 전체주의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그 어떤 사상과 이념은 대우주, 즉, 창조주의 기대에 부합되지 않는다. 여기서 장재(張載)의「범 세계주의」혹은「세계 동포주의」사상을 엿볼 수 있다. 당신의 뜻인「사랑과 우애」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하늘을 아버지라 부르고 땅을 어머니라 부른다. 나는 여기서 지극히 작지만 하늘, 땅과 어울려 그 가운데 있다. 하늘과 땅에 가득찬 것은 나의 몸이고, 하늘과 땅을 이끌어 가는 것은 나의 본성이다. 백성은 나의 동포이며 만물은 나의 친구이다.'
(출처)
'나'라는 존재는 단순히 기(氣)가 응집되어 하나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신성한 우주 정신의 조화 속에 태어난, 존엄성을 가진 생명체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인격적 존엄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우주와 구별될 수 없는, 우주의 한 부분이다. 즉, 내가 곧 대우주의 한 부분임을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그의 사상적 흐름, 즉, 우주와 나는 하나[天人合一]라는 사상이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장재(張載)는 양자론에서의 장(場)에 대비해서 동일한 개념의 기(氣)로서 우주 정신의 의도까지 설명하고 있다. 또한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덕적 도리에 대해서는 직접적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 흐름에서 보면 부모에 대한 도리는 곧 하늘에 대한 도리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나타내 주고 있다.
사물에 대한 본질적 규멍을 뛰어 넘어 인륜에까지 연결시키고 있는 그의 기(氣)철학은, 양자론에서의 장(場)이론으로는 도저히 이끌어 낼 수 없는, 동양 특유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같은 우주의 근본 원리를 터득하지 못하고「있고」,「없음」을 구별하는 어리석은 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태허(太虛)가 곧 기(氣)라는 사실[太虛卽氣]을 알게 되면 신비하게 변화하는 원리임을 알게 되는 것인데, 많은 학자들은 이를 깨우치지 못하여「있음과 없음」을 구별하려 하니, 이는 참되게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출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물리학에서의 장(場)과 대칭되는 개념인 기(氣)로써 우주와 현상계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미시적 세계의 관찰 결과, 도출해 낸 장(場)과 철학적 사유로 특정지어주는 기(氣)는 서로 상이한 배경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전자(前者)가 합리주의적 이성의 최대치로 결실을 본다면 후자(後者)는 동양 특유의 철학적 사념(思念)에 의해 접근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세련되지 못한 언어와 검증되지 못한 논리로 일관되고 있는 동양 사상이 서구인들에게 하나의 신비로 비쳐지고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엇보다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있다. 그것은 객관적 논리성이 부족하다고 비판되는 동양의 사상이, 원자물리학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부분에 대해 어떤 중대한 시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 밝히기로 한다.
다음은 장횡거(張橫渠)와 마찬가지로 기(氣)의 개념을 빌어 우주와 현상계의 비밀에 다가가고자 했던 조선 철학자의 학문적 성과를 다루어 보자. 적지 않은 학자들이 궁구(窮究)한 사색(思索)으로 우주의 신비에 접근하고자 했으나, 여기서는 조선(朝鮮)의 대표적 기(氣) 철학자였던 서경덕(徐敬德)과 임성주(任聖周)의 논문만을 단편적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원자 물리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공간과 물질의 관계가, 앞서 본 횡거(橫渠)와 마찬가지로 화담(花潭)과 녹문(鹿門)의 철학과도 어느 정도 가까운가를 보게 될 것이다.
■ 서화담(徐貨潭)이 말하는 관물원리(觀物原理)
'물(物)이 있어 오고 또 와도 다 옴[來래]이 없으며, 다 왔나 했더니 또 쫒아오네. 오고 와도 본래 스스로 옴[來]에 시작이 없구나. 묻노니 그대는 처음에 어디서 왔는가?
물(物)이 있어 또 가고 다 감이 없으며, 다 갔나 했더니 아직 다 가지 않았네. 가고 또 가도 마침(終)이 없구나. 묻노니 그대는 어디를 따라 돌아 가는가?
(출처)
이것은 대자연의 순환 원리이며 절대적 경지로서의 섭리(攝理)를 갈망하며 읊은 서화담(徐貨潭)의 철학시이다.
