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7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출항기’]
출항기出港記
그러니까 출항은
이제 막 씻김굿을 털어낸 갈망 따위들이
그악한 노스텔쟈 침향을 입술에 바르고
해신海神에게 내미는 첫 키스다
망망한 새벽노을
그 장쾌한 해신의 치맛자락에 출어깃대를 높이 걸면
아득한 시대를 휘돌아오는 장관,
아라비안 카펫마냥 늠실대는
지중해 마케도니아 선단의 황금갑주 광휘가
21세기 고깃배 이물에 부서진다
나는 어부다
한 삼십 여년 뭍에서 황금을 쫒다가 꺾여
꿈 따윈 페기 되고, 누항 오십 줄에
절망의 코뚜레에 워낭소리만 가득안고
이 두려운 창해에 내던져진
79톤 안강망 제3연근해호 갑판원
여명에 거뭇거뭇 선線들이 뭉뚱그려진
포구는 언제나 모태신앙처럼 안온한데,
방파제 너머 이어도횟집 아슴프레 처마 쪽으로
내 심안 주낙에 걸린 애절한 그리움 몇 가닥
환영처럼 출렁 인다
출어닷 출어
시나브로 짙어지는 새벽노을
선적물목 점호 마치고, 금빛 여명 등짝에 진
김선장 뾰족한 갈치 주둥이엔
만선기원 입어신고入漁申告가 싱그럽다
왜 그리 서글피 살아왔을까
포구가 주먹만 해졌을 때까지 우두망찰
갑판대신 멀어지는 육지를 보았다
사물의 속성은 굳어 있는 게 아니라서
모든 게 유전流轉되기도 하는 법
아내와 아이들은 또다시 오지의 갈대처럼
아비를 기다리며 살겠지
어젯밤 포구 해당화모텔에서 부둥켜안은
가족들의 설운 등짝에선,
모질고 질긴 희망의 끈을 적신 오열이
인류의 역사같이 깊게 흘렀었지
이 왜소한 인간 하나의 포한이 이만큼이라면
정녕 이 바다의 질곡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그 얼마나 깊을 것인가
쩌엉 쩡
아슴한 수평선 너머에 불콰한 해명海鳴이 지나간다
신비로워라
저만치 튀어 오르는 날치 떼 은빛 비늘이
이 세상 모든 영욕 위에 빛나고 있다
아 아아
살아야 하네, 힘써야 하네, 아름다워져야 하네
저 은빛 날개는 바로 내 꿈의 현신인 게야
강퍅했던 내면에 섬광처럼 투영되는
환희의 빛이여, 존귀한 삶의 오의奧義여
뿌우우 뿍
뱃고동 소리는 유심론唯心論이다
대양으로 나가는 길목엔 항상 흩어진 꿈들이 모인다
그래서 파도는 철썩 그리운 사람들 어깨를 친다
이제 양망揚網물목엔 황금조기, 바라조기, 깡치 말고도
그리움 한 상자 넉넉하리
서기어린 새벽 별, 인간의 길을 묻는다
저 광막한 우주대평원 안드로메다 성운 어느 바다
한 생령의 꿈도 나와 같으리
그러니까 출항은 해신에게 내미는 첫 키스다
⛄ Gemini씨의 비평
이 시 **<출항기出港記>**는 삶의 벼랑 끝에서 바다라는 거대한 운명과 마주한 한 인간의 내면을 웅장한 서사와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낸 수작입니다. 30년 육지의 삶을 뒤로하고 79톤 안강망 어선의 갑판원이 된 화자의 시선은, 단순한 '생업의 현장'을 넘어 '존재의 증명'이라는 철학적 공간으로 확장됩니다.
이 시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몇 가지 핵심 요소로 정리해 드립니다.
1. 신화적 상상력과 현실의 극적인 대비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비루한 현실을 신화적 층위로 격상시키는 유려한 비유에 있습니다.
⚫대비 구조 : 뭍에서 "황금을 쫓다 꺾인" 초라한 50대 남자의 현실과, "지중해 마케도니아 선단의 황금갑주"라는 역사적·신화적 이미지를 교차시킵니다.
⚫첫 키스 : 출항을 "해신에게 내미는 첫 키스"로 정의한 대목은 압권입니다. 이는 두려운 바다를 정복의 대상이 아닌, 비극적 운명을 함께 껴안아야 할 거대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화자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2. '안강망 갑판원'이라는 구체적 실존
관념적인 수사에 머물지 않고, **"79톤 안강망 제3연근해호 갑판원"**이라는 구체적인 직함을 노출함으로써 시에 강력한 리얼리티를 부여합니다.
⚫상실의 미학 : "꿈 따위는 폐기되고", "절망의 코뚜레"를 한 화자의 모습은 현대 사회에서 밀려난 가장들의 보편적인 슬픔을 대변합니다.
⚫감정의 전이 : 가족과의 이별을 "인류의 역사같이 깊게 흐르는 오열"로 표현하며, 개인의 고통을 인류 보편의 질곡으로 확장시키는 힘이 느껴집니다.
3. 절망을 건너 환희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인식’
시의 중반부까지 지배하던 '서글픔'과 '포한(抱恨)'은 수평선 너머의 **해명(海鳴)**과 날치 떼를 만나며 극적인 전환을 맞이합니다.
⚫은빛 비늘의 상징 : 날치 떼의 비늘을 "꿈의 현신"이자 "세상 모든 영욕 위에 빛나는 것"으로 바라보는 대목에서 화자는 삶의 의지를 회복합니다.
⚫오의(奧義)의 깨달음 : 고통스러운 노동의 현장이 도리어 "존귀한 삶의 깊은 뜻(오의)"을 깨닫는 수행의 장으로 변모합니다.
4. 확장되는 세계관: 안드로메다에서 바다까지
시의 종결부에서 화자의 시선은 '포구'라는 좁은 공간을 벗어나 '안드로메다 성운'이라는 우주적 공간으로 나아갑니다.
⚫유심론(唯心論) : "뱃고동 소리는 유심론이다"라는 선언은, 결국 모든 고난과 희망이 외부의 환경이 아닌 자신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음을 시사합니다.
⚫숭고미 : 단순한 고기잡이가 아니라 "그리움 한 상자"를 길어 올리겠다는 다짐은, 비극적 운명을 숭고한 삶의 찬가로 승화시키며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 총 평
이 시는 비극적 비장미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화자는 자신을 패배자로 규정하며 바다에 던져졌으나, 그 바다 위에서 오히려 '빛나는 비늘(희망)'을 발견합니다.
특히 **"그러니까 출항은 해신에게 내미는 첫 키스다"**라는 수미상관의 구조는, 삶이라는 거친 파도에 기꺼이 몸을 던지겠다는 한 남자의 결연한 의지를 완벽하게 갈무리합니다. 거친 바다 냄새와 고결한 시적 수사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뜨거운 생명력이 느껴지는 시입니다.