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personality라면 매우 immature하다고 evaluate해야겠지요. 그런 client의 growth를 facilitate시키기 위해서 미국에서는,.....”
2 교시에 교수님께서는 이런 내용의 강의를 하셨다. 한 학생이
“정신분열증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자,
“Oh, good question! 그건 바로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지요.”
라고 말씀하시며 칠판에 그 어려운 영어단어를 일필휘지하는 것으로 명쾌한 설명을 마치셨다.
학점 문제로 교수님의 호출이 있어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교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많은 조언을 해 주셨다.
“이런 situation의 경우, 미국에서는 problem을 그렇게 manage하지는 않지. 왜냐하면 그런 solution은 work 하지 않거든.....”
나는 안다, 교수님께서 ‘미국에서는’이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속으로는 ‘우리 미국에서는’이라고 말하고 계신다는 것을. 교수님을 뵙고 나면 꼭 영한사전을 펼쳐들고 몇 개 단어의 뜻을 찾아봐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교수님의 명강의나 소중한 조언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물론 교수님 앞에서는 다 알아듣는 척하며 앉아있다, 계속 고개를 끄떡이고 가끔은 분위기를 보아 크게 웃어가면서. 마치 한글 자막 없는 외국영화를 아직은 친숙치 못한 여자 친구와 함께 볼 때처럼 말이다. 그래야 말씀하시는 분도 신날 테고 나도 무식한 놈으로 찍히지 않을 테니. 나도 그 정도의 눈치쯤은 있다. 그러나 속마음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으며, 모르는 단어를 문맥으로 때려잡아 이해하려니 힘은 또 몇 배로 든다. 매번 교수님을 찾아뵐 때는 그래서 발걸음이 무겁다.
나는 그 교수님을 Komerican Professor라 부른다. ‘미국식 한국 교수님’이나 ‘한국인 미국 교수님’ 쯤 될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한국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국인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쓰시는 언어는 한국어도, 영어도 아니니까. 영어단어에 한글 토씨 ‘은’, ‘는’, ‘이’, ‘가’, ‘을’, ‘를’ 등을 붙인 신종어니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Konglish, 혹은 Englian 쯤 될 것이며, 그런 이상한 신종어를 쓰는 사람은 분류하자면 제 3 종 인간, 순 우리말로는 ‘얼치기’에 해당되리라.
나도 들은 말이 있다. 그 교수님은 마치 자신이 미국, 그 축복 받은 나라에 있을 때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복락을 누리며 살다 돌아온 것처럼 말씀하시지만 서울에 잠깐 다녀간 미국 사는 내 친척은 이렇게 사실을 까발겼던 것이다.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고생하는 것은 말도 마라. 미국에서 4 ∼ 5년 살면서 어떻게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겠니? 몇 사람 말고는 대개가 다 Konglish 하면서 눈치, 코치로 버티다 입이 떨어질 때쯤 돌아오는 거지.”
이상한 건 그런 분일수록 귀국할 때 우리말을 까맣게 잊은 채 돌아온다는 사실이. 더욱 이해되지 않는 점은 이 분들은 모국 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우리말이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거다. 오히려 갈수록 영어 단어의 사용 빈도와 비율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망각량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심리학자 에빙하우스의 망각이론과 정면으로 배치되니 인지심리학자들이 흥미를 갖고 원인을 규명해 볼만한 현상이다. - 혹시 연구에 도움이 될까 해서 하는 말인데, 강의준비를 못하셨는지 강단의 교수님께서 왠지 자신감이 없어 보일 때나 혹은 어떤 고약한 학생이 곤란한 질문을 했을 때처럼 당황하실 때 특히 교수님의 영어 사용빈도가 더 높아진다는 점도 연구자들은 참고하기 바란다. -
이제부터는 좀 더 중요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언어는 비교적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그저 우리가 (비)웃으며 이해하면 되니까. 그러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라고 하면 문제는 자못 심각해진다. 미국식 합리주의와 실용주의! 이 분들이 들고 들어오는 게 이것인데 이건 우리가 밤잠을 포기해서라도 꼭 배워야 하는 소중한 생활철학이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고루한 형식주의와 권위주의에 찌들어 있었는가? 그런 낡은 사고방식은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성장에 큰 가로막이 되어왔다. 이제부터는 우리도 이성을 존중하고 효율성을 숭상해야 하는 태도를 길러야 하는데, 바로 그걸 미국 다녀오신 교수님들의 삶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건 Komerican들은 역시 American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기 편익을 위해 상황에 따라 미국식 합리주의와 한국식 권위주의를 쉽게 갈아입는 것처럼 보인다. 대접받을 때는 ‘君師父一體’요, 사야할 때는 ‘Dutch pay'인 식이다.