조선조 성종 20년 개성(開城)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난 그는, 명종 원년(1546)인 58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친 대철학자이다. 그의 자(字)는 가구(可久), 호(號)는 화담(貨潭), 또는 복재(復齋)라고도 하였다. 선생은 주위의 천거로 출사(出仕)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고사하고 일생동안 학문에 뜻을 두고「평생 배움의 길」이라고 하는 고고한 삶을 살았다. 탁월했던 그의 재능과 끝없는 정진으로 마침내 그는 동양 철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비록 퇴계 철학이 더 많은 관심과 평가를 받았던 현실이지만, 그의 인품과 학문적 위업이 퇴계(退溪)의 그것보다 낮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여기서는 그가 말하는 절대적 원리를 이전에 소개된 장횡거(張橫渠)의 그것과 비교하며 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현대 물리학이 밝혀 놓은 정신과 물질과의 상관 관계가 화담(花潭)의 논문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보여 주고자 함에 근본 취지가 있다. 나아가 도구와 문자로 더 이상 접근될 수 없는 세계가 한 철학자의 위대한 사유(思惟)에 의해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를 비록 단편적이나마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참 실재(實在)는 장(場)은 곧 기(氣)였다는 사실이 원자 물리학의 미시적 세계와 동양 철학에서 일치하고 있다. 대우주 공간 그 자체가 기(氣)이며, 이 기(氣)가 어떻게 응결되었는가 혹은 해체되었는가에 따라 만물의 존재와 부존재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영원불멸한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볼 수 없다고 해서 절대적 소멸인 것은 아니다.
이렇게 대우주 정신이 기(氣)가 되듯 그의 닮은 꼴로서의 소우주인 우리 역시 기(氣)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생명을 창조한 원동력은「태초의 빛」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생명을 창조한 에너지가「빛」이라는 사실은「하나님은 사랑의 빛」이라고 하는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것으로서, 이 것을 인간의 순수 이성으로 밝혀 낸 셈이다. 그러므로 대우주 정신의 축소판으로서의 우리 참 모습[眞我진아]은「빛이며 기(氣)」라는 결론에 도달된다. 이런 대우주의 원리가 서화담(徐花潭)에게 있어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은 앞의 경우와 같이 신비롭고 흥미 있는 경험임에 틀림없다.
앞서 설명한 장횡거(張橫渠)와 그 밖에 주자(朱子), 정자(程子), 소강절(邵康節)의 학설을 공부하면서도 오히려 이들이 밝혀 내지 못한 부분을 서화담은 간명하고도 명쾌한 논리로 펴고 있음을 보게 된다. 먼저 그는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궁극의 자리로서의 선천(先天)과, 선천(先天)에 의해 생성되는 자연의 만물을 후천(後天)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감각이나 경험으로 지각될 수 없는 초경험적 세계를 선천, 즉 기(氣)로 본 반면, 이 기(氣)의 응집에 의해 형상화되는 삼라만상은 물질적 현상계인 후천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선천(先天)의 기(氣)는 시간적으로는 긑도 시작도 없는[無始無終무시무종] 영원한 존재이며, 공간적으로는 그 크기를 측정할 수 없는 무한 절대의 세계로 보고 있다. 이렇게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경외의 절대적 세계인 기(氣)를 허(虛)와 동일한 개념으로 보아, 양자는 구별되지 않는다. 즉, 횡거(橫渠)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무한 절대적 공간으로서의 우주(虛허)는 텅빈[All empty 또는 void] 허(虛)가 아니다.「허(虛)가 곧 기(氣)」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궁극적 자리이며 우주 본체로서의 태허(太虛)는 곧 기(氣)라고 갈파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바깥이 없는 것을 태허(太虛)라 하고 처음이 없는 것을 기(氣)라 하니 허(虛)는 곧 기(氣)다. 허(虛)는 원래 무궁하니 기(氣) 또한 무궁하다.'
(출처)
'태허(太虛)는 허(虛)하면서도 허(虛)하지 않다.「허(虛)가 바로 기(氣)」이다. 허(虛)는 끝도 없고 밖도 없으니 기(氣) 또한 그러하다. 이미 말하여 허(虛)라 했으니 어찌 기(氣)라 말하겠는가? 허정(虛靜)은 곧 기(氣)의 형상(體체)이요, 응결되고 흩어짐은 곧 기(氣)의 작용(用)이다.'
(출처)
모든 사물과 현상을 포용하는 절대적 경지인 기(氣)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인간의 의식과 이성으로 분석될 수 없는 세계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경험으로 감지될 수도 없고, 제한적인 문자와 언어로 정확히 묘사될 수도 전달될 수도 없는 자리이다. 즉,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가 기(氣)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정한 형상도 없으며, 들을 수도 없고, 맡을 냄새도 없으며 움켜쥘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초감각적 경지로서 공허라고 하며 고요[虛靜허정]한 성격을 갖는다.
이 기(氣)가 공간을 구성하고 있으므로 기(氣)가 없는 곳은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무엇이서 기(氣)가 생겨난 것도 아니다. 무한 절대 공간 그 자체가 기(氣)인 까닭이다. 당연히 시작도 끝도 있을 수 없게 되고, 모든 사물과 현상에 있어 절대적 종말을 뜻하는 소멸 역시 있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영원하고도 절대적 자리를 기(氣)로 보아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소멸을 뜻하는 무(無)는 절대적 부존재를 의미하는「없음」이 아니라 지각될 수 없는 초현실적 상태를 의미하는 상대적인 무(無)로서 「보이지 않음」을 말한다고 하겠다.
화담(花潭)은 선현(先賢)들이 밝혀내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부단한 철학적 사색에 의해 얻어진 것을 밝히며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자신의 위업을 과시함이 아니다. 선현들이 이룩해 놓은 토대를 발판으로 후학(後學)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의 길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동양의 성현들이 사색의 힘, 즉 지혜로 밝혀낸 우주의 비경(秘景)은 경외와 신비 이외 달리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잇다.
'절대적 우주 공간[太虛]은 맑고 일정한 형상이 없으니[湛然無形담연무형] 이를 선천(先天)이라 말한다. 그 크기는 밖이 없고 그 시간적으로는 시작이 없으며 그 유래를 궁구해 낼 수 없다. 그 맑고 공허하며 고요한 것이 기(氣)의 근원이다. 밖이 없는 먼 곳까지 가득 차서 핍색(逼塞)하고 충실하여 빈틈이 없어, 털끝 하나라도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러나 집어 내려면 공허하고 잡으려면 없으나 오히려 실(實)하니 그것을 무(無)라 할 수 없다. 이 경지에 이르면 들을 소리도 없고 맡을 냄새도 없다. 많은 성현들이나 주염계(周濂溪), 장횡거(張橫渠), 소강절(昭康節) 등도 한 글자를 밝혀 내지 못한 곳이다. 그러나 성현들의 말을 빌어 그 본래의 의미를 거슬러 가면, 주역(周易)의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는 상태[寂然不動적연불동]의 자리와 중용(中庸)에서 이르는 바 성자자성(誠者自成)이기도 하다. 그 담연(湛然)한 본체를 말하면 일기(一氣)이며 혼연(混然)의 주위를 말하면 태일(太一)이다. 주염계(周濂溪)는 여기서 어찌할 수 없어 다만「무극이 태극이다[無極而太極무극이태극]」라고만 했다. 이것이 곧 선천(先天)이니 기이하지 않은가.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또 미묘하지 않은가. 미묘하고 미묘하도다.'
(출처)
앞에서 이미 살펴본 횡거(橫渠)와 마찬가지로, 서화담(徐花潭)이 설명하는 기(氣) 역시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참된 모습으로 투영되고 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소멸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시작도 끝도 없이 언제나 영원한 항구불멸(恒久不滅)과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기(氣)가 붓다의 공(空)과 같은 개념으로 묘사되어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비록 시작이 다를지라도 궁극의 경지에서 만남은 필연적인 현상인가?
기(氣)가 붓다의 가르침에서는 공(空)으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이 공(空)이 왜 존재하는가는 논할 필요도 없고, 논한다는 것은 허망한 일이며 실없는 희론(戱論)이라고 붓다께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므로 왜 기(氣)가 있는가에 관한 논쟁 역시 불필요한 일일 뿐이다.