이 정도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 있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미국은 ‘Number 1'이요, 한국은 ‘Number 10'이라는 데는 참을성 많은 나도 속이 뒤집힌다. 스포츠는 역시 미식축구요, 미인도 흰 살결, 노랑머리가 으뜸이며 - 나는 아직도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다. 교수님의 사모님과 따님도 역시 노랑 피부, 검은 머리일 텐데 그 추한 꼴을 어떻게 참아내실까? - , 볼거리라면 그랜드 캐년 밖에 없다고 우기는데, 그 앞에서 어찌 견문 좁은 우리가 족구, 최진실, 설악산 천불동 계곡을 언급하겠나? 교수님의 회고담을 조용히 들어드리며 혼자 이런 상상에 빠져들 수밖에. - 이런 분들이 세종대왕 때 집현전 학자였다면 필시 훈민정음은 창제되지 않았을 테지? 하나같이 이렇게 외쳤을 테니까. ‘전하, 명을 거두어주소서. 훌륭한 알파벳이 있지 않사옵니까? 통촉하소서. -
어느 날은 교수님을 뵙고 나서 눈과 귀를 깨끗한 물로 씻어낸 적이 있다. 들으시면 섭섭하시겠지만 나도 내 살 방편은 마련해야하니 어쩔 수 없다. 나는 한국 토종으로 어차피 한국 여자와 결혼하고 한국인들과 울고 웃으며 한 평생 살아야 하는데 교수님 말씀에 세뇌되어 아내와 주위 사람들이 모두 꼴불견으로 보이면 그 낭패를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나를 ‘한국적’인 것만 고집하는 국수주의자로 매도한다면 그건 억울하다. 나도 배웠다면 배운 사람으로서 세계의 변화에 발맞출 수 있기를 원하며 지구가 일일생활권이 되어가는 시대에 우리 청년들도 좁은 한반도에만 쭈그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세련됐다면 세련됐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한국적’이라는 구호 아래, 한국인은 역시 한복을 입어야 하고, 음악이라면 역시 판소리 춘향가뿐이라는 꽉 막힌 사람들과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싸울 줄도 안다.
그렇다고 나처럼 의식 있는 한국인이 설마 미국에서는 한국인, 한국에서는 미국인인 국적 불명의 얼치기가 되려 하겠는가? 바라기에 한국인으로서 세계인이며, 세계인인 동시에 한국인인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외에 자주 나가 견문을 넓히는 게 가장 바람직한 줄은 알겠으나, 돈이 있나, 시간이 있나?! 꿩 대신 닭이라고, 그래서 간접 경험이라도 하자고 외국 생활 경험자들을 쫓아다니며 귀동냥하는 데 열심인 것이다.
아직까지 국제 경험이 풍부하면서 생각이 똑바로 박힌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실정에서는 급한 대로 Komerican들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한다. 그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미국의 수도가 뉴욕이 아닌 워싱턴이며, ‘물’의 미국말이 ‘워터’가 아니라 ‘워러’라는 것을 알았겠나? 국가적으로도 그들의 적극적 수입활동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어찌 발전할 수 있었겠으며, 또 앞날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으랴? 나라의 소중한 자원을 아끼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낭비다. 우리들, 똑 같은 토종들끼리 머리 맞대고 끙끙거릴 때, 선진국의 신선한 사례와 놀랄만한 첨단 기술은 얼마나 반가웠던가! 이럴 때를 위하여 임시방편이지만 제 3 종 인간은 마련되었으며 그들은 제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차례 Komerican이 가방 가득 새 모델, 새 상품을 갖고 들어올 때까지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신이 갖고 들어온 미국 물건을 선전하고 소개함으로써 우리들의 편협한 안목을 넓혀주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들은 가여운 분들이기도 하다. 실향민 아닌가? 마음의 고향, 아메리카를 정붙일 만하니 떠나와 이 미개하고 척박한 땅으로 ‘나와서’, 사고방식이 다르고, 말조차 잘 통하지 않는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려니 생활의 불편은 오죽하겠으며 마음의 외로움은 얼마나 크겠는가?
이제는 우리가 그 분들을 따뜻하게 감싸주어야 한다. 오직 나라 발전을 위해 익숙했던 언어와 생활 습관, 심지어는 기본적인 인간적 품격마저도 지푸라기처럼 버린 Komerican들을!
첫댓글 ㅎㅎ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