붓다께서 이르는 공(空)과 동일 개념인 기(氣)야말로 천지 만물의 근원이며 생명의 어머니이다. 바로「기(氣)가 삼라 만상의 생명선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경지가 깨달음(悟오)의 세계」이며, 이런 의미에서 많은 성현과 더불어 서화담(徐花潭)의 정신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결국 기(氣)가 응축 내지는 해체되었는가에 불과하며 대자연의 만유(萬有) 역시 기(氣)의 취산(聚散)에 따라 생성되고 소멸될 뿐이다. 곧 기(氣)가 모여지면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며 흩어지면 소멸한다. 또한 만물의 다양성도 바로 기(氣) 작용의 다양함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선천(先天)의 기(氣) 작용에 따라 만물은 생성, 변화, 소멸되는 과정을 겪게 되나 기(氣)의 양 자체는 변화 없다. 그리하여 감소됨이 없고 증가함도 없으며, 넘침도 없고 모자람도 없다.
조금 늦었지만, 우리가 동양의 성자 혹은 현인(賢人)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대할 때 다소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 중의 하나가 공간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즉 시간과 공간의 출발 이전을 의미하는 절대공간과, 절대공간의 창조적 진동에 의해 탄생되는 상대공간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자주 접촉하게 될 태허(太虛), 공(空) 등의 어휘가 그것이다.
이 어휘들이 상대공간을 설명할 때도 대개는 그대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진동에서 비롯되는 두 공간을 혼용(混用)하는 것은 위대한 통찰력으로 메꾸어 질 수 없는 부분적인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이 부분을 훌륭히 보완해 주는 분야가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양자장과 상대성 이론이다. 이들은 진동의 속성과 공간과의 관계를 치밀한 수식으로 설명하고 있어, 공간의 이해 범위를 넓혀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화담(花潭)의 경우에는 특색있는 면을 보여준다. 즉, 그는 두 공간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서로 구별시켜 부르고 있으니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화담(花潭)의 우주론에 좀 더 깊은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곧 많은 기(氣) 철학과 뒤에 이어질 성현(聖賢)들이 보여주는 원리해석보다 더 정교하고 구체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도 우주 공간 어디선가 은하(銀河)가 탄생되고 있고 또 소멸되고 있다. 탄생되는 그 은하들의 모형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여러 형태가 있다. 원반형(圓盤型), 구형(球型)등이 있는데, 이 은하들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소용돌이 형태로 회전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을 단순한 회오리(Vortex)작용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그 이면(異面)에는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되기 힘든 대립된「두 에너지」의 흐름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최초로 시작된 공간의 진동은 공간의 힘을 대립되는 상반된 에너지로 구분시킨다. 이 정반대 성격을 띤 에너지가 곧 음기(陰氣)와 양기(陽氣)다. 또한 미시적 공간의 결과에서 보이듯, 쌍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모든 입자에는 동일한 질량의 상반된 전하(電荷)성격을 갖는 반입자(反粒子)가 함께 한다. 입자와 반입자로 특정지어 지는 미시적 공간에서부터 거대한 우주공간에 이르기 까지「쌍의 구조」로 묶어 놓는다. 주위를 살펴보면 이같은 성격은 더욱 두드러진다. 산(酸)과 알칼리(Alkali), 여성과 남성, 정신과 육체등....
이 모든 대상과 현상이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묶을 수 있는 대립된 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 대립된 성격이야말로「탄생의 조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중 어느 한 편만으론 사실상 존재가치도 의의도 없다. 그러므로 만물을 탄생킬 수 있는 창조력은 대립된 쌍의 구조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이 현상계(現象界)는「쌍의 원리」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정반대 성격을 띤 상반된 두 개념 즉 대립되는 쌍을 전부 포괄하는 개념이 곧 음(陰)과 양(陽)이다. 또한 쌍의 법칙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순리가 곧 음양법칙이다. 그러므로 대자연을 지배하는 음과 양의 영원한 조화(造化)와 통일성을 상징하는 것이 음양문양(陰陽紋樣)이다.
이 원리를 우주 공간으로 유추시켜 보면, 대립되는 에너지의 흐름을 여성과 남성으로 대치시켜 볼 수 있다. 그 결과 두 에너지의 창조적 조화는 우주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은하를 탄생시킨다.
현상계에서는 이 정반대 성질의 이원적 에너지가 항상 균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천체물리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우주공간에「대립된 힘」이 있음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현대물리학에서 보이는 시각적 제한성은 동양철학의 도움을 받을 때 비로소 시야를 보다 넓힐 수 있다. 철학과 과학이 서로의 단점을 보완시켜 줄 수 있는 상보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드보로이(Louis de Broglie)를 비롯해 물리학자들의 실험에 따라 확인된 것 처럼 존재하는 물질은 다만 파동 즉 진동(氣)이었을 뿐이다. 중간 결론을 유도시켜 보자. 공간 그 자체는 파동「氣」이고, 그 파동은 이원적 대립세계를 창출(創出)시킨다. 특히 기(氣) 철학에서는 대립되는「쌍의 원리」에 있는 현상계를 二라는 수리(數理) 개념으로 표현한다. 즉, 음과 양의 대립적 대칭관계에 있는 현상계를 더욱 함축시킨 개념이다.
그런데 공간의 파동을 전제하지 않으면 쌍의 원리가 있을 수 없고 사물의 변화현상 역시 있을 수 없다. 이 공간이 시간과 공간의 출발 이전을 뜻하는 절대공간이다. 구체적 이해는 우주팽창론에서 좀 더 상세하게 논하기로 하자. 그 절대 공간을 일기(一氣)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화담(花潭)이 사용하는 선천(先天)도 그 중의 하나다.
상대공간을 二로 본 반면 절대공간은 一로 보았다. 그러므로 '하나는 둘을 낳는다(一生二)'는 의미를 이해할 수있다. 또한 二의 세계 곧 현상계는 긴장된 두 힘과 창조적 조화를 일으키는 영원한「공간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존재도 영원하지 못하다는 철학적 명제가 자연과학에 의해 증명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존재」라고 하는 만물은 영원한 시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잠시 비추고 이내 사라져 가는 순간적 존재로서「일시적 머무름」으로 받아들어야만 한다.
무한 절대공간의 진동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음양의 세계와 그 변화원리를 화담(花潭)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화담(花潭)의 학문적 위업과 정신적 고결함에 경의를 표하며, 끝으로 그가 말한, 궁극적이며 절대적 자리인 선천(先天)인 기(氣)가 어떤 원리에 의해 후천(後天)인 삼라 만상의 형체로 변화하는가를 밝히고 여기서 논급을 마치고자 한다.
화담은 다음과 같이 간결하고 명쾌하게 말하고 있다.
'이미 일기(一氣)라 했으니 一은 스스로 二를 포함하며, 이미 태일(太一)이라 했으니, 一은 곧 二를 갖고 있다. 二는 스스로 낳고(生) 대립(克극)할 수 있다. 낳으면 대립하고 대립되면 낳는다. 기(氣)의 미미(微微)함으로부터 움직여 운동함에 이르기 까지 그 낳음과 대립함이 그렇게 한다.
一은 二를 낳으니 二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음(陰)과 양(陽)이며 동(動 : 창조적 조화)과 정(靜 : 대립과 균형)이며, 감(坎)과 이(離)를 말한다. 一은 무엇을 말하는가? 음양(陰陽)의 시초이며 감리(坎籬)의 본체서 담연(湛然)하여 一이 된다.'
(출처)
'기(氣)의 근원(根源)은 그 처음에 一이다. 이미 기(氣)라 한다면 一은 곧 二를 품어 있고, 태허(太虛)도 一이 되니 그 가운데 二를 포함하고 있다. 이미 二이면 이에 개벽(開闢 : 천지창조)과 동정(動靜 : 작용과 균형)과 생극(生克 : 탄생과 대립)이 없을 수 없다.
(출처)
일기(一氣)가 나뉘어 음양(陰陽)이 되는데, 양(陽)이 지극히 운동[鼓]하여 하늘이 되고 음(陰)이 지극히 응축되어 땅이 된다. 양(陽)이 운동의 극치로 그 정기(精氣)가 결집된 것이 해[日]가 되며, 음(陰)의 응집이 극도로 되어 그 정기가 모여 달[月]이 되고, 그 나머지 정기(精氣)가 흩어져 별[星辰(일월성신)]이 된다. 그것이 땅에 있어서는 물과 불이 된다. 이를 일러 후천(後天=현상계)이라 하니 용사(用事)한 것이다.'
(출처)
앞서 본 횡거(橫渠)와 서화담(徐花潭)과 같이 임녹문(任鹿門)도 우주 만물의 생성 원리를 기(氣)로써 설명한다. 이른바 기일원론(氣一元論)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시 대우주로서의 태허(太虛)를 기(氣)로 파악하고 있다. 물리학에 의해 밝혀진 바와 같이 우주 공간은 그 자체가 에너지로 구성되어 단순한 허공이 아님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기(氣)는 에너지, 곧 생명을 잉태하고 창조하는 자체로서의 힘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선현(先賢)들의 혜안(慧眼)이다.
우주 절대 공간에 관한 그의 견해는 확고 부동한 의사로 표현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아울러 우주 만물의 근원에 관한 그의 견해에 귀를 기울여 보자.
'우주사이에 위로 솟구치고 아래로 내려오며(直上直下직상직하)하여 안도 없고 밖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가득히 차 넘쳐 있어, 수많은 활동을 하고 모든 인류와 만물을 생성하는 것은 오직「기(氣)」뿐이다.(중략) 그것은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도 아니고 자연히 그렇게 된다.'
(출처)
(출처)라 쓴 부분은 인용구들의 출처와 한문 원문으로써, 본인이 텍스트에 옮기기에는 한계가 있어 출처라 표현해 두었습니다. 이 점 양해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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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내용
'새로운 물리학에서 장(場)과 물질이란 양자(兩者)를 위한 것이 있을 수 없다. 장(場)이 곧 유일한 실재(實在)이기 때문이다'라고 갈파한 아인슈타인의 견해는, 드보르이(De Broglie)파라고도 하는 물질파가 실제 검증됨으로써 확실성을 더해 주었다. 즉, 1924년 드보르이는 입자(粒子)가 운동할 때에는 파동적인 성질을 갖는다고 제안하며 이 파를 물질파로 부른 것인데, 1927년 전자 파동의 회전 실험에서 확인되었던 것이다.
예컨데 전자(electrons)는 입자로 생각하고 있으나 파동성도 동시에 갖는다. 1924년 드보르이는 물질은 입자성 외에도 파동성을 갖는다고 가정한 것인데 3년 뒤 전자의 파동성이 실험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를 간단히 나타내 보자.
입자의 운동 상태를 에너지와 운동량 벡터 P로 나타내고, 파동의 상태는 진동수 V와 주파수 벡터 K로 기술된다. 드보르이는 이 둘 관계에 E=hv(h는 프랑크 상수), 벡터P=h벡터K라는 식이 성립된다고 발표했다. 이는 입자성을 보여주는 벡터 P가 파동성을 보여주는 벡터 K와 결합됨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물질이면서 동시에 파동의 성질도 함께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벡터 문자 입력이 안되어, 임의로 문자 앞에 벡터를 기술했음)
앞서 언급한 장횡거(張橫渠)의 신비적 사유는 기(氣)의 성질을 맑고 공허하며 가장 큰 산[淸虛一大청태일대] 것으로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맑음의 지극함은 곧 신[淸極則神청극즉신]」으로 통찰했다. 이것이 화담(花潭)의 관물(觀物) 원리에서「공허하고 고요한 것은 기(氣)의 형상이며,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그 작용이다(虛靜卽氣之體허정즉기지체, 聚散其用世취산기용세)」라고 다시 재현되었다. 그런데 이 원리가「장(場=氣)이야말로 유일한 실재」라고 본 아인슈타인의 예리한 합리주의에 의해 뒷바침되는 장 이론이라는 지적 위업에 의해 재차 확인되었다. 그러므로 이와는 반대로, 기(氣)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또 부단히 소멸되는 것으로 주장했던 이정(二程)의 견해는 모순된 결론임이 자연스럽게 얻어졌다.
앞으로도, 기(氣)가 무(無), 도(道), 허(虛), 공(空) 등의 다른 색상의 옷을 입고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거듭 지켜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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